65화
-내가 도울 수 있다니까!
‘네가 도울 수 있다고? 무슨 수로?’
-그 정도야 쉽지!
자칭 황제는 자신 있게 말했다. 서준은 미심쩍었지만 한번 들어보기로 했다. 듣는다고 돈이 나가는 것도 아니었으니깐.
어차피 이 놈이 하는 말을 안 들을 수도 없었다. 말 할 때마다 저절로 뇌에 쏙쏙 꽂혔다.
-그때 우리 집에서 여기로 이동할 때 썼던 능력이 문제인 거지? 좌표를 여러 군데 지정하고 싶은 거잖아?
‘응, 그렇지 뭐. 좀 더 활용할 수 있으면 좋겠는데.’
-그 정도야 간단하게 해결할 수 있어! 날 만난 걸 천운으로 알라고! 짐이 은혜를 베풀어줄게!
‘그렇게 간단하게 말할 수 있을 정도야? 몇 달을 고민해도 못 풀었던 문젠데.’
-응!
자칭 황제는 역시나 자신 있게 답했다. 정말 고민거리도 아니라는 듯이 아주 쉽게 답했다.
-그 정도야 뭐, 간단하지. 그냥 간단한 차원 이동 능력이잖아? 별로 어려운 것도 아닌데
‘차원 이동이 그렇게 쉬운 능력이었어? 여기서는 나만 쓸 수 있는 거로 알고 있는데.’
-물론이지! 나도 썼는데!
‘너도 할 수 있다고? 그럼 내가 쓸 것도 없이 네가 대신해주면 되겠네’
저놈이 대신해줄 수 있는데 굳이 서준이 힘들게 능력을 사용할 필요는 없었다.
만약 자칭 황제의 말이 사실이라면 앞으로 저놈에게 차원 이동을 맡기면 된다.
그렇게만 된다면 게이트를 유지하느라 힘을 뺄 이유도 없었다.
-그건 안돼!
‘왜 안돼? 너도 쓸 줄 안다며?’
하지만 자칭 황제의 대답은 서준의 기대를 벗어났다. 아주 단호하게 'NO'를 외쳤다.
-너 바보야? 그것도 몰라? 참… 정말 하나부터 열까지 다 알려줘야 하는구나?
자칭 황제는 서준을 나무라며 계속 말을 이어갔다.
-이런 고등 기술을 사용할 때는 네 가지가 필요하잖아. 영혼, 육체, 의지, 기운. 그런데 나는 육체와 기운이 이미 사라졌고 영혼은 갈가리 찢겨나갔잖아. 의지만 남았는데 어떻게 이런 고등 기술을 사용할 수 있겠어?
그랬다. 좋은 육체에서 좋은 기운이 나왔고, 좋은 영혼에서 좋은 의지가 나왔다.
이 네 가지 요소가 잘 어우러짐으로써 신비의 힘을 부려낼 수 있었다. 이 사실을 모르고 초능력을 사용하는 인간 각성자 즉, 초인들이 이상한 경우였다.
그리고 자칭 황제는 영혼은 아티팩트에 나뉘어 담겼고 육체와 기운은 모두 소실되었다.
의지만 남은 자칭 황제가 신비를 부리지 못하는 것은 당연했다.
‘기억을 다 잃었다면서 이런 어려운 건 용케도 기억하네?’
영혼이 나뉘면서 기억이 자칭 황제의 기억 대부분이 소실되었다.
남아있는 기억도 군데군데 구멍이 나 있는 불안정한 기억들이었다.
-당연하지! 이 세상의 근본을 이루는 요소들인데 이걸 기억 못 하면 바보지!
대침공 이후 9년간 인간들은 신비한 능력들을 사용하면서도 알지 못했던 사실이었다.
그러나 자칭 황제의 세상에서는 기본 상식이라고 불릴 정도의 이야기였다.
모르는 자는 아무도 없었다.
‘근데 네 근본인 이름은 기억 못 하잖아?’
-아! 안 해.
세상을 이루는 근본은 모두 기억하고 있던 녀석이었지만 본인의 이름은 기억하지 못했다.
이 점을 서준이 지적하자 자칭 황제는 삐졌다.
삐진 자칭 황제를 다시 설득해 마음을 돌리는 데 한참 시간이 걸렸다.
녀석은 쪼잔하게도 서준이 말 한번 잘못했다고 완전히 토라져 대답조차 없었다.
서준은 녀석의 마음을 돌리기 위해 온갖 애를 다 썼다.
-그래. 짐이 넓은 아량으로 한 번만 봐주겠다.
‘고마워, 그래서 방법이 뭔데?’
겨우 설득에 성공한 서준은 자칭 황제를 달래가며 물었다.
-일단은 연습부터 하자. 너 지금 엄청 허접스러운 거 알지?
