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골목약사 백선생-117화 (117/150)

117화.

“그래서 내가 뭘 하면 되지?”

유재학이 물었다. 감정변화가 계속되던 지난 모습과는 다르게 조금은 진중해진 듯한 모습이다.

지구로 돌아가고 싶다는 그의 말은 무엇보다도 진실이었다. 그의 생애 동안 뱉은 말 중 제일 진심이 담긴 말이었다.

그는 지구로 돌아가기 위해 악연이 있는 서준에게 허리를 굽혔으며 모든 걸 내놓을 기세로 말했다.

“뭘 해주실 수 있는데요?”

서준이 퉁명스럽게 되물었다. 이미 주도권을 잡긴 했지만 뭔가 조금은 아쉬웠다,

더 뜯어낼 수 있을 것만 같은 기분이었다.

-너무 잔인한 거 아냐? 외지에서 백 년이나 뒹군 놈한테.

‘이놈은 더 당해도 싸.’

하지만 서준은 거기서 그만둘 생각은 없었다.

신비를 처음 만났던 날이 떠올랐다. 신비 엄마가 차가운 시체로 남겨져 있던 모습이 떠올랐다.

그녀는 서준의 첫사랑이었다. 서준은 그녀를 죽게 만든 유재학을 쉽사리 용서해줄 생각이 없었다.

“돈을 원하나?”

“돈은 이미 충분히 많은데요?”

아지트째 날려버렸기에 리버스가 축적해놓은 재산 중 대부분을 놓치긴 했다.

그러나 그것이 필요 없을 만큼 서준은 충분히 많은 돈을 가지고 있었다.

“돈에는 충분이라는 말은 어울리지 않아. 네가 약초 팔이를 하면서 큰돈을 만졌다는 걸 알고 있다. 하지만 나한테는 네가 상상할 수조차 없을 정도로 많은 금괴가 있지.”

“아지트째 바다로 날려버렸는데 그걸 회수할 정신은 있었나 봐요? 금덩이 몇 개 주울 시간에 부하들이나 살리지 그랬어요?”

서준이 비꼬면서 말했다. 다시 말하지만 서준의 화는 아직 가라앉지 않았다.

단지 유재학이 쓸모가 있기에 데리고 있을 뿐이었다. 그렇지만 않았다면 당장 머리를 꿰뚫어버리고도 남았다.

“아니, 지구에 있다. 내가 이리로 넘어온 후 시간은 얼마 흐르지도 않았다며? 그렇다면 그대로 있겠지. 내 모든 비자금을 금괴로 바꾼 후 숨겨놓은 장소가 있다. 돌아가면 그 금괴의 절반을 주겠어.”

“전부가 아니라?”

전부를 주겠다고 해도 들어줄까 말까였는데 아직 정신을 못 차린 것 같다.

“비록 내가 늙어 얼굴이 변했다고는 하지만 양지에서 살아갈 수는 없는 몸이다. 숨어 살려면 많은 돈이 필요한 법. 조금만 이해해주길 바란다. 제대로 살 수 없다면 지구로 넘어가는 것에 그 어떤 의미도 없으니 넘어가는 것에 포함되어 있는 조건이라고 생각해주길 바란다.”

“말이 기네요. 그래서 얼마 정도 되는데요?”

일단은 확인해두는 것도 나쁘지는 않았다. 빚은 이미 모두 갚은 데다가 이후 벌어들이는 돈 역시 충분했기에 더 많은 돈이 필요하지는 않았다.

하지만 유재학 말대로 돈에는 충분하다는 단어가 어울리지 않았다. 많으면 많을수록 좋은 것이 돈이다.

혼자 쓰기에 너무 넘쳐나면 기부를 하면 그만이다. 서준은 혹시나 하는 마음에 금괴의 양을 물어보았다.

