98화.
수백 아니 천 마리 이상의 원숭이 떼가 서준의 일행을 둘러싼 채 회전하기 시작했다.
진한 물감을 칠해 놓은 것처럼 아주 새파란 털을 지닌 원숭이 떼가 단체로 회전하기 시작하자 주위는 온통 푸른색으로 물들었다.
긴 팔을 이용해 사족보행을 하는 원숭이들의 움직임은 매우 빨랐다. 서준 일행을 중심으로 두고 회전하는 원숭이 떼는 서서히 그 지름을 좁혀가고 있었다.
-마치 폭풍의 눈 같군.
‘너는 참 속도 편하다.’
-불만이면 너도 영혼 하던가.
그 와중에도 별은 서준에게 장난을 치며 말을 걸었다. 그리고 서준 역시 그 와중에도 침착함을 잃지 않고 받아쳤다.
-내기할까?
‘무슨 내기?’
-5분 안에 다 잡는지 못 잡는지 내기하자.
‘5분은 너무 빠듯한데? 20분은 줘야지.’
-그럼 내기가 안되지. 내기란 건 말이야 힘들면 힘들수록 재미있는 거야. 참고로 짐은 한 번도 내기에서 져본 적이 없다네! 하하하하하하하!
서준과 별이 농담 따먹기를 하는 와중에도 원숭이 폭풍의 지름은 점점 더 좁혀지고 있었다.
“형님, 너무 여유로운 거 아닙니까?”
오세근이 불만을 표하기도 해봤다.
“길드장님 그래도 이 정도는 크게 어렵지 않을 것 같은데요?”
놀랍게도 김비서가 받아쳤다. 김비서 역시 련의 수련으로 인해 자신감이 넘치는 상황, 천 마리의 원숭이 괴수 앞에서도 기죽지 않았다.
“김비서, 깡도 좋아? 대충 세봐도 천 마리도 넘는 것 같은데?”
오세근은 저리 말하면서도 미소를 띠었다. 각성 기간으로 따지면 서준보다도 한참 짧은 오세근이었다. 그러나 그의 강함은 서준이 같은 기간만큼 각성했을 때와 비교할 수 없을 만큼 강했다.
그럴 만도 했다. 그 당시의 서준은 련을 만나지 못했고 오세근은 련을 만났으니까.
오세근은 의지를 모으며 기운을 발산하기 시작했다.
-10분으로 가자.
‘좋아, 10분. 근데 뭘 걸지? 너 영혼 신세라 아무것도 못 걸잖아. 그냥 닥치고 구경이나 하고 있어.’
-하지 마! 그냥!
오세근의 기운이 방출되기 무섭게 서준 역시 합을 맞춰 기세를 끌어올렸다. 그의 오른손에는 역시나 오래전부터 애용하던 장도리가 있었다.
그의 오른손에 서준을 상징하던 두 빛깔의 기운 중 검은색의 기운이 세차게 올라왔다. 이전까지 기운을 운용할 때 스멀스멀 올라오던 것과는 확연히 다른 모습이었다.
기분 나쁠 정도로 짙은 검은색의 기운은 화산이 분출하듯 뿜어져 나오며 오른손을 타고 장도리를 감쌌다.
“가자!”
“예!”
서준과 오세근 그리고 김비서가 각자 다른 방향으로 튀어나갔다. 회전하던 원숭이 괴수들이 중간중간 한두 마리씩 튀어나오며 서준 일행에게 달려들었으나 그대로 양단되며 목숨을 잃었다.
“덤벼 봐! 이놈들아!”
오세근이 자기 키를 훌쩍 넘는 길이를 가진 장창을 휘두르며 달려들었다.
황금왕이라는 것을 자랑하듯 황금색의 강렬한 기운을 뿜어내는 장창이 회전할 때마다 수십 마리의 원숭이 괴수들이 그대로 갈려버렸다.
-끼엑! 끼엑! 끼에에에에엑!
저 뒤에서 심어져 있는 바오바브나무처럼 두꺼운 나무 위에 올라가 그 모습을 지켜보고 있는 거대 원숭이 괴수가 손가락질하며 포효했다.
하지만 그 소름 끼치는 소리는 부하들의 죽음 때문이 아니었다. 서준 일행의 힘을 제대로 빼놓지 못한 데에 대한 화풀이였다.
“조심하십쇼! 저놈 소리 지를 때마다 속이 진창이 되는 것 같아요! 기운으로 귀를 막고 싸우는 게 좋을 것 같습니다!”
역시나 오세근처럼 긴 창을 휘두르며 싸우고 있는 김비서의 말이었다.
김비서에 양 귀에는 푸른색의 막이 쳐 있었다. 당연히 김비서가 의지를 모아 기운으로 만들어둔 막이었다.
어느 정도 효과가 있었는지 다시 표정이 좋아진 김비서는 일 초에 열 번 이상 창을 찔러대면서 앞으로 나아갔다.
