89화.
“이 정도면 충분하신가요?”
윤희주가 서준에게 무언가를 건네며 물었다. 꽤 큰 가방 하나가 빵빵해질 정도로 많은 양이었다.
“네, 이 정도면 충분하네요. 모자라면 나중에 다시 오죠.”
서준이 가방을 받아들며 답했다. 가방이 상당히 묵직한 것이 서준의 손목이 살짝 저렸다.
“그나저나 뭘 하고 다니시길래 별부름탄이 이렇게 많이 필요해요?”
윤희주가 서준에게 건네줬던 물건은 별부름탄이었다. 지난번 별의 영혼 조각을 모으면서 가지고 있던 별부름탄을 모두 소모했기 때문에 서준이 부탁했던 물건이었다.
“요즘 세상이 흉흉하잖아요. 괴수들도 많이 나오고. 직접 때리는 것보다는 별부름탄이 편하네요.”
대충 둘러대는 서준이었다. 게이트를 닫기 위해 사용한다고는 말할 수 없었다.
“그나저나 요즘 약국 앞이 많이 소란스럽던데 괜찮으세요?”
이미 뉴스에도 여러 번 보도되고 있었다. 서준의 약국 앞에서는 하루를 거르지 않고 시위가 있었고 시위를 진압하기 위한 초인 경찰들과 시위대 간의 충돌도 계속되었다.
덕분에 서준은 매일매일 소음 속에서 살고 있었다.
“약국 안까지 들어오지는 않아서 걱정 없는데, 신비가 걱정이네요. 시위대랑 경찰이랑 충돌하면서 욕하고 그러거든요.”
흥분하고 폭력적인 시위대였지만 그들도 머리는 있었다. 감히 호랑이 약국의 영역 안으로 들어오지는 못했다.
초인 경찰과 충돌하는 건 괜찮아도 서준의 영역 안으로 들어가는 건 금기였다.
서준은 GOTY를 우승한 유명 헌터였다. 시위대들 역시 겁을 먹을 수밖에 없었고 당연히 약국 내부로는 들어오지 못했다.
“신비를 저희한테 맡겨보는 건 어때요? 각성자라 굳이 학교 갈 필요는 없을 거 같고 저희가 잘 가르쳐 볼게요.”
어린 나이에 각성한 경우 일반 학교에 가는 경우는 거의 없었다. 물론 매우 드물게 있긴 했지만 백 중 하나였다.
보통은 각성자 학교에 다니거나 길드의 교육 시설에 들어갔다. 대규모 길드들은 유망주들을 미리 영입하기 위해 어린 각성자 육성 프로그램을 가지고 있었고 상당히 잘 운영되는 편이었다.
게다가 마침 정신비도 이제는 트라우마에서 벗어나 서준과 떨어질 수 있게 된 상황이라 나쁜 이야기는 아니었다.
“으음…….”
서준 역시 고민하고 있던 부분이었다. 앞으로 더욱 강한 괴수들과 싸우러 다녀야 하는데 정신비를 계속해서 데리고 다닐 수는 없는 노릇이었다.
정신비가 위험한 걸 떠나서 호랑이 한 마리가 전투에 참여하지 못하게 되기 때문에 전력 손실이 매우 컸다.
“길드장님도 제 인터뷰 보셨죠?”
“네, 봤죠. 워낙 이슈였잖아요.”
서준은 말을 돌리며 물었다. 정신비의 문제는 윤희주의 대답을 듣고 결정해도 늦지 않는다.
“어떻게 생각하세요?”
“게이트를 닫는다는 거 얘기하시는 거죠?”
“네.”
서준의 질문을 받은 윤희주는 잠시 길게 생각하더니 답했다.
“저는 사실 지금이 좋아요. 사실 제가 먹고사는 게 전부 게이트 덕분이기도 하고… 아직까진 크게 위험하다고 느껴본 적이 없거든요.”
당연한 대답이었다. 최근 들어 강력한 괴수들이 튀어나와 큰 피해를 주고는 있지만 아직 우리와는 조금 거리가 먼 이야기였다.
한국 역시 안양이 쑥대밭이 되기는 했지만 잘 막아낸 편에 속했고 덕분에 헌터와 길드들은 꽤 큰돈을 만졌다.
괴수의 사체가 큰 만큼 분배할 것도 커졌으니까.
“역시 그런가요?”
“그렇죠, 뭐, 밥벌이가 사라지는 거잖아요. 저뿐만이 아니라 대부분 그럴 거예요.”
그도 그랬다. 윤희주는 지금은 거대 길드의 수장이지만 대침공 이전에는 평범한 시민1이었다.
대침공 전 아직은 어린 학생이었지만 공부를 잘하는 것도 집이 잘사는 것도 아니었다. 아마 게이트가 열렸다면 작은 회사에 들어가서 월급을 받아먹으며 간간이 살아갔을 것이다.
