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15화.
“우와……. 크네요?”
오세근이 커다란 마을을 보며 감탄을 쏟아냈다.
“진짜 있네요. 이곳에도 문명이란 것이 존재하네요.”
김비서 역시 오세근과 같은 표정이었다.
“왜, 저번에 본 적 있잖아요? 스승님이랑 밑에 군인들.”
“그래도 이렇게 거대 마을 단위로 존재하는 거 보니까 이제야 실감이 나네요.”
지금껏 이들이 본 것이라고는 원시 부족이나 련이 이끌고 있는 부대뿐이었지 이렇게 잘 발달된 마을은 본 적이 없었다.
“못해도 삼천 명은 살겠는데요?”
“스승님이 말했잖아, 실제로 보면 놀랄 거라고.”
어림잡아 삼천 명이다. 실제로 들어맞을지는 모르겠지만 큰 오차는 없을 것이다.
서준의 일행 앞에는 끝을 모르고 줄지어 이어지는 생활공간이 들어왔다. 높은 산 위에 있어 한눈에 다 담을 수 있었지만 직접 눈앞에서 보면 그야말로 장관임이 틀림없다.
“마을 중앙에 성 한번 보세요. 진짜 판타지 영화에서나 보던 거 아닙니까?”
모하메드가 마을 중앙을 향해 창끝을 가리키며 말했다.
창끝이 가리킨 곳에는 아주 높고 화려한 성이 위치하고 있었다.
“흐음…. 몰래 들어가는 건 힘들겠는데?”
서준이 한참 동안 성을 바라보다가 말했다.
목적을 이루기 위해서는 성 내부로 들어갈 필요가 있었는데 성의 상태를 보니 생각보다 일이 어려워질 것 같았다.
“그러게요. 제가 생각한 것보다 더 높아요. 스승님도 저렇게 높다고는 말씀 안 하셨는데……. 그동안 증축이라도 한 걸까요?”
“그렇겠죠. 아무래도 시간이 오래 흘렀잖아요? 중요한 물건 지키고 있을 텐데……. 저들도 방비를 했을 걸 예상했어야 했어요.”
김비서의 물음에 서준이 안타까움을 담아 말했다. 성이 련이 묘사한 그대로 존재했다면 어떻게라도 뚫고 들어갈 수 있었을 텐데 지금은 조금 어렵게 되었다.
성의 높이만 높아진 것이 아니라 그 성벽의 두께 역시 엄청났고 한눈에 보기에도 단단한 암석으로 지어져 있었다.
게다가 성 주위를 지키는 병력도 매우 많아 빈틈을 찾기 어려웠다.
“일단은 들어가 봅시다. 가까이서 살펴보면 뭐라도 답이 나오겠죠.”
“네.”
서준이 앞장서며 산을 내려가자 나머지 사람들이 서준의 뒤를 따라 걸었다.
아쉽지만 호랑이들은 마을 안으로 들어가기에 너무 눈에 띄었기 때문에 산속에 풀어두었다.
오랜만의 자유에 신이 난 호랑이들은 기쁜 얼굴을 하며 더 깊은 산속으로 뛰어들어갔다.
“얘들아, 너무 깊숙이 들어가진 말고 낌새 이상하다 싶으면 바로 성안으로 뛰어들어와.”
-어흥! 캬앙! 크릉!
보통 호랑이들이 아니었다. 이렇게 멀리 떨어져 있어도 호랑이들은 서준의 위험을 감지할 수 있는 능력이 있었다.
산속에서 놀고 있다가도 눈 깜짝할 새에 위험에 처한 서준을 구하러 올 능력이 되었다.
그렇기에 서준은 안심하고 호랑이들을 풀어놓을 수 있었다.
“북적북적하네요.”
“그러게. 그래도 말은 최대한 줄이자고. 통역 아티팩트를 켜놨다고는 하지만 민감한 사람은 그 차이를 잡아낼 수도 있어.”
“네.”
사실 그럴 확률은 거의 없었다. 서준 역시 완전히 발동된 통역 아티팩트 사이에서 그 미묘한 차이를 구분하지 못했다.
그러나 혹시라는 게 있다. 련처럼 강력한 존재가 근처에 있을 수도 있다. 조심해서 나쁠 것은 없었다.
어쨌든 이곳은 적지였으니까.
“일단 성 주변으로 가볼까요?”
김비서가 앞서나가며 물었다.
“김비서, 천천히 가자고 천천히. 이왕 온 김에 구경도 좀 하고 그러면 얼마나 좋아? 어차피 침투를 해도 오늘 하지는 않을 거 아니냐?”
“회장님 뜻이 그러시다면 저는 언제나 오케이입니다!”
오세근은 마을이 맘에 들었는지 헤벌쭉하며 주위를 계속해서 둘러보고 있었다.
