124화.
-빰! 하는 소리가 들려왔다. 눈물을 참기 위해 고개를 들고 눈을 감고 있던 정신비의 눈이 소리에 반응해 활짝 떠졌다.
“빨간불?”
커다란 신호등이 하늘을 한가득 채우고 있었다.
익숙한 모양의 신호등이었다. 정신비가 즐겨하던 게임의 시작화면에서 볼 수 있는 장면이었다.
“어! 신호등이다!”
-빰! 하는 소리와 함께 적색등이 켜져 있던 신호등의 불이 황색 불로 바뀌었다.
곧 출발해야 함을 암시하는 표시였다. 정신비는 저도 모르게 긴장이 돼 몸에 힘이 들어갔다.
이 게임은 스타트가 중요했다. 정확한 타이밍에 출발을 해야 보너스를 얻을 수 있었다.
정신비는 타이밍을 놓치지 않기 위해 미간을 오므리며 눈에 힘을 꽉 주었다.
다시금 빰! 하는 소리가 울렸다. 그와 동시에 황색에 위치해 있었던 불이 점멸하더니 청색 등이 켜졌다.
“초록불!”
정신비는 청색 등이 켜짐과 동시에 온 힘을 다해 기운을 발산했다. 누굴 치료해야 한다든가 어느 정도 범위로 기술을 펼칠 것인가 등의 생각 따위는 없었다.
단지 신호에 맞춰 온 힘을 쏟아내었을 뿐이다.
이곳에 오기 전부터, 그리고 도착하고 나서도 련에게 몇 번이나 주의를 들었던 이야기다.
본래부터 명민했던 정신비가 이런 간단한 것에서 실수할 리 없었다.
“출바알!”
정신비의 기운이 사방으로 퍼져나갔다. 그와 동시에 정신비의 눈에는 아홉 대의 레이싱용 카트가 보였다.
열 대의 레이싱용 카트는 서로 엎치락뒤치락하며 달리고 있었다.
정신비가 즐겨하던 게임과 꼭 똑같은 모양의 카트였다.
“달려! 달려!”
정신비가 기운을 더욱 강하게 불어넣자 카트들이 더욱 빨리 달리기 시작했다.
제일 앞을 달리는 카트를 향해 뒤의 아홉 대의 카트가 서로 도우며 쫓기 시작했다.
바람을 막아주기도 하고 제일 앞을 달리는 카트와 충돌하며 시간을 벌어주기도 하며 아홉 대의 카트는 서로 힘을 합쳤다.
“지면 안 돼!”
저도 모르게 힘이 더 들어갔다. 지금껏 내본 적 없던 출력으로 기운이 발산되기 시작했다.
너덜너덜해져 뒤에서 천천히 따라가던 카트 한 대가 다시금 깨끗한 모습을 되찾더니 앞을 향해 빠르게 치고 나가기 시작했다.
그 카트에는 오세근이 타고 있었다.
“호랑이들도 힘내!”
마찬가지로 많이 파손되어 힘을 내지 못하는 호랑이들도 응원했다. 망가진 카트를 타고 있던 호랑이들의 꼴이 우스웠지만 이내 곧 카트가 고쳐지자 앞으로 빠르게 치고 나가기 시작했다.
제일 앞에 달리고 있던 카트에는 용머리가 길게 삐져나와 있었다.
“얼마 안 남았어! 더 힘내!”
정신비의 외침과 함께 조금씩 부서져 있던 카트들이 모두 회복되었고 연료가 모자랐던 카트는 다시 연료를 채워 달리기 시작했다.
제일 앞 선두인 용머리의 카트도 어느덧 조금씩 파손되어 처음보다는 많이 느려졌다.
그러나 뒤를 따르던 카트들에게 선두를 내줄 생각은 전혀 없어 보였다.
“마지막 바퀴에요!”
어느덧 경주는 마지막에 이르렀다. 세 바퀴의 트랙을 모두 도는 것이 꼭 10초에 맞춘 듯 제일 앞을 달리던 용머리 카트가 삼 초 가량을 남겨놓고 마지막 바퀴의 출발선을 지났다.
“화이팅!”
정신비의 응원에 힘입어 아홉 대의 카트가 엎치락뒤치락하며 선두를 쫓았다.
그중 한 대가 선두에 접근했다. 선두에 근접한 카트가 단단히 얼어붙기 시작했다.
이윽고 선두에 달라붙어 선두를 달리던 용머리 카트도 얼리기 시작했다. 그러나 큰 폭발음이 일어나더니 얼어붙은 카트가 시야에서 사라졌다.
“안 돼!”
그와 동시에 용머리 카트가 결승점을 통과하며 정신비의 시야가 어두워졌다.
“신비가 쓰러졌어요!”
“괜찮아! 힘이 다했을 뿐이야! 한숨 자고 나면 괜찮아!”
