86화.
‘꽂을게?’
-어서 하거라!
‘후… 긴장되네. 정말 해도 돼?’
-어서 하라고! 뭘 그렇게 꾸물거리는 거냐!
‘알겠어, 알겠어. 긴장돼서 그랬어 무슨 일이 날지 어떻게 알고? 지난번에도 죽을 뻔 했잖아. 너.’
숨어있던 정신비를 데리고 별의 동상을 찾아온 서준은 한껏 긴장한 표정이었다.
동상에 아티팩트를 흡수시키면 어떤 일이 일어날지 알 수 없었기 때문이었다.
서준은 귀걸이 모양의 아티팩트를 조심스레 동상의 귓불 부분에 가져다 대었다.
기사의 창을 본뜬 모양을 하고 있던 동상의 귀걸이는 짙은 먹물의 색에서 짙은 강철의 색깔로 변해가며 물들었다.
다시 보아도 아름다운 귀걸이였다.
-덜컹!
하며 동상이 움직이기 시작했다. 이전과 마찬가지로 동상은 검을 들어 하늘 너머 어딘가를 가리켰고 강렬한 빛이 그곳을 향해 쏘아졌다.
그동안의 경험으로 미루어 보았을 때 이 주일 정도 달리면 도착할 수 있는 거리였다.
다음 서준의 목적지였다.
‘괜찮아?’
-그래… 견딜 만하군. 짐의 재능은 역시 엄청나구나!
지난번 흡수 때는 별이 굉장히 고통스러워했었다. 그러나 이번에는 익숙해지기라도 했는지 별은 능숙하게 영혼 조각을 흡수했다.
대륙 역사상 최고의 천재라고 불리던 군주였다. 추태는 지난 한 번으로 족했다. 별은 영혼을 아주 완벽하게 흡수해냈다.
‘그럼 가볼까?’
-그래. 어서 가자고.
서준은 어흥이의 등 위에 올라타며 자연스레 일행을 이끌었다. 이 주일의 긴 여행의 시작이었다.
가까운 거리는 아니었지만 더 이상은 지체할 여유가 없었다. 괴수들이 언제 성장을 마쳐 게이트를 넘어 지구로 침공해 올지 알 수 없었다.
게다가 시간 괴리 덕분에 놔두면 놔둘수록 쑥쑥 성장하는 놈들의 성장력 역시 두려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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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허억… 허억… 허억…. 죽겠네, 정말.”
서준은 숨을 헐떡이며 매우 지친 기색을 보였다. 안색은 파리해졌으며 허리는 굽었고 무릎은 땅에 닿기 직전이었다.
서준이 차고 있던 아티팩트들은 이미 모두 그 힘을 잃어 재충전 상태로 들어간 지 오래였다.
-캬앙! 카앙!
정신비를 지키던 캬앙이는 이제야 끝이 났다는 걸 알아챘는지 긴장을 풀고 낮게 갸르릉 댔다.
직접 전투에 참여하지는 않았지만 튕겨 나오는 전투 파편으로부터 정신비를 지켜내느라 고생을 했다.
-어흥! 어흥!
-크릉! 크릉!
전투에 직접적으로 참여한 어흥이와 크릉이는 서준과 마찬가지로 매우 지친 기색이 역력했다.
두 호랑이는 갈라진 목소리를 내며 숨을 헐떡였다.
-아직 성장하기 전이라서 다행이었어. 조금만 더 늦었다면 오히려 잡힐 뻔했다고. 아마 며칠만 더 시간을 줬으면 네놈이 졌을 거다.
‘그러게. 나도 상당히 강해졌다고 생각했었는데…… 앞으로 조금 더 서둘러야겠어. 이것들한테 시간을 주면 안 될 것 같아.’
별의 동상이 가리킨 방향 끝에는 양의 모습을 한 괴수 한 마리가 있었다. 그 크기가 버팔로 한 마리에 버금가는 거대한 양이었다.
다행히 놈은 아직 완숙히 성장하지 못한 상태였고 서준의 일행은 아티팩트와 별부름탄을 모두 쏟아 부어가며 겨우 사냥에 성공했다.
그야말로 전력을 다했고 한 끗 차이로 겨우 승리했다.
“얘들아, 오늘은 특식이다. 맛있게 먹어.”
-어흥! 캬앙! 크릉!
호랑이들은 식욕이 정신을 지배했는지 지쳤다는 사실도 어느새 잊은 채 양의 사체를 향해 달려들었다.
별의 영혼을 먹고 성장한 괴수였다. 비록 완숙하지는 못했지만 서준의 일행을 상당히 몰아넣은 것만 보아도 굉장한 녀석이었다.
이 녀석을 먹는다면 호랑이들도 한층 성장할 것이 분명했기에 서준은 흡족한 표정을 지었다.
-그럼, 이제 챙길 걸 챙겨야지?
