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09화.
“뒤지게 힘드네요.”
오세근이 툴툴거리며 앞장서서 걸어갔다.
“그래도 어떻게 하루 만에 넘긴 넘었네.”
“이게 넘은 겁니까? 뚫은 거에 가깝지.”
“뭐, 어쨌든 서울만 가면 그만 아니냐.”
“참 속 편해서 좋겠습니다. 형님은.”
서준과 일행들은 바세린 협곡을 하루 만에 주파했다. 련의 주문이 있기는 했지만 순전히 본인들의 의지가 더 컸다.
과연 내가 이 험한 산을 하루 만에 넘을 수 있을까? 라는 의문부터 시작해서 넘을 수 있다는 자신감과 호승심까지 그들의 심정은 시시각각 변해갔다.
그리고 드높던 장벽은 이 사내들 앞에 하루 만에 무너졌다.
“야, 세근아.”
“네, 형님.”
“너 혹시 헬기 같은 건 안 가지고 있냐?”
“헬기요? 몇 개 있죠. 근데 왜요?”
“다음엔 그냥 그거 타고 올까?”
“그게 돼요?”
“안 될 건 없지,”
안 될 건 없었다. 지난날 산악 바이크를 타며 재배지 섬을 누비던 백서준이다. 게이트 너머로 헬기만 넘긴다면 못 탈 것도 없다.
이제 서준이 열 수 있는 게이트의 크기는 헬기 따위를 뛰어넘은 지 오래다.
“그래도 그건 안 될 말입니다.”
서준과 오세근이 희망찬 말을 하고 있을 때 모하메드가 초를 치며 끼어들었다.
“왜요?”
오세근이 퉁명스럽게 묻자 모하메드가 매우 진지한 표정으로 답했다.
“이 또한 모두 훈련입니다. 새로운 환경을 맞이하는 것도 훈련입니다. 힘든 지형을 넘는 것도 훈련입니다. 편법을 사용해선 안 됩니다.”
참으로 훈련 중독자다운 말이었다. 모하메드의 이야기를 듣고 있던 백서준과 김비서는 고개를 좌우로 저었다.
“역시! 창신! 대단하십니다!”
“별거 아닙니다. 마음먹기에 달렸을 뿐입니다.”
오세근이 비꼬며 말했지만 모하메드는 텍스트 그대로의 뜻을 받아들인 듯했다.
그 어느 때보다 진중한 표정을 하며 훈련 예찬론자다운 말을 계속해서 이어갔다.
“그래, 그냥 걷자. 어차피 협곡도 넘었는데 이제 뭐가 문제겠냐?”
“그래요. 그럽시다. 길드장님. 편법을 쓰다가 스승님께서 아신다면 크게 혼날 게 분명합니다.”
서준과 김비서가 오세근을 설득해 나섰다. 두 사람도 헬기를 타고 편하게 이동하면 좋겠지만 모하메드의 말 역시 틀린 건 하나도 없었다.
새로운 환경에 적응하는 것도 훈련이었고 협곡을 넘는 것도 훈련이었다. 앞으로 어떤 상대를 맞이해야 할지 모르는데 벌써부터 힘들어서 편법을 썼다간 훗날 힘들어질 것이다.
현재를 대가로 미래를 구매해야지 오히려 팔아버리는 건 어리석은 짓이었다.
“그래요……. 두 사람 다 그렇게 말하면 별수 없죠. 스승님한테 맞는 건 더 싫고요.”
오세근이 시무룩한 표정을 하며 답했다. 그때 오세근의 양손은 이마에 위치해 있었다.
지난날 련에게 얻어맞은 자리였다. 멍도 사라지고 혹도 사라졌지만 어째선지 고통은 계속해서 오세근을 괴롭혔다.
오세근이 게으름을 피우려고만 할 때면 쓰라린 고통이 찾아왔다.
“일단 돌아갑시다. 날도 어두워졌는데.”
김비서가 말하자 모두 깨달았다.
바세린 협곡을 넘는 사이 어느새 해가 저물었다. 돌아갈 때가 온 것이다.
“그러게 제가 뭐라 했습니까? 헬기 타고 가자고 했죠?”
“이렇게 될 줄 누가 알았냐?”
다음 날 서준과 일행들은 호랑이 괴수를 잡기 위해 이른 새벽부터 게이트 탐험을 시작했다.
그리고 불행하게도 그들은 또 난관을 만나고 말았다. 이번에는 사막지대였다.
“이것 역시 훈련입니다. 발목까지 잡아먹는 모래 위를 걷기만 해도 온몸의 균형감각이 절로 향상될 겁니다.”
그 와중에도 훈련 중독자인 모하메드는 좋다고 함박웃음을 짓고 있었다.
실제로도 모하메드는 사막의 모랫바닥에 발을 빠트리지 않기 위해 조심조심 걸어가고 있었다.
