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골목약사 백선생-77화 (77/150)

77화.

“이거는 이 정도면 충분하고… 별부름탄을 더 챙겨야 하나?”

-다 들고 가 그냥!

‘시끄러.’

서준은 호랑이 약국의 지하 창고에서 전투에 필요한 약초들과 몇몇 물품들을 챙기고 있었다.

재배지에 가지 못한 지 꽤 되었기에 호랑이 약국의 창고는 지금 텅 비어있는 상태였다.

이제 정말 남은 걸 다 긁어모으는 수준이었다.

‘혹시 모르니 비상용으로 몇 개 남겨둬야지.’

-자꾸 뒤를 생각하니까 안 되는 거야. 오늘 바로 딱! 게이트 두 개 열고 다시 수확하러 갈 생각을 하고 노력을 해야지.

‘네가 그렇게 대책 없게 살아서 영혼 찢겨서 봉인된 거야 인마.’

-야!

서준이 이렇게 전투용 물품들을 챙기는 이유가 있었다. 오세근이 서준에게 부탁받았던 임무를 완수했기 때문이다.

오세근은 유명그룹의 정보력을 이용하여 리버스의 은둔 장소를 찾아내었다. 초인경찰이 몇 개월 동안 뒤져도 못 찾았던 것을 단 사흘 만에 찾아내었다.

‘역시 돈이 최고야.’

역시 돈으로는 못 하는 게 없었다. 서준은 내심 오세근과 더 친하게 지내야겠다고 다짐했다.

-삐리리리, 삐리리리.

그때 서준의 휴대전화 벨 소리가 울렸다.

“여보세요?”

<형님! 형님! 긴 밤 잘 주무셨습니까? 형님!>

오세근이었다.

“무슨 일이야?”

술도 마시며 한껏 친해진 데다가 서준의 부탁을 들어준 상태였다. 서준도 이제는 마음의 문을 열어 한껏 부드러운 목소리로 물었다.

<아우가 형님께 전화 거는 데 이유가 필요합니까? 그냥 목소리나 듣고 싶어서 전화했습니다! 형님!>

“어휴, 질리지도 않는구나.”

<그렇습니다! 형님!>

오세근은 여전히 밝은 목소리였다. 조증이라도 걸린 것인지 목소리 톤이 내려오는 걸 본 적이 없다.

<그나저나 형님! 리버스 놈들은 어떻게 하실 생각이십니까?>

“초인경찰에 넘겨야겠지?”

<초인경찰 말입니까?>

어차피 서준 혼자서 리버스 전체를 상대할 수 없었다. 그렇다고 유명 길드나 창천 길드의 손을 빌렸다가는 문제가 너무 커져 버릴 가능성이 컸다.

조용히 아티팩트를 빼낸 후 초인경찰에 넘겨버리는 게 최선이었다.

<그냥 제가 돕겠습니다! 형님! 저랑 같이 다 부숴버립시다!>

“그건 안 된다니까 그러네.”

<참, 형님도 걱정이 많으십니다.>

“너는 걱정 좀 더 하고 살아라.”

<돈 많으면 걱정 안 해도 잘 먹고 잘살 수 있습니다! 형님!>

서준은 오세근과 몇 마디를 더 나누다가 전화를 끊었다. 이렇게 서준 쪽에서 먼저 전화를 끊지 않으면 오세근은 정말 하루 종일 전화기를 붙잡고 있을 놈이었다.

다른 일들은 모두 아랫사람들에게 시키고 놀고먹는 게 일인 녀석이었기에 세근에게는 남는 게 돈과 시간밖에 없었다.

해서 세근은 휴대전화를 한번 잡으면 절대 먼저 놓지 않았다.

해서 매번 서준이 먼저 끊는 수밖에 없었다.

-매번 느끼는 거지만 저놈은 말이 참 많구나.

‘바쁘니까 말 그만 걸어.’

-이놈이! 감히 짐에게!

이미 오세근과 통화하면서 말을 너무 많이 했다. 말하는 게 귀찮아진 서준은 자칭 황제의 말을 무시하며 전투 준비를 차곡차곡하기 시작했다.

‘이 정도면 충분하겠네.’

-언제 갈 건데?

‘내일 해 뜨면.’

-보통은 해 떨어진 새벽에 가는 거 아닌가? 지구에서의 도둑질은 뭐가 좀 다른 거냐?

지구라고 별다를 건 없었다. 암살을 하든 도둑질을 하든 해 떨어져 앞뒤 분간이 안 될 때 하는 게 맞았다.

그래야 성공률도 높았고 도망치기도 쉬웠다. 대상도 잠들어 있는 상태에 가시거리도 짧은 시간이 가장 좋은 시간이었다.

그러나 서준의 선택은 정반대였다.

‘원래 나쁜 놈들은 주로 밤에 돌아다니거든.’

-그래서?

‘저놈들이 세상에서 제일 나쁜 놈들이잖아? 저놈들도 마찬가질 거란 말이지. 오히려 해 떴을 때가 저놈들이 자고 있을 시간이야.’