게이트란 것이 윤희주의 인생을 바꿔준 것은 틀림없다.
“무슨 얘기들을 그렇게 하세요?”
그때 훈련을 마친 후 잠시 쉬려고 휴게실로 들어온 김소현이 다가오며 물었다.
“게이트 얘기하고 있었어요.”
“게이트요?”
“응, 백 선생님이 인터뷰하신 거 있잖아. 그거, 넌 어떻게 생각해?”
원래 서준이 물어보려 했던 걸 고맙게도 윤희주가 물어봐 주었다.
“저는 반대에요.”
역시 김소현의 대답도 윤희주와 다르지 않았다. 차이점이 있다면 일 초도 망설이지 않고 대답했다는 거였다.
김소현의 성격이 잘 드러나는 부분이었다. 언제나 화끈했고 언제나 급했다.
“게이트 닫히면 이제 뭐 먹고 살아요? 제 밥줄인데 제가 지켜야죠.”
김소현의 이유 역시 윤희주와 다르지 않았다. 사람들이 가장 예민하게 반응하는 건 밥줄이었다.
“백 선생님은 그 전부터 약국 차리고 잘살았으니깐 모르시는 거예요. 게이트 닫혀도 다시 약국 하면 되잖아요. 우리는 게이트 닫히면 그냥 백수 되는 거예요.”
맞는 말이었다. 서준도 알고는 있었지만 사실은 조금 아쉬웠다.
이 질문을 한 이유도 단지 이들의 생각을 들어보기 위함은 아니었다. 도움을 받기 위함이었다.
앞으로 더 강한 적들과 싸우게 될 것이 확실했다. 특히 지난번 보았던 악룡은 아직도 상대할 자신이 없었다.
조력자가 있다면, 전투를 같이할 동료가 있다면 조금 더 수월해질 수 있었다.
“역시… 그렇네요. 아! 길드장님 신비는 그럼 창천에 맡겨도 되나요?”
아쉬웠다. 아쉽지만 어쩔 수 없었다. 하지만 게이트 탐사 중 정신비를 맡아주는 것만으로도 큰 도움이 된다. 아쉽지만 이 정도에 만족해야 했다.
“저희야 고맙죠. 신비도 재능은 충분하다 못해 넘치는 것 같던데, 저희 시설 들어오면 오히려 저희가 좋죠.”
어쨌든 정신비의 문제는 일단 해결이 되었다. 게이트 탐사를 함께할 동료 문제는 조금 더 생각해봐야겠지만 문제 하나를 해결한 것만으로도 꽤 큰 수확이었다.
서준은 아쉬운 마음을 뒤로한 채 약국으로 돌아왔다.
-아쉽게 됐네.
‘그러게. 함께 해준다면 큰 도움이 됐을 텐데…….’
사실 서준이 솔직히 있는 그대로 말했다면 윤희주와 김소현은 도와주었을 것이다.
길드 전체의 도움은 주지 못하더라도 개인적으로 서준을 도와줬을 가능성이 매우 컸다.
그들은 생각보다 의리가 있는 사람들이었다. 지금처럼 막연히 게이트를 닫고 싶다고 한다면 반대하겠지만 확실한 방법이 있다면 도움을 주고도 남을 사람들이었다.
-그냥 부탁해보지그래?
‘어떻게 그러냐.’
하지만 서준은 그럴 수 없었다. 그들 스스로 원하지도 않는 일을 서준 본인을 위해 강제로 하게 할 수 없었다.
성공한다 해도 마음이 불편했을 것이다.
-초인몰에 모집 공고라도 해보지그래? 돈 준다 하면 와르르 몰려들걸.
‘웃기려고 한 소리지?’
-응!
할 수 있었으면 진작에 했다. 그러나 믿을 수가 없었다. 김소현과 윤희주를 제외하고는 서준은 본인의 능력을 밝힐 생각이 없었다.
그리고 능력을 떠나서 게이트 내부에서 배신이라도 한다면 큰일이었다.
-띠리링! 띠리링!
그리고 바로 그때 약국 문에 달린 종이 울리며 누군가 들어왔다.
“형님! 형님! 만수무강하십니까?”
오세근이었다. 역시나 요란한 녀석이다.
-야! 저놈은 어때?
그때 별이 말했다. 그 순간 서준은 머리가 번뜩였다.
‘내가 왜 저놈 생각을 못 했지?’
서준이 이런 생각을 하고 있는지도 모른 채 세근은 싱글벙글 웃으며 서준에게 다가왔다.
“형님 뭔 생각을 그렇게 하십니까?”
“아니, 뭐 그냥…. 세근아.”
“아, 이 형님 반응 보니까 뻔하네! 또 무슨 부탁이 있으십니까? 말씀만 하십시오! 형님!”
역시 오세근다운 반응이었다. 이 녀석이 배신할 걱정은 없었다. 서준은 그동안 고민한 시간이 아까워져 허탈함에 절로 웃음이 나왔다.
