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8화
갑자기 느려진 시간 속에서 서준은 앞을 바라봤다. 서준의 몸에서 꿈틀대는 기묘함이 가리키는 방향이었다.
서준의 사고가 가속되었다는 것은 곧 서준에게 위기가 닥친다는 뜻이었다. 그리고 그 감각이 가리키는 방향은 서준의 약국 입구 방향이었다.
약국 방향에서의 위험을 느낀 서준은 혹여라도 호랑이들에게 위험이 생긴 건 아닐까 하며 눈을 살짝 찌푸리며 바라보았다. 그리고 그곳에는 한쪽 팔이 잘린 사내가 서 있었다.
“최운혁.”
결사회의 리더 최운혁이었다. 서준과는 인연이 있는 자였다. 물론 좋은 인연은 아니었지만.
“아아안녀어어엉…….”
최운혁이 뭐라고 말을 하며 입을 뻐끔뻐끔 거렸지만 서준은 알아들을 수 없었다. 서준의 사고가 가속되어 다른 세상이 느려 보이는 시점에서 최운혁의 말은 너무나도 느리고 길었다.
-어어어흐으응!
-캬아아아아앙!
-크르르르르릉!
마당에서 놀고 있던 호랑이들도 최운혁에게서 이상한 낌새를 느꼈는지 이빨을 보이며 그르렁대고 있었다.
호랑이들은 서준을 향해서 달려오고 있었다. 느려진 시간 속에서도 호랑이들이 이동하는 것이 확실히 느껴질 정도였으니 호랑이들이 얼마나 빨라졌는지 느낄 수 있는 부분이었다.
그런데 서준의 몸속에서 꿈틀대는 꺼림칙한 기운은 최운혁을 가리키고 있지 않았다. 최운혁이 있는 방향은 맞았지만 그보다 훨씬 뒤를 가리키고 있었다.
서준은 의아했다. 위기라면 분명 최운혁이 맞을 텐데 서준의 감각은 그게 아니라고 말하고 있었다. 지금까지 이 감각이 틀린 적이 없다는 것을 생각해 보았을 때 최운혁보다 더한 위험이 존재한다는 뜻이었다.
그리고 서준이 최운혁 너머를 바라보자 무언가 꿈틀거리는 것이 보였다. 그리고 그 모습은 서준이 매일매일 보던 광경이었다.
“게이트?”
서준이 재배지를 넘어갈 때처럼 서준의 약국 입구에서 게이트가 열리고 있었다. 가속된 사고 속에서 천천히 열리는 게이트의 모습은 서준으로서도 처음 보는 모습이었다.
빈 공간에 순식간에 나타나는 게이트는 사실 천천히, 아주 천천히 공간을 조금씩 찢어버리며 열리고 있었다.
“오오오오오래애애애앤…….”
최운혁이 뭐라고 계속 말을 하고 있었지만 서준의 관심은 최운혁의 머리 너머로 가있었다. 최운혁 뒤로 열 걸음 정도 거리에서 균열이 점점 더 커지고 있었다.
이제 얼마 지나지 않아서 곧바로 열릴 것이 분명했다.
‘어떡하지?’
서준의 집 앞에서 열리는 게이트였다. 미리 파악이 되었으면 경보를 못 들었을 리 없었다.
그렇다는 건 미확인 게이트라는 소리였고, 주변에 보호 임무를 하기 위한 헌터들도 없다는 이야기였다. 애초에 이곳까지 오면서 헌터의 머리털 하나 보지 못했다.
서준은 천천히 주위를 둘러보았다. 아무것도 모르고 일상을 즐기는 사람들로 즐비했다. 이대로는 피해가 클 것이 분명하다.
서준이 주머니에 손을 넣었다. 그곳에는 윤희주에게 건네받았던 별부름탄을 담은 작은 보따리가 있었다.
그 안에 들어있는 별부름탄의 개수는 열다섯 개, 게이트를 막아내기에는 턱없이 부족한 숫자였다.
그리고 서준이 다시 앞을 바라보았을 때는 이미 게이트는 완전히 오픈되었고 그 안에서 괴수들이 천천히 쏟아져 나오고 있었다.
공간 전체가 까맣게 보일 정도로 많은 수의 괴수들이 뛰쳐나오고 있었다.
“어어어어엉?”
최운혁도 무언가 낌새를 느꼈는지 천천히 고개를 돌리기 시작했다. 천천히 돌아가는 최운혁의 고개와 천천히 다가오는 괴수의 속도를 보았을 때 최운혁이 돌아보았을 때 쯤 괴수의 몸이 다 튀어나올 듯 했다.
“꺄아아아악!”
“게이트다! 게이트가 열렸어!”
그리고 최운혁과 괴수가 쾅 소리를 내며 충돌했다. 그 순간 서준의 시간도 원래대로 돌아왔으며 길거리를 채우던 사람들도 놀라서 도망가기 시작했다.
“경보 없었잖아! 씨발!”
“도망쳐! 도망쳐!”
“엄마! 엄마!”
