97화.
“어디 보자…. 여기가 좋겠군.”
남자는 약국을 돌아보다가 문을 열고 마당으로 나갔다. 이윽고 마당도 슬쩍 살펴보더니 호랑이들이 자주 애용하던 널찍한 바위 위에 걸터앉았다.
“뭣들 하는 건가? 어서 나오지 않고.”
남자는 어안이 벙벙해 그 광경을 지켜보던 서준 일행에게 말했다. 조금 전까지의 살기는 어디로 감춰뒀는지 모두 사라져버렸고 어느새 친근한 느낌까지 비추고 있었다.
남자는 서준 일행에게 살랑살랑 손짓하며 웃음을 보이고 있었다.
“지금 뭐 하자는 거죠?”
지금껏 공손하게 남자를 대했던 서준이지만 저도 모르게 강한 말이 튀어나갔다.
그럴 법도 한 게 남의 집에 찾아와서 죽일 듯 행세하던 놈이 어느덧 친근한 척 굴고 있었다.
서준은 매우 혼란스러웠다.
“왜 그렇게 날을 세우는가? 내가 너희를 죽인다고 했어? 고문을 한다 했어?”
남자는 여전히 헤실헤실 웃으며 말했다. 하지만 서준은 오히려 그 미소가 너무 무서웠다.
온몸에 닭살이 돋을 정도로 소름 끼치는 미소였다.
“뭘 하시려는 건지 이야기해줄 수 없습니까?”
서준은 다시 태도를 굽히며 물었다. 주도권을 쥐고 있는 것이 남자였으니 어쩔 수 없었다.
지금 잠시 웅크리더라도 나중에 모두 갚아주면 될 일이다. 잠시 숙이는 것 정도야 어렵지 않았다.
두려운 것은 지금 저자세로 나서는 것보다 앞으로 평생 숙이고 살아가는 것이었다. 잠시간의 치욕 따위 감내할 수 있었다.
“이해력이 많이 달리는군. 앞으로 고생길이 훤하겠어.”
남자는 의미심장한 표정으로 서준을 바라보더니 다시 말했다.
“내가 너희들을 도와주겠다는 이야기다. 미래로부터의 침공? 내가 막을 수 있게 도와주겠다는 이야기다. 강력한 괴수들? 너희가 그들을 잡을 수 있도록 내가 만들어 주겠다는 이야기다.”
남자의 말을 듣고 있는 서준의 얼굴에 화색이 돋았다. 표정 관리를 할 정신도 없었다.
서준이 그토록 바라고 있던 말이었다. 오세근과 김비서도 훌륭한 조력자였고 최고의 조력자였다.
그러나 저 남자가 서준을 돕는다면 그와 비교할 수 없을 정도로 일이 수월해진다.
그런데 그 남자의 입에서 도와주겠다는 말이 나왔다. 서준은 반색하며 물었다.
“정말이십니까? 어떻게 도와주시려는 거죠? 지금 바로 건너가서 괴수들을 잡는 건 어떻습니까?”
흥분한 서준이 따발총처럼 말을 쏟아내자 남자가 서준을 진정시키며 답했다.
“그건 힘들겠어.”
“왜죠?”
서준이 되묻자 남자가 이어서 말했다.
“내가 돌아간다면 놈들이 나를 추격해 올 게 뻔하다. 석 달이랬나? 아직 시간이 흘러도 한참은 더 흘러야 해.”
“놈들이라고요? 그게 누구죠?”
“아마도 이 지구라는 세계를 공격하는 놈들과 한패이지 않을까 싶은데. 괴수들에게 아티팩트를 나눠준 게 놈들이었으니 말이야.”
남자의 이야기는 충격적이었다. 별의 영혼을 괴수들에게 나눠준 집단을 남자가 알고 있다는 것도 놀라운 사실이었으나 남자가 그들과 적대적이라는 사실이 더욱 놀라웠다.
“자세히 이야기해주실 수는 없나요?”
그러나 남자가 말한 정보만으로는 더 이상 추측해내는 것은 불가능했다. 해서 서준은 되물었다.
“아니, 좀 더 확실해지면 말해주도록 하지. 하나 확실한 것은 아티팩트를 고의로 괴수에게 나눠준 집단이 있다는 것, 그리고 나는 그들에게서 벗어나고 싶었다는 것, 이 두 가지다.”
“그렇다면 당신이 그 집단에 속해 계셨다는 건가요?”
“그래. 해서 내가 나의 세계로 돌아간다면 곧장 추격기가 울릴 테고 놈들이 나를 잡으러 올 거다. 시간이 더 흐른다면 모를까 벌써 돌아갈 순 없어.”
남자는 굳은 표정으로 서준에게 이야기해주었다.
이 남자는 추적 마법이 걸린 채로 그들의 명을 수행하며 살아왔다. 요즘 말로 표현해보자면 심부름센터 혹은 청부업자 정도 되는 일을 해온 것이다.