‘어느 부분에서?’
사실 서준도 본인이 능력을 잘 활용하고 있다고는 생각하지 못했다.
그러나 어느 부분이 모자란 것인지는 알지 못했기에 보완하지 못하고 있었다.
애초에 스승도 없었고 어디서 배워온 능력도 아니었다. 괴수에게 쫓기다가 저절로 각성한 능력이었다. 능력은 사용하면서도 이 능력에 대한 깊은 이해는 없었다.
자칭 황제는 그 부분을 잘 알고 있는 듯 보였기에 서준은 여태까지와 태도를 달리하며 진지하게 물었다.
-하나부터 열까지 전부 다. 영혼, 육체, 의지, 기운 모두 다 부족해. 근데 말이야. 진짜 하나같이 모두 모자란 데 어떻게 신비의 힘을 사용하는 거야?
‘그냥 되던데?’
서준뿐만이 아니었다. 각성한 모든 인간, 즉 초인들은 단순한 의지만으로 능력을 사용했다.
어린아이라도 각성을 하면 세상을 뒤집을 만한 능력을 사용할 수 있었다.
이 역시도 언젠가 서준이 밝혀내야 할 문제 중 하나였다. 게이트를 막아내고 평화의 세상이 되었을 때 인간에게 주어진 과분한 힘은 위기가 될 수 있었다.
-그냥 된다고? 흐음…. 신기하군. 일단 기초적인 것부터 하나씩 해보자고.
하지만 영혼이 나뉘어 판단력이 떨어진 자칭 황제는 이런 문제까지 신경 쓸 여력이 없었다.
지금 중요한 건 눈앞에 있는 서준을 단련시키는 것이었다.
-일단 오늘은 좀 쉴까? 나 좀 피곤한데.
‘그래, 내일부터 하자. 내일부터.’
서준에게 이끌려 갑작스레 차원을 넘었다. 찢긴 영혼 중 일부가 합쳐지기까지 했다. 고생을 많이 한 날이었다.
그리고 그건 서준 역시 마찬가지였다. 신대륙은 긴장의 연속이었다. 다행히 별 위협은 없었지만 그렇다고 긴장을 풀 수는 없는 노릇이었다.
그렇게 서준은 남은 시간을 정신비와 호랑이들과 보내며 지친 마음을 달랬다.
신대륙을 탐험하며 긴장되었던 마음이 호랑이들과 놀며 조금씩 치유되었다.
그리고 그렇게 하루가 흘러 훈련 시간이 되었다.
-자 그럼 눈을 감아볼래?
‘그래.’
서준은 자칭 황제의 말에 따라 살포시 눈을 감았다.
그리고 그의 다음 말을 기다리고 있었다. 기대되는 순간이었다.
-띠리링, 띠리링.
그때였다. 이른 아침부터 누군가 약국 문을 열고 서준을 찾아왔다.
“형님! 저 왔습니다! 형님!”
“누구… 세요?”
짧은 머리가 잔디처럼 빳빳이 나 있는 사람이었다. 하지만 서준이 기억하지 못하는 얼굴이었다. 왜 형님 형님 거리며 친근하게 구는지 알 수 없었다.
“형님! 접니다! 저! 세근이에요! 왜 어제 왔었잖아요!”
“아! 어제! 돈 많은 그놈!”
유명 길드의 오세근이었다. 서준에게 형님, 형님 거리며 달려들다 보니 서준도 얼결에 반말이 튀어나왔다.
“그래요! 접니다! 세근이! 어제는 제가 무례했습니다! 죄송합니다! 형님! 존경합니다! 형님!”
“그, 그래.”
오세근은 서준에게 달려들어 서준을 껴안았다. 당황한 서준이 뿌리치려 해봤지만 오세근의 의지를 뿌리칠 수는 없었다.
서준은 그런 오세근의 머리를 다시 한번 바라보았다.
맨들맨들하여 반짝반짝 빛나던 머리는 어느새 짧고 검은 머리카락으로 가득 차 있었다.
오세근이 이렇게 달려드는 것도 어느 정도 이해가 갔다.
‘뭐, 효과는 물어볼 것도 없겠네.’
물어볼 것도 없었다. 이미 서준의 눈앞에 그 증거가 있었다.
“형님! 자고 일어나니까 온몸에! 털이 그냥! 막 났습니다!”
“온몸에?”
“네! 쓸모없는 곳까지 털이 막 자라나긴 했는데! 오늘 아침에 부랴부랴 깎았습니다! 괜찮습니다!”
“흐음… 그런 부작용이 있구나.”
아무래도 원하는 곳에서만 자라게 하지는 못하는 것 같았다. 머리에만 자라게 할 수 있다면 정말 최고였을 텐데.