“일찍이 내 주 무대는 한국이 아니었다. 남들은 최운혁이 놈이랑 결사회한테 밀려 숨어버린 거라곤 하는데 사실은 그렇지 않아. 나는 조금 더 국제적으로 놀았을 뿐이야.”

“자랑이나 들으려고 하는 게 아닌데요?”

“끝까지 들어보라고.”

유재학이 서준의 빈정을 받아치며 말했다.

“전 세계를 돌아다니며 나쁜 짓이란 나쁜 짓은 다 하고 다녔지. 그래 그건 인정한다. 다 어릴 적 이야기니까. 한국에서만 소문나지 않았을 뿐 이미 전 세계의 내 악명을 떨치고 다녔지.”

“아 서론은 됐고요. 본론만 딱 말하세요.”

서준은 그 악랄한 범죄행위를 어릴 적 일탈이라고 말하는 유재학을 강하게 쏘아붙였다.

“알겠다. 전 세계를 돌아다니며 훔친 돈이 얼마나 되겠냐? 그걸 모두 금괴로 바꿔서 강원도 어딘가에 숨겨놨다. 금값이 크게 떨어지지만 않았다면 그걸 모두 팔면 강남 정도는 살 수 있을걸?”

서준은 어이가 없어서 크게 웃었다. 강원도 어디 산골에 숨겨놓은 금괴를 모아 팔아서 강남을 전부 산다? 있을 수 없는 일이었다.

“금이 해봐야 얼마나 한다고 강남을 다 사요? 강원도 전체가 금으로 이뤄졌다고 해도 믿을까 말깐데.”

대침공 이후 강남의 땅값은 지난날과 비교할 수 없을 정도로 엄청나게 폭등했다. 원래도 엄청난 가격을 자랑했던 강남이지만 대한민국에서 제일 안전한 장소라고 평가받는 지금은 정말 상상하기도 힘든 가격을 자랑하고 있다.

서준의 말처럼 강원도 전체가 금으로 이루어졌다고 해도 강남을 전부 살 수는 없었다.

“그 금괴가 게이트 금괴라면 이야기가 달라지지 않겠어?”

“게이트 금괴요?”

“그래.”

옆에서 이야기를 듣고 있던 김비서와 오세근이 어이가 없다는 듯이 입을 벌리며 놀랐다.

모하메드는 금전적인 얘기는 관심 없다는 듯 주점 방향을 계속 바라보고 있었다.

주인공 놀이가 너무 금방 끝나서 아쉬운 눈치였다.

“내 활동 기간을 생각하면 이상한 것도 아니야. 음…. 대충 따져보면 오십 평 조금 넘는 지하벙커에 게이트 금괴로 가득 차 있으니 강남 정도는 살 수 있지 않겠어?”

“말도 안 돼…….”

오세근이 어이가 없다는 듯이 바람 빠진 소리를 내뱉었다.

“음…. 그쪽은 얼굴을 보니 유명 그룹의 도련님이었군! 백 년 만에 보는 얼굴이라 이제야 기억나는군!”

오세근을 바라보던 유재학이 그를 알아보며 소리쳤다. 범죄조직의 두목이었다. 재벌가를 못 알아볼 리 없었다.

“오십 평 공간에 게이트 금괴를 가득 채워놨다고요? 말이 됩니까?”

“내가 재벌 도련님보다 돈이 많다는 게 믿기 싫으면 어쩔 수 없고.”

오세근도 믿기 힘들 정도로 많은 양이었다. 그만큼 게이트 금괴의 가격은 엄청났다.

그런 걸 오십 평 공간에 가득 채워놨다니 믿기 힘든 말이었다.

“위치부터 말해보시죠.”

“그건 안 되지. 내가 널 어떻게 믿고?”

“그럼 내가 당신을 어떻게 믿어요? 범죄자 새끼한테 신용은 기대할 수 없는데요?”

서준은 유재학을 사납게 몰아붙였다. 애초에 유재학은 거래대상이 아니었다. 이용 대상이었을 뿐이다.

