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골목약사 백선생-99화 (99/150)

99화.

사고 가속이 발동되는 것도 정말 오랜만의 일이었다.

별에게 배우고 련에게 배우면서 제 의지대로 발동할 수 있게 되었지만 그동안 사용할 일이 없었기에 봉인해 두었던 기술이었다.

혼자 다른 시간을 걷는다는 것은 차원문을 여는 것만큼 고차원의 기술이었다. 당연히 그만큼 에너지의 소모가 컸고 정신력의 소모 역시 상당했다.

해서 정말 중요한 상황이 아니라면 사용하지 않기로 마음을 먹었던 서준이었다.

그럼에도 서준의 원하지 않은 상황에 제멋대로 사고 가속이 발동되었다.

처음부터 서준이 위험할 때 자동발동하던 기술이었다. 해서 사고가 가속되었다는 것은 서준이 위험에 처했다는 것을 뜻했다.

서준은 주위의 시간이 느려지는 순간 온 집중을 다 해 적을 바라보았다. 사고가 가속된 순간 그 어떤 방심도 허용되지 않는다.

-막지 말고 피해!

별이 소리쳤다. 별은 서준의 영혼에 포함되어 있었기에 서준이 사고 가속을 한 순간 별 역시 서준과 같은 시간 속에 살 수 있었다.

서준을 향해 날아오는 괴수의 주먹을 장도리로 마주쳐 막아내려 했던 서준은 별의 판단을 믿고 그대로 몸을 옆으로 날렸다.

아무리 시간이 느려졌다지만 아티팩트의 힘을 그대로 전해 받으며 강해진 거대 원숭이 괴수의 주먹은 호락호락하지 않았다.

-콰앙!

하는 소리와 함께 괴수의 주먹이 서준 뒤편에 있던 지면을 그대로 뚫어버렸다.

“허억, 허억, 허억.”

온몸의 힘을 다 쥐어짜 강제로 몸을 던져 피해낸 서준은 숨을 헐떡이며 겨우 일어설 수 있었다.

안 그래도 사고가속 속에서 움직이는 것은 신체적인 부담이 컸다. 거기에 정말로 온 힘을 다해 몸을 날렸으니 서준의 몸이 비명을 지르는 것도 당연한 일이었다.

‘진짜로 죽을 뻔했다.’

-다행히 속도는 온 힘을 쥐어짜면 피할 수 있을 정도야. 대신 절대로 맞아선 안 돼!

땅에 박힌 괴수의 주먹이 천천히 땅에서 뽑히는 것이 눈에 들어왔다. 그 옆을 바라보자 오세근과 김비서가 이제야 반응했는지 아주 느린 움직임으로 다가오고 있었다.

괴수의 뒤편에선 공중에 떠서 괴수 쪽으로 아주 천천히 날아오는 호랑이들의 모습이 보였다.

그 와중의 괴수의 주먹이 땅에서 모두 뽑혀 나왔고 어느새 괴수의 시선이 다시 서준을 바라보았다.

‘손오공도 아니고 저게 뭐야!’

-손오공이 뭔데!

‘그런 게 있어!’

-집중이나 해!

괴수 이마에 쓰인 관이 꼭 긴고아를 닮았다. 마침 괴수도 원숭이의 모습을 하고 있었고.

물론 서준이 알고 있기로는 긴고아는 손오공의 힘을 제어하기 위한 물건이지 힘을 증폭해 주는 물건은 아니었다.

그럼에도 저 모습이 흡사 손오공을 닮았다. 하늘과도 견줄 수 있는 제천대성, 서준은 마치 그를 상대하는 것과 같은 압박감을 느꼈다.

‘어떡하지? 먼저 들어가야 하나?’

-아니, 끌어들이자. 팔이 긴 만큼 근접전에 취약할 거야. 먼저 공격하길 기다렸다가 피하면서 앞으로 몸을 날려! 그다음에 어떻게든 한 방에 쓰러트려! 두 번은 없어!

별의 말대로였다. 괴수의 힘은 서준이 감당하기 힘든 수준이었다. 아니 감당할 수 없는 수준이었다.

느려진 시간 속에서 괴수를 제외하면 제대로 움직일 수 있는 건 서준뿐이었기에 오세근과 김비서 그리고 호랑이들의 도움을 바랄 수도 없었다.

거대 원숭이 괴수의 양팔이 채찍처럼 휘둘러져 서준에게 내리꽂히고 있었다.

서준의 사고가 가속된 그 순간에도 전혀 느리지 않았다.

-지금이야! 앞으로 뛰어!

서준은 속도를 상승시켜주는 아티팩트를 모두 한 번에 발동시켰다. 지금 서준이 차고 있는 아티팩트 중 신체 속도와 관련된 아티팩트는 총 5개. 그중 2개는 재사용 대기시간이었으니 3개를 중첩한 셈이었다.