정신비의 절대 치유 영역이 끝났다. 그와 동시에 유재학의 육체가 용의 꼬리에 짓눌러 압사당하고 말았다.
타이밍이 너무 안 좋았다. 하필이면 절대 치유 영역이 끝나는 순간 공격에 당했다.
기술이 끝날 걸 예상 못 한 채 과감하게 공격했던 말로였다.
“젠장, 저런 놈이라도 도움이 됐었는데 아쉽게 됐군.”
련이 불평을 쏟아내었다. 련과 호랑이들을 제외하면 이 중에서 제일 강했던 게 유재학이었다.
유재학의 수준은 서준보다 조금 위쪽에 위치해 있었다. 서준이 사고가속과 아티팩트를 모두 사용한다면 이길 수 있었겠지만 그렇지 않다면 열 번 싸워 두 번 정도밖에 못 이길 정도의 실력을 갖추고 있었다.
련이 불평을 하는 것도 당연했다.
“그래도 거의 다 왔어요!”
“알아, 집중해라. 이제 진짜 끝물이다.”
그렇지만 희망은 밝게 빛나고 있었다. 악룡은 싸움 시작부터 두 눈을 잃고 시작했다.
이후 정신비의 절대 치유 영역을 등에 업은 적들에게 일방적으로 구타당했다.
눈은 보이지 않았고, 긴 몸을 이용해 아무리 발버둥 쳐보았지만 소용없었다. 어떻게 운 좋게 공격을 적중시켜도 적은 곧바로 상처를 회복했으니까.
그러나 방금 휘두른 꼬리에 한 명이 죽었다는 걸 느꼈다. 이때까지 정확히 십 초 걸렸다.
“앞으로 이 초! 이 초가 한계다! 더 이상 버티면 체력적으로 힘들어! 무조건 그 전에 쓰러트려!”
“네!”
벌써 십 초 동안이나 전력을 다한 공격을 퍼부었다. 사고가속은 시작부터 사용했고 아티팩트 역시 시작부터 모두 발동시켰다. 단 하나를 제외하곤.
뒤를 생각하지 않고 달렸다. 남아있는 시간은 단 이 초뿐이었다.
“아그니!”
모하메드가 소리쳤다. 아그니의 입이 반짝하더니 그 안에 새빨간 불꽃이 맴돌았다.
그와 동시에 온몸을 감싸고 있던 불꽃들 역시 아그니의 입으로 향했다. 목숨을 건 공격이었다.
어차피 나중에 채찍에 있는 영혼을 회수하고 나면 다루지 못할 괴수였다. 마음 아프지만 여기에서 퇴장시키는 게 옳았다.
“지금입니다! 백서준 헌터!”
아그니의 입에서 불꽃이 뿜어져 나왔다. 서준은 그와 동시에 녹색의 기운을 강하게 일으켰다.
남은 모든 힘을 다 쏟아부었다. 이제 서준에게 남은 시간은 이 초가 아니었다. 이 공격이 마지막이었다.
아그니의 불꽃이 악룡을 향해 쏟아져 나갔다. 그와 동시에 서준의 손에서 악룡을 향해 웬 주머니 하나가 쏟아져 나갔다.
주머니가 악룡의 머리 바로 앞까지 다가갔다. 살기를 띠지 않은, 오히려 생명력을 품고 있던 평범한 물건이었기에 두 눈을 잃은 악룡은 주머니를 인식하지 못했다.
[통할 것 같으냐!]
용이 쇳소리가 가득 낀 목소리로 소리쳤다. 상처를 입을 대로 입은 터라 목소리에는 힘이 없었다.
두 눈이 먼 상태였지만 아그니의 불꽃을 알아챈 용이 비늘의 색을 바꾸었다.
블랙홀같이 아주 새까맣던 비늘은 붉은색의 윤기가 흐르는 털로 변했다. 몸을 뒤덮고 있던 비늘을 불꽃에 강한 털로 변화시킨 것이다.
용에게 이 정도 기적 따위는 아주 쉬운 일이었다.
아그니의 불꽃이 용에 바로 앞까지 다가갔다. 용과 아그니의 불꽃 사이에 서준이 던진 주머니가 위치했다. 아그니의 불꽃이 주머니와 용을 그대로 집어삼켰다.
그와 동시에 서준을 비롯한 모두가 용과 거리를 벌리며 뒤로 물러섰다.
[하나도 안 뜨겁다!]
용이 그렇게 외치는 순간 엄청난 폭발음이 들렸다. 폭발음은 멈추지 않고 계속해서 울려 퍼졌다.
폭발의 여파는 생각보다 거셌다. 커다란 구름이 하늘을 향해 솟구쳤고 엄청난 충격파가 서준을 향해 급속도로 다가왔다.