비위를 맞춰가며 조율할 필요가 없었다. 모든 주도권은 서준에게 있었다.

강남을 전부 살 수 있는 금괴? 그런 건 있어도 그만 없어도 그만이다. 어차피 지금 서준이 가진 돈을 다 쓰기 전에 서준은 늙어 죽을 것이다.

“…….”

유재학은 서준의 말에 대응하지 못하고 입술을 깨물었다. 서준의 말은 유재학이 예상하지 못한 반응이었다.

보통은 게이트 금괴라는 말이 나오면 이성을 잃고 달려들기 마련이었다.

그것도 50평 공간을 채워놓을 정도라고 말하면 이성을 유지할 수 있을 리가 없다. 재벌 후계자라는 오세근이 넋을 놓은 것만 봐도 그렇다.

유재학은 그를 이용해 거래의 주도권을 잡으려 했다. 그러나 그가 놓친 것이 있었다.

서준은 돈에 대한 욕심보다 유재학에 대한 분노가 더욱 컸다.

지금 말한 금액의 백 배가 넘는 금액을 제시하여도 서준은 흔들리지 않았을 것이다.

“어쩔 수 없군. 좋다. 장소를 알려주지. 그래도 세간에서는 영웅이라는 소리를 듣던 분인데 내 뒤통수를 치지는 않겠지.”

유재학이 질 수밖에 없는 승부였다. 급한 건 유재학이었다. 서준은 돈이 있어도 그만 없어도 그만이었지만 유재학은 지구로 돌아가야만 했다.

어차피 지구로 돌아가지 못한다면 금괴가 얼마나 있던 다 무용지물이었다.

유재학도 그 사실을 깨달았는지 서준에게 한번 져줬다.

“장소를 알려주지. 대신 절반이다. 딱 절반만 가져가고 나머진 그대로 남겨둬야 해.”

“장소나 말하쇼.”

유재학은 서준에게 장소를 말해주었다. 서준은 주위를 한 번 둘러본 후 휴대폰을 꺼내 위치를 메모해 두었다.

위치는 좌표의 형식을 띠고 있었다. 꽤 길었기에 한 번에 외우기는 힘든 숫자 조합이었다.

유재학은 아마 100년 넘게 이 좌표를 잊지 않기 위해 매일같이 되뇌었을 것이다.

“휴대전화라……. 그리운 물건이군. 한 번만 만져봐도 되겠나?”

“닥치쇼.”

유재학이 휴대폰을 향해 손을 뻗었지만 서준이 반대 손으로 유재학의 손을 쳐냈다.

역겨운 놈의 손이 자신의 물건에 닿는 것을 지켜보고 싶지 않았다.

“이건 계약금일 뿐입니다. 해 줄 일이 있다는 건 알고 있죠?”

“잔인하군. 택시비로 이렇게 큰돈을 받고도 더 원하다니.”

“싫은 말고.”

“아니, 알겠네. 뭐든 말해보게. 이곳에서 내 권력을 이용해 할 수 있는 일이라면 뭐든 하겠네.”

이미 금괴를 숨겨둔 곳의 장소까지 말해버리고 말았다. 아직 서준이 확인하지는 않았지만 확인하러만 간다면 금세 들통날 것이 분명하기에 사실을 말했다.

한데 여기서 괜히 서준의 눈 밖에 났다가는 금괴만 뺏기고 지구로 돌아갈 수는 없었다.

유재학은 어쩔 수 없이 서준에게 숙이고 말았다.

아마 이후로도 유재학은 주도권을 잡을 수 없을 것이다. 물론 유재학 역시 그 사실을 잘 알고 있었다.

“혹시 거대 멧돼지 괴수가 들고 있던 아티팩트에 대해 들은 거 있어요?”

서준이 한층 누그러진 목소리로 물었다. 역겨운 놈인 건 변함없지만 일을 같이해야 할 사람이었다.

