90화.
서준의 폭탄 발언 이후 잠시 침묵이 흘렀다. 서준도 이야기를 듣고 있던 오세근과 김비서도 모두 침묵했다.
“에이, 형님 진짠 줄 알았잖아요!”
그 분위기가 어색했는지 오세근이 참지 못하고 먼저 입을 열었다. 아무래도 믿지 않는 눈치였다.
“저도 깜빡 속았습니다. 진짜 무슨 방법이 있는 줄 알았네요.”
오세근이 허탈하게 웃고 있는 모습을 본 김비서 역시 허탈하게 웃으며 입을 열었다. 김비서도 믿지 않는 눈치였다.
“아니야, 나한테 방법이 있어.”
믿지 않을 거라곤 이미 예상했다. 다른 누군가가 서준에게 같은 말을 했어도 그랬을 것이다. 서준 역시 믿지 않고 저렇게 반응했을 것이다.
이미 예상한 결과였고 말하려고 마음먹었기에 서준은 망설이지 않았다. 있는 그대로 이야기하기로 마음먹었다.
“진짜라구요?”
“에이, 설마요. 백 선생님도 참 짓궂으십니다.”
오세근과 김비서는 아직도 믿지 못하는 눈치였다.
“이 사람들이 속고만 살았나 정말. 저한테 방법이 있다니깐요?”
“뭔데요 말해 봐요.”
오세근이 증명해보란 듯이 말했다. 서준은 무언갈 보여줄 듯 자리에서 일어나더니 약국 문 앞에 섰다.
“잠시만, 누가 들어오면 곤란해져서.”
서준은 약국 문을 잠근 후 설치된 블라인드를 내려 밖에서 약국 내부를 들여다볼 수 없게 만들었다.
그동안 게이트를 이용할 때마다 하던 일이었지만 누군가 약국 안에 있을 때 하려니 어색했다.
“와, 이 형님 준비성 철저하신 거 봐. 이러니까 꼭 진짜 같네.”
“길드장님, 백 선생님이 몰래카메라 준비 열심히 하신 거 같은데 한번 속아줘야겠습니다. 근데 카메라는 어디 있죠?”
두 사람은 아직도 믿지 않는 눈치였다. 서준은 그런 두 사람을 바라보며 한번 씨익 하고 웃었다.
“잘 보세요.”
서준은 왼손을 가볍게 들어 올린 후 게이트를 열었다.
공중에서 검은색의 구체가 일렁이더니 조금씩 확장되기 시작했다. 이윽고 사람 하나가 들어갈 정도의 크기로 확장된 검은 구체는 이상한 기류를 띠며 공간에 안착했다. 게이트화 된 것이다.
“어…….”
“이게 뭐지?”
두 사람은 눈앞에 게이트가 생성된 걸 보고 정신을 살짝 놓았다. 아니, 아직 이 현상이 게이트라는 것을 인지하지 못한 듯했다.
그럴만했다. 누군가 게이트를 인위적으로 만들어낼 수 있을 것이란 생각은 해본 적 없을 테니까.
“두 사람 이게 뭐처럼 보이나요?”
정신을 못 차리는 두 사람을 두고 서준이 말했다. 이쯤 하면 눈치챌 때도 되었다.
“게이트… 게이트를 어떻게…….”
“형님… 형님이 게이트를 만드신 겁니까? 그런 겁니까?”
두 사람도 드디어 눈치를 챘다. 아니 정신을 차렸다는 것이 맞는 표현이었다. 이 현상이 게이트인 것은 진작 알고 있었으니까. 단지 인정하지 못했을 뿐이다.
“보이는 대로 게이트다. 나는 게이트를 만들 수 있어.”
또다시 침묵이 흘렀다. 오세근과 김비서는 인정할 수 없다는 듯 눈을 비비고 다시 쳐다보았다.
그러나 결과는 달라지지 않았다. 그들의 눈앞에는 게이트가 떠 있었다.
“형님…… 그러면 이제 곧 괴수가 튀어나오는 겁니까?”
오세근이 소파에서 일어나 전투태세를 취하며 물었다. 만약 눈앞의 현상이 정말 게이트라면 곧 괴수가 튀어나올 테니까.
그 모습을 본 김비서도 곧 정신을 차리고 전투준비를 했다. 두 사람은 이제 완전한 헌터였다. 대기업의 철없는 후계자도, 그 후계자의 비서도 아닌 목숨 걸고 매일을 전쟁하는 헌터였다.
“아니, 그런 걱정은 안 해도 돼. 네가 알고 있는 게이트랑은 조금 달라.”
“다르다고요?”
“응.”
서준은 계속해서 설명을 이어갔다. 함께 하려면 능력에 대해 정확히 알려줄 필요가 있었다.
“내가 만든 게이트는 과거의 게이트야.”
“과거요? 무슨 소리죠?”
“지구 곳곳에 열리는 게이트들 있지? 그 게이트들의 과거를 투영하고 있어.”
“이해가 잘 안되는데요?”
