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2화
손에 닿은 붉은색의 열매는 매우 따듯했다.
아니, 뜨거웠다.
마치 심장이 뛰듯이 붉은 열매는 서준의 손안에서 쿵쿵대며 생명의 박동을 느끼게 해주었다.
그 이질적인 힘에 서준이 놀라기도 잠시 열매에 그대로 홀려버린 서준은 열매를 조심스럽게 땄다.
나무는 괴로운 듯 몸을 잠시 흔들었으나 얼마 지나지 않아 괜찮아진 듯 다시 얌전해졌다.
서준은 굵은 나뭇가지 위에 그대로 걸터앉았다.
그리고 열매를 그대로 입속에 한 번에 집어넣었다.
그렇게 열매가 입속에서 과육을 터트렸을 때 서준의 머릿속엔 해일이 일어난 것마냥 엄청난 충격이 있었다.
심장은 강하게 뛰며 거대한 핏줄기를 온몸의 구석구석 강하게 뿌려대기 시작했다. 혈관에서 핏물이 흐르는 것이 느껴질 정도로 강력한 박동이었다.
"후우우우우……."
서준은 나무에 걸터앉은 그대로 눈을 감고 심호흡을 크게 했다.
몸속이 미쳐 날뛰기 시작했다. 게이트 능력을 사용할 때 들끓는 이상한 기운과 온몸을 때리듯이 빠르게 도는 핏물이 몸을 부술 듯이 아프게 했다.
최대한 빨리 이 상황을 컨트롤하지 않으면 큰일 날 것임이 직관적으로 느껴졌다.
-어흥! 어흥!
서준의 이상한 낌새를 느낀 걸까? 어흥이는 나무 밑에서 걱정스러운 듯이 울어댔다.
눈을 감고 심호흡을 하던 서준은 무의식적으로 날뛰는 에너지와 혈류를 의식의 영역으로 가져오기 시작했다.
본래는 불가능한 일이었다. 그러나 아직도 서준에 입안에 남아있는 과육이 그를 가능케 했다.
뭔지는 모르겠지만 엄청난 열매였다.
서준은 입안에 남아있던 과육을 억지로 삼켰다. 목구멍에 걸려 넘어가길 거부하던 과육은 서준이 억지를 부리자 어쩔 수 없다는 듯이 서준의 뱃속으로 들어갔다.
다시 한번 몸속의 것들이 날뛰기 시작했다.
서준은 나뭇가지 위에서 자세를 가다듬고 다시 몸속의 것들을 다스리기 시작했다.
본래는 나뭇가지 위에서 이러한 불편한 자세를 취하고 있었다면 위태위태해야 했지만, 신기하게도 서준은 완벽하게 균형을 잡고 있었다.
그리고 서준이 몸속의 날뛰는 것들을 완전하게 다스렸을 때 다시 서준은 눈을 떴다.
"후우우우……."
몸속의 날뛰는 것들을 완전히 다스린 서준의 입에서 뜨거운 한숨이 쏟아져 나왔다.
'이건…. 정말 엄청난데?'
서준은 게이트를 유지할 때마다 소모되던 에너지를 의도적으로 움직여봤다. 이제는 손발을 움직이듯 자연스럽게 다룰 수 있게 되었다.
‘적어도 다섯 배 이상은 늘었어.’
적어도 다섯 배였다. 분명 그 이상 늘었음이 확연하게 느껴졌다.
아마도 게이트를 10시간 이상 유지가 가능할 정도였다. 기존에 한 시간 정도 유지하면 탈진하듯 쓰러졌던 것에 비하면 엄청난 발전이었다.
서준은 조심스레 나무 위에 손을 얹었다. 그리고 몸속에 끌어 오르다 못해 터지기 직전인 기운을 손바닥으로 쏟아내었다.
“오!”
그러자 놀라운 일이 일어났다. 두꺼운 줄기와 나뭇가지와는 비교될 정도로 잎이 피지 않았던 나무였다.
몇 가닥의 잎줄기와 한 개의 열매만을 지니고 있던 나무였는데 서준의 손바닥에서 흘러나오는 기운을 받아내더니 이윽고 커다란 나무 전체를 메울 정도로 잔뜩 잎을 피워냈다.
열매를 섭취하고 난 후 서준이 얻어낸 또 하나의 능력이었다. 서준은 이것을 원래 알고 있었다는 듯이 자연스럽게 깨달을 수 있었다. 신비로운 일이었다.
‘이걸로 약초 재배를 하면…….’
괴수의 시체를 엄청나게 먹어치우고도 제대로 성장하지 못했던 나무였다. 그런 나무가 온 세상을 뒤덮을 정도로 많은 나뭇잎을 지니게 했다. 그것도 한순간에.