거리는 순식간에 난장판이 되었다. 그나마 다행이었던 것은 게이트가 최운혁의 바로 뒤에서 열렸다는 것이다.
게이트를 뛰쳐나온 괴수들은 바로 눈앞에 있는 최운혁에게 일제히 달려들었고, 공격받은 최운혁은 살아남기 위해 괴수들을 공격하기 시작했다.
헌터들이 없는 지금 테러범인 최운혁이 헌터의 역할을 하는 셈이었다.
천만다행이었다.
-어흥! 어흥! 어흥!
-캬앙! 캬앙! 캬앙!
-크릉! 크릉! 크릉!
그 무렵 호랑이들이 서준 앞에 도착했다.
“얘들아! 괴수들 뒤로 못 넘어오게 막아줘!”
-어흥! 캬앙! 크릉!
서준은 호랑이들에게 괴수들을 맡긴 후 사람들을 혼란에 빠진 돕기 위해 달려갔다.
어차피 대부분의 괴수들은 최운혁에게 정신이 팔려있었기 때문에 가끔 넘어오는 것들 정도는 호랑이들이 충분히 저지 가능했다.
서준은 도망치다 뒤엉켜 넘어진 사람들을 일으켜 돕기 시작했다.
“살려주세요…….”
겁을 먹고 자리에 주저앉은 어린아이를 한 손에 안고 달려서 최대한 멀리 데려다주었고,
“살려주세요! 다리가 안 빠져요!”
갑작스레 튀어나온 괴수에 놀라 사고 난 차량 사이에 끼인 사람을 꺼내주기도 했다.
약국 골목은 그야말로 아수라장이 되었다. 서준 혼자서는 감당하기 힘들 정도였다.
“게이트 관리국 맞죠? 여기 게이트 열렸어요!”
서준은 그 와중에도 게이트 관리국에 전화를 거는 것도 잊지 않았다. 미확인 게이트가 열렸다는 것은 아직 관리국에서도 감지하지 못했을 가능성이 있었다.
서준 혼자서는 이 넓은 공간을 커버할 수 없었고 다른 헌터들의 도움은 필수였다.
-쾅! 쾅! 콰과광!
그 와중에 엄청난 폭발음이 들렸다. 괴수를 상대하고 있는 최운혁이 만들어낸 소리였다.
굉음에 놀란 서준은 게이트가 열린 방향을 바라보았다.
“뒤져! 뒤지라고! 개새끼들아!”
그곳에서 최운혁은 그야말로 미쳐 날뛰고 있었다. 단신의 몸으로 그것도 한쪽 팔을 잃어 많은 전력을 상실한 몸으로 그는 혼자서 게이트를 막아내고 있었다.
믿을 수 없는 광경이었다.
오늘 이후로 누군가 서준에게 한국 최강의 초인은 누구입니까? 라고 묻는다면 두 번 고민할 것도 없이 최운혁을 고를 것이다.
그럴 정도로 지금 최운혁이 보여주고 있는 장면은 엄청난 것이었다.
-캬아아악!
-캬악!
그럼에도 불구하고 최운혁을 넘어오는 괴수들도 상당했다. 게이트에서 쏟아져 나오는 수백, 수천의 괴수를 혼자서 막아내는 것은 무리였다.
혹시라도 양쪽 팔이 모두 존재했다면 가능했을 수도 있지만, 한쪽 팔만을 가지고 만들어내는 폭발에는 한계가 있었다.
-어흥! 캬앙! 크릉!
최운혁의 뒤로 넘어온 괴수에게 호랑이들이 달려들었다.
물소처럼 생긴 괴수는 코끼리의 크기를 가지고 있었다. 호랑이들을 향해 사납게 달려드는 물소의 기세는 정말 어마어마했다.
다중 추돌 사고로 이미 막혀버린 도로변에 주인이 버려두고 간 차들은 괴수가 한걸음 걸을 때마다 저 멀리 튕겨 나갔고 괴수의 한발 한발이 닿을 때마다 도로는 금이 가기 시작했다.
-어흥! 어흥!
하지만 호랑이들은 겁을 먹지 않았다. 어흥이는 재빨리 놈에게 달려들어 뒷발의 뒤꿈치 부분을 강하게 물어뜯었다.
-캬아아악!
놈이 고통에 몸부림치는 순간을 놓치지 않은 캬앙이는 높게 점프해서 앞발로 놈의 눈알을 찍어내렷다.
거대한 망치처럼 두꺼운 캬앙이의 앞발이 놈의 눈알을 정확히 파고들었고, 송곳처럼 날카로운 발톱이 놈의 각막을 찢었다.
-캬아아아악!
놈이 고통에 더욱 몸부림치기 시작했다. 놈이 한번 날뛸 때마다 주위의 전봇대가 하나씩 무너졌다.
-크릉! 크릉!
크릉이는 서준을 등위에 태운 채 겁먹어서 도망치지 못하는 사람이나 다쳐서 쓰러져있는 사람들에게 달려갔다.
서준은 크릉이와 호흡을 맞춰가며 사람들의 대피를 최대한 도왔다.
