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18화.
“왔나?”
“아 왜 이리 늦어요? 돈만 주고 튄 줄 알았네.”
주점에서 신나게 주인공 놀이를 하며 놀다가 해가 떨어진 후 약속의 시간이 되었다.
서준에게는 시계가 있었기에 정확한 시간에 맞춰 약속장소로 나갈 수 있었다.
물론 유재학에게는 시계가 없었기에 현지인들의 특수한 방법으로 시간을 확인했다.
“이곳에는 정밀한 시계가 없어서 말이야……. 정확한 시간을 측정하는 건 어려운 법이지.”
해서 유재학은 정확한 시간을 측정하지 못해 늦어버리고 말았다.
“그럼 먼저 나와 있었어야 하는 거 아닌가? 하긴 범죄자한테 예의를 바라는 건 무리지.”
“…….”
별로 좋아하지도 않는, 아니 증오하는 사람이 시간 약속마저 늦어버리자 서준은 대놓고 표를 내며 유재학을 몰아붙였다.
유재학은 서준에게 구박을 받더라도 지구로 돌아가는 것이 중요했기에 분노를 꾹 눌러 담으며 참았다.
‘후…. 참자. 어떻게든 참자. 돌아가서 목을 따버리든 팔다리를 잘라버리든 하고 일단은 참자…….’
지구로 돌아가서 서준에게 복수를 하는 날만을 꿈꾸며 유재학은 모든 분노를 목구멍 아래에 고이 간직했다.
분노하고 있다는 상황이 서준에게 들켜도 상관없었다. 어차피 그 정도는 서준도 유재학 본인도 서로 알고 있는 사이다.
서로가 서로를 굉장히 마음에 들지 않아 하고 있다. 단지 필요에 의해 서로 손을 잡았을 뿐이란 것을 두 사람은 누구보다 잘 알고 있었다.
“짜증 나면 돌아가셔도 되는데요?”
“내가 비록 창고의 위치를 알려줬다고 하지만 네놈도 아티팩트를 훔쳐야 한다는 걸 내게 말해줬는데 그래서 되겠는가?”
하지만 유재학은 당하고만 있을 수는 없는지 조금의 주도권이라도 뺏어오기 위해 서준을 위협했다.
“아, 싫으면 하지 말든가요. 그냥 제가 알아서 할게요.”
“내가 훼방을 놓을 수도 있는데?”
유재학은 이곳의 경비대장이었다. 훼방을 놓기에 충분한 위치에 있었다.
서준 역시 그 사실을 잘 알고 있었다. 그러나 서준이 이렇게 당당하게 나설 수 있는 데에는 다른 이유가 있었다.
그 위협이 전혀 무섭지 않았기 때문이다.
“아, 아저씨 천년만년 살 수 있을 거 같아요? 시간 괴리 있다고 했잖아요. 한 이삼십 년 뒤에 오면 어쩔건데요?”
“…….”
괜히 주도권을 가져오려다 본인의 위치만 자각한 유재학은 꿀 먹은 벙어리가 되었다.
유재학의 양 주먹은 허리 아래에서 꽉 쥐어져 부들부들 떨리고 있었고 이빨은 깨질 듯이 강하게 물려있었다.
“미안하네. 내가 생각이 짧았어. 시키는 대로 하겠네. 부디 지구로 돌려만 보내줘.”
하지만 유재학이 할 수 있는 건 사과밖에 없었다. 유재학은 꽉 쥐어진 주먹을 풀었으며 꽉 물린 잇몸을 이완했다.
그리고 목소리를 부드럽게 내며 서준에게 사과했다. 이것이 유재학이 할 수 있는 두 가지 길 중 하나였다.
남은 하나는 지구행을 포기하는 것이니 사실상 막힌 길이나 다름없었다.
“좋아요. 이제 뭘 하면 되죠? 그쪽이 경비대 시선 끌면 그때 몰래 들어가서 훔쳐오면 되는 거예요?”
유재학을 놀려먹을 만큼 충분히 놀려먹었다고 판단한 서준은 본론으로 넘어갔다.
그 분노를 모두 잠재우기에는 부족했지만 그래도 조금은 마음이 편해졌다고 느낀 서준은 썩은 미소를 지으며 유재학에게 물었다.
“괜히 시간 끌지 말고 빨리 말해요. 아티팩트 어디 있어요? 경계 수준은 어느 정도고요?”
서준은 최대한 깔끔한 작전을 짜기 위해 유재학에게 정보를 물었다.
내부 조력자, 그것도 상당한 위치에 있는 내부 조력자가 있었기에 아주 멋들어지게 임무를 수행할 수 있을 것이라 장담했다.
“그럴 것 없다.”
“엥? 왜요 지구 안 가게요? 이제 와서 마음이 바뀌었어요?”
유재학에 말에 서준이 비꼬듯이 말했다.
-야, 너 진짜 기분 나쁘게 말 잘한다. 이런 재능이 있는지 몰라봤는걸?
‘닥쳐.’
오죽했으면 별이 감탄할 지경이었다.