그럴 만도 했다. 이렇게 말해주면 폰 노이만이 와도 이해를 못 할 것이다. 서준은 좀 더 쉽게 풀어주기 위해 다시 입을 열었다.
“좀 더 쉽게 말하자면 정확히는 얼마나 차이 나는지 알 수 없지만 내가 연 게이트를 들어가면 현재 지구에서 열리는 게이트들의 과거로 갈 수 있어.”
“그러니까 지구에서 열리는 게이트보다 과거의 시점으로 간다는 이야기죠?”
“오! 역시 김비서님! 그렇게 말하니까 이해하기 쉬울 것 같네요.”
서준이 워낙 말주변이 부족한지라 설명하는 데 애를 먹고 있었는데 다행히 옆에서 김비서가 도와주어 잘 설명할 수 있었다.
오세근은 옆에서 뭔가 살짝 부족하지만 그래도 이해는 했다는 표정을 짓고 있었다.
“그래서요? 과거로 가면 어떻게 되는데요?”
“타임 패러독스인지 뭔지 그런 건 잘 모르겠고 대충 내가 알아낸 것만 말하면…… 내 게이트에서 무언갈 건드리면 그게 지구의 게이트에 영향을 끼친다.”
“음…. 어렵군요.”
“그래.”
서준도 시간 여행에 대한 공부를 꽤 했다. 아무래도 본인의 능력과 관련되어 있었으니까.
하지만 가설이 너무 많았고 가설마다 허점도 너무 많았다. 해서 그만두었다. 시간 여행을 실제로 해 본 사람이 없었기에 완벽한 이론이 존재할 수 없었다.
무언가 설명이 부족한 서준은 김비서를 바라보았다. 옆에서 듣고 보충해주길 바라면서…….
“그러니까…. 백 선생님 말씀은 백 선생님이 만든 게이트에 들어가서 원인을 제거하자 이 말씀이신가요?”
“바로 그겁니다!”
뭔가 속이 뻥 뚫리는 느낌을 받은 서준은 신이 나서 답했다.
“지구에 게이트가 열리게 된 원인이 분명 무언가 있을 겁니다. 일단 그걸 제거하면 두 번 다시 게이트는 열리지 않게 되겠죠.”
서준의 최종 목표였다. 하지만 그를 향해가기 위해선 먼저 처리해야 할 것들이 있었다.
“그럼 그 원인은 찾으셨습니까?”
김비서가 그 허점을 날카롭게 찾아낸 후 물었다.
“아뇨, 아직입니다. 하지만 그 전에 해야 할 것은 알고 있어요.”
서준 역시 알지 못했다. 지구를 향해 게이트를 여는 것이 누군지, 어떤 단체인지, 아니면 어떤 목표를 가지고 여는지 알지 못했다.
그러나 그를 향해가는 방법 하나는 알고 있었다.
“게이트 너머에는 특별한 괴수들이 있습니다. 총 열두 마리의 괴수예요.”
“아! 전에 십이지신을 조사해달라고 하신 게…….”
오세근이 무언갈 눈치챈 듯 소리치며 말했다. 이전에 서준의 부탁으로 태평양에 소환된 꿀닭을 찾은 적 있었다.
“맞아. 이것 때문이었어. 열두 마리의 괴수들이 각각 하나씩 아티팩트를 지니고 있어. 우선은 그걸 다 모아야 다음 길을 알 수 있어.”
일단은 별의 영혼이 우선이었다. 별의 영혼을 모두 되찾으면 별의 기억을 되찾을 수 있었고 그렇다면 무언가 실마리를 잡을 수도 있었다.
“하지만 저희 셋이 상대하기엔 그 괴수들은 너무 강한 거 아닌가요? 요번 이집트 건만 보아도 백만 명이 넘게 죽었습니다.”
김비서의 말이었다. 사실이었다.
“하지만 안양 토끼 사건을 생각해보면…… 무언가 약점이 있는 게 아닐까요? 토끼가 갑자기 힘을 잃고 쓰러졌잖아요.”
오세근의 말이었다. 그리고 이 역시 사실이었다.
“두 사람 다 맞는 말이야. 일단 하나 말하자면 안양 뿔토끼는 내가 개입했어. 약점이라고 할 거까진 아니지만 공략법이 있었고.”
뿔토끼의 뿔을 잘랐다. 그게 바로 별의 영혼이 담긴 아티팩트였다. 물론 운이 좋았다. 다른 괴수들은 아티팩트를 뺏는다고 그렇게 힘을 잃지는 않았다.
“그리고 말했다시피 내 게이트는 과거를 비춰줍니다. 괴수들이 성장하기 이전에 찾아낸다면 손쉽게 처리할 수 있어요. 물론 그렇다고 해도 아주 쉽지는 않지만……. 어쨌든 가능한 수준은 됩니다.”
물론 악룡의 경우는 예외였다. 서준이 얼핏 보기에도 악룡은 이집트를 초토화시킨 말 괴수보다도 강해보였다.
서준의 얘기를 들은 김비서가 골똘히 생각하더니 물었다.
“그럼 이미 처리한 녀석들이 있는 건가요? 몇 마리나 처리했죠?”