지금껏 모하메드의 발은 발목 이상 빠진 적이 없다.
“그건 그쪽이 원래 사막 사람이라 그런 거 아닙니까?”
사막에 지친 오세근이 퉁명스럽게 말하기 시작했다. 지난 이틀간은 협곡을 오르고 오늘은 사막을 거닐었다.
지치고 힘들어 성질이 예민해지는 것도 당연한 결과였다.
“이집트가 사막일 거라는 건 편견입니다.”
“사막이 아니라구요? 피라미드랑 스핑크스 보면 죄다 사막에 있던데요?”
“피라미드랑 스핑크스만 이집틉니까? 거참…….”
항상 무뚝뚝한 모하메드였지만 이번에는 조금 서운하긴 했나 보다.
이제껏 보여준 적 없는 표정을 하며 모하메드는 저 앞으로 먼저 걸어나갔다.
“이번엔 네가 잘못했다. 세근아.”
서준이 오세근을 나무랐다. 이번에는 오세근이 잘못한 게 맞다.
조국을 놀림감 삼는 건 참을 수 없을 것이다. 특히나 모하메드는 이집트의 영웅이라고 불릴 정도였다. 이집트에 대한 자부심이 엄청날 것은 분명했다.
“아닙니다. 길드장님. 남자로 태어나서 고작 말 한마디에 삐지는 게 잘못입니다. 길드장님은 잘못한 거 없습니다.”
역시 이세상 최고의 아첨꾼, 간신배 김비서다. 오랜 기간 오세근의 비서로 남아있을 수 있는 이유가 여기에 있었다.
김비서는 언제나 오세근의 편이었다.
“그치? 뭔 저런 거로 삐지고 그래. 모하메드! 같이 가요!”
김비서의 위로에 힘을 조금 얻었는지 시무룩해진 오세근의 얼굴이 조금은 펴졌다.
마음이 풀린 오세근은 모하메드를 위로하려는 듯 저 앞을 걸어가는 모하메드를 향해 달려가기 시작했다.
오세근이 지난 자리에는 발목보다 조금 깊은 구덩이가 파여있었다.
-한번 해보지그래?
‘뭘?’
-발자국 없이 걷는 거. 모하메드랑 오세근의 발자국을 봐라. 벌써 차이가 나잖아.
‘음…. 그러네?’
그제서야 서준도 발자국의 깊이를 의식하기 시작했다. 모하메드는 발목보다 낮게, 오세근은 발목보다 깊게 파였다.
이것이 저 둘의 수준 차이를 보여주는 대목이었다.
‘음…. 그래도 내가 꼴등은 아니네.’
-참, 자랑이다.
서준은 뒤를 돌아보며 자신의 발자국을 바라보았다. 모하메드보다는 깊었다. 그러나 오세근보다는 얕았다.
딱 두 사람 사이에 낀 수준이었다.
‘좋아, 한번 해보겠어.’
모하메드보다 깊은 발자국을 본 서준도 승부욕이 생겼다. 사고 가속이나 아티팩트 그리고 호랑이들을 활용하면 모하메드를 이길 수는 있었다.
서준에게 목숨을 걸고 싸우라고 한다면 백번 싸워서 백번 모두 이길 자신이 있었다.
그러나 몸뚱이 하나만을 다루는 능력을 비교한다면 모하메드가 위에 있었다.
별도 련도 없이 스스로의 힘으로 단련한 모하메드보다 서준의 수준이 떨어진 것이다.
-발을 가볍게 놓으려고 하지 말고 체중을 분산시켜.
그리고 그것은 서준의 자존심을 상하게 하기에는 충분한 사건이었다.
서준은 그 어느 때보다 별의 말에 집중하며 조심스럽게 발을 내딛기 시작했다.
‘오! 됐다! 이 정도면 복숭아뼈 아래까지 온 거 아냐?’
서준이 지나온 발자국을 보며 말했다.
‘모하메드보다 구멍이 얕잖아? 별로 어려운 것도 아니네.’
서준이 자랑하듯 별에게 말했다.
-참나, 진짜 어이가 없네? 지금 네 자세를 봐라. 누가 보면 똥 마려운 줄 알겠다.
별이 어이가 없어서 깔깔대며 웃기 시작했다.
‘그렇게 이상해?’
-어. 심각할 정도로.
서준은 어떻게든 발자국을 남기지 않기 위해 조심스럽게 발걸음을 내디딘다는 것이 엉거주춤한 걸음걸이를 하게 만들었다.
별의 말처럼 체중을 분산시키되 평소와 같은 걸음걸이와 속도를 해야 옳았다. 그러나 지금 서준의 수준으로는 힘든 일이었다.
-느려도 좋아. 대신 정자세로 차근차근 가보자고. 조금 뒤처져도 따라갈 수 있잖아?
‘그래. 알겠어.’
