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4화
작고 푸르스름한 그 열매는 아직 설익었다는 것을 한눈에 알아볼 수 있었다.
오랜 기간 서준이 정성스레 키운 나무가 맺은 첫 열매는 작고 그 색조차 옅었지만 그 안에서 뿜어내는 기운은 서준이 느낄 수 있을 정도였다.
-어흥! 어흥!
어흥이조차도 무언갈 느꼈는지 몸을 일으켜 세우며 크게 울었다. 그 울음소리가 얼마나 컸는지 주위에 있던 수많은 뿔토끼들이 놀라 사방으로 흩어졌다.
‘아직 덜 자랐는데도 이 정도면…….’
나무 꼭대기에 맺혀있는 그 열매를 바라보고 있으면 서준의 감각이 서늘해지기 시작했다.
본래 서준이 위험에 처했을 때만 발동하던 초감각이었다. 정확한 이유는 모르고 단지 꿀닭이 원인일 거라 생각되었던 그 능력이 열매를 바라보고 있으면 발동되었다.
느려진 시간은 열매가 아주 미세하게 박동하는 것을 느낄 수 있게 해줬다. 작은 열매는 아직 덜 자란 신생아의 심장처럼 미약하게 쿵! 쿵! 하며 뛰었고, 그때마다 서준의 단전이 울렁거렸다.
‘다 자라려면… 몇 년이 걸릴까?’
나무가 이만큼 자라나는 데에는 수십 년이 걸렸다. 게다가 아직 잎이 달리지 않은 가지가 더 많은 것을 보면 덜 자란 것이 분명했다.
그렇다면 열매가 완전히 익는 데에는 몇 년의 시간이 걸릴까?
‘기대가 된다.’
서준은 그 날이 기다려지기 시작했다. 이제야 막 피어난 열매가 이 정도의 힘을 뽐내고 있는데 다 자라난다면 어떤 결과가 일어날지 기대가 되기 시작했다.
열매가 다 자라난다면 분명 엄청난 변화를 가져올 것이 분명했다.
최정윤 : 야! 고혜리! 너네 길드 대박 났다며?
김진표 : 그니까 뭐냐? 소문 쫙 퍼졌던데? 요번 게이트에서 대박 났다고.
고혜리 : 아, 거기까지 소문이 났어?
서준이 나무 열매가 다 자랄 날을 기대하며 괴수의 시체를 묻어주고 있는 동안 초인몰의 실명 게시판은 한바탕 난리가 났다.
그리고 그 원인은 서준이었다.
김진표 : 너네 요번 게이트에서 대박 건졌다며? 어떻게 한 건데? 빨리 말해봐.
최정윤 : 빨리! 빨리!
고혜리 : 별건 아니구, 그 보온초 있잖아? 창천 길드에서 파는거.
최정윤 : 웅! 웅!
고혜리 : 그거 비상용으로 몇 개 사뒀거든. 근데 요번에 게이트 넘어갔는데 극한 지방인 거 있지? 온도가 영하 40도나 내려가더라니까?
최정윤 : 그래서?
고혜리 : 혹시나 해서 보온초 먹어봤는데 그냥 쌀쌀한 가을 정도로 느껴지더라, 극한 지역 게이트가 노다지라고 소문은 파다했잖아. 활동하기 힘들어서 그렇지. 그런데 몸이 따듯해지니까 뭐 어려울 게 없더라고. 다 들고 왔지 뭐.
김진표 : 보온초는 먹어봤자 살짝 몸 따듯해지는 거 아니었어? 난 창천 길드 놈들이 약 팔아먹으려고 약 친 건 줄 알았는데.
그렇다. 본래 시중에서 돌고 있는 보온초는 그 수가 매우 적은 것은 둘째치고 그 효과조차 매우 미미해서 잘 사용하지 않는 약초였다.
복용한다고 해도 몸이 살짝 따듯해지는 정도의 효과를 가지고 있을 뿐이었다. 한겨울에 핫팩 대신 쓰면 적당한 정도의 효과였다.
단지 그만큼이라도 몸을 따듯하게 할 필요가 있을 때나 쓰는 약초였다. 핫팩처럼 움직임에 방해를 주지 않는 약초였으니깐.
고혜리 : 그동안 창천 길드가 바이럴 마케팅한 적은 없었잖아? 그래서 나도 속는 셈 치고 한번 사봤지. 근데 진짜였던 거지 뭐.
최정윤 : 와! 대박.
하지만 서준이 재배해낸 보온초의 경우는 기존의 것과 사뭇 달랐다.
영하 40도의 추위에서도 서준의 보온초를 복용하기만 한다면 늦가을에 밖을 나돌아다니는 정도의 체감 온도를 느끼게 된다.
그리고 그것은 헌터들의 움직임에 아주 큰 차이를 가져다준다.
게이트 너머의 극한 지방은 이유를 알 수 없지만, 진귀한 보물들을 많이 품고 있었다.
진귀한 아티팩트부터 시작해서 많은 에너지를 품고 있는 광석들, 거기에 효능 좋은 약초들도 많았다.
하지만 약하면 영하 40도 심하면 80도를 넘어가는 극한 지방에서 제대로 움직일 수 있는 헌터는 없었다.
불을 다루는 헌터나 얼음을 다루는 헌터들도 그 추위에서는 제대로 작동하지 못했다.
그렇기에 그 진귀한 보물들은 그림의 떡이었다. 길드 입장에서는 극한 지방은 노다지가 아닌 꿈속 환상일 뿐이었다.