만약 약초 재배에 이 능력을 사용한다면 평소 수확하던 양보다 적어도 배 이상을 수확할 수 있었다.
‘굳이 뭐 그럴 거 있나?’
하지만 굳이 그럴 이유는 없었다. 서준이 지니고 있는 기운의 총량이 워낙 많아졌기에 충분히 가능한 일이기는 했다.
그러나 그것과는 별개로 이 능력을 사용하면 몸이 피곤해졌다. 기운을 과도하게 방출한 탓일 것이다.
‘그냥 놔둬도 잘 자라는데 뭐…….’
어차피 그냥 놔둔 채 밖에 나가서 몇 밤 자고 나면 다 자라는 약초들이었다. 굳이 힘들게 힘을 써가며 키울 필요는 없었다.
차라리 이 능력을 다른 곳에 활용하는 것이 백배는 나았다.
-어흥! 어흥! 어흥!
-캬앙! 캬앙! 캬앙!
-크릉! 크릉! 크릉!
호랑이들은 서준이 걱정되는지 나무 아래에서 계속해서 울부짖고 있었다.
호랑이들의 울음소리에 정신을 차린 서준은 조심스럽게 나무를 내려왔다.
“왜 다들 여기 모여있어?”
열매를 먹고 흘러넘치는 기운에 죽을뻔하긴 했지만 결국에는 잘 다스려냈다. 왜 이렇게 호들갑들인지 모르겠다는 얼굴로 묻자 호랑이들과 함께 나무 아래에 와있던 정신비가 말했다.
“아저씨 여섯 시간 동안 눈 감고 있었어요.”
“뭐? 여섯 시간?”
“네에…….”
“그렇게 오래됐다고?”
“엄마처럼 계속 자는 줄 알고 무서웠어요…….”
정신비는 울먹이면서 답했다.
서준은 손목에 차고 있던 시계를 확인했다. 재배지 안에서는 휴대전화가 먹통이기 때문에 손목시계는 필수였다.
그리고 정신비의 말처럼 정말로 여섯 시간이 흘러있었다.
서준이 느끼기에는 찰나였는데 실제로는 굉장히 오랜 시간이 흘러있었다.
‘그동안 게이트도 유지되고 있었나?’
재배지 한편에는 아직도 게이트가 울렁거리고 있었다. 여섯 시간이나 흘렀다고 했는데 아직 견고한 모습으로 남아있었다. 확실히 에너지의 총량이 많이 늘기는 한 모양이었다.
‘열 시간 동안 유지가 가능한 건가? 그렇다면 재배지 탐험을 재개해도 되겠는걸?’
그동안 빈번히 테러가 일어나느라 잠시 동안 재배지 탐사를 중단했었다. 서준은 계속해서 활력초를 공급할 필요가 있었는데 재배지 탐사를 하다가 그때를 놓칠까 두려웠다.
하지만 이제는 테러도 멈췄다. 아직 테러범 일당들을 잡지는 못했지만 그들이 테러를 멈춘 것은 확실했다.
거기에 게이트를 열 시간 동안 유지할 수 있게 되었다. 적어도 10시간 동안은 시간 괴리 현상을 피할 수 있다는 이야기였다.
그리고 열 시간은 상당히 긴 시간이었다. 서준과 호랑이들의 체력을 생각하면 그 이상 탐사를 진행하는 건 위험했다. 그 얘기는 이제는 재배지 탐험을 시간 괴리의 두려움 없이 할 수 있다는 이야기가 됐다.
서준은 다시금 재배지 탐사의 계획을 세우기 시작했다.
‘근데…. 신비도 데려가야 하나?’
그것은 차차 고민해볼 문제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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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봐, 대장. 이제 어떡할 거야?”
“누가 우윈지 확실하게 느끼게 해줘야지.”
어느 어두운 폐공장에서 한 무리의 사람들이 대화를 나누고 있었다.
“리더! 저놈들 너무 건방지다고 생각 안 하십니까?”
“슬슬 정리해야겠지? 위아래를 확실히 구분 짓자고.”
그리고 같은 건물 2층에서 역시 한 무리의 사람들이 대화를 나누고 있었다.
1층에 있던 녀석들은 최운혁과 탈옥한 결사회의 일원들이었고 2층에 있던 녀석들은 유재학과 리버스 일당들이었다.
물론 테러 당시 함께했던 이들은 각자 자기 맘에 드는 리더를 골라서 나누어져 있었다.
최운혁과 유재학은 같은 목적을 가지고 서로 힘을 합쳤다. 수년 전 모든 조직원이 체포당하며 힘을 잃었던 유재학과 몇 달 전 같은 일을 겪은 최운혁은 부하들의 탈옥이라는 한가지 뜻을 모아 힘을 합쳤다.