어차피 오늘은 정보를 수집하는 날이었다. 작업 개시는 내일 해도 늦지 않았다. 오히려 서두르는 것보다는 확실하게 처리하는 게 중요했다.
마을 주민들은 정신없이 고개를 휘두르는 오세근을 촌에서 올라온 사람들처럼 바라보고 있었다.
“어쨌든 눈치를 보니 의심은 안 받는 거 같네요. 복색이 크게 바뀌지 않아 다행이에요.”
“일단 한고비는 넘겼네요.”
서준의 일행은 련이 일러준 대로 옷을 제작해 입고 왔다. 다행히도 련이 살던 때와 지금의 복색이 크게 변하지는 않을 것 같았다.
마을 사람들이 서준의 일행을 약간 촌티 나는 사람을 쳐다보듯 보기는 했지만 마침 그것이 오세근의 행동과 잘 어우러져 오히려 위장에 도움을 주었다.
-저 멍청한 놈이 도움이 되는 때가 다 있구나.
‘세근이는 항상 도움이 됐지.’
지금껏 오세근이 서준의 부탁을 들어준 게 한두 가지가 아니었다.
백서준에 한해서 오세근은 특급 도우미였다.
‘그나저나 네가 살던 때랑 비교하면 어때? 뭐가 좀 달라졌냐?’
-끄으응……. 기억이 잘 안 나네?
영혼이 찢어진 여파일까? 별은 무언갈 깊숙이 생각하려고만 하면 머릿속에 짙은 안개가 낀 것처럼 기억이 흐릿해졌다.
무언가에 관해 설명하면서도 갑작스레 기억이 사라졌다. 심지어 방금까지 설명하던 것에 대해 까먹기도 했다.
‘내 생각엔 영혼이 나뉘어서 그런 게 아니고 치매가 온 것 같은데? 나이로 따져보면……. 그럴 만도 하잖아?’
-닥쳐라!
역시 별을 놀려먹는 게 제일 재미났다.
“티 안 나게 행동해. 갓 상경한 시골 사람처럼 이렇게 높은 성 처음 본 것처럼 행동해.”
어느덧 천천히 걷다 보니 서준의 일행은 마을 중앙에 위치한 성에 도달할 수 있었다.
성 주위에는 경비병들이 쫙 깔린 것이 경계가 정말 삼엄했다.
서준의 일행은 관광지를 놀러 온 관람객처럼 입을 떡 벌리고 성 위를 바라보며 주위를 걸었다.
“흠……. 빈틈은 없어 보이는데요?”
모하메드가 조용히 속삭이듯이 말했다.
“그러게요. 경비병들 배치해놓는 거 보니까 사각지대는 없는 것 같네요.”
서준이 공감하듯이 말했다. 성 주위와 그 위에 배치된 병사들은 서로의 사각지대를 완전히 커버하고 있었다.
어떻게든 빈틈을 찾아 침투해야 했던 서준의 일행에게는 정말 최악의 악재였다.
“이거 보는 눈이 너무 많아서 벽을 타고 넘을 수도 없고……. 그렇다고 부수자니 한 방에는 안 될 테고……. 어떡하죠?”
벽을 타고 넘자니 그 시간이 너무 오래 걸렸다. 어떻게든 사각을 찾아 오른다고 해도 금세 발각될 게 뻔했다.
높은 벽에 매달린 상태로 공격을 받으면 그대로 끝장이다.
그렇다고 성벽을 부수고 들어가서 물건만 훔치고 나오기에는 벽이 너무 두껍고 단단했다.
한눈에 보기에도 성벽은 서준 일행의 힘으로는 부술 수 없는 물건이었다.
“이거 스승님이라도 불어와야 하는 거 아니에요?”
“아냐, 어떻게든 우리끼리 해결해야지. 스승님을 여기서 사용하면 악룡을 우리끼리 잡아야 할 수도 있어. 악룡보다는 성벽 뚫는 게 쉬울 거 같은데?”
련에게 장치된 추적마법이 언제까지 유효한지는 알지 못했다. 그러나 혹시 아직까지 유지되고 있었다면 련이 게이트를 넘어 이곳으로 오는 순간 신호가 갈 것이다.
그리고 련을 추격하기 위한 정예부대들의 끝없는 추격이 시작될 것이다.
련을 이용하는 건 어떻게든 악룡을 사냥할 때까지 보류해둬야 했다.
“아 그러게 스승님은 왜 아티팩트를 안 들고 와서 우릴 개고생을 시키는 거야.”
오세근이 볼멘소리를 하며 투정을 계속했다.
“사부님이라고 알았겠냐? 우리랑 함께할지?”
돼지 괴수가 지니고 있던 별의 영혼이 담긴 아티팩트는 련의 부하 중 한 명이 가져갔다.
련이 서준 일행을 추격하면서 아티팩트를 부하에게 맡겨둔 것이다.
