91화.
“와 좋네요.”
“그러게요. 공기도 맑고 물도 깨끗하고… 지금 한창 휴가철인데 여기서 노는 것도 나쁘지 않겠습니다.”
“저기 백사장 위에 펜션 하나만 지어놔도 훌륭하겠는데?”
“추진하겠습니다.”
“그래.”
오세근과 김비서는 해변가를 둘러보며 이야기하고 있었다. 맑은 물과 고운 백사장에 감탄도 했고 미세먼지 하나 없이 새파란 하늘을 보며 탄성을 질렀다.
파도는 깨끗한 거품을 물고 출렁였으며 햇볕은 따스하게 내리쬐었다.
그들의 현 위치는 재배지 섬의 외곽 해변이었다.
“어때? 좋지?”
“그러게요. 여기 최고네요. 형님 그동안 이렇게 좋은 데서 혼자 노셨던 겁니까?”
오세근과 김비서도 이제 서준과 함께하기로 했다. 그리고 그러기 위해서는 준비가 필요했다.
두 사람 모두 훌륭한 트레이너 밑에서 훈련받은 헌터인 데다가 닥치는 대로 게이트를 따내서 전투를 치르기도 했다. 그러나 헌터로 활동한 기간은 매우 짧았다.
많은 경험을 했지만 모두 단기간에 이뤄졌을 뿐이다.
게다가 모두 게이트 방위 임무에만 투입되었을 뿐 게이트 침투 임무를 수행한 적은 없었다.
그들의 목적은 민간인들의 피해를 줄이기 위함이었지 금전적 이득이 아니었기 때문이다.
해서 두 사람 모두 게이트 너머의 세상에 적응할 필요가 있었다. 그런 이유로 서준은 이 두 사람을 재배지 섬으로 데려와 구경을 시키며 적응훈련을 하는 중이었다.
앞으로 이곳에서 오래 생활해야 했으니 적응은 필수였다.
“와…. 제가 길드장님 따라서 좋다는 곳은 다 가봤는데 진짜 여기가 최고네요.”
오세근을 따라서 전 세계의 휴양지란 휴양지는 모두 다녀본 김비서 역시 감탄했다. 서준을 제외한 그 어떤 인간의 손이 닿지 않은 해변은 매우 깨끗했고 청량했다.
바닷물은 완벽한 에메랄드빛을 띠고 있었고 그 속이 훤히 들여다보여 바닥이 코앞처럼 느껴질 정도였다.
-어흥! 어흥!
“같이 가! 어흥아!”
정신비와 어흥이는 서로 물장구를 치면서 놀고 있었다. 저들에게는 이곳이 매일같이 오는 곳이다 보니 어느새 동네 앞 놀이터처럼 익숙해져 있었다.
캬앙이와 크릉이는 정신비와 어흥이가 노는 것은 관심도 없는 듯 백사장에서 배를 드러내고 누워서 일광욕을 하는 중이었다.
햇볕은 아주 따스했고 포근했다. 어흥이와 캬앙이는 햇볕을 받으며 꼬리를 휘두르다가 어느새 잠이 들었다.
“그럼 구경은 여기까지 하고 일 얘기를 좀 해볼까?”
헤벌레 입을 벌리고 해변을 거닐고 있는 오세근을 향해 서준이 말했다. 이 정도면 충분히 즐길 만큼 즐겼다.
“좋습니다.”
김비서가 옆으로 다가와 앉으며 말했다. 이어서 오세근도 오더니 맞은편에 앉았다.
촤아악 거리는 파도 소리를 곁에 두고 세 사람의 이야기가 시작되었다.
“지금 봤듯이 이곳은 지구와는 완전 다른 세계입니다.”
“네, 확실히 다른 세계라는 건 알 수 있었어요. 그런데 여기가 지구에서 열리는 게이트의 과거라는 건 어떻게 알아내신 거죠?”
“직접 봤습니다.”
그랬다. 서준은 지구에서 열린 게이트를 통해 재배지 섬의 미래를 본 적이 있었다. 서준의 철제 선반이 녹슨 채 존재했으며 서준이 심어두었던 나무 역시 말라비틀어진 채 존재하고 있었다.
오랜 시간이 흘렀음에도 지형은 크게 변하지 않았고 재배지 섬의 괴수들도 그대로였다. 물론 모두 다 몸이 부식되어 좀비화되기는 했지만 그 원류는 알아볼 수 있었다.
“흠…. 그렇다면 사실인 거 같네요. 김비서는 어떻게 생각해?”
“사실인 것 같습니다. 신기하네요. 정말.”
이 사실을 서준이 설명해주자 오세근과 김비서 역시 받아들인 듯했다. 서준이 굳이 이들에게 거짓말을 할 이유도 없었고 게이트를 열어냈다는 것 자체가 가장 큰 증거였다.
