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4화
캉! 하는 굉음과 함께 표범의 앞발이 튕겨 나갔다.
공격 성공을 확신하고 의기양양했던 놈의 표정은 일순간 당혹으로 물들었다.
느려진 시간 속에서 서준은 그것을 정확히 포착할 수 있었다.
그때 서준의 목에는 강렬하게 빛나는 아티팩트가 걸려있었다.
강렬한 빛의 뒤편에는 충격의 반동으로 튕겨 나가는 놈의 앞발이 보였다. 천천히, 아주 천천히 놈의 몸과 함께 뒤로 튕겨나고 있었다.
'아마도 다음 공격이 한계야. 아니 거의 확실하다!'
서준의 이 능력은 오랫동안 지속할 수 없었다. 서준을 제외한 주위 모두의 시간을 느리게 만드는 신비한 능력이었다. 정확히는 서준의 사고를 가속하는 능력이었지만, 그렇게 이해하는게 더욱 편했다.
물론 이런 엄청난 능력을 아무 제약 없이 사용할 수 있을 리 없었다. 아마도 다음 공격 그 한번을 피하고 나서는 더 이상 사용하기 힘들 것이었다.
'그 전에 끝내야 해!'
느려진 시간 속에서 서준이 생각을 끝마칠 즈음에는 서준의 손은 이미 허리춤에 달려있는 장도리에 도달해있었다.
손끝에 장도리의 감촉을 느낀 서준은 그대로 손잡이를 쥐고 놈의 머리통을 향해 힘껏 휘둘렀다.
느려진 시간 속에서 거의 공중에 멈춰있는 것이나 다름없는 표범의 머리는 어린아이라도 맞출 수 있을 정도로 간단한 일이었다.
서준의 장도리는 놈의 관자놀이를 정확하게 후려쳤다.
이계의 광물로 만들어진 장도리가 놈의 머리를 후려치는 소리와 함께 퍼어억! 하는 소리가 길게 늘어지며 들려왔고 표범은 그대로 땅으로 처박혔다.
그리고 그 순간 다시 시간의 흐름이 원상태로 돌아왔다. 아마 이 정도가 사고 가속의 최대 사용시간인 듯하다.
충격을 입은 표범은 상대가 안 되는 것을 깨달았는지 잽싸게 일어나 도망치려 했지만,
-어흥! 캬앙! 크릉!
호랑이들은 그를 놓치지 않고 그대로 놈을 덥쳐 물어뜯기 시작했다.
비록 호랑이들은 놈을 감지하는 데는 실패했지만 이제는 눈에 보이는 데다가 상처까지 입은 놈이었다.
상처입은 사냥감을 서준의 호랑이가 놓칠 리 없었다.
"휴우……."
이제 상황이 종료됐음을 깨달은 서준은 길게 한숨을 내쉬며 땅바닥에 주저앉았다.
남은 건 호랑이들이 처리해줄 것이었다.
'그래도 이놈 덕분에 살았네.'
서준은 목에 걸린 목걸이를 오른손 엄지손가락으로 쓰다듬었다.
GOTY KOREA 우승의 대가로 받은 아티팩트였다.
그 능력은 매우 간단했지만 매우 강력했다.
24시간에 딱 1번 어떤 공격이든 막아주었다. 물론 그 발동을 조절할 수 없어서 원하는 공격만 막아낼 수는 없었다.
첫 피격을 무조건 막아주는 아티팩트였다.
김소현도 결승 당시 보스가 차고 있던 이 목걸이의 능력에 잠깐 당황했었다.
겁을 먹고 있는 보스를 자신 있게 공격했지만 회심의 일격이었던 첫 번째 공격이 아주 간단하게 튕겨 나갔었다.
물론 둘 사이의 기량 차이가 엄청났기에 김소현은 정신을 차리고 놈을 쉽게 처리할 수 있었다.
서준의 능력과 이 목걸이만 있으면 웬만한 기습에는 면역이라고 할 수 있었다.
첫번째 피격은 무조건 막아주는 아티팩트와 서준이 위협에 빠졌을 때 서준의 사고를 가속 시켜주는 능력은 매우 궁합이 좋았다.
사실상 절대방어나 다름없었다.
언제 최운혁에게 공격을 당할지 모르는 서준에게는 꼭 필요한 아티팩트였는데 적절한 타이밍에 손에 들어왔다.
운이 좋았다.
'그나저나…. 또 24시간이네?'
그나저나 아티팩트의 재사용 대기시간이 24시간이었다.
그리고 게이트의 유지 시간도 24시간이었다. 우연이라면 우연일 수도 있겠지만 연관이 있을 수도 있다는 생각이 들었다.
'다른 아티팩트의 쿨타임도 알아봐야겠어.'
