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골목약사 백선생-95화 (95/150)

95화.

검을 들고 허공에서 튀어나온 남자와 서준의 눈이 마주쳤다.

서준의 온몸에서 식은땀이 비처럼 흘러내리기 시작했다. 이런 느낌은 처음이었다.

아니 굳이 비교해보자면 이전에 악룡을 만났을 때나 느껴봤던 그런 감정이었다. 압도적인 수준 차이를 가진 적을 마주한 느낌이었다.

“카록레릭루?”

남자의 입에서 알 수 없는 말이 튀어나왔다. 다행히도 무작정 공격할 생각은 없어 보였다.

남자는 서준에게 말을 거는 동시에 고래를 좌우로 돌려보며 약국을 살펴보았다.

표정으로 짐작해 보건대 약간은 신기하다고 느끼는 모양이었다. 그럴 만도 했다. 다른 차원의 문명을 처음 접한 순간이었으니까.

“카록레릭루?”

서준이 아무 대답도 하지 않자 남자는 다시 한번 물었다. 하지만 이전과는 달리 그 말투가 조금 더 사나워졌다.

그리고 그렇게 느끼는 게 서준 혼자만의 감정은 아니었는지 오세근과 김비서의 몸에도 식은땀이 줄줄 흐르고 있었다.

‘어떻게 뭘 좀 알아듣겠어?’

서준은 곧장 별에게 도움을 청했다. 별과 같은 차원의 사람이니 별이라면 알아들을 수 있지 않을까? 하는 기대였다.

이전 작은 부락의 사람들을 만났을 때는 그들의 의사소통 체계가 매우 저급했기에 어쩔 수 없었지만 지금은 다르다.

눈앞의 사람은 완벽한 언어를 구사하고 있었다.

-아니, 전혀 모르겠다. 아무래도 짐이 저놈들은 쓰던 말과는 다른 말을 쓰는 듯하구나. 미개한 놈들…….

하지만 소용없었다. 믿고 있던 유일한 희망인 별마저 저자의 말을 알아들을 수 없었다.

시간의 흐름 때문이었을까? 다른 언어를 사용하는 국가의 사람이었을까? 하는 건 알 수 없었지만 앞으로 별의 통역을 믿고 행동해선 안 된다는 것만은 확실해졌다.

“어쩌죠. 형님”

“글쎄다…. 나도 별다른 방법이 없는데.”

“저희 길드에 통역 아티팩트가 있긴 있는데…. 가져올 수만 있다면 좋겠네요.”

“그러게요. 그 전에 다 죽겠죠? 아마도?”

아티팩트 중에는 통역 기능을 지닌 아티팩트 역시 존재했다. GOTY를 비롯한 전 세계의 사람들이 모이는 행사에서도 자주 사용하는 아티팩트였다.

어떤 원리인지는 그 누구도 알 수 없었다. 아티팩트란 물건이 원래 그랬다. 단지 작동시켜놓으면 에너지의 공급이 끊길 때까지 범위 안에서 흘러나오는 모든 언어를 통역했다.

해서 에너지 공급만 끊지 않는다면 24시간이라는 재사용 대기시간이 무색할 정도로 무한히 사용할 수 있었다.

통역 아티팩트는 듣는 자가 알아들을 수 있는 언어로 자동으로 변화해서 들려주었다. 심지어 동물들의 언어 역시 완벽하게 통역해주었다.

물론 이처럼 엄청난 능력을 지닌 물건이었지만 동시 통역사가 존재할 때는 뒷전으로 밀려나기도 했다. 그 대여료가 엄청나기 때문이다.

하지만 역시 유명 길드다웠다. 통역 아티팩트를 대여한 것이 아니라 온전히 소유하고 있었다.

물론 지금은 아무짝에도 쓸모없었다.

“카르록레이루코스!”

허공을 찢고 나온 검을 들고 있는 남자가 무언가 알아차린 듯하며 말했다.

“아무래도 저분도 알아채신 거 같죠?”

“그렇지…. 뭐, 우리가 대화하는 거 들었으면 말이 다르다는 거 정도는 알겠지…….”

남자도 사용하고 있는 언어가 다르다는 것을 알아챘는지 대답하지 않고 머뭇거리던 서준을 향해 쏟아내던 살기를 걷어내었다.

온몸에 비 오듯 땀을 쏟아내던 서준의 일행은 그제서야 제 호흡을 하며 정신을 차릴 수 있었다.

그동안에는 살기에 짓눌려 호흡조차 힘들었기에 서준의 일행은 살기가 거둬지자마자 가쁜 숨을 내쉬었다.

“쿠탓이랏타스......”

남자는 고민을 하듯 중얼거리며 약국 안을 서성였다. 말이 통하지 않으니 일단은 새로운 문명을 접해보려는 생각처럼 보였다.

그는 서준의 책상 서랍도 열어보고 찬장도 열어보는 듯 거리낌 없이 행동했다.

-안 막고 구경만 할 거냐? 저쪽에 아티팩트 모아놓은 곳도 있는데?