조금 뒤처져도 괜찮다. 호랑이들을 타고 따라가든 뛰어가든 방법은 많았다. 지금은 훈련에 집중할 때였다.
“김비서님 먼저 가계세요. 금방 따라가겠습니다.”
“네, 알겠습니다. 여기도 있었네요. 훈련 중독자.”
김비서가 웃으며 먼저 걸어가기 시작했다.
김비서 눈에는 서준이나 모하메드나 똑같았다. 서준이 모하메드를 훈련 중독자라 부르며 놀려댔지만 김비서의 눈에는 두 사람 모두 별다를 건 없었다.
다른 사람의 눈에는 서준 역시 지독한 훈련 중독자였다.
서준은 한걸음, 한걸음 조심스럽게 걸어나갔다. 허리를 꼿꼿이 펴고 자세를 망치지 않기 위해 노력했다.
그렇게 걷다 보니 사막이 끝나갈 때쯤엔 서준의 발자국은 지나온 흔적만 찾아볼 수 있을 뿐 깊은 구덩이를 만들지 않게 되었다.
“금방 오셨네요?”
“오래 기다리셨나요?”
“아니요. 저희도 도착한 지 오 분쯤 된 거 같은데요?”
어느새 걸음 속도도 빨라진 것일까? 다행히도 선발대와 큰 시간 차이를 두지는 않았다.
‘아쉽네.’
-됐다. 오늘은 이 정도면 충분해.
서준은 뒤를 바라보며 아쉬움을 삼켰다. 지금은 빨리 걷는 것에 그쳤다. 완전히 발자국을 지우지도 못했다.
‘한 번만 더 하면 가능할 거 같은데.’
-다음에 하자고. 다음에. 뭐든 때가 있는 거야.
‘그래.’
서준은 아쉬움을 참은 채 걸어갈 수밖에 없었다.
한 번만 더 사막을 지나본다면 달릴 수도 있을 거 같은데……. 하며 쓴 침을 삼켰다.
“앞에 뭔가 있습니다. 모두 몸을 낮추세요.”
제일 앞서가며 걷던 모하메드가 말했다.
서준의 일행이 사막을 지난 지 벌써 보름이나 흘렀다. 아마도 괴수를 잡으려 탐험을 한 기간 중 최장 기간일 것이다.
그만큼 호랑이의 서식지는 별의 석상에서 매우 멀리 떨어져 있었다.
-어흥… 어흥….
-캬앙! 캬앙!
-크르응!
호랑이들도 낮은 울음을 토해내기 시작했다. 아무래도 무언가 기척을 느낀 것 같았다.
-동족끼리는 알아보는 거 같은데?
아마도 호랑이의 서식지였다. 우거진 수풀에 계곡도 군데군데 있었다. 군데군데 찍힌 발자국으로 보건대 멧돼지 괴수도 여럿 서식하는 것 같다.
호랑이들이 살기에 딱 좋은 환경이었다.
‘괜히 긴장되네.’
호랑이 괴수는 서준을 긴장케 하기에 충분했다. 맹수의 왕이었다. 그 어떤 동물보다도 강력한 것이 호랑이였다.
그런 호랑이가 괴수로 변했다니 얼마나 늠름하고 멋진 모습일까 상상해보았다.
‘분명 하늘을 날 수도 있을 거야.’
-그건 아닌 거 같은데?
서준이 훈련보다 좋아하는 것이 호랑이였다. 이미 서준의 머릿속엔 늠름한 호랑이 괴수로 가득 들어찼다.
‘말이 통할 수도 있어. 아티팩트 달라면 그냥 주지 않을까? 우리도 호랑이 세 마리나 있는데. 친구끼리 그럴 수도 있잖아?’
-적당히 해라…….
‘알겠어.’
장난은 이 정도면 족했다. 서준도 앞서간 모하메드처럼 몸을 낮추고 기척을 숨기기 시작했다.
이미 서준의 기척을 감추는 능력은 상상을 초월할 정도로 엄청났다.
바로 옆에서 지켜본다고 해도 흐릿하게 보일 정도였다. 거기에 사막에서 흔적을 남기지 않고 걷는 연습을 한 것이 더해졌다.
서준의 몇 발 앞에서 걷던 김비서가 순간 서준이 길을 놓쳐 사라진 줄 알고 뒤를 돌아보았다.
“놀랐습니다. 안 따라오시는 줄 알고.”
“하하, 그 정도는 아니에요.”
멋쩍은 서준이 둘러대었다.
그리고 바로 그때.
-크허어어어어어어어어어엉!
산 전체를 뒤엎는 호랑이의 포효가 들려왔다.
-크와아아앙!
뒤이어 또 다른 호랑이가 울었다. 본디 호랑이는 무리를 짓지 않는 동물이었다.
-크허어어엉!
하지만 적어도 이 숲에는 세 마리 이상의 호랑이가 사는 것은 분명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