괜히 일을 망치는 것보다는 잠시 동안 화친을 맺는 게 옳았다.

“아주 오래전 일인데 그걸 네가 어찌 알지? 아…. 시간의 흐름이 다르다고 했구나.”

“그 소리는 알고 있다는 얘기 같은데요?”

유재학은 마치 알고 있다는 듯이 말했다. 일이 생각보다 술술 잘 풀리기 시작했다.

이대로라면 코도 안 풀고 일을 해결할 수 있을 듯했다.

“그래, 내가 이 마을로 흘러들어와 겨우 정착했을 때쯤 일이었지……. 그런 얘기를 들은 적이 있어.”

“직접 보지는 못했고 얘기만 들었다?”

“한창 적응하기 바빴으니까 그런 이야기에 관심 같을 여유 따위 없었다고.”

“그래서 지금 그게 어디 있는지 안다는 겁니까? 모른다는 겁니까?”

“당연히 알고 있지! 내 직책이 뭐라 했나? 경비대장이라고 하지 않았어?”

정말 다행히도 유재학은 그 물건의 행방을 알고 있었다.

만일 유재학이 그 물건을 빼낼 수 있는 위치에 있지 않더라도 이것만으로 큰 수확이었다.

어디에 있는지 모르는 물건을 훔쳐내는 것보다는 그 존재 위치를 아는 물건을 훔쳐내는 게 수천만 배는 쉬웠으니까.

“어째서 그 물건이 필요한지는 모르겠지만 위치는 정확히 알고 있어. 성내의 모든 경비단의 근무를 내가 직접 짠다고. 그 물건이 보관된 곳의 경계 역시 내가 책임지고 있어.”

“오!”

유재학의 말이 사실이라면 일이 더 수월해질 수 있었다. 유재학이 근무표를 조금만 조작해준다면 소란스럽지 않게 일을 처리할 수 있었다.

“그런데 그 물건이 왜 필요하지? 나도 중요한 물건이라는 것만 알지 어디에 쓰는 건지는 잘 몰라.”

“그건 묻지 마쇼.”

“알겠네. 그럼 그 물건만 빼내 주면 되는 건가?”

“네.”

유재학은 잠시 고민하듯 입술을 깨물더니 다시 물었다.

“근데 정말 중요한 물건이라 없어진다면 금세 눈치채고 말 거야. 훔쳐낸 후 바로 몸을 빼야 해.”

“그 정도는 나도 알고 있어요. 근데 추적 마법 같은 건 안 걸려있을까요? 그렇다면 골치 아픈데요?”

아티팩트를 훔쳐 별의 동상까지 가져가야 했다. 추적마법이 걸려있다면 일이 복잡해진다. 련조차도 무서워하는 것이 추적마법이었으니까.

“추적마법? 그런 얘기는 어디서 들었는지 모르겠는데 그런 건 없으니까 걱정 마. 추적마법을 걸 수 있는 자는 이 세계에서도 손에 꼽으니까.”

련은 서준이 열어버린 게이트의 흔적을 추적해 차원 이동도 했는데 추적마법이 그렇게 어려운 건가? 하는 의문이 들었지만 서준은 그냥 넘겼다.

난이도의 고하가 서준의 개념과는 다를 수가 있었으니까.

“그래요. 어쨌든 알겠습니다. 그래서 언제까지 가져다주실 수 있죠?”

“오늘 밤 안에는 가져다주지. 아직 저녁이 되려면 한참 남았으니 주점에서 술이나 마시고 있으라고.”

유재학은 훗날 접선 장소와 시간만을 말한 후 근무시간이라며 돌아갔다.

“그럼 어차피 할 일도 없는데 이제 좀 즐겨 볼까요?”

“좋죠.”

유재학을 보낸 서준의 일행들은 다시 주점을 향해 뛰어갔다.

이제는 마음 편히 즐길 시간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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