별의 말대로였다. 약국 입구 쪽은 그 누가 들여다봐도 별 상관없었다. 약초 몇 개나 그릇과 접시 몇 개가 전부였다.

물론 비싼 물건들이었지만 약초 팔이로 짭짤한 수입을 얻은 서준에게는 대수롭지 않은 물건들이었다.

하지만 안쪽에 금고는 달랐다. 그곳에는 서준이 직접 착용하지 않고 모아두었던 아티팩트가 전부 담겨있었다.

그 효과가 서준과는 어울리지 않거나 아직 밝혀내지 못한 아티팩트들이었다. 하지만 그 가치는 말로 따져볼 수 없을 정도로 귀했다.

‘나도 말리고 싶다…….’

그러나 어쩌겠는가. 약자가 강자를 막아설 순 없는 노릇이었다. 서준은 남자가 금고 앞에 서는 것을 지켜볼 수밖에 없었다.

“로쿠?”

남자는 금고를 열어보려다 금고가 잠겨있다는 것을 깨달았다. 그리고 잠시 고민하는 듯하더니 금고를 향해 검을 내리쳤다.

“앗!”

서준 일행 모두가 놀라며 소리쳤다. 그런데 신기하게도 금고를 베어 나간 검과 금고의 충돌음이 전혀 들리지 않았다.

금고는 남자를 환영한다는 듯이 스르르 문을 열며 제 속살을 그대로 보여주었다.

남자는 단 일검으로 금고의 잠금장치만을 제거해낸 것이다. 서준의 눈으로도 쫓을 수 없는 그야말로 신기였다.

“포룰이깄쿤!”

남자는 금고 속 아티팩트들을 바라보며 탄성을 질렀다.

아무래도 최초의 아티팩트였던 별의 영혼이 등장한 이후 그의 세계에서도 아티팩트란 것이 나타나기 시작했고 그곳에서도 아티팩트란 것이 귀한 물건일 테니 당연한 반응이었다.

남자는 그중 제일 안쪽에 놓여있던 아티팩트를 찾고 있었다는 듯이 단숨에 집어 들었다. 그 어떤 망설임도 머뭇거림도 없었다.

남자의 손끝에서 아티팩트를 향해서 엄청난 양의 기운이 흘러 들어갔다. 도대체 뭔 짓을 하려고 아티팩트 하나에 저렇게 많은 양의 기운을 주입했을까? 싶을 찰나 아티팩트가 번쩍였다.

“통역 마도구를 가지고 있으면서 왜 사용하지 않았지?”

남자가 서준을 바라보며 물었다.

“…….”

당황한 서준은 아무 대답도 하지 못했다. 사용 용도를 몰라서 처박아 두었던 아티팩트가 통역 기능을 지니고 있을 줄은 꿈에도 몰랐다.

아주 비싼 가격에 심지어 판매도 아닌 대여를 할 수 있는 아티팩트였다. 그런 물건이 손에 들어왔음에도 서준은 전혀 기쁜 표정을 보이지 못했다.

“몰랐어요…….”

남자는 서준을 향해 거리낌 없이 반말을 했지만 서준은 공손히 답했다. 왠지 그래야만 할 것 같았다.

“넘어가 주지. 그나저나 신기한 능력을 지니고 있더구나.”

“어떤 능력을 말씀하시는 거죠?”

서준이 전혀 모르겠다는 듯이 되묻자 남자는 재미있다는 듯이 웃으며 답했다.

“차원 이동 능력을 사용했지 않았나? 쉽게 사용할 수 있는 능력이 아닐 텐데……. 어떻게 고작 그 수준으로 그 신비의 힘을 사용한 거지?”

잠시 말을 멈춘 남자는 서준의 수준을 가늠해보는 듯이 자세히 살펴보다가 말했다.

역시나 남자가 느끼기에는 서준의 수준은 형편없었다. 본인 수하의 제일 약한 놈보다 약한 수준이었으니까.

그런 서준이 차원 이동 능력을 사용하는 게 신비하다는 듯이 보았다.

“어찌 되었건 그쪽도 사용할 수 있는 능력 아닌가요? 이렇게 저희를 따라오신 거 보면…. 그렇게 희귀한 능력은 아닌 것 같은데?”

-그럼! 그럼! 짐 역시 쉽게 사용할 수 있던 기술이다!

서준의 말에 별이 맞장구 하듯 소리쳤다. 물론 별이 그런 능력을 사용한 것을 아무도 본 적도 없었고 증거도 없었다.

“하하하하! 나를 자네와 같은 수준으로 놓고 비교하다니 재미있구나!”

남자는 서준의 말에도 기분이 나쁘지 않은 듯 웃으며 말했다.

“그리고 나는 너처럼 그런 고차원의 기술을 사용한 게 아니야.”

“그럼 여기엔 어떻게 온 거죠?”

“네 기술의 흔적을 쫓아왔지.”

“네?”

남자는 놀란 서준을 뒤로한 채 계속해서 설명해주었다.