“너는 게이트를 닫을 수 있는 방법이 있다면 어떻게 할래?”
“그럼 무조건 닫아야죠.”
오세근은 단 일 초도 고민하지 않고 답했다.
“그래?”
“당연하죠! 게이트만 없으면 예전처럼 좋은 세상으로 돌아갈 수 있는 거 아닙니까? 죽거나 다치는 사람들도 없어지고 해외여행도 자유롭게 다니고.”
오세근다운 대답이었다. 뒷얘기는 그렇다 쳐도 좋은 세상, 죽거나 다치는 사람이 없어진다는 이야기가 서준의 마음을 울렸다.
이미 세근은 서준에게 완전히 감화되어 진정으로 평화를 바라고 있었다.
게다가 결정적으로 오세근은 애초부터 부자였다. 대기업의 후계자였다. 게이트가 닫힌다고 해도 손해는 없다. 오히려 더 큰 이득을 볼 수 있는 부류였다.
“김비서님은 어떻게 생각하세요?”
“저도 길드장님이랑 같은 생각입니다.”
역시 아부의 대왕이었다.
“아니, 그런 거 말고 진짜 김비서님 생각이요.”
“아뇨, 저도 진짜 그렇게 생각합니다. 저도 아이가 있는 몸인지라 이런 세상은 좀 싫네요…….”
김비서 역시 그럴만한 이유가 있었다. 게다가 김비서는 최근에 각성했다. 각성하기 전에도 오세근 밑에서 일하며 충분히 잘 먹고 잘살았고 능력도 좋은 남자였다.
그리고 결정적으로 김비서 역시 서준이 믿을 수 있는 사람이었다.
“방법만 있다면 찬성이란 거죠?”
“그렇죠, 뭐. 방법만 있으면 무조건 합니다. 저는.”
생각보다 김비서의 의지는 강렬했다. 부모의 마음이란 이런 것이었을까? 게이트를 닫는다는 건 상당히 위험이 따르는 일일 텐데도 김비서는 거침이 없었다.
“형님, 뭐 방법이 있는 것처럼 말씀하시네요?”
“왜? 너도 방법만 있으면 뭐든 할 거야?”
서준은 오세근의 물음에 장난을 치는 듯 답하며 물었다. 아마 오세근의 답에 따라 이후 서준의 계획이 상당 부분 수정될 예정이었다.
“아, 당연하죠! 방법만 있으면 다 합니다! 안 그래도 요즘 몸이 근질근질하던 차였어요.”
“정말?”
“아! 뭘 묻습니까? 게이트 닫는 거 뭐 방법이 뭔지는 모르겠지만 위험하겠죠. 근데 그거 닫으면 나중에 교과서에도 나오고 그런 거 아닙니까? 게이트를 닫은 위대한 오세근!”
오세근다운 발상이었다. 자의식으로 똘똘 뭉친 녀석이니 교과서에 실리는 게 목표일 수도 있었다.
“어릴 적부터 제 꿈이었거든요. 대통령? 과학자? 우주여행? 그런 거 말고 저는 교과서랑 위인전에 이름 올리고 싶었어요. 나쁜 쪽 말고 좋은 쪽으로!”
“꼭 좋은 쪽은 아닐걸?”
게이트를 닫는다고 좋게 평가될 거란 보장은 없었다. 현대 산업은 게이트에 대한 의존성이 상당히 컸다.
환경을 파괴하던 에너지원들을 버리고 게이트 너머에서 가져온 물질들로 전기를 뽑아내 사용했다.
많은 건축 자재들도 게이트 너머의 광물들을 사용했다. 가볍고 단단했으며 층간 소음도 없어졌다.
게이트를 닫는다면 다시 예전으로 돌아갈 수밖에 없었다. 비난의 목소리도 분명히 크게 울릴 것이다.
“아이! 그 정도는 후세에서 전부 잘 평가해줄 겁니다! 믿어보자고요! 우리 후손들을!”
오세근의 대답에 서준도 싱긋 웃었다. 참 긍정적인 녀석이었다. 오세근의 이런 행동들은 서준을 자주 웃을 수 있게 해주었다.
비참하고 참혹한 세상이었지만 웃음은 끊이지 않는 아이러니한 세상이었다.
결국 서준은 생각을 굳혔다. 오세근도 김비서도 믿을 수 있었다. 그리고 두 사람 모두 게이트를 닫기를 원했다.
두 사람이 동료가 된다면 서준도 믿고 등을 맡길 수 있었다. 게다가 두 사람 모두 훌륭한 각성자였다.
각성 시간은 짧았지만 훌륭한 트레이닝을 받고 금전적으로 충분한 지원을 받았다. 헌터들의 강함도 돈으로 살 수 있는 세상이었다.
“그럼 두 사람 저랑 같이 게이트 닫으러 가지 않을래요?”
결국 서준은 두 사람에게 폭탄 발언을 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