81화.
유적이 있었다. 황제 동상의 검 끝이 가리킨 곳이었다. 서준과 일행은 반나절 정도 달려 그곳에 도착했다.
-용의 유적이군.
‘용의 유적?’
-그래, 용이 수명을 다해 승천할 때 그의 둥지는 이렇게 유적화된다.
‘가능한 일이야?’
-용이란 그런 종족이다.
용, 여기서 말하는 용이란 동양 용이다. 용이 수명을 다해 승천할 때면 그가 머물고 있던 둥지는 유적화되었다.
생전 그가 품고 있던 사소한 물건들은 보물이 되었고 유적에 벽면에는 용의 예언이 남겨지기도 했다.
미로처럼 변해버리는 유적도 있었으며 아주 단순한 둥지 형태 그대로 남는 유적들도 있었다.
그 형태와 규모는 생전 용의 사상에 따라 매번 달리했다.
-벽을 한번 세게 쳐보아라.
‘갑자기?’
-일단 해보거라.
서준은 장도리를 들고 벽을 아주 강하게 쳤다. 쿵 소리와 함께 큰 진동이 울렸지만 벽에서는 자그마한 돌 부스러기도 떨어지지 않았다.
-이렇듯 용의 유적은 웬만한 충격으로도 파괴되지 않지. 그리고 이게 바로 용의 유적이란 가장 큰 증거다.
‘더 세게 쳐도 안 부서질까?’
-아무래도 네 수준으로는 무리지. 짐이라면 모르겠지만.
‘또 시작이네.’
서준은 자칭 황제의 말을 뒤로한 채 용의 유적 안으로 걸어 들어갔다.
이곳에 있는 용의 유적은 평범한 동굴 형태였다. 어떤 용은 궁전 형태의 유적을 남기기도 한다는데 이 용은 꽤 소박한 용이었나보다.
‘이곳에서 뭘 찾으라는 걸까?’
-글쎄다? 그걸 내가 알면 이미 알려줬겠지?
‘아는 게 뭐냐?’
-닥쳐라.
굴의 크기는 매우 컸지만 그 길이 외길인지라 길을 헤매는 일은 없었다. 게다가 동굴 안쪽은 신비하게도 어둡지 않고 은은한 불빛이 계속해서 흘러나왔다.
‘이 불빛은 용의 마법인가?’
-아니, 그냥 유적의 신비라고 생각하면 편하다. 용이 죽을 때 밝은 동굴을 원했나 보지.
‘거참 대단한 족속들이네.’
-용 앞에서 그런 소릴 함부로 지껄였다간 바로 모가지 날아갈걸?
동굴의 벽면에는 벽화들이 그려져 있었다. 아주 빼곡히 그려져 있었다.
‘용이 인간에게 관심이 많았나 보네? 죄다 인간의 그림이야.’
-모든 용은 인간에게 관심이 많았다. 인간과 어울리기 위해 별의별 짓을 다 하던 게 용이란 놈들이야.
‘왜?’
-그건 기억이 안 난다…….
벽에 그려진 그림들 중 인간이 없는 그림은 없었다.
인간과 괴수가 싸우는 그림도 있었고 인간끼리 서로를 죽이는 그림도 있었다.
아무래도 인간과 괴수, 그리고 인간끼리의 전쟁을 벽화로 남겨둔 듯했다.
‘왜 이런 그림을 남겨놨을까?’
-글쎄다. 어찌 됐건 인간에게 관심이 많은 놈이었으니깐.
‘이곳에서도 전쟁이 계속됐나 봐? 용이 죽으면서 마지막까지 남긴 그림이 죄다 싸우는 그림이네.’
-전쟁은 많았지. 하지만 이 그림이 용이 본 광경을 그린 건지 미래를 예언한 건지는 몰라.
‘어떡하면 알 수 있는데?’
-끝까지 가 보면 뭐라도 나오지 않을까?
