88화.
서준과 오세근 그리고 김비서는 약국의 문을 잠가놓고 게이트 럼을 마시다 그대로 곯아떨어졌다.
술을 퍼마시다가 소파에서 그대로 잠든 장정 셋을 보면 인생을 낭비하는 한심한 종자들로 보일만도 했다.
그러나 그 일면을 따지고 보면 각각이 대단한 사람들이었다.
뭐, 지위 고하를 막론하고 부자든 가난한 사람이든 술은 모두에게나 공평한 물건이었다.
세 사람은 잠시나마 고민을 잊고 편히 잠들 수 있었다.
“일어나세요! 아저씨! 벌써 해가 저 높이 떴어요!"
이미 정오가 되어 해가 중천에 떴고 한여름의 강렬한 태양은 지면을 강하게 익히고 있었다.
약국 내부는 에어컨이 자동으로 온도와 습도를 맞추어 주었기에 선선했으나 창문을 뚫고 들어오는 강렬한 햇볕은 뜨겁다 못해 따가웠다.
“으하아아암! 잘 잤다!”
“아이고! 여기서 잠들었나 봅니다!”
뜨거운 햇볕과 정신비에 성화에 못이긴 오세근과 김비서가 일어났다. 두 사람의 성격을 대변해주듯 오세근은 태평하게 하품을 했으며 김비서는 큰 잘못이라도 저지른 마냥 안절부절못했다.
“아저씨! 일어나라고요! 호랑이들 배고프대요!”
-어흥! 어흥!
-캬앙! 캬앙!
-크릉! 크릉!
사실 서준이 호랑이들의 밥을 챙겨주지 않아도 되었다. 정신비가 꺼내다 줄 수도 있었고 지능이 좋은 호랑이들이 스스로 찾아 먹을 수도 있었다. 그 정도는 되었다.
그러나 정신비는 단지 서준을 깨우기 위해 호랑이를 이용한 것뿐이다.
“알겠어…. 5분만… 5분만 더 잘게.”
“안 돼요! 이제 일어나세요! 더 자면 밤에 못 자요! 일어나요! 빨리!”
“알겠어…….”
결국 서준은 정신비의 성화에 못 이겨 억지로 눈을 뜨며 기지개를 켰다. 소파에 앉아서 자느라 잘못 맞물렸던 뼈들이 제대로 정렬되며 따다닥 소리를 내었다.
목을 한 바퀴 돌리자 크게 꽝 소리가 나며 목뼈가 맞춰줬다. 잠시 고통이 있었지만 고통보다도 그 쾌감이 더 컸다.
“뭐 먹을래?”
잠에서 깬 서준은 주위를 둘러보며 물었다. 밤새 술을 마시며 안주를 충분히 먹었기에 배고프지는 않았지만 해장이 필요한 시점이었다.
“뜨끈한 국물이 땡깁니다. 형님.”
“저도 그게 좋겠습니다. 백 선생님”
오세근과 김비서가 말했다. 이 두 사람 역시 서준 못지않게 과음한 상태였다. 머리가 지끈거리고 속이 쓰린 것이 서둘러 해장할 필요가 있었다.
초인 셋을 이렇게 숙취로 고생하게 하다니 역시 게이트 럼이었다. 맛도 일품 숙취도 일품 어디 하나 빠지는 곳이 없었다.
“그러면 시원한 거로 먹지.”
서준의 청개구리 기질이 발휘되었다. 사실 서준 본인이 뜨거운 음식보단 차가운 음식을 선호하는 편이기도 했다.
게다가 실내 온도는 적절히 맞춰져 있다지만 햇살이 너무 뜨거운 탓에 더운 기분이 드는 것도 사실이었다.
“아이고… 그냥 물어보지를 마시지. 형님 먹는 거로 먹겠습니다. 그냥.”
오세근은 사실 별 상관없었다는 듯이 답했다. 뭐 싫다고 해도 서준은 차가운 음식을 가져다 놨을 것이다.
애초에 음식 하는 사람이 서준이니 서준 말에 따라야지 별수 있겠는가? 원래 집주인이 왕이다. 손님이 왕이라는 소리는 틀렸다. 손님은 손님일 뿐이다.
“저는 냉면 먹고 싶어요! 냉면! 냉면!”
시원한 음식이라는 소리에 정신비가 냉면을 외쳤다. 얼마 전에 냉면 맛집에 한 번 데려갔더니 그 이후로 계속해서 냉면을 찾았다.
하지만 아쉽게도 서준이 생각하고 있는 음식은 냉면이 아니었다.
“냉면은 아닌데…… 뭐, 그래도 비슷한 음식이야. 한번 먹어 봐.”
“네에!”
그래도 비슷한 음식이라는 소리에 정신비가 신이 나서 대답했다. 뭔들 싫겠는가? 서준의 음식 솜씨가 좋다는 것은 이미 정신비 역시 알고 있었다.