거대 멧돼지 괴수를 사냥하던 이유도 통제를 벗어난 괴수에게서 아티팩트를 뺏어낸 후 다른 괴수에게 넘겨주기 위함이었다고 했다.
“흐흐흐, 아티팩트가 몇 개 사라졌다고 광분하던 놈들 표정이 아직도 지워지질 않는데 이후 내가 깽판을 쳤을 때 미쳐 날뛸 놈들의 모습이 벌써 기대가 되는구나.”
남자는 행복한 상상을 하는 듯 기분 좋은 웃음을 지었다. 그러나 서준에게는 그 모습이 소름 끼칠 정도로 기분이 나빴다.
하지만 내색할 수는 없었다.
“직접 가실 수는 없다고 하셨습니다. 그러면 저희를 강하게 만드시겠다는 말씀이십니까?”
서준이 역겨움을 참아내고 남자에게 물었다.
“그래, 별로 어려운 것도 아니다. 본래 우리 부대원들도 모두 내가 길러냈다. 자질이 영 없는 것은 아닌 거 같고… 혼자서 능히 돼지 새끼를 잡을 정도로는 내가 만들어 주지.”
서준의 예상이 맞았다. 남자는 서준과 오세근 그리고 김비서의 스승을 자처하며 나섰다.
“아, 그전에 드릴 말씀이 있습니다.”
서준은 반신반의하면서도 받아들일 수밖에 없었다. 만약 남자의 말이 진실이었다면 그와 힘을 합치면 그만이었고 거짓이었다면 기회를 엿보면 그만이었다.
단지 지금 이 순간만 숙일 뿐이었다.
“뭐지?”
“지금 당신께서 계시던 본래의 세계로 돌아가도 그리 오랜 시간이 흐르지는 않았을 겁니다.”
“그게 무슨 소리지?”
“석 달이란 시간은 당신이 시간을 헤맸기에 흘렀을 뿐입니다. 아마 시간 흐름이 다른 세계를 지나왔겠지요. 하지만 이 세계와 당신의 세계는 딱 100배의 차이를 보입니다. 저는 이곳으로 돌아온 지 한 시간도 채 지나지 않았고요.”
서준은 이어서 시간 괴리에 대해 다시 한번 자세하게 설명해주었다. 어차피 이미 서준의 능력을 대부분 파악하고 있던 남자였다.
시간이 흐름에 따라 남자도 사실을 알아챌 게 분명했다. 신뢰감을 쌓고 기회를 엿보기 위해서는 미리 말해두는 것이 훨씬 나았다.
“그렇군. 뭐, 상관은 없다. 이곳에서 한 달만 버텨도 오 년이 넘게 흐르는 건 맞잖아? 어차피 시간을 보내기로 결정한 이상 달라질 건 없다. 나는 긴 시간이 필요할 뿐이니까.”
남자는 대수롭지 않게 받아쳤다. 사실 남자에게 중요한 건 고작 석 달이 아니었으니까.
남자에게 필요한 건 남자를 부리던 집단이 남자를 잊게 할 정도의 긴 시간, 십 년 이상의 긴 시간이었다.
“그럼 바로 시작하도록 하지. 나는 급할 게 없지만 너희는 꽤나 급한 것 같으니까.”
“네.”
“내 이름은 련이다. 좋은 첫 만남은 아니었지만 그래도 스승이니까 이름 정도는 기억하도록.”
“네.”
서준과 오세근 그리고 김비서가 답했다. 그렇게 이 셋은 새로운 스승을 맞이하게 되었다.
하지만 서준은 이 일이 잘된 것인지 그렇지 않은 것인지 아직까지는 제대로 파악하지 못했다.
지금껏 서준은 두 명에게 전투를 배웠다. 첫 번째는 GOTY 참여 전 창천 길드에서였고 두 번째로는 별에게 배웠다.
두 명의 스승을 둔 셈이었다. 여기서 다른 스승이 생긴다고 눈에 확 띌 정도의 발전이 있을 거라고는 보기 힘들었다.
그러나 서준의 예상은 완전하게 틀려먹었다.
창천 길드에서의 훈련은 단순히 육체적인 훈련에 그쳤다. 그도 그럴 것이 훈련 교관이었던 전창진 역시 지구의 평범한 초인에 불가했고 의지와 기운을 다루는 법 따위는 알지 못했다.
두 번째 스승이었던 별의 경우는 의지를 다루는 법을 알려주었다. 하지만 그는 육체도 없었고 기억의 대부분을 소실한 상태였다.
고도의 수련은 시킬 수는 없는 입장이었다.
그러나 이 남자, 본인의 이름을 련이라고 밝힌 이 남자는 달랐다.
련은 의지를 원숙히 다룰 줄도 알았고 기운을 다양하게 활용할 수도 있었다. 게다가 육체도 존재했으며 무기술의 달인이었다.
별이 이론으로만 설명해주던 기술들을 련은 실제로 보여주며 서준을 이끌었다. 말로만 전해 듣던 기운의 운행을 스스로 보여주고 서준이 잘 이끌 수 있도록 도와주었다.
