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1화
“히히힛!”
-캬앙!
캬앙이가 천천히 꼬리를 흔들며 달리고 있었다. 그리고 그 뒤를 정신비가 뒤따라 뛰고 있다.
캬앙이가 좀 더 속도를 늦춰주어 정신비가 따라잡을 수 있었고 이윽고 캬앙이의 꼬리를 잡으려 했다.
-캬앙!
“에잉! 이리와!”
캬앙이가 잽싸게 빠져나왔다. 아쉬운지 입맛을 쩝쩝 다시던 정신비는 다시 캬앙이의 뒤를 따라 뛰기 시작했다.
요즘 들어 호랑이들은 정신비와 놀아주느라 매우 바빴다. 어린 나이에 부모 양측을 모두 잃은 정신비의 정신 상태는 매우 불안정했다.
잠시라도 혼자 있거나 딴생각을 하게 될 경우 매우 불안해했으며 울부짖기까지 했다.
호랑이들은 그런 정신비의 정신을 딴 데 팔리게 하기 위해 매우 많은 노력을 쏟고 있었다. 호랑이들은 번갈아 가면서 정신비와 놀아주고 있었다.
“얘들아 이제 나가자!”
“네!”
-어흥! 캬앙! 크릉!
서준은 정신비와 호랑이들을 게이트 안쪽으로 밀어 넣었다. 한 시간째 유지되고 있던 게이트였다. 지금까지 기록 중에 최고 기록이었다.
서준은 호랑이들과 정신비가 노는 모습을 구경하면서 게이트를 오랫동안 유지하는 연습을 했다. 처음에는 삼십 분도 간당간당했었는데 지금은 한 시간 가까이는 충분히 유지할 수 있었다.
물론 그 이후에는 탈진하여 쓰러지듯 누워 쉬어야 했지만…….
“하아…. 노는 거 구경하는 것만으로도 지치네.”
마치 액체처럼 소파에 드러누운 서준은 한숨을 내쉬며 소파를 더욱 파고들었다.
-어흥!
어흥이는 그런 서준이 한심하다는 듯이 한번 짖어준 후 서준의 등 위에 올라와 자리를 잡고 누웠다.
“으음…. 좋아…….”
어흥이의 체온이 따듯하여 서준의 등 위로 그 온기가 전해졌다. 기분 좋은 느낌이었다. 비록 어흥이가 이전과 달리 상당히 커져 무게가 엄청났지만 서준의 근력이 이제는 그 정도는 이겨낼 수 있게 되었다.
무게로 인한 불편함보다 온기로 인한 편안함이 더욱 컸으니 서준은 그를 참아내다 스르르 잠이 들었다.
-띠리링, 띠리링
서준이 한참 잠에 빠져있을 무렵 누군가 약국 문을 열고 들어왔다. 각성과 GOTY를 준비하며 오랜 훈련 기간은 견뎌낸 서준의 감각은 예민해질 대로 예민해져 있었고 그 소리를 정확히 잡아내었다.
기절하듯 잠이 들었던 서준은 작은 종소리를 듣고 곧장 일어나 소리가 난 방향을 바라보았다.
“아! 죄송해요. 주무시고 계셨네요? 나중에 올 걸 그랬어요.”
“아, 아니에요. 어차피 일어날 때 됐어요. 무슨 일이세요?”
서준은 시계를 한번 쳐다보더니 말했다. 윤희주였다. 빚쟁이가 할 수 있는 것이 무엇이겠는가? 채권자에겐 한없이 낮아지는 것이 빚쟁이였다.
“그냥 한 번 들러봤어요. 보여드릴 것도 있고.”
윤희주는 가방에서 지퍼백 하나를 꺼내어 서준에게 건네주었다. 그 지퍼백 속에는 작은 환이 열 개 정도 담겨있었다.
“이게 뭐죠? 보약인가요?”
“아뇨, 초록 활력초 변종으로 만든 환이에요.”
“아! 연구 다 끝난 건가요?”
서준이 창천 길드 연구소에 맡겨두었던 물건이었다. 역시 대한민국 최고의 길드다웠다. 참으로 짧은 시간에 성과를 내다니!
서준은 흡족한 미소를 지으며 지퍼백을 건네받았다.
“아뇨, 다 끝난 건 아니에요. 일단 열매 부분만 환으로 만들어봤어요. 이런저런 방법 다 써봤는데 이 방법이 가장 좋더라구요.”
“음…. 효과는 역시 회복 효과인가요?”
지퍼백을 열어본 서준은 작은 환 하나를 소심스럽게 집어 올려 손가락으로 굴려보았다. 단단하고 둥그런 것이 아주 잘 만들어진 듯했다.
“네, 우선 사용법이 기존의 것과 다르게 매우 편리해졌어요. 굳이 환부에 바를 필요 없이 섭취하면 소화할 것도 없이 곧바로 상처가 치유돼요.”