마다할 이유가 없었다. 서준이 주는 대로 받아먹기만 해도 행복할 것이다.
“그럼, 조금만 기다리고 있어.”
“네에!”
-어흥! 캬앙! 크릉!
서준이 정신비를 번쩍 들어 소파에 앉혀놓고 말하자 정신비와 호랑이들이 답했다.
오세근과 김비서는 아직 정신을 차리지 못했는지 물을 벌컥벌컥 마신 후 다시 축 늘어져 소파에 몸을 맡겼다.
부엌으로 간 서준은 냉장고에서 재료들을 꺼내기 시작했다. 재료가 충분히 있지는 않았지만 그 주인공이 워낙 화려한 녀석이었기에 감당 가능했다.
우선 양파와 파 그리고 마늘을 꺼냈다.
“아저씨! 저는 고기가 좋아요!”
“기다려 봐.”
채소들만 잔뜩 꺼내자 정신비가 볼에 바람을 잔뜩 넣으며 말했다. 하지만 진짜 주인공이 아직 나오지 않았기에 서준이 정신비를 진정시켰다.
애초에 파와 양파 그리고 마늘은 한식의 기본재료가 아닌가, 서준은 칼을 빠르게 다루며 채소들을 손질하기 시작했다.
각성하고 신체 능력이 강해지고 감각도 예민해지다 보니 칼질이 그 전보다 더 잘되는 것만 같았다.
서준은 텔레비전에 나오는 유명 요리사들처럼 현란하게 칼질하며 채소를 손질했다.
“어디 보자… 이게 좋겠네.”
서준은 찬장을 열어 냄비를 골랐다. 인원이 꽤 되기에 작은 냄비로는 부족할 것 같아서 약국에 있는 가장 큰 냄비를 골랐다.
약국이지만 취사장도 있는 곳 그곳이 바로 호랑이 약국이고 서준의 약국이었다. 사실 약국 기능을 못 하고 있었으니 서준의 집이나 다름없었다. 오히려 진짜 집으로 사용하던 2층에는 안 올라간 지 오래였다.
서준은 냄비에 물을 가득 채워 넣고 손질한 채소들을 몽땅 집어넣었다. 그리고 오늘의 주인공인 꿀닭을 냉장고에서 두 마리 꺼내서 통으로 냄비에 넣었다. 다른 조미료는 필요 없었다. 필요한 맛은 꿀닭이 모두 내어줄 테니까.
그리고 서준은 휴대용 버너를 꺼냈다. 약국에 인덕션이 있었지만 그래도 휴대용 버너를 꺼내 그 위에 냄비를 올려놓았다.
“응? 형님, 인덕션 고장 났습니까?”
“아니, 그냥 이게 빨라서.”
오세근은 서준의 행동에 의아해하다가 다시 숙취가 찾아왔는지 관자놀이를 지그시 누르며 다시 고개를 푹 박아 처넣었다.
서준은 불을 올리고 냄비 뚜껑을 닫았다. 그리고 게이트를 열어 냄비를 게이트 너머로 보냈다.
이게 서준의 비법이었다. 긴 조리시간을 엄청나게 단축할 수 있는 서준만의 필살기였다.
뭐 능력을 알아챌 수 있다면 알아채라지. 상관없었다. 이미 서준은 이들을 상당히 믿고 의지하고 있었다.
“18… 19… 20.”
서준은 정확히 20초를 센 후 다시 게이트를 열어 휴대용 버너를 가져왔다. 냄비 뚜껑을 여니 연기가 올라오며 꿀닭의 냄새가 약국 전체에 가득 퍼졌다.
“와… 냄새 좋다.”
김비서가 저도 모르게 감탄의 말을 꺼냈다.
“형님, 그거 그냥 그대로 먹죠? 국물 마시면 해장 끝장날 거 같은데.”
“조금만 더 기다려 봐.”
이대로 그냥 먹는다면 요리사의 자존심에 금이 가는 법이었다. 서준의 목표는 고작 백숙이 아니었으니까.
서준은 닭을 꺼내서 잘게 찢은 후 통에 담았다. 육수 역시 다른 통에 곱게 담아 둔 후 뚜껑을 닫았다. 그리고 두 통을 아이스박스에 넣은 후 다시 게이트 너머로 던졌다.
이제 얼마 후 가져오면 둘 다 차갑게 식어있을 것이다.
“다들 얼마나 먹을 거야?”
“형님 초계 국수 하는 거죠?”
“그래.”
“저는 곱빼기요.”
“저도요!”
“저도요!”
서준이 요리하는 모습을 보고 오세근이 메뉴를 알아챘다. 이 정도나 봤는데 모를 수가 없었다. 닭을 차게 해서 먹는 요리가 그렇게 많지는 않았고 냉면과 흡사하다니 초계 국수 말고는 없었다.
서준은 냉장고에 숨어있던 메밀면을 한 봉지 꺼내서 큰 냄비에 삶았다. 이건 그리 오랜 시간이 걸리지 않았기에 지구에서 해결했다.