어차피 여기서는 알아낼 수 없는 사실이었다. 지구로 돌아가 창천 길드에 물어보면 그만이었다.
'애들 먹는 거만 보고 가야지.'
표범사냥에 성공한 호랑이들은 즐거운 포식 시간을 즐기고 있었다.
"맛있게 먹어 얘들아, 간만의 포식이네."
-어흥! 캬앙! 크릉!
표범이 맛이 좋은지 서준의 호랑이들은 기분 좋게 그르렁댔다. 그동안 매번 같은 식사만 해서 질렸을 텐데 간만의 특식이었다.
게다가 꿀닭이나 뿔토끼와는 비교할 수도 없는 강한 맹수였다. GOTY KOREA에서 엄청난 활약을 보여줬던 서준의 호랑이들도 감지해내지 못한 은신 능력을 지닌 표범이었다.
게다가 그 속도는 어떠했는가? 저 정도 되는 맹수를 사냥한 대가는 호랑이들에게 충분하게 돌아갈 것이다.
꿀닭이나 뿔토끼처럼 약한 동물에게서 얻은 힘보다 오늘 하루 표범을 포식한 후 얻어내는 힘이 더 클 것이 분명했다.
-어흥! 어흥!
-캬앙! 캬앙!
-크릉! 크릉!
서준은 맛있게 식사하는 호랑이들을 보며 만족스러운 미소를 지었다.
"백 선생님 배낭에 든 건 뭐예요? 부피가 상당한데요?"
호랑이들의 식사가 끝난 후 서준은 지구로 돌아와 창천 길드에 와 있었다.
"아! 이거요? 저도 잘 모르겠어요. 그거 물어보려고 온 거예요."
서준은 커다란 배낭 속에 들어있는 물건을 꺼냈다.
"이건…. 밀인가요?"
바로 재배지에서 뿌리까지 곱게 캐서 가져온 밀이었다.
물론 보통의 밀보다는 훨씬 크기가 크고 그 알갱이도 굵었다.
"어디서 주웠는데 보통 밀이랑은 좀 다른 거 같아서요. 조사 좀 부탁드립니다."
"네, 알겠습니다. 연구팀에 맡겨볼게요."
윤희주는 서준에게 밀을 건네받으며 답했다. 그러고선 직원 한 명을 불러 밀을 건네주었다.
"그런데 저건 어디서 구하셨나요? 길이는 둘째치고 굵기도 많이 굵고 알갱이도 큰 게 보통 밀은 아닌 거 같은데요?"
"그냥 길 가다가 보이길래 캐 봤어요."
차마 재배지에서 가져왔다고는 말하지 못하는 서준은 대충 얼버무리며 답했다.
이럴 때는 차라리 말할까 고민을 하는 서준이었다. 그러나 아직은 때가 아니었다.
"으음…. 일단 알겠습니다. 새로운 약초 구해오시는 것도 그렇고 오늘 가져오신 밀도 그렇고…. 언젠가는 때가 되면 말씀해주시겠죠. 기다리고 있을게요."
그래도 윤희주는 서준을 이해하는지 싱긋 웃으며 말해주었다. 이러한 점 때문에 서준은 윤희주와 손을 잡은 것이다.
서준이 말 하려 하지 않으면 두 번은 묻지 않았다. 그저 대충 이해한 후 넘어가 주었다. 윤희주의 최고 장점이었다.
"그나저나 부탁이 하나 있어요."
"뭐든 말씀하세요."
서준의 말에 윤희주는 역시 싱그럽게 웃으며 답했다.
"별부름탄 만들어진 거 있죠? 한 보따리만 가져갈 수 있을까요?"
"별부름탄을요? 위험한 물건인데요?"
별부름탄은 살상용 무기였다. 그 위력은 상당했다. 약초꾼이 들고 다닐만한 무기는 아니었다.
"혹시 몰라서요. 최운혁이 언제 습격해올지도 모르고…. 호신용으로 들고 다니게요."
"그래도 한 보따리는 좀 과한데…. 일단 알겠습니다. 연락해 놓을 테니 이따가 가실 때 정문 인포에서 받아 가시면 될 거예요."
"감사합니다."
사실 최운혁 때문은 아니었지만 서준은 대충 둘러대었다.
요번 표범의 습격도 그렇고 서준은 느낀 바가 있었다. 넓은 재배지에 또 어떤 맹수가 숨어있을지 몰랐다.
심지어 그들이 무리생활을 한다면 굉장히 위험해질 수도 있다.
그러나 그 문제는 별부름탄으로 완벽하게 해결할 수 있었다. 서준은 재배지 탐험을 위한 마지막 무기를 손에 넣은 셈이다.
이 정도면 재배지에서 다구리를 맞아도 웬만해선 극복할 수 있다.
길드 정문에서 별부름탄을 받아든 서준은 기쁜 마음에 룰루랄라 거리며 약국을 향해 걸어가고 있었다.