‘다행히 눈에 보이는 곳에 모셔뒀네.’
서준은 양의 둥지를 향해 갔다. 이놈은 특이하게 둥지를 만들어놓고 그곳에서 생활했다.
개체 자체의 특성인지 별의 영혼에 의해 변한 것인지는 알 수 없었다.
그리고 둥지의 중앙에는 반짝이며 빛나는 귀걸이가 있었다. 이전 꿀닭에게서 얻은 것과 한 쌍을 이루는 귀걸이였다.
이 역시 마찬가지로 기사의 창을 본뜬 모양이었다.
-좋아! 아주 좋아! 오늘은 짐의 영혼이 풍족해지는 날이로구나!
‘다 모을 날도 얼마 남지 않았네.’
-훌륭하구나! 짐이 제자를 아주 잘 가르쳤어! 하하하하하!
서준은 고개를 절레절레 흔들며 신이나 날뛰는 별을 뒤로 한 채 정신비의 머리를 쓰다듬어 주었다.
정신비는 신이 나서 양의 사체를 뜯어먹고 있는 호랑이들을 흐뭇하게 바라보고 있었다. 호랑이들이 기분이 좋으니 본인의 기분도 절로 좋아진 듯했다.
그리고 그 시각 지구에서는 평화로운 서준의 일행과는 다르게 비명이 쏟아져나오고 있었다.
“막아! 막아! 어떻게든 막으라고!”
“지원은? 언제 온대? 더 이상은 무리라고!”
헌터로 보이는 자들이 괴수와 맞서며 소리치고 있었다. 헌터의 수는 대충 세어봐도 백이 넘었고 괴수는 단 한 마리였다.
그러나 전세는 괴수에게 유리하게 흘러가고 있었다.
“연락이 왔습니다! 창왕이 오고 있답니다!”
“오! 알라시어!”
“조금만 버텨라! 창왕이 온다!”
창왕, 이집트의 최종 병기이자 창의 신이라고도 불리는 창술가였다. 단신으로 이집트를 GOTY의 우승팀으로 만든 적도 있는 괴물이었다.
말 그대로 괴물 같은 저 괴수 놈도 창왕이 온다면 어떻게든 처치할 수 있지 않을까? 하는 희망이 생겼다.
헌터들은 힘을 내서 괴수를 향해 공격을 퍼붓고 있었다.
“태양 길드가 전멸했습니다!”
“이쪽도 심상치 않습니다!”
“창왕은 언제 오는 거야!”
그러나 상황은 그렇게 여유롭지 못했다. 괴수가 발걸음을 한 번씩 옮길 때마다 길드가 하나씩 사라졌다.
창왕이 오는 걸 기다리는 동안 벌써 절반의 길드가 사라졌다.
그나마 다행인 것은 죽은 헌터만큼 곳곳에서 지원이 와 새로운 병력이 채워 넣어졌다는 것이다.
이집트의 모든 헌터들은 재앙을 막기 위해 이곳으로 총출동했고 하나둘씩 집결하고 있었다.
그들은 목숨을 바쳐가며 조국과 그곳에서 살고 있는 가족들을 위해 괴수에게 달려들었다.
그리고 그때.
“왔다! 모하메드가 왔다!”
후방에서 원거리 공격을 쏟아붓고 있던 헌터 한 명이 소리쳤다.
“창왕이다! 창왕이 왔어!”
“모두 길을 열어! 창왕이 놈에게 접근할 수 있도록 길을 열어라!”
“길을 열어라!”
“길을 열어라!”
전투에 참여 중인 모든 헌터가 힘을 얻어 소리쳤다. 다리 한쪽이 뜯겨나간 헌터도 희망을 보았는지 기쁘게 웃으며 소리쳤고 이제 열다섯이 갓 넘은 어린 헌터도 기뻐 소리쳤다.
“이제부터 내가 상대하겠다!”
그리고 그런 기대에 부응하듯 창왕 모하메드는 괴수를 향해 다렸다. 허벅지가 터질 듯이 부풀어 올랐고 이윽고 다시 수축하자 어느덧 창왕은 괴수의 앞에 도착했다.
온몸이 붉게 타오르는 말과 창왕이 대면하는 순간이었다.
말 괴수의 모습은 지금껏 별의 영혼을 먹어치운 괴수들과는 달랐다. 지금껏 별의 영혼을 먹어치는 괴수들은 모두 그 크기가 과도하게 커져 그 움직임만으로도 큰 피해를 주는 괴수들이었다.
그러나 말 괴수는 그렇지 않았다. 붉게 타오르듯 새빨간 피부와 두 눈을 제외하면 보통의 말보다 살짝 큰 정도에 그치지 않았다.
뭐, 투레질 할 때마다 불꽃이 뿜어져 나온다는 것 역시 특별했지만 이 괴수 개체 자체의 특성이었지 별의 영혼 덕이 아니었다.