서준은 벽면에 그려진 그림들을 하나씩 살펴보면서 유적 안으로 계속해서 들어갔다.
사람 열 명이 들어가도 좁지 않을 넓이를 가진 동굴은 그 길이 역시 매우 길었다.
이십 분 이상 걸어들어온 것 같은데 좀처럼 끝을 보이지 않았다.
‘동굴에 그 흔한 박쥐 한 마리가 없네?’
-감히 용의 유적에 둥지를 틀 간 큰 짐승이 있겠냐? 사실 인간들도 웬만해서는 용의 유적에 들어오려고 하지 않아.
‘그런가?’
-그래.
용의 유적에 괴수가 있다거나 위험한 생물이 산다거나 하는 것은 아니었다. 그러나 웬만한 동물들은 용의 유적에 발을 들이지 않았다.
그 형태가 미로가 될지 단순한 동굴이 될지 들어가 보기 전에는 구분하기가 어려웠다.
겉으로 보기에는 단순해 보이는 유적도 그 속은 매우 복잡할 수도 있었다.
괜히 들어왔다 길을 잃는 경우 그 어떤 식물도 자라나지 않는 유적에서 그대로 굶어 죽는 일도 허다했다.
‘그나저나 너도 있고, 유적에 그림도 그렇고 이 세계에도 인간이 산다는 거잖아?’
-그렇지.
‘근데 왜 지금껏 그 모습이나 흔적을 발견하지 못했지? 내가 돌아다닌 곳이 꽤 많은데?’
-이곳은 너희 세계처럼 인간이 모든 것을 지배한 세계가 아니야. 인간의 영역은 그리 넓지 않다.
‘하긴…….’
괴수들이 사는 세상이다. 지금껏 서준은 이곳에 넘어와 아주 강한 괴수를 만나지는 못했다.
그러나 이곳의 미래가 투영되는 곳에서 지구를 향해 넘어오는 괴수들을 생각해보면 인간들이 이 세계를 지배하지 못한 것도 이해가 갔다.
지구에 고양이나 비둘기가 돌아다니듯이 괴수들이 돌아다니는 곳이 이곳이었다.
발에 치이는 게 괴수였다. 인간의 영역이 좁아질 수밖에 없었다.
‘그럼 도대체 지구로 넘어오는 괴수들은 누가 조종하는 거야?’
-글쎄다. 그것도 시간이 흐르면 차차 알게 되겠지.
‘너는 도대체가 아는 게 하나도 없구나!’
-닥쳐라!
지구를 향한 괴수들의 공격은 결코 우발적이지 않았다. 개별 종족의 변덕이 아니었으며 그 모든 종족을 관리하는 누군가가 분명히 있었다.
그것이 전 세계의 전문가들이 내놓은 결론이었다. 그리고 서준 역시 그 생각에는 동의하고 있었다.
이 역시도 서준이 재배지에서 밝혀내야 할 비밀 중 하나다.
‘여기가 끝인가 본데?’
-그런가 보군. 살펴보거라.
‘그래.’
한 시간 정도를 더 걸어 들어갔을 때에야 동굴의 끝에 다다를 수 있었다. 동굴의 끝엔 벽을 정교하게 조각해 만든 건축물이 있었다.
마치 요르단의 페트라와 같았다. 그러나 안으로 들어가는 입구는 없었고 겉모습만을 표현해놓은 듯했다.
‘무슨 의밀까?’
-글쎄다. 내 눈에는 그냥 용의 변덕으로만 보인다.
‘그런가?’
안으로 들어갈 수 없으니 용도가 무엇인지는 알아낼 수 없었다.
“우와! 아저씨! 궁전이에요! 궁전!”
“그래, 궁전이네? 사진이나 한 장 찍어줄까?”
“네! 얘들아! 이리 와!”
-어흥! 캬앙! 크릉!