“뭐! 없는 것보다야 있는 게 낫지 않습니까? 있으면 깎으면 되죠! 근데 없는 건 만들 수 없어요!”
오세근의 말이 맞았다.
털이 필요 없는 부분은 제모하면 그만이었다. 자라지 않는 곳에서 자라게 하는 것이 중요한 것이었다.
그리고 이 약초는 그 역할을 충실해서 해냈다.
훌륭한 약초였다. 아무래도 잘 팔릴 것 같다.
“형님! 형님! 정말 고맙습니다!”
“그래그래, 잘 썼으면 홍보 열심히 하고.”
어느새 자연스레 하대하던 서준은 오세근의 어깨를 툭툭 치면서 말했다.
오세근은 그조차도 기분이 좋은지 헤실헤실 웃었다.
“제가 다 알아서 하겠습니다! 맡겨만 주세요!”
오세근은 자신 있다는 듯이 주먹으로 가슴을 팡팡 치며 말했다.
재벌 3세가 저렇게 자신 있게 말하니 믿어볼 만했다. 재벌 카르텔에만 연락을 돌려줘도 충분하다.
“그나저나 형님! 우리 길드 정말 안 오실 겁니까? 형님! 제가 잘 모시겠습니다!”
“말했잖아. 나는 혼자가 편하다고.”
서준이 단호하게 거절하자 오세근은 실망한 기색이 역력했다.
하지만 이내 표정을 풀고 다시금 서준에게 형님 형님 거리며 따라다녔다.
“근데 그렇게 사람을 모아서 뭐 하려고?”
“기분이 좋잖아요!”
오세근의 대답은 참 단순했다. 정말 그랬다. 오세근은 게임을 하듯 헌터들을 수집해서 자신의 밑에 두려고 했을 뿐이다.
컴퓨터 게임으로 축구 구단을 운영하듯 오세근은 헌터들을 모아서 관리하려 했을 뿐이다. 그것도 현실에서.
“단지 기분 때문에?”
“네!”
“이제 그 정도면 충분하지 않아? 이제 충분히 모은 것 같은데.”
서준도 어젯밤 오세근이 다녀간 후 초인몰에 접속하여 알아보았다.
해서 오세근이 각성했고, 많은 헌터들을 영입했다는 사실을 알 수 있었다.
그리고 오세근이 데려간 헌터들 중 상당히 유명한 헌터들도 있다는 것도 알 수 있었다.
그리고 그중에 창천 길드의 헌터가 포함되어 있다는 사실도 알았다.
“흠…. 잘 모르겠는데요? 좀 부족하지 않아요?”
“아니야. 이미 충분해. 충분히 모았어.”
“그런가요?”
오세근은 미심쩍은듯한 얼굴로 물었다.
그러나 오세근에게 서준은 이미 신이나 다름없는 존재였다. 서준은 평생의 고민거리를 해결해준 존재였고 이미 오세근 마음속에 자리 잡았다.
서준의 말이 오세근의 마음을 움직이기 시작했다.
“충분하다니까? 이제 사람들 모으는 건 그만하고 그 능력 다른 곳에 써봐.”
“어디요? 어디에 쓸까요? 어디에 써야 잘 썼다고 소문이 날까요?”
서준이 조언을 해주자 오세근은 흥분하며 물었다.
정말 뭐든 할 기세였다.
“주변 어려운 사람들 있잖아. 그런 사람들도 좀 돕고 그래.”
“왜요? 그러면 뭐가 좋은데요?”
“기분이 좋잖아.”
하지만 오세근은 이해하지 못한 눈치였다.
“기분이 좋다고요? 남 돕는다고 기분이 왜 좋아져요? 이해가 안 가네.”
“나는 너 머리 자란 거 보니까 기분이 좋은데? 다른 사람이 행복하면 나도 행복해질 수 있는 거야.”
하지만 단순한 오세근을 설득하는 것은 전혀 어려운 일이 아니었다.
서준은 오세근을 돌려보내기 위해 대충 머리에서 생각나는 대로 내뱉었지만 이미 서준을 존경하는 오세근에게는 엄청난 충격으로 다가왔다.
오세근의 눈에는 서준이 위대한 선지자처럼 보였다.
“아! 그렇군요! 저도 노력해볼게요. 그럼!”
“그래, 나 바쁘니까 이제 그만 가 보고. 사람들 돕고 살아!”
“네! 바로 실행하겠습니다!”
오세근은 깨달음을 얻은듯한 밝은 표정으로 약국 문을 벌컥 열며 뛰쳐나갔다.
당장이라도 선행을 행할듯한 몸놀림이었다.
‘휴, 미친놈. 겨우 보냈네. 어이! 자칭 황제 놈!’
-무엄하도다! 예를 지키지 못할까!
'예이, 전하. 됐고 슬슬 시작하자고.'
-그래, 시작해보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