"어!"
"아!"
약국까지 오 분 정도 남았을까? 약국을 향해 가던 중 눈에 익은 여자를 만났다.
"오랜만이네?"
서준을 알아본 여자는 한 손을 가볍게 들며 인사했다. 둘이 만난 건 8년 만이었다.
"오랜만이네, 잘 지냈어?"
"그냥 그렇지 뭐. 네 얘기는 들었어. 뉴스에도 나오더라."
서준과 여자는 어색하게 인사를 나누었다. 둘 사이에는 이상한 기류가 흘렀다.
"옆에는 딸이야?"
"응, 그렇게 됐네."
"귀엽네, 몇 살이야?"
여자는 아랫입술을 한 번 깨물며 잠시 고민하더니 답했다.
"여섯 살."
"그래? 나중에 모델해도 되겠네. 너 닮아서 그런가? 키가 큰가 보다."
"그런가?"
여자와 서준은 어색하게 웃었다. 여자는 서준의 전 여자친구였다.
서준이 타임 워프 하기 전 만났던 여자였다. 타임 워프 후 연락이 끊겨 그대로 관계가 끝이 났는데 그새 결혼을 했던 모양이다.
"대침공 이후로 연락이 끊겨서 죽은 줄만 알았는데…. TV에서 네 소식 듣고 깜짝 놀랐어."
"어쩌다 보니 그렇게 됐네. 미안해 연락 해야 했는데."
"아니야, 힘든 시기였으니까."
차마 재배지에서 타임 워프했다고 말하지 못한 서준은 대충 얼버무렸다.
여자도 오랜 시간이 흘러 이미 감정이 다 녹슬었는지 대수롭지 않게 받았다.
"어쨌든 잘돼서 기분은 좋다. GOTY 본선도 TV 보면서 응원할게. 잘해!"
"본선? 뭐…. 잘 해야지. 창천 길드는 나 없으면 안 되는데 뭐."
본선에 나갈지는 아직 생각조차 하지 않고 있던 서준이었다. 그렇지만 괜한 마음에 본선에 참가할 것처럼 답한 서준이었다.
여자에게는 8년이었다. 하지만 서준에게는 8년이 아니었다. 둘이 겪은 시간의 흐름이 달랐으니 감정의 마모 정도도 다를 수밖에 없었다.
"가봐야겠다. 남편이랑 저녁 먹기로 했거든. 퇴근 시간 맞춰서 회사 앞으로 가야 돼."
"그래, 오랜만에 만나서 반가웠어."
"나도, 멀리서 응원할게."
서준은 약국을 향해 걸어갔고, 여자는 그런 서준의 뒷모습을 오랫동안 바라봤다.
"엄마!"
"응 신비야 왜?"
"왜 거짓말했어?"
"무슨 거짓말?"
"나 여덟 살인데……."
여자와 딸 사이에 잠깐 침묵이 흘렀다.
"하아……."
집에 돌아온 서준은 소파에 걸터앉아 길게 한숨을 내쉬었다.
여자친구뿐만이 아니었다. 친구들도 친한 선배들과 후배들도 모두 잃었다.
8년이라는 긴 시간 동안 사라졌던 서준은 모든 관계를 잃었다.
서준에게는 한 달이라는 짧은 시간이었지만 그들에게는 괴수에게 쫓기는 기나긴 8년이었다.
그동안 죽은 사람들도 많았고 살아남은 사람들도 모두 새로운 관계를 구축했다.
한 달 후 돌아온 서준은 완전한 외톨이가 되어있었다.
서준은 주먹을 강하게 움켜쥐었다.
이 모든 일의 원흉은 분명했다. 괴수를 조정해 지구를 침공한 그놈이었다.
물론 아직 괴수 침공의 원인은 밝혀지지 않았지만 많은 사람들은 그렇게 믿고 있었다.
외계의 다른 곳에서 지구를 침공해온 것이라고, 그 지배자를 처리하면 다시 지구는 예전처럼 돌아갈 수 있다고.
서준 역시 다르지 않았다. 그렇게 믿었고, 예전으로 돌아가길 원했다. 그리고 서준은 그 단서를 가지고 있었다.
재배지에서의 역사는 게이트 너머의 세계에 영향을 끼치는 것을 확인했다.
서준은 이 모든 일의 원흉을 되돌릴 것이라고 굳게 다짐했다. 비록 시간을 되돌릴 수는 없겠지만 적어도 마음은 후련해지겠지.
자리에서 일어난 서준은 표범의 피가 묻은 장도리를 잘 닦아주고 별부름탄의 상태를 확인했다.
오늘 푹 잔 후 내일 아침부터 다시 재배지 탐험에 나설 생각이었다.
이제 서준의 표정에는 망설임이 보이지 않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