80화.
서준은 어흥이의 등 위에 올라타서 계속해서 달렸다. 자칭 황제가 인도하는 데로 무작정 달려갔다.
그리고 그곳에는 작은 동상이 있었다. 위로 산발처럼 떠오른 머리카락에 작은 체구, 꼭 어디서 본 적이 있는 것만 같은 동상이었다.
-짐의… 짐의 동상이로구나!
‘네 동상이라고?’
-그렇다! 바로 짐의 동상이구나!
‘어디서 본 것 같은데…….’
-아쉽지만 짐의 위엄이 지구까지 떨치진 못했으니 착각일 거다.
자칭 황제의 말 그대로였다. 하지만 서준은 어디선가 본 적 있다는 느낌을 지울 수가 없었다.
동상의 모습은 그만큼 서준에게 익숙했다.
‘아! 어린 왕자!’
-뭣이? 아직도 짐에게 어린이라고 하는 게냐!
‘아니, 그게 아니고 어린 왕자랑 똑같이 생겼어!’
-짐은 어린이가 아니다!
어린 왕자 책에 그려져 있던 삽화와 똑같았다. 머리의 모양부터 체구, 얼굴의 윤곽까지 매우 흡사했다. 게다가 이 망토의 모양까지 매우 흡사했다.
물론 다른 점도 있었다. 들고 있는 검의 모양이 달랐고 어린 왕자는 왕관을 쓰고 있지 않았다.
-흐음…. 그렇단 말이지.
‘우연이겠지 뭐. 중요한 건 아니잖아?’
-그래. 하지만 그럴 수도 있고 아닐 수도 있다.
‘뭔 소리야?’
-짐의 위엄이 지구까지 뻗어 나왔을 수도 있다는 소리지.
‘응, 그건 아니야.’
서준은 자칭 황제를 말로 짓누른 뒤 온통 검은색으로 덮여있는 흙색의 왕자 동상을 바라보았다.
망토 속에 잠들어 있는 영혼이 인도한 장소였다. 그리고 그 장소에는 이 동상이 하나 놓여있었고 자칭 황제의 모습을 본뜬 동상이라고 한다.
분명 이곳으로 인도한 이유가 있을 것이다.
서준의 눈에 동상이 쓰고 있던 왕관이 들어왔다. 짙은 검은색의 왕관이었다.
‘똑같이 생긴 거 같은데?’
-뭐가 말이냐?
‘동상에 있는 왕관이랑 네 왕관.’
-당연한 얘기를…….
서준은 품에 넣어둔 작은 왕관을 꺼냈다. 애초에 어린이용 사이즈였기 때문에 그리 크지 않았다.
그리고 동상이 쓰고 있는 왕관에 실물 왕관을 가져다 대자 실물 왕관이 동상 속으로 흡수되었다.
-무슨 짓을 한 거야!
‘아무것도 안 했어! 그냥 가져다 댔을 뿐인데…….’
-앗! 저걸 보거라!
당황한 서준이 변명하다가 자칭 황제의 말에 동상을 다시 바라보았다. 그리고 그 동상의 왕관이 황금빛을 되찾아 밝게 빛나고 있었다.
그 외의 모든 부분은 아직 빛을 잃은 검은 상태였지만 왕관만은 찬란하게 빛났다.
-빨리! 빨리! 다른 물건들도 해보거라!
‘응, 알겠어.’
서준은 주머니 속에서 단검을 꺼냈다. 이제 와서 보니 단검이 아니고 어린이 사이즈용 검이었던 것 같다.
아무래도 생전 자칭 황제의 신장이 꽤 작은 듯했다.
-웃지 말거라!
‘미안.’
그 생각을 눈치챈 건지 자칭 황제가 역정을 내었다.
사과를 한 서준이 실물 단검을 동상이 들고 있는 검정빛의 단검 위에 가져다 댔다.
그리고 역시 단검이 동상으로 흡수되었고 동상이 들고 있는 단검은 빛을 되찾았다.
‘이건 어디다 가져다 대야 해?’
서준이 주머니 속에서 도장 모양의 아티팩트를 꺼내며 물었다. 동상은 왕관도 단검도 망토도 패용하고 있었지만 도장은 따로 보이지 않았다.
-네 눈은 옹이구멍인 것이냐? 잘 보거라 저기 오른손에 도장을 들고 있지 않느냐!
‘뭐?’
서준은 동상의 오른손을 다시 살펴보았다. 그리고 확실히 동상은 도장을 들고 있었다.
‘와, 진짜네? 너무 작아서 안보였어.’
-쯧쯧쯧…. 항상 주위를 세심히 관찰할 줄 알아야지.
-시끄러.
서준은 도장 모양의 아티팩트를 동상에 가져다 대었고 역시나 아티팩트가 흡수되면서 동상이 들고 있는 도장이 색을 찾았다.