이제는 오세근과 김비서도 모든 사실을 납득했다.
“잠깐만요, 시간의 배분이 다르다고 했었죠?”
“네.”
김비서가 무언가를 떠올린 듯 물었다.
“이거 그럼 만화책에 나오는 정신과 시간의 방처럼 수련용으로 쓰면 제격 아닌가요? 완전 현실판 정신과 시간의 방인데요?”
“아, 그건 안 됩니다.”
맨 처음 각성했을 때 서준 역시 떠올렸던 생각이었다. 서준과 김비서가 아니라 누구라도 이 능력을 접하게 되면 같은 생각을 떠올릴 것이다. 그만큼 흔한 상상이었고 효과적인 수련법이었다.
“왜죠?”
옆에서 듣고 있던 오세근이 물었다. 오세근 역시 같은 생각을 떠올린듯했다.
“시간 괴리가 있기는 하지만 한쪽 방향으로 일방적이지는 않아.”
서준은 그동안 자신이 알아낸 능력에 대한 이야기들을 해주었다. 서준의 위치에 따라 흐르는 시간이 다르다는 것과 시간 괴리를 막아내는 방법 등을 설명해 주었다.
“아! 그러면 백 선생님이 아까부터 게이트를 열어두었던 것도 그런 이유군요!”
“맞습니다. 100배의 시간 차이는 무시할 게 못 됩니다. 여기서 하루를 보내면 밖에서는 자그마치 세 달이 흐릅니다.”
“무섭네요. 그건…… 여기서 하루를 머물다 집에 들어가면 석 달 만에 들어왔다고 구박을 받겠네요.”
김비서가 잠시 끔찍한 상상을 한 듯 양팔로 어깨를 감싼 채 부르르 떨었다.
“이제 어느 정도 익숙해진 거 같으니 내일 오전 다시 모여서 출발하도록 하죠.”
그 이후로도 한참을 설명하던 서준이 말했다. 이제는 준비를 끝마쳐야 할 때였다.
더 이상 시간 끌 이유는 없었다. 오히려 서둘러야 했다. 서두르면 서두를수록 적이 더 약해지기에 빠르면 빠를수록 좋았다.
그리고 그렇게 시간이 흘러 다음 날 새벽 서준과 호랑이들 그리고 오세근과 김비서는 신대륙에 발을 디뎠다.
물론 정신비는 미리 약속한 대로 창천 길드에 맡겨둔 상태였다. 아마 그곳에서 능력에 활용에 대한 것을 배우게 될 것이다.
“이곳은 좀 으스스하네요……. 섬과는 또 다른 분위기인 것 같습니다.”
김비서가 주위를 둘러보며 말했다.
“네, 조심하셔야 합니다. 저도 아직 이곳은 완벽히 파악하지 못했습니다. 언제 어디서 어떤 괴수가 나올지 모릅니다.”
서준과 세근 그리고 김비서는 각각 한 마리의 호랑이에 올라타서 천천히 이동 중이었다.
일전에 별의 동상이 가리켰던 방향을 향해가고 있었다. 목적지를 향해 급하게 달려서 딱 목표물만 찍어 먹는 방법도 있었지만 그렇게 하지 않았다.
주변을 제대로 파악하는 것도 중요했다. 제대로 된 정보는 언제고 도움이 된다.
“그나저나 황량하네요…. 이렇게 넓은 땅에 인간의 흔적이 보이지도 않다니.”
“아무래도 괴수들의 세상이다 보니 인류의 영역이 좁아진 듯합니다. 아마 이곳까지 나와 있다면 도망쳐왔거나 무리에서 쫓겨났거나 하는 거겠죠.”
이미 이곳에도 사람이 살고 있다는 것 또한 설명한 상태였기 때문에 김비서는 당연스럽게 물었다.
물론 서준도 아직 한 번도 보지 못한 상태였다. 하지만 언젠가 보게 될 거란 걸 믿어 의심치 않았다.
지구로의 침략을 괴수들이 주도했을 리는 없으니까, 분명 사람의 짓이라고 확신하고 있었다.
“형님! 형님! 이거 정말 최곱니다! 저도 호랑이 한 마리 키우고 싶습니다! 얘네들 새끼 까면 저 주십쇼! 형님!”
캬앙이의 등 위에 올라타 있던 오세근이 말했다. 호랑이들이 워낙 힘이 세 그 안정감은 비교할 것도 없이 최고였으며 털의 감촉 또한 좋아서 타고 있는 것만으로도 기분이 좋아졌다.
오세근은 캬앙이의 목덜미를 쓰다듬으며 헤벌쭉 웃었다.
-캬앙! 캬앙!
캬앙이가 잠시 불쾌한 듯 소리쳤지만 오세근은 멈추지 않았다. 어쩔 수 없다. 호랑이들을 한번 쓰다듬다 보면 멈출 수 없었다.