자신의 기술, 비법 따위는 처음 본 사람에게도 설명해주는 것 그게 바로 정체 모를 이 남자의 성격이었다. 그만큼 자신감이 넘친다는 거겠지.

“네가 열어놓은 차원의 틈을 가르고 찢어서 쫓아왔다. 고작 나 정도의 실력으로 차원문을 열어젖힐 수는 없는 노릇이지. 네가 남긴 흔적이 있기에 가능한 일이었다. 참…. 멀리도 왔더구나. 쫓아오는 데 무려 석 달이나 걸렸으니.”

“석 달이요?”

서준이 저자를 피해 약국으로 도망친 후 남자가 다시 나타나기까지 약 일 분여의 시간이 흘렀다.

시간 괴리가 백 배라고 해도 말이 되지 않는 수치였다. 아무래도 차원을 쫓아오는 길에는 시간이 다른 비율로 흐르는 듯했다.

“왜 그리 놀라지?”

“저희가 넘어온 지 고작 일 분이 흘렀을 뿐이거든요.”

서준은 남자에게 시간 괴리에 대해 자세히 이야기해주었다. 어차피 차원을 가르고 쫓아올 정도의 사내에게 숨겨보려 해봤자 금세 들통날 게 뻔했다.

차라리 진솔하게 말하며 신뢰를 쌓는 게 나았다.

“흠…. 그렇게 되었군. 그렇다면 저곳에선 이미 내가 실종상태가 되고도 남을 시간이 흘렀겠구나.”

남자는 무언가를 골똘히 생각하며 혼잣말을 했다. 하지만 남자의 예상은 틀렸다.

남자는 서준의 흔적을 쫓아오며 다른 시간의 흐름을 타고 왔기에 석 달이라는 시간을 보냈을 뿐이다.

서준과 건너 세계의 시간 괴리는 여전히 백 배의 차이로 유지되고 있었다. 남자가 지금 돌아가도 고작 몇 시간이 흘렀을 뿐이다.

“맞아요. 더 큰 일 생기기 전에 돌아가시는 게 어떨까요? 부하분들도 그렇고 가족분들도 걱정하실 겁니다.”

옆에 있던 김비서가 거들며 말했다. 우선은 이 남자를 돌려보내는 것이 중요했다.

저 남자가 마음을 바꿔 검을 휘두른다면 약국 내에 있는 세 사람뿐만 아니라 인류 전체가 위험했다.

서준과 김비서는 힘을 합쳐 남자를 설득하려 애썼다.

“꼭 나를 돌려보내야겠다는 것처럼 말하는군. 섭섭한데?”

남자가 싱긋 웃으며 말했다. 서준의 속셈을 이미 모두 파악한 것처럼 자신만만한 얼굴이었다.

“하지만 나는 돌아갈 생각이 없는데?”

“네?”

하지만 남자의 입에서 나온 말은 서준 일행의 기대감을 무너트리기에 충분했다.

남자는 마치 지구에 눌러앉고 싶다는 듯이 말하며 약국 중앙에 있는 소파에 몸을 기댔다.

“흐음, 좋구나…. 이렇게 푹신푹신한 의자라니. 훌륭하구나!”

푹신한 소파에 온몸을 맡긴 남자는 감탄하듯이 말했다. 그러면서도 약국을 둘러보며 주위를 파악하는 것을 잊지 않았다.

“실력과는 전혀 어울리지 않는 기술에 강력한 수호수까지 재미있구나! 하하하하!”

남자는 호랑이들을 바라보며 말했다. 아무래도 저쪽 세계에서는 영수를 수호수라고 부르는 듯했다.

“이곳에 머무시는 이유라도 있을까요?”

남자의 목적이 있다면 최대한 빨리 해결하고 돌려보내는 게 급선무였다.

서준은 뭐든 해줄 것처럼 매우 공손하게 물었다.

“왜 해결해주고 빨리 돌려보내게?”

“그건…….”

직설적인 남자의 화법에 서준이 당황했다. 그러나 남자는 개의치 않는다는 듯이 다시 말했다.

“소용없어. 나는 단지 도망치고 싶었을 뿐이니까. 실종상태라…. 오히려 좋구나. 차라리 사망선고를 해주었으면 더 좋고! 하하하하하하!”

하지만 남자는 돌아갈 생각이 전혀 없어 보였다.

“재미있어! 재미있어! 하하하!”

남자는 웃으면서 서준을 바라보았다. 서준의 모든 것을 훑어보듯 뚫어지게 쳐다보았다.

그러던 남자가 아주 장난스럽게 서준에게 말했다.

“그래, 그럼 왜 우리 차원으로 넘어와서 그런 깽판을 쳐놨는지 들어나 볼까? 아주 난도질을 해놨던데?”

남자는 서준 일행이 죽인 수많은 멧돼지 괴수를 이미 본 상태였다.

남자는 지금껏 장난스러웠던 행동과는 다르게 목소리를 내리깔며 날카롭게 물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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