딱히 위협요소도 없었기에 서준은 아이들을 세워놓고 사진을 한 장 찍었다. 힘들게 이런 곳까지 걸어왔는데 사진 한 장 정도 남기는 것도 나쁘지 않았다.
게다가 그 풍경이 워낙 훌륭했으니 대충 찍어도 작품이 나왔다.
“저쪽에 가서 애들이랑 놀고 있어.”
“네! 아저씨! 가자! 얘들아!”
-어흥! 캬앙! 크릉!
서준은 정신비와 호랑이들을 잠시 보내놓고 주위를 살피기 시작했다. 벽의 질감도 만져보고 건축물의 구조 하나하나를 건드려 보기도 했다.
-저기 뭐가 있는데?
‘응? 어디?’
-저기 말이다!
자칭 황제가 어딘가를 가리켰다. 물론 육체는 없었지만 서준은 정확히 느낄 수 있었다.
그곳으로 가 보니 페트라를 닮은 건축물 중앙에 웬 쇳덩이가 달려있었다.
주위와는 확연히 구분되는 물질이었다. 온통 흙색으로 가득한 곳에서 홀로 회색의 빛을 뿜고 있었다.
-이거 수상하지?
‘응, 만져볼까?’
-만져봐라.
‘위험하진 않을까?’
-괜찮다. 용의 유적은 그 구조가 복잡할 때나 위험한 거지 그 안쪽에 있는 물건들이 위험한 경우는 드물다.
그 말을 들은 서준은 조심스럽게 쇳덩이에 손을 가져다 대었다. 둥그런 모양의 쇳덩이는 벽에 박혀서 그 절반만을 내놓고 있었고 서준의 손은 자연스럽게 그 쇳덩이 위로 올라갔다.
마치 서준의 손 크기에 맞춘 듯 쇳덩이는 서준의 한 손에 그대로 들어왔다.
“윽!”
그리고 그와 동시에 서준의 머릿속에 방대한 양의 이미지가 들어왔다.
용의 기억이었다.
태초의 대륙을 통일한 한 인간이 있었다. 그의 이름은 별, 별의 힘을 사용하는 그를 사람들은 그를 우러러보며 별이라고 불렀다.
그의 통치 중에는 세상은 평화로웠다. 인간의 영역은 점점 더 넓어졌으며 괴수들의 침공은 점점 줄어들었다.
인간과 무조건 적대하던 괴수들 중 인간의 품으로 들어와 사육되는 종족들도 생겨나기 시작했다.
인간들은 사육된 괴수들을 먹으며 힘을 길러왔다. 기존에는 외부의 괴수를 먹어서 강해질 수 있었다, 해서, 일부의 사람들만이 신비의 힘을 누리며 살아왔다.
그러나 그 이후 모든 인간들은 신비의 힘을 누릴 수 있게 되었고 그 세력 역시 점점 더 커갔다.
허나 그것이 화를 불렀다. 자칭 황제의 자리를 욕심내는 세력들이 생겨나기 시작했다.
그리고 결국 자칭 황제의 영혼은 이리저리 찢겨 그가 사용하던 물건에 담겼고, 이후 온 세상으로 흩어졌다. 그리고 그것이 최초의 아티팩트가 되었다.
-이거… 내 얘기냐?
‘그런 것 같은데?’
-내, 내 이름이… 별…….
‘진짜로 황제였나 보네?’
-잠시 생각할 시간이 필요하다.
‘그래.’
혼란스러울 법도 했다. 영혼이 찢기며 대부분의 기억을 상실했던 녀석이었다.
서준은 생각에 잠긴 별을 뒤로한 채 쇳덩이 주위를 바라보았다.
쇳덩이 주위에는 이전과는 다르게 벽화가 새겨져 있었다. 용의 기억을 들여다보는 동안 생겨난 듯했다.
‘그나저나 별이라니…. 참, 안 어울리는 이름이네.’