그가 한 번의 찌르기를 할 때마다 괴수의 심장이 하나씩 터져나갔다. 그야말로 창신의 재림, 한국판 모하메드의 강림이었다.
-이러다 재들이 다 잡겠는데? 너무 농땡이 피는 거 아냐?
‘나도 열심히 하고 있거든?’
서준 역시 가만히 있지 않았다. 검게 물든 장도리를 휘두르며 원숭이 폭풍을 뚫고 나아갔다.
서준은 한 걸음 나설 때마다 괴수 한 마리씩 착실하게 쓰러트리고 있었다.
-역시 무기를 바꾸는 게 나을 것 같다.
‘그래도 나는 이게 좋아.’
련과 수련하면서 무기 교체에 대한 이야기도 여러 번 해왔다. 물론 서준 정도 수준에 올라섰을 때 무기의 차이로 승패가 갈리는 경우는 드물었다.
모하메드 정도의 상대를 만난다면 모를까 보통의 헌터들은 서준의 옷깃조차 스치지 못할 테니까.
그러나 서준의 무기, 장도리의 최대약점은 다른 곳에 있었다. 그 길이가 무척이나 짧다는 것이었다.
-이거 봐, 언제 다 잡을래? 한세월 걸리겠어. 무기는 두껍고 긴 게 최고라니까? 그냥 단단한 쇠로 봉 하나 만들어서 들고 다녀.
‘그걸 어떻게 들고 다녀, 쪽팔리게.’
지금처럼 많은 수의 적을 상대할 때 장도리의 약점이 드러났다. 피격 범위가 매우 작고 사정거리 또한 매우 짧아서 한 번에 많은 적을 쓰러트리기에는 부적절했던 것이다.
그럼에도 서준이 이 무기를 고집한 이유가 있었다. 어느 정도 적응이 되었다 하더라도 서준은 타임 워프로 인해 과거에서 온 사람이었다.
현재를 살고 있는 수많은 헌터들처럼 현대의 감각에 완전히 동화되지 못했다. 서준에게는 무기를 차고 길을 나다니는 것이 아직까지 매우 창피한 일이었다.
장도리처럼 작은 무기야 옷 속이나 가방 속에 숨길 수 있으니 상관없었으나 다른 헌터들처럼 검이나 창 심지어 철퇴 등의 무기를 차고 다닐 수는 없었다.
그것은 서준의 기준으로는 미친 짓이었다.
‘남들 한 번 움직일 때 두 번 움직이면 그만이야. 이제는 그럴만한 능력도 되고.’
-그래, 너 잘났다. 에휴.
별의 한숨을 뒤로한 채 서준은 기운을 더 끌어올려 빠르게 움직이기 시작했다. 그러면서도 서준의 왼손 새끼손가락에 끼워져 있는 반지가 빛나기 시작했다.
서준의 속도를 빠르게 해주는 아티팩트였다. 무기의 하자는 아티팩트로 매우면 그만이었다. 서준은 그럴 만큼 많은 아티팩트를 가지고 있었으니까.
“형님 이쪽은 대충 정리됐습니다!”
“여기도 정리됐습니다!”
오세근과 김비서가 소리쳤다. 과연 다수를 상대할 때에는 저 둘이 서준보다는 효율적이었다.
“길은 제가 뚫을 테니 형님은 저놈 잡으세요!”
오세근이 말하면서 자세를 잡았다. 김비서는 오세근 주위로 괴수들이 다가가지 못하도록 계속해서 창을 휘둘렀다.
오세근의 창이 옆구리에 끼워졌고 창을 쥐고 있는 오른팔의 근육은 부풀어 올랐다.
오세근의 창이 세상의 모든 황금을 가져다 놓은 것처럼 반짝 빛났고 그대로 앞으로 밀어졌다.
-콰앙!
하는 굉음과 함께 앞을 막고 있던 모든 것이 사라졌다. 원숭이 괴수들도 거대한 나무들도 절대 부서지지 않을 것 같은 바위들도 모두 사라졌다.
그리고 그 앞에는 신장이 삼 미터는 될법한 원숭이 괴수가 있었다.
“고마워! 먼저 갈게!”
“네! 이쪽은 저희 둘한테 맡기세요!”
서준은 빠르게 앞으로 튀어나갔다. 아티팩트의 효과가 아직 남아있었기에 서준은 그 누구보다도 빠르게 달릴 수 있었다.
-끼에에에에에에에에엑!
거대 원숭이 괴수는 갑작스레 다가온 서준을 보고 놀랐는지 괴성을 지르며 두 팔을 마구 휘두르기 시작했다.
팔 한쪽에 이 미터를 훌쩍 뛰어넘는 긴 팔이었다. 채찍처럼 휘둘러지는 두 팔은 주위의 모든 지형지물을 부수며 서준 쪽으로 쏘아 보냈다.