느린 시간 속에서 한 줄기 섬광이 쏟아져 나갔다. 서준의 기준으로 본다면 올림픽 100m 신기록과도 비슷한 정도의 평범한 속도였지만 그 밖에 서 있는 오세근과 김비서의 시선으로 본다면 그야말로 빛줄기와 다름없었다.

-한 번이야! 딱 한 번! 끝내버려!

엄청난 속도로 튀어나간 서준은 원숭이 괴수의 타격점에서 벗어났다. 양팔을 채찍처럼 후려친 원숭이 괴수의 팔이 어느덧 교차하였고 그 품 안은 태풍의 눈, 그야말로 완벽한 안전지대였다.

서준은 그대로 더 파고들며 어퍼컷을 하듯 장도리를 아래서 위로 올려쳤다. 둘의 신창 차이 덕분에 나온 완벽한 타격점 그곳은 바로 거대 원숭이 괴수의 고간이었다.

인간과 거의 흡사한 신체 구조를 지녔다. 인간뿐만 아니라 모든 수컷 포유동물의 공통된 약점이기도 했다.

섬광같이 빠른 서준의 몸에서 나오는 엄청난 가속도에 서준의 온 기운이 하나로 뭉쳐서 내는 엄청난 힘이 합쳐졌다.

-콰아아앙!

괴수의 고간에서 엄청난 굉음, 그야말로 천둥소리가 울려 퍼졌다. 그와 동시에 서준의 시간 가속이 멈추었다.

위험이 끝났기에 멈춘 것이 아닌 지속 가능 시간이 모두 지났기에 멈췄을 뿐이다.

-끼에에에에에에에에에엑!

엄청난 고통에 괴수는 고간의 앞뒤를 모두 부여잡고 위아래로 통통 튀기 시작했다.

고통에 의한 몸부림이었지만 괴수의 엄청난 근력은 높은 점프력으로 변환되었다.

계속해서 5m 이상 폴짝폴짝 뛰어대는 괴수에 서준과 그의 일행들은 괴수의 발에 밟히지 않기 위해 피해 다니기 시작했다.

‘젠장! 한 번에 끝냈어야 했는데!’

-끝이다. 이제는 방법이 없어.

단 한 번 있는 기회를 제대로 살리지 못했다. 괴수가 고통에서 벗어나는 순간 다시 공격을 시작해 올 테고 더 이상은 별다른 수가 없었다.

이제 사고 가속조차 사용할 수 없었고 동료들과 힘을 합친다 해도 괴수를 잡아내는 건 무리였다.

-콰앙! 콰앙! 콰앙!

결국 괴수의 발을 피하다가 오세근과 김비서가 튕겨 나갔다. 육중한 몸의 괴수가 한번 올라갔다 내려올 때마다 엄청난 충격이 있었고 그 충격을 견디지 못한 오세근과 김비서가 나가떨어진 것이다.

김비서의 경우는 다행히 넘어지면서 입은 찰과상 정도에 끝이 났지만 오세근은 튕겨 나가면서 바위에 몸을 부딪쳐 그대로 기절했다. 절체절명의 상황이었다.

-끄르르륵.

그리고 어느새 고통을 극복해낸 괴수가 기묘한 소리를 내며 서준을 노려보았다.

지금까지는 영역을 침범한 침입자에 대한 분노 정도에 그쳤다면 지금부터는 자신의 목숨을 위협한 적에 대한 분노였다.

괴수의 눈빛은 지금까지와는 확연히 다르게 날카로워져 있었다.

‘방법이 없을까? 생각 좀 해봐.’

-글쎄다……. 지금은 짐도 별수가 없군.

‘젠장.’

서준을 위협하는 괴수를 본 호랑이들이 짖어대며 괴수에게 몸을 날렸다.

이미 호랑이들의 아티팩트 역시 모두 소진된 상태였기에 큰 기대를 하는 건 무리였다.

-어흥! 캬앙! 크릉!

그럼에도 호랑이들은 있는 힘껏 포효하며 괴수에 목덜미를 향해 몸을 날렸다.

그리고 바로 그 순간 괴수의 오른손이 서준을 향해 쏘아졌다.

-이건 피할 수가…….

호랑이들이 몸을 날려 다가오는 속도보다 괴수의 손이 훨씬 더 빨랐다. 별의 말이 채 끝나기도 전에 괴수의 손은 어느덧 서준의 얼굴 앞까지 다가왔다.

-콰앙!

하는 굉음이 울렸다. 호랑이들은 아직 괴수의 목덜미에 도달하지 못한 채 공중에 떠 있는 상태였다.

괴수의 손은 서준의 얼굴 코앞에 멈추어 섰다. 서준의 방어형 아티팩트가 발동된 것이다.

서준이 최초로 얻어내었던, 그 어떤 공격도 단 한 번은 막아내 주는 아티팩트였다. 그러나 기쁨도 잠시 괴수는 방어막을 손으로 쥐어짜 부숴낸 후 그대로 서준의 목을 틀어잡았다.