놈의 행동과는 안 어울리게 이쁜 이름이었다.
-생각 좀 하자!
‘미안.’
서준은 진짜로 별을 뒤로한 채 벽화를 살펴보기 시작했다.
벽화의 내용은 이러했다. 커다란 뱀이 왕관을 쓰고 있었고 커다란 원숭이가 망토를 두르고 있었다.
그 밖에도 지구에서 십이지신에 해당하는 동물들이 각각의 물건들을 하나씩 가지고 있었다.
그리고 그중에서 도장과 단검도 있었다.
모두 별의 영혼이 담긴 물건들이었다.
‘도장과 망토는 지구에서 발견되었고… 단검은 빈집에서 찾았는데?’
아마도 이 벽화는 훗날 별의 영혼이 담긴 아티팩트를 차지하게 되는 괴수들을 그려놓은 예언인 듯했다.
실제로 왕관의 경우는 뱀 모양의 괴수 바실리스크가 차지했다. 단검의 경우 아직 괴수의 손에 들어가기 전에 서준이 찾아낸 경우였다.
‘앞으로 많으면 여덟은 처치해야 하는 건가…….’
서준은 원을 그리며 새겨져 있는 열두 마리의 괴수를 바라보았다. 그리고 그 중앙에 그려져 있는 익숙한 형태의 무언가를 발견했다.
‘나무…….’
재배지 섬에 심어놓았던 나무였다. 일전에 열매를 맺어 서준에게 특별한 힘을 선사해주었던 그 나무였다.
‘이 나무가 왜 여기에 있는 거지?’
나무의 정체는 별에게 물어보려 했었다. 그러나 기억을 잃은 별은 별다른 해답을 찾아주지 못했다.
하지만 이곳에 새겨져 있는 것을 보면 분명 특별한 무언가 있는 나무였다. 그리고 그 특별한 무언가는 별과 관련 있을 것이 분명했다.
-후우…. 복잡하군.
‘이제 정신 좀 차리겠어?’
-그래, 과거의 내 모습을 갑자기 보게 되니 당황스럽네.
이름조차 잊었던 별이었다. 본인의 과거를 남의 머릿속에서 보게 되니 당황할 수밖에 없었다.
그러나 회복하는 데는 그리 오랜 시간이 걸리지 않았다.
-이건… 용의 예언이로군.
별이 벽에 새겨진 벽화를 바라보며 말했다. 쇳덩이를 만진 후 나타난 벽화는 용의 예언이었다.
‘저 나무가 뭔지는 알아보겠어?’
-아니, 그건 아직이다. 대신 네가 해야 할 일이 무엇인지는 확실히 알았다.
‘뭔데?’
-열두 괴수를 모두 처치하고 내 영혼 조각을 모두 모아라. 그럼 실마리를 찾을 수 있을 거야.
‘그건 원래 하려던 일이잖아?’
-그렇긴 하지. 하지만 이제 그 목표가 확고해졌잖아?
본래부터 영혼을 모두 모아주려 했다. 믿기 힘든 말이긴 했지만 어찌 되었건 영혼을 모아준다면 소원을 이루어준다는 별의 말을 믿기로 했다.
해서 서준은 별의 영혼을 찾는 모험에 동참한 것이다.
달라진 건 하나였다. 영혼 조각의 개수를 이제는 정확히 알았다. 막연히 모으던 아티팩트도 이제는 그 목표가 명확해졌다.
-찾다 보면 또 다른 용의 유적도 찾을 수 있겠지. 거기서 다른 예언을 찾아가다 보면 실마리를 잡을 수 있을 거야.
‘그래, 한번 해보자고.’
막연했던 목표가 확고해졌다. 서준의 눈에도 더욱 총기가 돌기 시작했다.
이제는 정말 해볼 만했다.
그리고 바로 그때 쇳덩이를 중심으로 벽에 금이 가기 시작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