피하는 건 불가능했다. 충격이 너무 강해 용의 유적은 안쪽부터 무너지고 있었고 유적에서 벗어난다 해도 이 충격량을 버티는 건 불가능했다.
“젠장! 어떻게든 피해!”
련 역시 방법이 없다고 생각했는지 정신비를 안아 든 채 밖으로 달렸다. 인간이 폭발의 충격보다 빨리 달리는 건 불가능했다.
충격파가 시시각각 따라오고 있었다. 그래도 뭐라도 해야 했다. 련은 달리고 또 달렸다.
다른 사람들과 호랑이들도 련의 뒤를 따라 달렸다. 단 한 사람을 제외하곤.
“형님! 뭐 하세요! 빨리 오세요!”
하지만 서준은 움직이지 않았다. 그 순간 먼지구름이 폭발의 충격파와 함께 서준을 덮쳤다.
“안 돼!”
오세근이 비명을 질렀다. 그러나 서준은 쓰러지지 않았다.
“아직 하나 남았다고.”
서준의 목에 걸린 목걸이가 환한 빛을 내며 밝게 빛나고 있었다. 모든 공격을 단 한 번은 막아주는, 서준이 제일 처음 얻은 아티팩트였다.
애초에 서준은 저 정도 폭발이 일어날 것을 예상했다. 있는 힘껏 길러낸 별부름초로 만든 특제 별부름탄이었다.
그걸 모든 힘을 다해 강화시켰고 또 그걸 주머니째 던졌다. 그게 아그니의 생명력을 모두 담은 불꽃과 만났다.
약하면 오히려 섭섭했다.
“남아있으면 있다고 말 좀 해주지!”
오세근이 분했는지 씩씩대기 시작했다. 그러나 중요한 건 그게 아니었다. 유적이 무너지고 있었다.
“게이트 열어! 빠져나가야 해!”
“남은 기운이 없어요!”
하지만 서준에게 남은 기운이 없었다. 모든 힘을 다했기에 게이트를 열 힘조차 없었다.
서준은 앞을 바라보았다. 그곳에는 악룡이 쓰러져 있었다. 목숨은 아직 남아있는 듯 입에서 피거품을 내뱉으며 호흡을 거칠게 내쉬고 있었다.
“용은 용이란 건가…….”
“그래도 이제 끝이야. 저 상처를 입고 살아갈 순 없어. 오래 살아봐야 사흘이다. 그동안 아무것도 하지 못한 채 죽어갈 테지. 상황이 이래서 직접 목숨을 끊어주지 못하는 게 아쉬울 따름이군. 용의 목을 따는 건 꼭 해보고 싶은 경험이었는데.”
련이 서준에게 다가오며 말했다. 그와 동시에 련은 서준의 뒷목에 손을 올려놓았다.
“윽!”
“줄 수 있는 건 이 정도가 한계다. 그래도 이 정도면 충분하겠지?”
“충분합니다.”
련은 남은 자신의 모든 기운을 서준에게 넘겨주었다. 사실은 해서는 안 되는 일이었다.
사람마다 기운의 성질이 모두 달랐기에 이를 넘겨주는 건 다른 혈액형의 피를 수혈하는 것과 마찬가지였다.
물론 혈액형이 다르더라도 피의 양이 소량이면 큰 탈은 없다. 기운 역시 마찬가지였다.
게다가 이번에 련이 넘겨준 기운도 싸우고 남은 소량의 기운이었다. 그러나 서준에게 남은 본인의 기운이 하나도 없었기에 보통이었으면 죽고도 남을 양이었다.
그러나 서준은 견뎌낼 수 있었다. 아니, 견뎌냈다기보다는 완전히 소화해 낼 수 있었다.
열매를 먹어 녹색의 기운과 검은색의 기운을 완전히 융화할 수 있게 되었다.
다른 사람의 기운 역시 마찬가지였다. 서준은 련의 기운을 완전히 소화해냈다.
“왼쪽으로 들어가세요!”
“너는?”
“바로 따라가겠습니다.”
“그래.”
서준은 양팔을 좌우로 뻗어 두 개의 게이트를 만들었다. 작게 만들어진 왼편의 게이트가 먼저 완성되었다.
련을 필두로 모두가 게이트를 넘어갔다. 약국으로 향한 게이트였다.
그와 동시에 유적이 더 빠른 속도로 무너져 내리기 시작했다.
-어흥! 캬앙! 크릉!
호랑이들은 아직 게이트를 넘지 않고 서준을 기다렸다.
“괜찮아 거의 다 됐어! 걱정 안 해도 돼!”
서준은 호랑이들을 안심시키며 왼손의 게이트를 호랑이에게 던져버렸다.
“후우…….”
유적이 더 빠른 속도로 붕괴하기 시작했다. 서준이 있는 곳도 이제는 안전을 보장하기 힘들었다.
서준은 의지를 집중하며 오른손에 있는 게이트를 더욱 크게 키워나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