-윽!

순식간에 일어난 일이었다. 호랑이들이 아직도 공중에 떠 있는 상태였으니 정말 짧은 순간에 일어난 일이었다.

괴수는 서준을 쉽게 죽이지 않을 거라는 듯 서준의 목을 꽈악 움켜잡은 채 기분 나쁜 미소를 지었다.

숨을 쉴 수 없던 서준은 양손을 괴수의 손 위로 올려 힘을 꽉 주어봤지만 괴수의 손은 벌려지지 않았다.

-캬앙!

어느덧 캬앙이가 괴수의 목덜미를 물었다.

-크릉!

크릉이 역시 괴수의 질긴 목덜미를 물었다.

-어흥!

어흥이 역시 온 힘을 다해 괴수의 목 근육에 이빨을 박았다.

-쿠에에에에에!

괴수는 고통스러워했지만 호랑이에게 조금의 신경조차 주지 않고 소리를 지르며 서준을 노려보았다.

그만큼 서준에게 얻어맞은 고간이 고통스러웠던 것이다.

“으윽!”

-어흥! 캬앙! 크릉!

괴로워하는 서준을 보고 호랑이들이 더 힘을 내 물었지만 괴수의 목은 뜯겨나가지 않았다.

이빨을 박고 있는 게 최선이었다. 그만큼 질기고 강건한 근육이었다.

“백 선생님!”

쓰러졌던 김비서가 일어나 괴수에게 달려들었다. 그러나 그 거리가 너무도 멀었다.

오세근은 아직도 정신을 차리지 못하고 있었다.

게다가 괴수에게 목을 잡힌 서준의 숨 역시 끝까지 차오르고 있었다. 조금만 더 있으면 질식하기 일보 직전이었다.

정말 절체절명의 상황이었다.

-쓰러지면 안 된다! 정신 차리거라!

별이 서준에게 끊임없이 말을 해주지 않았더라면 진작에 기절해도 모자랐다.

-어떻게든 버텨! 버텨서 방법을 생각해내! 포기하는 순간 죽는 거야!

끊어지기 일보 직전이었던 서준의 정신이 별의 말을 듣고 겨우 제자리로 돌아왔다. 하지만 그렇다고 해도 상황이 더 좋아지거나 한 것은 아니었다.

서준은 온 힘을 다해 괴수의 팔을 떼 내려 했다. 괴수의 손에 목이 잡히면서 왼쪽 어깨는 사용할 수 없게 되었다.

그만큼 괴수의 손이 너무나도 컸고 손가락으로 어깨를 완벽히 짓누르고 있었기 때문이다.

-쓰러지면 안 된다! 쓰러지면 안 돼!

서준은 별의 절규를 들으면서 오른팔을 겨우 들어 올렸다.

“으윽!”

겨우 들어 올린 오른팔로 괴수의 엄지손가락을 어떻게든 펴보려고 온 힘을 다해 잡아당겼다.

“흑!”

온 힘을 다한 덕분일까? 다행히 아주 잠깐이지만 괴수의 엄지손가락을 들어 올릴 수 있었다.

덕분에 그 아주 짧은 시간 동안 서준은 호흡할 수 있었다. 상식적으로 불가능한 일이었지만 련의 수련을 견뎌낸 서준이기에 가능한 일이었다.

-좋았어! 잘했다! 잠시나마 시간을 벌었구나! 저놈이 너를 편하게 죽일 생각하지 않은 게 행운이었다! 그동안 어떻게든 방법을 찾아봐라!

별의 희망찬 외침과는 달리 상황이 그렇게 좋지는 않았다. 짧은 시간 온 능력을 활용해 최대한 호흡을 들이마셨다고 해도 한계가 있었다.

그리고 괴수의 엄지손가락은 더 이상 들리지 않았다.

“끄윽.”

서준은 신음소리를 내며 괴수의 엄지손가락을 어떻게든 들어 올리려 애를 써봤다. 그럼에도 어떤 소용도 없었다.

“끄륵!”

-버텨! 버티라고!

이번에는 정말 위험했다. 의식이 거의 끊어지려는 순간 별의 목소리가 울려서 겨우 정신 줄을 잡을 수 있었다.

서준은 마지막 기회에 목숨을 걸어보기로 했다. 어차피 이대로는 끝장이었다. 남은 건 도박 수밖에 남지 않았다.

실패한다면 진정 모든 힘을 소모한 상태였기에 뒤가 없는 방법이었지만 하지 않아도 죽는 수밖에 없었다.

-무슨 짓을 하려는 거냐!

서준의 마음을 읽은 것일까? 별이 소리쳤다.

-남은 기운도 별로 없는데 그런 도박은 무리다! 실패하면 끝장이라고!

하지만 서준의 마음은 이미 굳었다.

괴수의 엄지손가락을 잡고 있는 서준의 팔에서 아주 짙은 녹색의 기운이 피어올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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