본래 암흑세계의 이권을 다투며 끊임없이 싸우던 두 조직이었다. 리버스가 먼저 몰락하기는 했지만 그 전까지는 오히려 리버스가 앞서있다고 할 수 있었다.
서로 힘을 뽐내지 못하면 좀이 쑤시던 그러한 자들이었다. 잠시나마 뜻을 함께하느라 서로를 존중해주었을 뿐 목적을 이룬 지금 두 사람의 생각은 백팔십도 변해있었다.
한 세상에 태양이 두 개일 수는 없는 법이었다. 최운혁을 필두로 한 결사회와 유재학을 필두로 한 리버스의 세력다툼은 조용히 시작되었다.
덕분에 세상은 지금 잠깐 평화로울 수 있었다.
그리고 약 한 달이 흘렀다. 끊임없이 교전을 계속해서 해오던 리버스와 결사회는 드디어 마지막 결전에 이르렀다.
물론 서로의 조직을 흡수하기 위함이었기 때문에 살상을 벌이지는 않았다. 결국에는 미래에 자신의 아래에 들어올 것이라 생각했기 때문이다.
그리고 지금 유재학이 드디어 최운혁의 공격을 막아내지 못하고 무릎을 꿇었다.
“그러게 진작 포기했으면 편하잖아? 도대체 이게 뭐야 한 달 동안 일도 못 하고.”
유재학의 머리통을 움켜쥔 최운혁이 말했다. 최운혁이 능력을 사용하면 유재학의 머리통은 곧장 터져나갈 것이었다.
“내가 졌다. 패배를 인정하겠다.”
유재학은 두 눈을 감으며 허탈하게 말했다.
사실 거의 잡았다고 생각했었다. 많은 수가 죽은 결사회보다 온전히 남아있는 리버스가 수적 우위를 잡고 있었다.
게다가 테러 당시 영입했던 자들도 최운혁보다는 유재학의 밑으로 많이 들어왔다. 리버스의 숫자가 더 많았기 때문이었다.
그러나 유재학의 예상을 뛰어넘는 것이 하나 있었다. 바로 최운혁의 전투능력이었다. 한쪽 팔이 없는 채로 싸우는 최운혁은 도무지 믿을 수 없을 정도로 강력했다.
유재학은 만약 최운혁이 두 팔 모두 무사했다면 어땠을까를 생각하며 두려움에 몸을 떨었다.
리버스가 망하고 잠적하기 전에는 분명 최운혁보다 위에 있다고 확신했었는데 이제는 한팔이 없는 놈을 당해낼 수 없었다. 유재학은 너무 분했다. 하지만 티를 낼 수는 없었다.
“패배를 인정하겠다? 아니지. 패배를 인정하겠습니다가 맞는 거야.”
머리통을 붙잡힌 채 무릎을 꿇고 있던 유재학은 몸을 부들부들 떨며 손바닥에 손톱이 박힐 정도로 주먹을 불끈 쥐었다.
그러나 이미 대세가 넘어갔다는 것을 그 누구보다도 잘 알고 있었다.
유재학이 할 수 있는 것은 이제 단 하나밖에 없었다. 하는 수 없이 유재학은 다시 입을 열었다.
“졌습니다. 앞으로 시키시는 일은 모든 따르겠습니다. 저를 포함한 리버스의 모두가 결사회를 따르겠습니다.”
“좋아, 좋아! 아주 맘에 들어. 진작 그렇게 했어야지.”
유재학이 인정하자 유재학을 따르던 녀석들도 모두 무기를 버리고 무릎을 꿇었다.
그들의 표정에는 분함이 가득했다. 숨기려 해봤지만 도저히 숨길 수 없을 정도였다.
“얘들아?”
그 모습을 본 최운혁이 기분 좋은 얼굴을 하며 눈짓을 했다.
“파티 시작이다!”
이윽고 결사회의 멤버들은 항복한 자들을 거침없이 구타하기 시작했다. 분풀이의 시작이었다.
지난 한 달간의 결투로 그들 역시 쌓인 것이 많았다. 최운혁이 강했기에 이기기는 했지만 수적 열세인 상태로 한달 동안 잠도 줄여가며 계속 싸워왔다.
한 달은 상당히 긴 시간이었다. 그 시간 동안 긴장을 풀지 못한 채 전투에 임했던 녀석들은 모든 것을 쏟아내겠다는 듯이 발을 놀렸다.
항복한 유재학과 리버스의 단원들은 모두 체념한 채 그들의 발길질을 반항 없이 받아들였다.
완전하게 굴복한 것이다.
이렇게 오늘 암흑세계의 세력도가 크게 일렁였다. 사상 최악의 두 범죄조직이 완전하게 하나로 통일되는 순간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