-위험해! 집중!
‘말 안 해도 알고 있어!’
거대한 바윗덩이, 원숭이 괴수의 사체들, 나뭇조각들이 서준을 향해 포탄처럼 쏘아졌다.
두 달 전의 서준이었다면 하나도 제대로 피해내지 못하고 그대로 끝이 났을 것이다. 그러나 지금의 서준은 달랐다.
날라오는 파편들을 장도리로 하나하나씩 여유롭게 쳐내면서 원숭이 괴수를 향해 쏘아나갔다.
파편들을 쳐내는 순간에도 서준의 속도는 하나도 줄지 않았다.
‘어때? 이쯤이면 쓸만하지?’
-어, 험……. 그 정도면 봐줄 만은 하구나. 그래도 아직 한참 멀었다. 짐이 젊었을 적엔 말이야…….
서준은 별의 말을 무시한 채 거대 원숭이 괴수 앞에 두 발로 섰다. 안 그래도 큰 키인 데다가 높은 나무 위에 있어서 서준이 올려다봐야 하는 형국이었다.
거대 원숭이 괴수가 서준을 내려보고 있는 표정에는 끓어오르는 분노가 모두 담겨 있었다.
거대 원숭이 괴수는 표정을 전혀 숨기지 않았다.
“내려와서 덤벼, 어디 원숭이 주제에 인간을 내려다봐?”
서준이 원숭이 괴수를 도발했다. 물론 진짜 알아들을 거라고 생각한 것은 아니었다. 하지만 효과는 만점이었다.
-끼에에에에에에에에에에엑!
서준의 도발을 알아듣고 정말 폭발한 것인지 원숭이 괴수는 온 세상이 흔들릴듯한 포효를 하면서 나무 위에서 뛰어내렸다.
삼 미터의 거대한 체구가 높은 곳에서 뛰어내리자 순간 서준의 주위로 온통 그림자가 지기 시작했다.
거대 원숭이 괴수는 망치질을 할 것처럼 두 손을 깍지낀 채로 머리 뒤로 넘기며 서준에게 다가왔다.
-콰아아아아앙!
하며 서준의 장도리와 거대 원숭이 괴수의 두 손이 맞부딪혔다. 진짜 망치와 괴수의 손으로 만들어진 망치가 부딪치자 엄청난 충격파가 일어나며 서 있는 모든 동물들을 쓰러트렸다.
“크윽!”
“형님! 적당히 하십쇼!”
그 충격파 속에서 서 있을 수 있는 것은 오세근과 김비서뿐이었다. 두 사람이 붙잡아 두고 있던 수백의 원숭이 괴수들은 충격파를 견디지 못하고 그대로 몸이 터져 죽어버리고 말았다.
-끼에에엑!
거대 원숭이 괴수도 공격의 여파가 남아있는지 괴로운 몸부림을 치고 있었다. 그리고 바로 그때 세 개의 빛줄기가 원숭이 괴수의 목으로 쏘아졌다.
-어흥! 캬앙! 크릉!
바로 지금까지 숨어있었던 서준의 호랑이들이었다. 서준이 기회를 만들어주기를 엿보다가 거대 원숭이 괴수가 충격으로 괴로워하자 그대로 달려들어 괴수의 목덜미를 물어뜯은 것이다.
“왜? 일대일이 아니라서 불만이야? 너도 원숭이 새끼들 천 마리나 데려왔잖아.”
입에서 피를 뿜으면서도 서준을 원망스러운 표정으로 바라보던 원숭이 괴수에게 서준이 말했다.
원숭이 괴수는 그 말을 알아듣기라도 한 것처럼 그대로 한쪽 무릎을 꿇었다.
슬슬 힘이 다 된 것이다.
‘저게 네 영혼이지?’
-아마도 그럴 거다. 짐이 기억이 잘…….
‘어휴 이제는 지 영혼도 못 알아보네. 이걸 어디에다 써먹어.’
서준은 한쪽 무릎을 꿇고 애처롭게 버티고 있는 원숭이 괴수의 이마를 바라보았다.
그 체고가 워낙 높았기 때문에 무릎을 꿇고 있음에도 서준이 올려다 봐야 했다.
그리고 서준이 올려다보고 있는 그곳에는 월계관을 닮은 액세서리가 있었다. 정말 월계수 잎으로 만든 것은 아닌 것 같고 그 모양만 비슷하다는 이야기다.
“그래, 얘들아 이제 끝내자.”
-어흥! 캬앙! 크릉!
서준의 말에 호랑이들이 한번 포효하며 이빨을 더욱 세게 물었다.
그리고 바로 그 순간, 거대 원숭이 괴수가 이마에 쓰고 있던 관에서 강력한 빛이 흘러나왔다.
“조심해!”
서준이 반응하며 반사적으로 소리침과 동시에 서준의 시간이 조금씩 느려지기 시작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