어차피 서준과 호랑이들은 언제든 도망갈 수 있었다. 더 이상 막아낼 수 없다고 판단되면 게이트를 열고 도망치면 될 뿐이다.
대부분의 괴수들은 엄청난 무력을 보여주며 활약하고 있는 최운혁에게 쏠려있었고 서준에게 접근하는 괴수는 어차피 소수였다.
그저 도망칠 때 마음 불편하지 않게 일반인들의 대피를 끝내놓기만 하면 될 뿐이었다. 어차피 최운혁은 서준의 목숨을 노리는 범죄자일 뿐 걱정의 대상이 아니었다.
-캬아아아악!
-어흥! 어흥! 어흥!
-캬앙! 캬앙! 캬앙!
어흥이와 캬아 이이가 거대한 괴수를 상대로 끈질기게 달라붙어 물었고, 괴수가 공격하려 하면 피하기를 반복하며 괴수를 괴롭혔다.
놈의 크기와 힘이 최운혁이 상대하는 놈들과는 비교도 할 수 없을만큼 강한 것을 보았을 때 확실히 놈이 보스였다.
저 놈을 처치하기만 한다면 그 이후의 큰 위협은 없었다.
“크릉아! 저리로 가자!”
-크릉! 크르릉!
서준은 어흥이와 캬앙이가 싸우고 있는 곳을 가리켰다. 두 호랑이가 최선을 다해 싸워주고 있었지만 쓰러트리기에는 무리였다.
서준도 힘을 합칠 필요가 있었다.
“저놈만 죽이면 나머지는 저 외팔이 새끼가 알아서 하겠지!”
서준은 허리춤에 달아둔 장도리를 들었다. 연희주에게 선물 받은 이후 단 한순간도 몸에서 뗀 적 없는 물건이었다.
-크릉! 크르릉!
크릉이가 크게 울부짖으며 높이 뛰어올랐다. 그 높이는 거대한 물소의 머리를 뛰어넘을 정도로 높았다.
-쾅!
크릉이의 등위에 올라타 있었던 서준은 놈의 옆을 지나면서 놈의 척추뼈를 장도리로 강하게 내리찍었다.
강철처럼 단단한 놈의 피부를 뚫고, 강철보다 단단한 놈의 척추와 이계의 광물로 만들어진 서준의 장도리가 충돌하자 천지가 개벽할 만큼 커다란 소리가 울려 퍼졌다.
게이트 앞에서 피 터지게 싸우고 있던 최운혁과 괴수들이 순간 움찔하며 돌아볼 정도였다.
-캬아아아아아악!
놈은 더욱 괴로워하며 몸부림쳤다.
-어흥! 캬앙!
어흥이와 캬앙이는 그 순간을 놓치지 않고 놈에게 달려들어 가슴팍을 할퀴고 옆구리를 물어뜯는 등 끊임없이 공격했다.
고통에 휩싸인 놈의 발버둥에 이미 주위는 폐허가 되었다.
“다시 가자!”
-크릉!
크릉이 위에 올라탄 서준 역시 다르지 않았다. 크릉이는 빠른 속도로 괴수의 공격을 피하며 놈의 주위를 잘 뛰어다녔다.
서준은 그 위에서 편하게 놈을 공격할 수 있었다.
놈의 정강이를 후려치고 뒤꿈치를 내리찍고 발톱을 박살 내는 등 장도리가 한 번씩 움직일 때마다 놈은 괴로움에 소리쳤다.
-캬아아아악!
그리고 그 순간 놈의 코에서 기다란 뿔이 자라나기 시작했다. 붉은색으로 빛나는 에너지의 형태로 이루어진 놈의 뿔은 누가 보더라도 놈의 회심의 기술이었다.
놈은 부러지고 살갗이 뜯어져 제 기능을 하지 못하는 다리를 이끌고 서준과 크릉이를 향해 빠르게 달려오기 시작했다.
고통을 잊은 놈의 속도는 그야말로 어마어마했다.
“크릉아! 피해있어!”
-크릉!
서준은 크릉이를 뒤로 물렸다. 그리고 놈의 뿔이 서준에게 점점 더 다가오고 있었다.
그러나 서준은 피하지 않았다. 오히려 미소를 짓고 있었다.
-콰아아앙!
놈과 서준이 충돌하는 순간 엄청난 굉음이 일어났으며, 서준의 목걸이에서 강한 빛이 발하기 시작했다.
“인생은 템빨이야. 담부터는 현질 하고 오라고.”
서준은 회심의 일격이 통하지 않아 당황한 녀석의 머리통을 온 힘을 쥐어짜 내며 내리쳤다.
서준을 공격하기 위해 얼굴을 땅 가까이 내린 놈의 두개골은 이미 서준의 사정거리였다.
온 힘이 실린 서준의 장도리가 그곳을 정확히 내리찍었다.
그리고 쾅! 하는 굉음과 함께 놈의 두개골은 그대로 박살 났고, 힘을 잃은 괴수는 그대로 쓰러졌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