-아! 그렇군. 멍청한 줄만 알고 있었는데 제법 머리를 쓸 줄 알잖아?

‘닥쳐.’

-네 이놈! 감히 황제에게! 그런!

그동안 놈들이 저질렀던 테러 행각만 봐도 그랬다. 대부분 새벽 시간에 발생했다. 놈들 역시 보통의 나쁜 놈들처럼 밤에 활동하는 단체였다.

서준은 오래전부터 계획했던 것처럼 착실하게 준비를 시작했다.

-이제 남은 시간은 뭘 할 거냐? 잘 거냐?

‘아니, 의지를 다루다 보니까 굳이 오래 자지 않아도 괜찮더라고.’

-당연한 결과다.

‘그래서 그냥 애들이랑 놀아주려고. 요새 워낙 훈련이다 뭐다 바쁘다 보니까 애들이 삐졌어.’

-쯧쯧쯧, 이해할 수 없군.

잠시 후에 있을 전투 준비를 끝마친 서준은 계단을 올라서 1층의 약국으로, 그리고 문을 열어 정신비와 호랑이들이 있는 마당으로 나갔다.

“아저씨! 여기에요! 여기!”

-어흥! 어흥!

-캬아아앙!

-크릉!

재미있게 놀고 있던 정신비와 호랑이들은 서준을 보자마자 반갑게 맞아주었다. 그런 그들의 얼굴에는 흙이 잔뜩 묻어있었다.

아마 흙놀이를 하고 있던 듯했다.

“어휴, 아저씨가 흙 묻히고 놀지 말랬지?”

“히잉…. 이따가 씻을게요.”

“어제도 그래놓고 안 씻고 잤잖아?”

“오늘은 진짜 씻을 거예요!"

서준은 반항하는 정신비를 붙잡고 얼굴에 묻어있는 흙먼지를 털어주었다. 정신비는 빨리 가서 다시 놀고 싶은지 발버둥 쳤지만 서준의 힘을 뿌리칠 수는 없었다.

-어흥! 어흥!

어흥이는 높은 나무를 타고 다니며 뛰어놀았고.

-캬앙 캬앙 캬아앙!

캬앙이는 하늘에 날아다니는 나비를 쫓아다니며 놀았다. 나비는 평범한 나비였지만 놀랍게도 캬앙이의 앞발을 다 피해 훨훨 날아다녔다.

-크릉… 크릉…

크릉이는 그 모습을 보며 한심한 듯이 비웃더니 하품을 하며 자리를 잡고 누워 자기 시작했다.

요즘 들어 부쩍 잠이 많아진 모습이다.

“좋네.”

정신비와 호랑이들이 놀고 있는 모습을 지켜보기만 해도 서준의 마음은 안정되어갔다.

테러로 인한 비명도 괴수로 인한 파괴의 기억도 모두 잊은 채 잠시 평화에 잠길 수 있었다.

이럴 때면 의지를 모아 기운을 씻어내지 않아도 저절로 서준의 기운들이 저절로 순환하기도 했다.

아무래도 서준의 기분에 영향을 받는 듯했다.

그렇게 평화롭게 정신비와 호랑이들이 노는 모습을 지켜보다 보니 어느새 해가 떨어져 잘 시간이 되었다.

“신비야, 이제 그만 들어가서 자자.”

“네에!”

“오늘은 꼭 씻구 자는 거 알지?”

“내일 아침에 씻을게요! 꼭이요!”

정신비가 자신 있는 얼굴을 하며 말했다.

“안 돼! 지금 씻어!”

“힝….”

아무리 귀여운 표정을 지어봤자 통하지 않았다. 서준은 정신비를 번쩍 안아들어 화장실 안에까지 데려다 놓고 문을 닫고 나왔다.

그렇게 호랑이들도 잠들고 정신비도 잠이 들었다. 해는 이미 떨어졌고 도로를 달리는 차들의 소리도 가끔가다 간헐적으로 들리기 시작했다.

완전한 어둠이 찾아왔다.

“후우…….”

서준은 마당에 있는 평평한 바위 위에 가부좌를 틀고 앉아서 심호흡을 했다.

전투 전 최고의 몸 상태를 만들어 놓기 위해 서준은 의지를 모으기 시작했다.

솔직히 긴장도 되었다. 대한민국에 남은 최강의 범죄조직이었다. 그런 곳에 단신으로 침입하는 게 부담이 되지 않을 리 없었다.

서준은 긴장을 떨쳐내기 위해 의지를 더욱더 강하게 모았다.

의지에 따라 모인 기운들이 서준의 몸을 순환하며 파괴되었던 근육들, 피곤해 지쳐있던 장기들을 하나하나 스쳐 지나가기 시작했다.

그와 동시에 지치고 피곤했던 서준의 심신이 안정되어갔다.