지금껏 오랜 기간 홀로 수련해왔던 서준이었다. 그런데 련에게서 배운 일주일이 그보다 알차고 훌륭했다.
그렇게 훈련은 계속되었고.
“좋아, 이쯤이면… 충분한 것 같군. 자질은 썩 뛰어나진 않지만 이상할 정도로 많은 기운을 지녔어. 덕분에 수월했다.”
그렇게 두 달간의 긴 훈련이 끝났다. 서준과 오세근 김비서는 최운혁이나 모하메드가 온다 해도 밀리지 정도로 강해졌다고 스스로 느꼈다.
뭐 실제로는 붙어봐야 알겠지만 그들 스스로 느끼기에도 그들은 상당히 강해졌다.
“기운이 이상할 정도로 강한 건 각성 현상 때문일까요? 아니면 꿀닭을 꾸준히 먹었기 때문일까요?”
서준이 련에게 물었다. 어느덧 두 달이라는 시간이 흘렀다. 당연히 그 시간 동안 이들은 더욱더 친밀해질 수 있었고 신뢰감이라는 것도 생겼다.
복수의 기회만 꿈꾸던 서준도 련을 진정한 스승으로 받아들였고 련 역시 서준을 제자라고 생각하기 시작했다.
오세근과 김비서도 마찬가지였다.
“아무래도 각성 때문인 것 같다. 너희뿐만이 아니라 지구의 각성자들은 수준에 비해 이상할 정도로 고강한 기운을 가지고 있더구나. 어째서 그런 현상이 일어났는지는 알 수 없지만 너에게는 행운이나 다름없다.”
그랬다. 애초에 서준의 능력 자체가 서준이 사용할 수 없을 정도의 고도의 신비였다. 련조차도 차원문을 여닫을 수는 없었다.
서준뿐만 아니었다. 지구의 각성자들 중에는 특별한 능력을 부리는 자들도 많았고 지닌 실력에 비해 고강한 기운을 지닌 자들도 많았다.
모두 이해할 수 없는 기적이었다.
“정말 같이 가지 않으실 겁니까? 두 달이면 꽤 긴 시간입니다. 그리울 법도 하실 텐데요?”
련이 지구로 온 지 벌써 두 달이나 흘렀다. 집을 떠나 두 달간 해외여행을 해도 고향이 그리운 법이었다.
그럼에도 련의 대답은 단호했다.
“아니, 나는 돌아가지 않는다. 그쪽 시간으로 고작해야 십육 년이다. 내가 돌아가는 순간 그놈들의 추격이 시작될 거야. 그럼 모든 일이 수포로 돌아간다.”
련은 그 집단을 매우 두려워하는 듯했다. 서준의 수준이 아직 미천하여 아는 것이 독이 된다고 아직까지 자세한 얘기를 해주지 않는 련이었다.
그만큼 강력한 집단이었다. 만약 련이 함께 돌아간다면 그들이 눈치를 챌 확률이 높았고 그렇다면 지금껏 준비한 모든 일은 수포로 돌아간다.
“너희가 가진 기운은 너희들이 상상하는 것보다 엄청나다. 조금만 더 배운다면 나를 넘어서 그들을 상대할 수 있을 거야. 그때가 되면 모든 것을 이야기해주겠다. 지금은… 너희들끼리 가거라.”
련은 단호했다. 하지만 이렇게 말하면서도 련의 표정에는 근심이 가득했다. 두 달이라는 시간 동안 서준 일행을 진심으로 제자로 받아들인 것이다.
“조심히 가거라.”
“네.”
련의 근심 걱정에 서준과 오세근 김비서는 힘차게 답하며 게이트를 넘었다. 련의 걱정은 련의 걱정이었을 뿐이다.
서준 일행은 이미 자신감으로 가득 차 있었다. 지난번의 거대 멧돼지 괴수가 나타난다고 하여도 충분히 상대해 낼 자신이 있었다.
“가자고.”
“좋습니다! 형님!”
“갑시다!”
그렇게 게이트를 넘은 서준 일행은 단숨에 쥐와 개의 모습을 한 괴수를 쓰러트렸다.
쥐와 개의 모습을 한 괴수를 상대할 때는 정말 손쉬웠다. 강하고 날렵한 괴수들이었지만 성장한 서준 일행을 당해낼 수는 없었다.
“이번에는 집중 좀 해야겠는데요? 이전처럼 호락호락하지는 않을 것 같습니다. 형님!”
“그래, 긴장하자.”
서준 일행의 앞을 파란 털에 아주 긴 팔을 지닌 원숭이들이 가로막았다. 그 수가 어림잡아도 천 마리는 넘었다.
-꾸에에에에에에에에!
그리고 그 뒤에는 거인이라는 말로밖에 표현이 안 되는 거대한 원숭이 괴수가 포효하며 서준 일행을 노려보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