“아니, 아티팩트는 여기 있어.”
유재학이 주머니에서 웬 물건을 하나 꺼냈다.
“내 위치쯤 되면 이런 거 가지고 나오는 건 크게 어렵지 않아. 내일 아침 임무 교대 시간이면 모두 들통나기 때문에 위험한 거지.”
유재학은 서준을 만나러 나오는 길에 현장점검을 한다는 핑계로 아티팩트가 숨겨진 방에 들어갔다.
그리고 아주 자연스럽게 아티팩트를 주머니에 넣고 그대로 성문을 빠져나와 서준과 접촉했다.
물론 내일 해가 뜬 후 아티팩트가 사라졌다는 것이 들통나면 제일 먼저 의심받을 사람은 유재학이었다.
해서 유재학은 무조건 오늘 서준을 따라 지구로 도망갈 필요가 있었다.
“이거 맞아요? 가짜 아니죠?”
서준은 유재학에게 아티팩트를 건네받으며 물었다. 서준은 범죄자를 믿지 않았다.
조심 또 조심해서 나쁠 것은 없었다.
서준은 브로치 모양의 아티팩트를 건네받으며 유재학에게 물었다.
“틀림없이 진짜다. 만약 누가 사전에 바꿔치기를 해놓지만 않았다면 가짜일 수 없어. 그걸 지키겠다고 투입되는 인력이 얼만데……. 설마 가짜일 리가.”
유재학은 서준에게 정말 너무한다는 듯한 표정을 지으며 말했다. 유재학은 사실상 목숨을 서준에게 맡긴 거나 다름없었다.
서준이 지구로 돌려보내 주지 않는다면 평생 쫓기며 살아가야 했다. 이방인으로서 겨우 자리를 잡고 살아갈만했는데 서준을 믿고 모든 것을 포기했다.
유재학은 그런 자신을 믿어주지 않는 서준이 너무 원망스러웠다.
‘이거 진짜 맞아?’
하지만 서준은 그런 사실 따위 별로 알고 싶지 않았다. 아티팩트를 건네받은 서준은 그대로 별에게 물었다.
-맞다! 맞다! 짐의 영혼이 느껴지는구나! 이건 틀림없이 진짜다!
물론 서준에게는 진위 여부를 확인해 줄 감정사가 있었다. 영혼의 원래 주인인 별이 서준과 함께였기에 서준은 유재학에게 사기를 당할 염려가 없었다.
“진짜가 맞네요.”
“그걸 어떻게 알았지? 특별히 외부로 드러나는 힘은 없을 텐데?”
“그건 알 거 없고요.”
물론 그 사실을 유재학에게 말해줄 필요도 의리도 없었다.
“그래, 중요한 건 그게 아니니까. 그럼 이제 돌아갈까? 들키기 전에 가야 해. 그놈들 무서운 놈들이라고.”
“알겠어요. 일단 일행이 있는 곳으로 돌아가죠.”
“그래.”
밤에 물건을 훔치기 위해 만난 두 사람이었다. 이목을 끌어서는 안 되었기에 이 장소에는 서준만 홀로 나왔다.
애초에 유재학이 아주 자신만만했고 서준 혼자 와도 모든 일은 해결될 것이라 했기에 그것을 믿고 서준 혼자 나선 것이다.
설령 유재학이 배신을 해 병사들을 이끌고 서준을 공격한다 해도 서준은 빠져나갈 자신이 있었다.
게이트를 오픈하는 시간은 예전과 비교도 할 수 없을 만큼 짧아졌기에 도망가면 그만이었다.
“금방 오셨네요? 어떻게 일은 잘 해결되셨어요?”
일행들이 숨어있는 곳으로 가자 오세근이 가장 먼저 서준을 반겼다.
“응, 다 해결됐어.”
“그럼 이제 어떻게 하실 건가요?”
모두 해결되었다는 말에 김비서가 유재학을 한 번 쳐다보더니 서준에게 물었다.
“지금 그건 무슨 의미지? 배신이라도 하겠다는 말이냐?”
그 모습을 본 유재학이 당황하며 물었다. 모든 것을 걸었는데 돌아오는 것이 배신이라니…….
유재학은 하늘이 무너질 것만 같았다.
“뭐래? 내가 당신처럼 쓰레긴 줄 알아요?”
하지만 서준은 유재학과 여기서 이별할 생각은 조금도 없었다.
“함께 돌아가실 겁니까? 저자는……. 쓰레깁니다. 재활용도 불가능한 쓰레기 새낍니다.”
김비서가 낮은 목소리로 물었다. 모든 한국인에게 유재학은 세상에서 제일가는 쓰레기였다.
아직 테러로 인한 상처는 모두 아물지 않았다.
그 테러로 인해 부모를 잃은 아이는 셀 수도 없이 많았다. 반대로 아이를 잃은 부모도 셀 수도 없이 많았다.
유재학과 그 일당의 테러로 인해 받은 피해는 아직도 절반도 채 회복되지 않았다.
“일단은 들어가시죠.”
서준은 김비서의 어깨를 툭툭 두드려 준 후 게이트를 열었다.