그리고 이제 마지막 망토만이 남았다.
‘이제 이거 하나 남았네.’
-그래. 어서 해보거라.
아직 망토 속의 영혼은 흡수하지 못한 상태였다. 다른 물건들이야 이미 영혼을 모두 흡수된 평범한 아티팩트에 불과했지만 이 망토는 달랐다.
자칭 황제의 영혼 조각이 담겨있었다. 이대로 동상에 흡수된다면 이 영혼 조각은 영원히 회수할 수 없을 수도 있었다.
서준은 긴장되는 마음에 침을 꿀꺽 삼켰다.
‘긴장도 안 돼?’
-짐이 하는 일에 실패 따위 없다. 그냥 하거라.
‘이럴 땐 또 대담하단 말이야?’
서준은 조심스럽게 동상의 목에 걸린 망토에다가 망토 모양의 아티팩트를 가져다 대었다.
그리고 앞선 상황과 같이 아티팩트가 사라지면서 동상의 망토가 색을 찾았다. 정열적으로 타오르는 붉은 태양 색이었다.
‘어때? 뭐가 좀 달라진 것 같아?’
-…….
‘야! 왜 그래?’
-…….
망토가 흡수되고 난 후 자칭 황제의 말이 사라졌다.
평소에 그렇게 조용하라고 해도 계속해서 재잘거리던 녀석이었다. 심지어 서준이 잠들었을 때도 계속 말을 걸어 서준을 깨운 적도 있었다.
그런데 그런 녀석의 말이 사라졌다.
‘혹시 영혼 흡수를 못 한 거야? 망한 거야?’
-…….
혹시나 망토 속에 잠들어 있던 영혼이 증발해 그 실망감으로 말을 잃었나 했지만 그것도 아닌 것 같았다.
자칭 황제는 그렇게 십 분이 지나도록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야, 뭐 말 좀 해봐. 그래야 대응을 하지!’
서준도 그 자리에 묶여 아무것도 하지 못한 채 하염없이 기다렸다.
-후우…… 죽을뻔했다.
그리고 그때 자칭 황제의 목소리가 다시 들려왔다.
‘무슨 일인데?’
놀란 서준이 다급히 되물었다.
-영혼이 영원히 흩어질 뻔했어. 짐의 신들린 제어 능력이 아니었다면 이대로 영원히 흩어져 사라졌을 거야.
‘왜 그런 건데?’
-나도 몰라, 기억을 되찾으면 알 수 있을 수도 있겠지.
‘너는 어떻게 결정적일 때마다 아는 게 하나도 없냐?’
-…….
‘그래서 이제 어찌해야 되는 건데?’
서준은 말을 하면서 무의식적으로 동상의 어깨 위로 손을 얹었다. 동상의 신장 자체가 매우 작아서 손을 쫙 펼쳐 어깨 위에 얹은 형국이 되었다.
“으악!”
그리고 그 순간 동상이 칼을 뽑아 위로 치켜들었다. 놀란 서준은 뒤로 점프하며 피하다가 엉덩방아를 찌었다.
‘뭐, 뭔데! 쟤 왜 저러는데?’
-기다려 봐라! 무언갈 하는 것 같다!
동상의 칼끝이 붉게 빛나기 시작했다. 그리고 그 붉은 점이 점점 앞을 향해 뻗어 나가더니 일정한 장소를 가리키는 듯했다.
그렇게 한 오 초간 그 지점을 가리키던 동상은 다시 검을 검집에 집어넣고 원래의 자세로 돌아왔다.
‘다음 장소 같지?’
-그런 것 같군. 과연 짐의 영혼이다. 이렇게까지 짐에게 돌아오고 싶어 하다니…… 훌륭하다!
‘일단 다음 행선지는 정해졌네.’
-그래, 일단 돌아가서 채비를 하자꾸나.
‘그래.’
또 하나의 영혼을 회수한 자칭 황제와 서준은 그대로 게이트를 열고 약국으로 돌아왔다.
“아저씨! 오셨어요!”
-캬앙! 캬앙!
-크릉! 크릉!
이제는 어느 정도 안정이 되어 서준과 떨어져 있어도 불안해하지 않는 정신비와 남아있던 호랑이들이 서준을 반겼다.
“그래, 이제 밥 먹을까?”
“네에!”
-어흥! 캬앙! 크릉!
서준은 식사 준비를 하면서 텔레비전을 켰다. 그리고 언제나처럼 뉴스 채널에 맞춰놓았다.