그렇게 시간 가는 줄도 모르고 제자리에서 미동도 않은 채 한참을 앉아있던 서준이 번쩍 눈을 떴다.

지평선 너머로 떠오르는 태양이 보였다. 일출 시간이었다.

“어흥아.”

-어흥!

서준은 바위 위에 가만히 앉아서 조용히 어흥이를 불렀다. 자고 있던 어흥이는 그 소리를 듣자마자 잠에서 깨 서준의 앞으로 어슬렁 걸어왔다.

전쟁을 하러 가는 게 아니었다. 도둑질을 하러 가는 것이었다. 물론 전투 없이 끝낼 수는 없겠지만 목적이 달랐다.

호랑이들을 전부 데리고 가서 이목을 끄는 것보다 어흥이와 단둘이 움직이는 게 나았다.

“가자.”

-어흥!

서준은 어흥이의 위에 올라탔다. 어흥이는 서준이 미리 알려준 방향을 향해 빠르게 달렸다. 정말 빠르게 달렸다. 어흥이의 발은 점점 더 빨라졌고 주위의 풍경은 흐릿해지기 시작했다.

서준은 그런 어흥이 위에서 눈을 감고 명상에 잠겼다.

역시 의지를 모으기 위함이었다.

‘나는 약사다.’

서준은 약사였다. 대침공 이전에도 그랬고 그 이후에도 그랬다. 비록 하는 일이 조금은 달라졌을지는 몰라도 본질은 변하지 않았다.

하지만 오늘은 그래서는 안 됐다. 의지를 모아 긴장을 씻어냈다지만 완벽하지 않았다.

해서 서준은 오늘만은 약사를 포기하기로 했다. 이런 일에 익숙한 사람이 되어야 했다.

긴장은 일을 망쳐버릴 수가 있었으니깐…….

‘나는 약사가 아니다.’

서준은 부정했다. 본래 의지란 것이 몸을 이끈다. 서준의 의지는 오늘 약사를 지향해서는 안 됐다.

‘나는 도둑이다.’

오늘의 서준은 도둑이어야 했다. 서준의 의지가 모이기 시작했고 목표의 방향이 변하기 시작했다.

‘나는 대도다.’

그냥 도둑이 아니었다. 세상을 뒤흔들 대도였다.

서준의 의지의 방향이 틀어짐에 따라 기운의 성질도 서서히 변하기 시작했다. 본디 남을 치료하기 위해 존재하던 기운들이 물건을 훔쳐내기 위한 성질로 조금씩 변해갔다.

‘나는 도둑이다.’

다시 한번 되뇌었다. 아직은 조금 남아있던 약사의 성질이 조금 더 사라졌다.

본래 검었던 그러나 초록빛을 띠던 서준의 기운이 더욱더 짙은 검은색으로 변해갔다.

치유의 효과를 강하게 해주던 초록의 기운도 조금 더 공격 성향이 강해졌다.

‘나는 대도다.’

마지막으로 대뇌자 약사의 본분을 지켜주던 서준의 기운들이 모두 사라졌다.

이제 서준은 누구보다 뛰어난 프로페셔널 도둑이 되었다.

서준의 육체도, 신념도, 의지도 모두 도둑의 것이 되었다.

-이제야 어린아이 단계는 벗어났군. 그래, 그렇게 하는 거다.

그 모습을 모두 지켜본 자칭 황제가 흡족하게 웃었다.

하지만 그의 말처럼 쉬운 일은 아니었다. 이 지구상에서 이 일이 가능했던 것은 아마 역사 전체를 통틀어도 한 손에 꼽을 것이다.

그리고 보통 그런 사람들은 후세에 이름을 떨친 대종사이거나 위대한 통치자였다.

서준 역시 미약하지만 그 경지에 올라섰다.

자칭 황제의 세상에서도 어려웠지만, 모두가 목표로 삼고 있는 경지였다. 하지만 목표로 했기에 이를 이룬 자들도 상당했다.

하지만 서준의 세상 지구에서는 그러지 못했다. 신비의 기본요소조차 알지 못했던 세상이었기에 더욱 그랬다.

예수 혹은 석가모니처럼 특별한 경지에 올랐던 자들만 가능했다. 지금 서준은 그 경지에 비록 단 한 발자국뿐이지만 올라선 것이었다.

물론 갑작스럽지만 모든 일이 그렇다. 깨달음이란 것은 언제나 그렇듯 갑작스럽게 찾아온다.

“도착했네, 어흥아 몸을 감추고 조용히 들어가자.”

-어흥!

의지를 통일한 서준이 눈을 뜨자 그 앞에는 리버스의 은신처가 있었다. 초인경찰도 찾지 못했던 그 장소였다.

서준이 어흥이에게 말하자 어흥이는 조용히 소리치며 기척을 숨겼다.

서서히 주변과 동화되어가던 어흥과 서준은 집중해서 보지 않으면 찾을 수 없을 정도의 존재감만 발하게 되었다.

그리고 그들의 은신처로 자신 있게 걸어 들어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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