그만큼 호랑이 털의 감촉은 최고였고 마약과도 같았다.
-저기 뭐가 있다!
그때였다. 한동안 잠자코 있던 별이 소리쳤다. 영혼 속에서 곧장 내뱉은 소리에 서준은 깜짝 놀라 하마터면 어흥이 위에서 떨어질 뻔했다.
‘뭔데?’
-저기 앞을 봐라! 연기가 오르고 있어! 연기가!
별의 말에 서준이 눈을 가늘게 뜨며 앞을 바라보았다. 하지만 끝없는 지평선만이 보일 뿐 별다를 게 보이진 않았다.
‘아무것도 없는데?’
-자세히 보거라! 의지를 모으고 기운을 눈으로 집중시켜! 똑바로 쳐다보거라!
별이 하도 재촉을 하자 서준은 자연스럽게 기운을 두 눈으로 집중시켰다. 서준 역시 처음 해보는 행동이었다. 그러나 아주 자연스럽게 해낼 수 있었다. 서준이 신비를 다루는 능력은 이제 어느덧 궤도에 올랐다.
그리고 서준의 눈으로 기운이 모이자 시야가 확장되고 먼 곳까지 뚜렷하게 볼 수 있게 되었다.
떨어지는 나뭇잎의 궤도를 예측할 수 있게 되었으며 날아다니는 작은 벌레들까지 뚜렷하게 볼 수 있게 되었다.
그리고 저 멀리서 뭉게뭉게 올라오는 연기가 보였다. 불에 의한 흔적이 분명했다.
“사람이다!”
연기를 본 순간 서준은 저도 모르게 소리쳤다.
“사람이라고요?”
“어디요? 형님? 안 보이는데요?”
그 소리를 들은 오세근과 김비서가 주위를 두리번거렸다. 그러나 연기는 기운을 두 눈으로 집중시켜야 겨우 볼 수 있는 거리에서 피어오르고 있었다. 두 사람이 발견할 수 있을 리 없었다.
“저기서 연기가 올라오고 있어!”
“연기요? 안 보이는데요? 그리고 연기랑 사람이 무슨 상관입니까?”
오세근이 눈을 가늘게 뜨며 앞을 바라보았다. 그리고 역시나 발견하지 못한 표정을 지으며 물었다.
“연기가 있다는 건 불이 있다는 거잖아! 동물이 불을 쓰겠어? 당연히 사람의 흔적이지!”
물론 자연적으로도 불이 발생한다. 매우 건조하거나 번개가 나무에 떨어지거나 해서 말이다.
그러나 지금 저 불의 흔적은 사람의 것이었다. 명확히는 말할 수 없었지만 서준의 감이 그렇게 말하고 있었다.
지금껏 서준을 여러 번 살려준 감각이었다. 이 정도 흔적은 구분해낼 수 있었다.
서준은 왠지 저 연기가 사람의 흔적이라고 느껴졌다. 아니 확신했다.
“그럼 일단 빨리 갑시다!”
연기를 발견하지는 못했지만 서준의 말을 모두 믿기로 한 김비서가 외쳤다.
“괜찮을까요? 수가 많으면 어쩌죠?”
오세근의 말이었다. 이 역시 틀리지 않았다. 그들의 수가 훨씬 많고 그들의 성격이 포악해서 일행을 공격하면 곤란했다.
“일단은 가보자. 게이트가 있으니 어떻게든 될 거야. 수틀리면 게이트를 열고 도망치면 돼.”
“저도 찬성입니다. 사람이 있으면 일단은 한번 찾아가 봐야 할 것 같습니다.”
김비서 역시 찬성했다. 애초에 제일 먼저 가자고 했던 것이 김비서였다.
“알겠어요. 대신 위험할 수 있으니 일단은 멀리서 지켜보는 걸로 해요.”
오세근의 말이었다. 서준과 김비서는 고개를 끄덕인 후 호랑이를 몰아 빨리 달리기 시작했다.
“우리도 가자! 캬앙아!”
멀어져가는 두 사람의 뒤통수를 바라본 오세근도 캬앙이의 목을 세게 잡으며 말했다.
-캬앙! 캬앙!
캬앙이 역시 저들에게 뒤처지지 않겠다는 듯 빠르게 달리기 시작했다. 어릴 적부터 가장 빨리 달릴 수 있는 아이였다. 캬앙이는 금세 어흥이와 크릉이를 따라잡으며 그들의 옆에 섰다.
“진짜…. 사람이 살고 있었어…….”
그리고 그렇게 한참을 달려서 그들은 나무가 우거진 언덕 위에 오를 수 있었다.
그리고 그 언덕 아래로 자그마한 부락이 있었다. 여러 개의 오두막을 지어놓고 살고 있는 원시 부락이었다.
서준의 일행은 언덕 위에 숨어서 부락을 살피기 시작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