이후 찬 얼음물에 박박 씻어내고 물기를 말끔히 털어내었다.
그리고 다시 게이트를 열어 아이스박스를 가져와 열어보니 그 안에는 차갑게 식은 닭고기와 육수가 있었다.
“거의 다 됐어. 조금만 기다려.”
-어흥! 어흥!
-캬앙! 캬앙!
-크릉! 크릉!
거의 다 되었다. 그런데 호랑이들이 배고픈지 아우성치기 시작했다. 서준은 냉장고를 열어 꿀닭 포대를 양손에 들고 집어 던져주었다.
어차피 호랑이들이 초계 국수를 먹지는 않을 테니 먼저 먹게 해줘도 상관없었다.
-어흥! 캬앙! 크릉!
호랑이들은 신이 나서 자루를 헤집으며 꿀닭을 입에 물고 각자 좋아하는 구석 자리로 가 씹어먹기 시작했다.
그 모습을 흐뭇하게 지켜보던 서준은 식초와 설탕 그리고 간장과 소금을 적절히 섞어 소스를 만들었다.
이후 기름이 떠오른 차가운 닭 육수에서 기름을 거둬낸 후 소스를 넣고 차갑게 식힌 메밀면과 찢어놓은 닭고기를 넣었다.
“완성!”
완성이다. 육수를 한 숟갈 먼저 먹어보니 끝내줬다. 이번 요리는 대성공이었다. 애초에 꿀닭을 사용했으니 실패하기도 힘들었지만 거기에 서준의 훌륭한 손맛이 첨가되니 정말 최고였다.
“자, 먹자. 이건 신비 꺼. 나머지는 알아서 각자 하나씩 가져가.”
정신비는 아직 어리기 때문에 양이 조금 적었다. 나머지는 큰 대접에 면이 한가득 들은 국수를 하나씩 가져갔다.
“와… 대박! 형님! 그냥 요리사 하셔도 되겠어요!”
성격 급한 오세근이 국수를 받자마자 후루룩거리며 그대로 흡입하기 시작했다. 그 맛에 진심으로 감탄했는지 서준을 보며 연신 찬사를 보내다가 대접에 얼굴을 처박고 다시 흡입하기 시작했다.
“이건, 정말… 훌륭하군요. 제가 먹어본 국수중 최고입니다.”
김비서도 한 젓갈 먹더니 감동의 표정을 지으며 말했다. 만약 이 표정이 연기라면 김비서는 당장 영화 오디션을 봐야 했다. 그만큼 진한 감동의 표정이었다.
“아저씨! 이거 완전 맛있어요! 냉면보다 더 맛있어요! 최고예요!”
서툰 젓가락질을 하며 메밀면을 한 젓갈 입에 넣은 정신비도 눈이 휘둥그레지며 말했다.
서준은 앞으로 정신비가 초계 국수를 해 먹자며 졸라댈 게 벌써 머릿속에 그려졌다.
‘기분 좋네.’
정성스레 준비한 음식이었다. 모두가 맛있게 먹어주니 서준의 기분이 절로 좋아졌다.
숙취로 고생한 와중에 집중해서 요리를 하니 머리가 더욱 지끈거리긴 했지만 기분이 좋았기에 괜찮았다.
-짐도 먹어보고 싶구나.
그 모습을 지켜보던 별이 말했다. 하지만 아쉽게도 그렇게 해줄 수는 없었다. 방법이 없었다.
‘나 먹는 거 보고 대리만족이나 해라.’
-너라는 인간은 참으로 잔인하구나!
서준은 별의 말을 무시한 채 국수를 먹기 시작했다. 최고였다. 정말 맛있었다.
직접 한 음식이었지만 정말 맛있었다. 꿀닭과 서준의 손맛 이 조합은 정말 최고였다.
“나 그냥 약국 접고 식당이나 할까?”
“저는 찬성입니다.”
“저도 찬성입니다.”
서준의 말에 오세근과 김비서가 동시에 답했다.
“줄이 상당이 길어지겠네요.”
김비서의 말이었다. 하긴, 이 정도의 맛이면 가격이 비싸더라도 줄 서서 먹을 게 뻔했다.
“그냥 우리 길드 전속으로 뛰시죠? 최고 대우해드릴게요! 형님!”
“그것도 좋네요! 저도 찬성입니다!”
오세근이 말하자 김비서가 맞장구쳤다. 서준은 새삼 김비서의 아부 능력에 감탄하며 미소를 보였다.
그냥 이러고 있는 것 자체가 행복했다. 마치 대침공 이전처럼 평화로운 세상으로 돌아온 것만 같았다.
서준은 국수를 맛있게 먹고 있는 이들과 꿀닭을 맛있게 먹고 있는 호랑이들을 보며 흐뭇한 미소를 짓다가 다시 국수를 먹기 시작했다.
다시 한번 얘기하지만 참 맛있었다.
‘내일 또 먹어야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