콰앙! 소리와 함께 말 괴수와 창왕이 맞붙었다. 별의 영혼을 오로지 강력한 근력과 순발력을 위해 모두 소모한 말 괴수였다. 거대한 신체를 포기한 채 강력한 힘만을 좇은 괴수였다.
아무리 창왕이라고 하지만 당해낼 수 있을 리 없었다. 그리고 그 사실을 창왕과 주위의 헌터들 역시 잘 알고 있었다.
창왕과 괴수가 충돌하는 순간 주위를 둘러싸고 있던 수백의 헌터들이 함께 달려들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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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집트를 향한 애도의 물결이 전 세계를 돌고 있습니다.>
<현재 집계된 바로는 사망자가 백오십만 명에 이르며 그중 헌터는 만 명이 넘어가는 것으로 알려졌습니다.>
<이번 게이트로 인해 현재 파악된 것으로만 쳐도 무려 이집트 인구의 1%가 사망했습니다.>
<더 이상 게이트를 방치하지 말고 닫아야 한다고 주장하는 목소리가 전 세계를 뒤덮기 시작했습니다.>
뉴스 화면에는 참담한 이집트의 모습이 스쳐 지나갔다. 모든 건물은 무너져내렸고 도로는 박살 났다.
도로를 가득 메운 자동차들 역시 대부분 파손되었으며 이집트의 자랑 피라미드가 무너졌다.
스핑크스의 몸통은 두 조각으로 나뉘었고 이집트의 대통령이 사망했다.
이번 게이트는 단일 게이트로는 가장 큰 피해를 입힌 게이트로 기록되었다.
그만큼 보스는 강력했고 결과는 참담했다.
최전선에서 맞서 싸운 모하메드는 중상을 입어 병원에 실려갔다. 이집트의 내로라하는 초인 의사들이 모두 달라붙었지만 그 앞을 장담하기 힘들다는 소식도 전해졌다.
“하아…….”
서준은 착잡한 마음에 한숨을 길게 내쉬었다. 이 모든 일이 서준이 게이트 너머에서 양 괴수와 싸우고 있을 때 일어난 일이었다.
물론 서준이 지구에 있었다고 해도 막을 수 없는 일이었고 결과 역시 변함없었을 거라는 것을 잘 알고 있었지만 마음이 착잡한 건 어쩔 수 없었다.
게다가 모하메드와는 이미 GOTY에서 한 번 몸을 섞어본 적이 있었기에 더욱 그랬다.
-이미 일어난 일 어쩔 수 없다. 기운 차리거라.
‘그래… 그래도 안타까운 건 어쩔 수 없네. 모하메드 그 녀석… 정말로 용감하고 정의로운 녀석이었는데. 괜찮은 놈이었어.’
-그래도 그놈이 있었기에 이 정도로 끝난 듯싶구나. 그놈이 아니었다면 배는 더 죽었을 수도 있겠어.
서준은 씁쓸한 마음을 억지로 털어냈다. 더 이상 우울해봤자 상황은 달라지지 않는다. 빨리 털어내고 다음을 준비하는 게 옳았다.
‘속도를 조금 더 높여야겠어.’
-그래. 다음 목적지를 알아냈으니 준비를 마치는 대로 바로 출발하자고.
‘그래.’
별부름탄을 모두 소모했기에 창천 길드에 들러야 했다. 그 외에도 자잘하게 준비할 것들이 많았다.
이번에 양 괴수를 잡으면서 또 다른 영혼 조각을 얻었기에 다음 목적지를 알아냈다. 다행히도 동상과 그리 멀지 않을 곳에 있었다. 준비를 끝마치는 대로 달려가면 요번 주 안에 처리할 수 있을 듯싶었다.
‘근데… 저거는 아무래도 가져오기 힘들겠지?’
-머리를 잘 굴려 보아라.
‘말은 쉽지.’
-쯧쯧쯧, 짐이 몸만 있었다면 진작에 가져왔을 것이다.
서준은 뉴스에서 보여주는 아티팩트를 보며 별에게 말했다. 요번 이집트 게이트에서 나온 별의 영혼이었다.
아무래도 저걸 회수하는 건 다음으로 미뤄둬야 했다. 가져올 명분이 없었다.
단지 아티팩트만 존재했다면 어떻게라도 가져올 만했는데 지금 상황은 조금 특별했기에 가져오는 건 더 힘들어졌다.
-그나저나 창잡이 놈이 대단한 일을 해냈구나.
‘그러게. 덕분에 네 영혼 회수하는 건 더 힘들어졌지.’
모하메드는 그야말로 믿을 수 없는 일을 해냈다. 서준은 상상치도 못했던 일이다. 비록 쓰러져 의식을 잃은 상태지만 그가 깨어난다면 모하메드를 막아낼 헌터는 아마 이 세계에선 없을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