유재학은 흥분하며 제일 먼저 게이트를 넘어갔다. 그리고 나머지 사람들도 그 뒤를 따라 들어갔다.
오직 김비서만이 홀로 분노를 삭이다가 제일 마지막에 게이트를 넘어왔다.
“여긴 어디지? 여긴 지구가 아니잖아! 돌려보내 준다고 했잖아!”
하지만 그곳은 지구가 아니었다.
서준의 게이트가 열린 곳은 재배지 섬이었다. 서준의 첫 번째 게이트 포인트가 존재하는 곳이었다.
“아직은 그쪽이 해줘야 할 일이 하나 더 남았는데요?”
“그게 무슨 말이야! 부탁은 다 들어줬잖아! 이제 곧 추격대가 구성될 거라고!”
“어차피 여기까지는 못 와요.”
“왜 못 오는데! 다른 차원이라도 돼?”
유재학은 서준의 멱살을 잡고 흔들어대기 시작했다.
서준은 뿌리치려 했지만 본래의 근력 차이가 상당했기에 쉽사리 뿌리칠 수는 없었다.
해서 유재학의 복부를 발로 걷어차며 상황에서 벋어났다,
“아 말 좀 끝까지 들어요.”
“허억! 허억!”
복부를 강하게 걷어차인 유재학이 막힌 숨을 내뱉었다.
“여기 섬이에요. 추적 마법 같은 거 없다면서요? 놈들도 여기는 못 찾아요.”
애초에 이곳은 섬이었다. 게다가 보통 먼 거리에 있는 섬이 아니었다.
바다의 경우는 이곳의 선박 기술이 얼마나 뛰어난지 모르겠지만 아무리 못 해도 삼 일이면 건너올 정도밖에 되지 않았다.
하지만 그 바다까지 오기까지의 길이가 상당했다. 적어도 한 달 이상은 걸어야 할 거리였다.
추격대도 흔적도 없이 사라진 유재학이 이곳에 있을 거라고는 상상도 못 할 것은 확실했다.
“그래! 말 해봐! 뭐든 다 해줄게! 대신 이번엔 정말 마지막이다!”
더욱 간절해진 유재학은 한 번 더 굽힐 수밖에 없었다. 아무리 주위를 둘러보아도 이곳은 무인도였다.
주위에 있는 약초들은 누가 봐도 백서준이 길러낸 것이었고 그것을 제외한 사람의 흔적은 보이지 않았다.
이대로 백서준과 척을 지고 등을 돌린다면 평생을 무인도에서 살아야 할 수도 있었다. 해서 유재학은 한 번 더 허리를 굽혔다.
“잡아야 할 괴수가 있어요. 그놈만 잡아준다면 놔드릴게요.”
“괴수? 웬만한 놈들은 니들끼리도 충분히 잡을 수 있을 것 같은데?”
유재학은 서준과 그 일행들, 그리고 호랑이들을 둘러보며 말했다.
틀린 말은 아니었다. 이제 웬만한 괴수들은 이들을 막을 수 없었다.
“상대하려는 게 용이라면 이야기가 달라지죠.”
하지만 그 상대가 용이라면……. 그것도 아주 오래전 봉인되어 온몸에 끓어오르는 분노를 고스란히 간직하고 있는 악룡이라면 이야기가 달라진다.
물론 오랫동안 봉인된 여파로 그 힘은 굉장히 약해졌을 테지만 분노한 용이 마구잡이로 하는 공격을 무시할 수는 없다.
서준은 다시 한번 악룡을 처음 만난 날을 떠올리며 몸을 떨었다.
“미쳤나? 용을 잡겠다고?”
“네. 용을 잡을 겁니다.”
유재학은 어이가 없다는 듯이 웃었다. 사실 유재학은 용을 본 적은 없었다.
유재학뿐만이 아니라 정말 소수를 제외하고는 본 적이 없었다. 그렇지만 유재학은 알고 있었다.
이 전력으로는 무슨 짓을 해도 용을 못 잡는다는 사실을.
“최소한으로 잡아도 나보다 두 배 이상은 강한 사람이 필요해. 그래도 될까 말까야. 이 전력으로는 자살행위야. 용이 실제로 존재한다는 사실은 둘째 치더라도…….”
유재학의 말은 하나도 틀린 것이 없었다. 하지만 서준은 유재학이 말한 두 가지 모두의 해답을 이미 가지고 있었다.
“용은 존재합니다. 제가 봤어요.”
유재학은 서준의 말을 듣고 놀랐다. 용이 존재한다는 것에 한번, 용을 보고도 살아 돌아왔다는 것에 두 번 놀랐다.
“그리고 당신보다 강한 사람이 있습니다. 두 배인지 세 배인지는 모르겠지만.”
서준은 련을 떠올리며 말했다. 련이 유재학보다 얼마나 강한지는 모른다.
그러나 적어도 두 배는 될 거라고 서준은 판단하고 있었다.
이제 최종병기인 련이 본래의 세계인 이곳으로 돌아올 시간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