“뱀, 그리고 양 이렇게 두 마리 처치했습니다. 지구에서 죽은 게 닭과 토끼 그리고 말과 소 이렇게 네 마리니 총 여섯이 죽었습니다.”
그랬다. 뱀을 잡고 왕관을 양을 잡고 귀걸이를 얻었다. 닭과 소는 서준이 알지 못하는 새에 이미 죽었고 말은 이집트에서 모하메드가 잡았다. 그리고 마지막으로 토끼는 서준이 개입해 성공적으로 잡아냈다.
“형님, 그럼 벌써 아티팩트를 절반이나 모으신 건가요? 아…. 지구에서 죽은 놈들한테서는 회수하지 못했겠네요.”
“아니, 요번 이집트에서 죽은 말을 제외하고는 나머지 괴수들이 지니고 있던 아티팩트는 모두 구했어.”
사실 운이 좋았다. 별의 영혼이 GOTY의 상품으로 나왔고 리버스의 은신처에서 구할 수 있었다. 서준이 의도하지 않았지만 모두 서준의 손으로 들어왔다.
“그럼…. 이집트에서 나온 아티팩트를 회수하는 게 우선이겠군요.”
“그래, 근데…. 아무리 너라도 어렵겠지?”
“흠…. 방법을 좀 생각해봐야겠네요.”
아무리 오세근이라도 이건 어려웠다. 나라 하나를 쑥대밭으로 만든 녀석이 뱉은 아티팩트였다. 쉽게 건네줄 이유도 없었다.
게다가 모하메드가 미친 짓에 성공했기에 더욱 확률은 낮아졌다. 아마 죽어도 놔주지 않을 것이다.
“일단 나중으로 미루고 나머지 여섯 개를 구하는 게 우선이라고 생각합니다. 일단은 소재지는 파악한 거잖아요? 방법은 차차 생각해봅시다.”
듣고 있던 김비서가 상황을 정리해주며 말했다. 그의 말이 맞았다. 아직 발견 못 한 괴수들을 처리하는 게 우선이었다.
“괴수들의 수준은 어느 정도입니까? 아무리 성장하기 전이라지만 그래도 상당할 거 같은데요?”
“정말 제각각입니다. 뿔토끼처럼 본래 가진 힘이 미약한 녀석이라면 성장 전에 제압하는 게 쉽겠지만 남은 동물들이 그렇게 호락호락한 녀석들은 아닌 것 같아요. 그리고 이미 상당히 성장한 상태인 녀석들도 있기 때문에 만나기 전까지는 몰라요.”
실제로 그랬다. 뱀 괴수인 바실리스크는 그 크기는 엄청나게 컸지만 거의 유아기에 가까운 상태였다. 해서 아직 제대로 싸우는 법도 모르던 서준이 상대할 수 있었다.
하지만 양 괴수의 경우는 이미 어느 정도 성장했기에 강해진 서준도 상대하는 데 애를 먹었다.
“그럼 준비를 좀 철저히 해야겠네요. 서둘러야 할 이유는 없으니깐요.”
김비서의 말이었다.
“아니요. 그렇지 않아요. 그러다 지구로 언제 튀어나올지 모릅니다. 그리고 제일 중요한 건 제 게이트 너머의 세상과 지구와는 시간 괴리가 있습니다.”
지금은 이 때문에 꽤 고생하고 있지만 이전에는 서준의 밥줄이었다. 지금도 서준의 약초를 성장시켜주는 최고 동력이었다.
“흠…. 꼭 만화 같은 이야기네요. 그 차이가 얼마나 되나요?”
“백 배 정도 납니다.”
“…….”
“…….”
믿기 힘든 이야기였다. 오세근과 김비서 둘 다 말을 잃었다. 상상도 하지 못했던 이야기였다. 기껏해야 두세 배 정도를 예상한듯했다.
“그럼 백 선생님이 약초를 그렇게 기를 수 있던 것도 게이트 덕분이었군요.”
김비서가 무언가를 깨달은 듯 말했다. 오세근 옆에서 수행하는 동안 도가 트였는지 눈치가 정말 빨랐다.
“네, 맞아요. 게이트 너머의 세상을 오갈 수 있기에 약초를 길러낼 수 있었고, 백 배의 시간 차이가 있었기에 빠르게 길러낼 수 있었어요.”
서준의 비밀이었다. 정신비와 호랑이들 그리고 별을 제외하고는 누구도 알지 못하는 서준의 능력이었다.
사실상 저들은 서준의 가족이나 마찬가지였다. 해서 지금 이 순간이 서준의 능력이 외부에 공개되는 최초의 순간이었다.
하지만 서준은 후회하지 않았다. 오히려 꼭꼭 숨겨두었던 사실을 믿을 수 있는 사람들에게 말하니 가슴이 뻥 뚫린 것처럼 속이 시원해졌다.
“그럼 앞으로의 계획은 어떻게 되나요?”
생각을 모두 정리한 김비서가 물었다. 평소에는 오세근이 앞장서 말했는데 이런 중요한 일에는 김비서가 나서는 모양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