<강원도 평창 어느 산골의 동굴입니다. 이처럼 이 안을 보시면 커다란 구멍이 뚫려 있습니다.>
<이 절단면을 보면 아주 매끄러운 것이 자연적인 현상이라고는 보기 매우 어렵습니다.>
<이 현상은 게이트에 걸쳐있던 장소가 게이트가 사라지면서 발생하는 게이트 절단 현상과 매우 흡사합니다.>
<이곳에서도 게이트가 열렸다 닫혔을 가능성이 매우 큰 것으로 전문가들은 예측하고 있습니다.>
<하지만 게이트 관리국에서 감지한 게이트 중에서 이곳에서 열린 게이트는 없었습니다.>
<만약 이 추측이 사실이라면 빠져나간 괴수들이 2차 피해를 입힐 수 있기에 게이트 관리국은……>
서준은 뉴스를 보며 지난 일을 떠올렸다. 수련을 마치고 재배지 섬으로 돌아가는 길이었다.
요트를 타고 신대륙에서 재배지 섬을 향해 가는 길 중간에 작은 섬이 하나 있었다.
전체가 단단한 암석으로 이뤄진 작은 섬이었다.
바위로 이루어져 있기에 풀 한 포기 살지 않고 동물 한 마리 살지 않는 작은 섬이었다.
서준은 그곳에 요트를 세워둔 뒤 리버스의 은신처에 접근했다. 그리고 게이트를 열었다. 아주 크게 열었다.
게이트를 크게 여는 것은 힘든 일이었지만 그럴만한 보람이 있었다. 오랜 시간이 걸렸지만 견뎌낼 가치가 있는 일이었다.
해가 중천까지 뜬 어느 낮, 깊은 잠에 빠져있던 리버스의 은신처에서 일어난 일이었다.
리버스의 은신처는 지금 바다 한가운데의 바위섬 위에 올라가 있었다. 물론 그 일당들도 함께…….
“얘들아! 밥 먹자!”
“네!”
-어흥! 캬앙! 크릉!
식사 준비를 끝마친 서준은 아이들을 불러모았다.
#
“여기가 어디냐고!”
“바다…. 바다 한가운데 같습니다…. 대장님…….”
“그러니까 우리가 왜 여깄는 건데!”
“그건 저도 잘… 윽!”
화가 머리끝까지 난 유재학이 그 수하 하나를 걷어찼다. 유재학의 엄청난 발차기를 얻어맞은 그 부하 놈은 저 멀리 바다까지 날아가 그대로 풍덩 빠졌다.
“젠장! 배라도 만들어서 가져오란 말이야! 일단은 빠져나가야 뭘 하든 말든 할 거 아니냐!”
화가 난 유재학이 부하들을 돌아보며 소리쳤지만 달라질 건 없었다.
“없습니다…… 나무가 한 그루도 없습니다! 나무, 아니 풀뿌리조차 찾을 수가 없어요! 온통 바위투성이에요!”
“이런 씨발! 그걸 말이라고 하는 거야? 어떻게든 방법을 찾아내라고!”
열이 받아 계속해서 화를 내는 유재학은 그대로 바다로 몸을 던져 뛰어들어갔다.
그리고 그 뒤를 이어서 부하들도 바다로 뛰어들었다.
높게 뜬 태양이 바위 섬을 뜨겁게 달구고 있었고 그 열기를 이겨내지 못해 어쩔 수 없는 선택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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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일 바로 출발할 셈이냐?
‘너한테도 그게 낫지 않겠어?’
-그래 주면 고맙지.
‘영혼의 조작을 모았더니 조금은 얌전해진 것 같다?’
-고통이 줄어들었으니까…….
영혼이 찢기면 매 순간마다 엄청난 고통이 찾아왔다. 자칭 황제의 영혼은 셀 수 없을 만큼 많이 찢겨있었으니 그 고통이 엄청났을 것이다.
지금은 겨우 네 조각 모았을 뿐이지만 이것만으로도 그 고통이 상당히 경감되었다.
그 덕에 이전처럼 날뛰지 않고 조용히 서준 머릿속에 머물 수 있었다.
“그럼 가 볼까 얘들아?”
“네에!”
-어흥! 어흥!
-캬앙! 캬앙!
-크릉! 크릉!
다음 날 아침, 서준은 아이들을 데리고 게이트를 열었다.
동상의 검 끝이 가리킨 곳으로 향하기 위함이었다.
“신비야, 아저씨가 게이트를 열면 곧바로 약국으로 도망쳐야 돼, 알겠지?”
“네! 아저씨!”
전투가 발생하면 정신비를 약국으로 피신시킬 생각이었다. 탐험에 얼마나 오랜 시간이 걸릴지 모르기에 무작정 놓고 갈 수는 없었다.
아티팩트로 무장까지 시켰으니 대피할 시간은 충분했다.
“가자.”
“네!”
-어흥! 캬앙! 크릉!
서준은 어흥이의 위에 올라탔고 정신비는 캬앙이의 위에 올라탔다. 그리고 그 주위를 크릉이가 지켰다.
서준의 일행은 동상이 가리켰던 방향을 향해 빠르게 나아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