“근데 여기 있는 건 확실한 겁니까?”
김비서가 물었다.
“우선은 그것부터 확실히 알아봐야겠죠. 중요한 물건이니 성내에서 보관하고 있다고 예상만 했을 뿐 정확한 건 알 수 없으니까요.”
오늘 하루 전체를 정보 탐색 기간으로 둔 이유는 여기에 있었다.
아티팩트가 성안에 있는지 밖에 있는지 알지 못했다. 성안에 존재하더라도 성안의 어떤 건물에 있는지 알지 못했다.
정말 최악의 경우에는 다른 성에 존재할 수도 있었다.
정보 파악에 시간이 걸린다면 내일이 돼도 작전을 시행하지 못할 수도 있었다.
“어떻게든 최대한 빨리 알아내자고. 우선은 주점 같은 데로 가서 이야기를 꺼내보는 것도 나쁘지 않을 것 같아.”
판타지 영화 같은 걸 보면 주인공들은 정보를 탐색하기 위해 주점으로 향했다.
그곳에서 사람들이 나누는 이야기를 엿듣는다거나 종업원에게 돈을 주어 정보를 사고는 했다.
“일이 영화처럼 잘 풀릴까요? 괜히 의심만 사는 건 아닌지 모르겠어요.”
김비서의 말이었다.
“그래도 방법이 없잖아. 안 되면 게이트 열고 튀었다가 일이 년 흐르고 다시 오면 그만이지. 그때쯤이면 우리 얼굴 다 잊었을걸?”
오세근다운 발상이었다. 약간 막무가내의 성질은 있었지만 틀린 말은 아니었다.
“맞아요, 해보지 않으면 결국 아무것도 못 이루는 거예요. 일단은 해보자고요.”
모하메드가 자신 있는 얼굴로 말했다. 그 역시 판타지 영화에 매료된 적 있었다. 창술을 수련하게 된 계기도 그곳에 있었다.
해서 모하메드는 지금 어린아이처럼 들뜬 기분이었다. 모하메드는 최대한 빨리 주점에 가고 싶어 몸이 근질거리는 지경이었다.
“일단은 가봅시다. 뭐라도 해보고 나중 일은 나중에 생각하죠.”
서준이 련에게 받은 주머니를 만지작거리며 말했다. 그 속에는 련이 건네준 이 세계의 화폐가 들어있었다.
“주화체계 역시 변하지 않았으면 좋겠는데요……. 사부님 말로는 먹고 자고 즐기고 다 할 정도의 돈이라고는 했지만 인플레이션이라도 일어났으면 큰일입니다.”
“뭐, 그때는 촌놈인 척하자고요.”
그렇게 말을 하며 마을 중심부로 걷다 보니 사람들이 북적이는 주점을 발견할 수 있었다.
아직 해가 하늘 중앙에 떠 있는 것으로 보아 열심히 일할 시간이었지만 주점에는 사람들이 바글바글했다.
역시 어느새 계나 낮술 하는 사람은 끊임없이 있었다.
“처음 보는 얼굴인데?”
“옷 보니까 딱 촌놈이네.”
“쉿! 창 들고 있잖아. 시골 사람이라도 부족 최고의 전사쯤 되면 무시할 수준이 아니야!”
서준의 일행이 주점 안으로 들어가자 주점 내부에 있던 사람들이 그들을 보며 속삭이기 시작했다.
어느 정도는 뒷담의 성격을 띠고 있는 대화였기에 매우 작고 은밀했지만 서준 일행의 뛰어난 감각을 피해갈 수 없었다.
다행히 이들은 서준 일행을 촌놈으로만 생각할 뿐 특별히 이상하게 생각하지는 않았다.
련에 말에 따르면 이곳에는 지구와는 비교할 수 없을 정도로 다양한 인종이 섞여 살고 있다고 했다.
해서 동양인의 모습을 한 한국인 셋과 이집트 사람인 모하메드가 같이 다니는 것 역시 어색한 모습은 아니었다.
단지 촌스러운 복색을 하고 있을 뿐이었다.
“어서 오시지요. 이곳엔 처음이시죠? 잘 오셨습니다. 저희 주점 술맛이 이 마을 최고거든요.”
“네, 여기 앉으면 되나요?”
“여부가 있겠습니까?”
서준 일행은 종업원의 안내를 받고 자리에 앉았다. 다행히 이야기를 해보니 화폐의 가치가 크게 달라지지는 않은 것 같았다.
련에게 받은 액수는 이곳에 존재하는 모든 메뉴를 주문해도 남을 만큼 큰 액수였다.
다행히도 판타지 영화의 주인공 역할을 충분히 즐길 수 있을 것 같았다.
“백…… 서준?”
그리고 바로 그때였다. 누군가 서준의 이름을 말했다.
있을 수 없는 일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