“뭐, 그렇겠죠.”
이전에 열매를 사용해봤을 때 이미 알아봤던 효능이었다. 뭐, 진화가 완벽하게 완성된 변종인데다가 연구소에서 가공까지 했으니 그 효과는 더욱 효과적이리라 예상했던 서준이었다.
크게 놀라지 않고 담담하게 답할 수 있었다.
“내상이나 골절 등 기존의 것으로 회복 불가능했던 것들도 치료할 수 있어요. 이건 정말 획기적이에요!”
그러나 윤희주의 태도는 서준과는 정반대였다. 이미 그 결과를 예상했던 서준과는 다르게 윤희주의 입장에서는 서준이 갑자기 괴물 같은 풀뿌리를 하나 들고 온 셈이었으니깐.
이전에 서준에 의해 먹었을 때는 무슨 일이 일어난 건지도 잘 몰랐었다.
“그리고 중요한 건 그게 아니에요!”
“뭐가 또 있나요?”
이미 서준이 예측하고 있던 효과는 다 들은 것 같은데 윤희주가 무언가를 더 말하려 하자 이번에는 서준도 궁금함이 동했는지 귀를 쫑긋 세우고 물었다.
“아까 소화할 것도 없이 곧장 치료가 된다고 했죠? 먹으면 소화가 다 될 때까지 신체의 자가 회복 능력을 향상시켜줘요! 그것도 상당히.”
“어느 정도나 되죠?”
“웬만한 상처는 수십 초면 겉보기엔 다 나을 정도예요. 초록 활력초 분말을 환부에 바른 것 정도의 효과는 낼 수 있어요!”
놀라운 효과였다. 섭취 시 한 번의 치료로 끝나는 것이 아닌 환이 뱃속에서 소화가 다 될 때까지 일정의 치료 효과를 낼 수 있었다.
“이거…. 전투 시 상당히 재미 좀 보겠는데요?”
“네, 전투 능력을 적어도 두 배 가까이 올려줄 것이라 예상하고 있습니다.”
섭취하는 것만으로 일정 시간 동안 상처를 자가 수복할 수 있게 되었다. 그렇다는 건 전투 전 미리 섭취한다면 전투 중에서도 끊임없이 상처를 치유할 수 있다는 얘기가 된다.
다쳐도 곧장 상처가 회복 된다는 건 더욱 격렬하고 도전 전인 싸움을 할 수 있다는 얘기였다.
길드 전체의 전투력이 상당 부분 올라갈 것이 분명했다.
“이거 공급량이 어느 정도나 될까요?”
“그렇게 많지는 않습니다. 창천에서 사용할 것만 빼도 빠듯할 거 같은데요?”
아직 첫 번째 수확도 이루어지지 않은 시점이었다. 종자를 불리지 못한 상태였기에 그 수 역시 매우 적었다.
발견지로 가서 수확을 한다면야 다른 이야기가 될 수 있겠지만 재배지의 거점과는 그 거리가 상당히 멀었다.
이거 하나 수확하자고 가기에는 아까운 시간이었다.
“잘됐네요.”
“뭐가요?”
하지만 윤희주는 오히려 잘 됐다는 듯이 흡족한 얼굴로 말했다.
“그럼 당분간은 우리 길드가 전량 매입할게요. 외부 유통은 GOTY 본선이 끝난 후로 잡죠.”
“야망이 상당히 크시네요?”
“그럼요, 어떻게 얻은 본선 참가권인데 뽕 뽑아야죠?”
이미 예상했듯이 전투 능력을 상당히 올려줄 수 있는 약이었다. 그것을 창천 길드가 독점한 채로 GOTY에 참가한다면 엄청난 무기가 될 것이 분명했다.
“아예 런칭을 GOTY 본선에서 하죠? 어차피 대회 전시장에서 소량 푸는 것 정도로는 티도 안 날 거 같은데…. 홍보 효과도 좋을 거 같구요.”
“음…. 그것도 나쁘지 않겠네요. 근데 선생님 그때까지 준비 가능하시겠습니까?”
“충분해요.”
서준은 달력을 바라보며 말했다. 아직 본선까지는 꽤 많은 시간이 남았다. 조금 빠듯하긴 했지만 몸을 열심히 놀리면 충분히 가능한 시간이었다.
서준은 자신 있게 답했다.
“그보다 그놈은 어떻게 됐습니까? 뉴스에는 딱히 나오지 않던데요?”
“최운혁 말씀하시는 건가요?”
“네.”
본래도 시간 괴리 때문에 습관적으로 뉴스를 보던 서준이었다. 그런 데다가 최운혁의 습격을 받았고 그가 초인교도소에서 동료들을 탈옥시켰다는 이야기도 들었다. 관심이 갈 수밖에 없었다.
서준은 평소보다 더 자주 뉴스를 붙잡고 습관적으로 최운혁의 소식을 찾았다. 그러나 탈옥 이후의 최운혁에 대한 소식은 그 어떤 미디어에서도 찾을 수가 없었다.
“아직까진 특별한 것은 없어요. 뭘 노리고 있는지는 모르겠는데 기분 나쁘게 조용하네요.”
“그렇습니까?”
대한민국 최고 길드의 길드장인 윤희주의 귀에도 최운혁에 대한 이야기는 들어가지 않았다. 최운혁은 탈옥 이후 그 어느 때보다 조용한 시간을 보내고 있었다.
“어쨌든 그들의 수가 이제는 상당합니다. 거기다가 리버스가 합쳐지고 테러 활동할 때 데리고 다니던 녀석들도 있으니…. 이제는 웬만한 길드의 전투조와 비슷한 수가 됐네요.”
“무섭네요.”
“네, 놈이 백 선생님을 노리는 건 확실하니까 특별히 더 조심하셔야 합니다.”
길드의 전투조는 길드마다 다르지만 대부분 스무 명 전후로 구성되었다. 물론 전투조도 여러 개의 조가 있었고 그 외에도 다른 요원까지 다 합치면 전투 가능한 숫자는 훨씬 많았다.
어찌되었건 소수정예로 활동하던 최운혁의 일당이 전투조 수준이 되었다는 건 주목할 만했다.
소수로 활동하던 시절에도 어마어마한 악행을 저질렀는데 이제는 그 수까지 많아졌다. 무슨 일을 저지를지 몰랐다.
“테러조직이 그놈들 거인 줄 진작에 알아챘어야 했는데…. 어렵게 됐습니다.”
“그러게요. 뭐, 제가 특별히 할 수 있는 건 없으니깐요. 깊게 생각 안 하려구요. 다른 소식이나 더 있으면 알려주세요.”
“네.”
윤희주는 그 외에도 서준에게 몇 가지를 더 주의시킨 후 약국을 떠났다.
“크릉아! 크릉아! 어흥이가 나 때렸어!”
-크릉! 크릉!
장난을 치다가 어흥이에게 살짝 맞은 정신비는 크릉이에게 일러다 바쳤다. 크릉이는 그런 어흥이를 나무라며 한 대 툭 쳤다.
서준과 일행들은 윤희주를 돌려보내고 다시 재배지로 넘어왔다. 물론 서준의 훈련을 위해 게이트를 유지한 상태였다.
“어흥이 바보!”
-어흥……
정신비와 호랑이들은 재배지에서 신나게 뛰어놀고 있었다. 물론 서준은 그 와중에 놀지 못하고 새로운 초록 활력초 변종을 수확하는 데 열중이었다.
애들은 놀아도 가장은 열심히 일해야지 어쩔 수 없었다.
더군다나 게이트를 유지한 상태로 일을 하려니 더욱 힘들었지만 서준은 그럴 때마다 호랑이와 정신비가 노는 모습을 보며 힘을 얻고 다시 변종을 한 뿌리 한 뿌리 조심스럽게 캐냈다.
“다했다!”
준비해온 포대에 수확한 변종을 모두 담아 넣은 서준은 어흥이를 불렀다.
“가자!”
어흥이의 등 위에 올라탄 서준은 어흥이를 어디론가 이끌었다.
빠르게 달리기 시작한 어흥이의 등 위에 타고 있으니 상쾌한 바람이 서준의 귓가를 스쳤다. 언제나 느끼는 것이지만 어흥이의 승차감은 최고였다.
빠르게 지나가는 아름다운 풍경들은 잠시 바라보던 서준은 드디어 목적지에 도달할 수 있었다.
그리고 그곳에서 서준은 놀랍고 반가운 발견을 할 수 있었다.
“어흥아! 맞지? 변한 거 맞지?”
-어흥! 어흥!
어흥이도 그 변화를 알아챘는지 누구보다 기쁘게 울부짖었다.
나무 위에 달린 열매가 눈에 보일 정도로 붉은빛을 보이기 시작한 것이다.
어흥이 역시 서준처럼 나무를 기르기 위해 상당한 노력을 해왔다. 나무가 먹은 괴수의 시체는 대부분 어흥이와 호랑이들이 묻어둔 것이었다.
어흥이 역시 고생의 보람이 있었다고 느꼈는지 꼬리를 살랑살랑 흔들며 기분 좋은 표정을 지었다.
“그럼…. 수확해 볼까?”
가장 기쁜 순간이었다. 힘들게 기른 열매를 수확하는 시간이었다. 그 무엇보다 기쁜 일이었고 설레는 일이었다.
“으엇차!”
어흥이의 등에서 내린 서준은 나무를 타고 올라가기 시작했다. 워낙 그 둘레가 엄청나 붙잡기는 힘들었지만 군데군데 굵은 가지들이 솟아있어 오르는 데 큰 어려움은 없었다.
그리고 열매가 열린 가지에 다다른 서준은 망설이지 않고 열매를 향해 손을 뻗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