그러나 서준의 보온초를 먹게 된다면 이야기가 달라졌다.
늦가을 정도의 추위는 일반인들도 운동을 하는 도중에는 잊을 수 있을 정도의 추위였고, 당연히도 헌터들에게는 가소로울 정도였다.
그러한 상황에 노다지 밭에 떨어진 헌터들은 한걸음 걸을 때마다 보물을 하나씩 캐는 것이 가능했다.
일전에는 창천 길드가, 이번에는 고혜리의 길드가 그 대박을 주웠을 뿐이다.
김진표 : 야 그거 호랑이 약국에서 만든 거랬지?
고혜리 : 어.
김진표 : 와 거기 약사가 대단한가 보네? 불끈초도 재배하더니.
고혜리 : 불끈초 관심 없다더니?
김진표 : 아! 관심 없어. 말이 그렇단 거지.
최정윤 : 야! 거기 사장 몇 살이냐?
김진표 : 그건 왜?
최정윤 : 바로 꼬신다. ㅋㅋ
김진표 : 응 너 안 만나 줘.
최정윤 : 아니거든!
구하선 : 호랑이 약국 만세!
최정윤 : 만세!
김진표 : 갑자기?
초인몰에서 한창 서준의 이야기가 피어나고 있을 동안 서준은 재배지에서의 일을 모두 마치고 약국으로 돌아왔다.
시신을 묻어두고, 약초를 캐고 새로 심고 하다 보니 어느덧 해가 쨍쨍히 떠오른 낮이 되어있었다.
-띠리링, 띠리링,
그리고 그때 누군가 찾아왔다.
“안녕하세요! 백 선생님!”
“아! 어서 오세요, 소현 씨.”
창천 길드 전투 조장 김소현이었다.
“연락도 없이 갑자기 무슨 일이세요?”
원래 갑자기 찾아왔다 갑자기 사라졌던 사람이었지만 서준은 예의상 한 번 물었다.
“호랑이들 놀만 한 곳 생겼다는 소문 듣고 찾아왔는데요?”
답을 하며 김소현이 오른손을 들어 올렸다. 김소현의 오른손에는 호랑이 두 마리가 들어있는 케이지가 있었다.
김소현은 씽긋 웃더니 케이지를 열어 호랑이들을 풀어줬다.
-꺄앙!
“와 둘리랑 또치도 많이 컸네요?”
“그럼요! 이제 좀만 더 크면 곧 말도 할 거 같아요.”
서준은 둘리와 또치를 안아 들고 마당으로 향했다. 마당에는 이미 서준의 호랑이들이 자리를 잡고 일광욕을 즐기고 있었다.
“얘들아! 동생 왔다!”
-어흥! 어흥!
-캬앙! 캬앙!
-크릉! 크릉!
서준의 호랑이들은 둘리와 또치를 발견하더니 재미있는 놀잇감을 발견한 듯 기쁜 표정을 지으며 가벼운 발걸음으로 달려왔다.
-쿠와아앙!
둘리와 또치는 지난번 서준의 호랑이를 만났을 때처럼 겁에 떨지 않고 서준의 호랑이들에게 다가가기 시작했다.
“와, 많이 컸네요? 겁도 안 먹고.”
“그럼요! 이젠 저한테도 대든다니까요?”
서준과 김소현이 둘리와 또치를 보며 얘기를 하던 와중에 둘리가 어흥이의 머리를 한 대 툭 쳤다.
-쿠와아앙!
그리고 겁을 상실한 대가를 곧바로 치를 수 있었다. 어흥이는 곧바로 둘리의 몸을 타고 올라가 짓누르며 목을 살짝 물었다.
-어흥!
어흥이에게 사로잡힌 둘리는 완전히 제압당해 꼼짝도 할 수 없었다. 겁을 상실한 대가는 컸다.
“하하, 진짜 많이 컸네요. 어흥이한테 대들기도 하고.”
서준과 김소현이 그렇게 호랑이들의 재롱을 바라보며 즐겁게 웃으며 호랑이들을 쓰다듬고 있었다.
그러던 중 갑자기 김소현과 김소현이 쓰다듬고 있던 또치가 사라져버렸다.
“어? 소현 씨?”
-쿠와아앙!
갑작스러운 상황에 둘리도 당황했는지 주위를 살펴보았다. 그리고 곧 그 원인을 알 수 있었다.
김소현과 또치가 있던 자리의 땅바닥이 검게 물들어 있었다.
“게이트?”
바로 게이트였다.
게이트를 발견한 또치는 망설이지 않고 그 속으로 뛰어들어갔다. 김소현을 완전한 주인으로 인식하고 있던 또치에게 한 치의 망설임도 없었다.
“젠장! 얘들아 따라와!”
-어흥! 어흥!
-캬앙! 캬앙!
-크릉! 크릉!
서준과 호랑이들도 망설임 없이 게이트로 뛰어들었다.
그리고 그 속에서 주위를 경계하는 김소현을 찾을 수 있었다.
“소현 씨! 괜찮으세요?”
“네, 전 괜찮아요. 그보다 게이트 경보가 없었는데…. 어째서 이런 일이?”
본래 게이트 경보는 매우 정확했다. 대부분의 게이트는 게이트 관리부에서 그 징조를 정확히 파악했고, 미리 경고했다.
그렇기에 길드들이 사전의 게이트를 배정받고 보호 임무를 하거나 침투 임무를 할 수 있었다.
하지만 오늘 서준의 마당에서 발생한 게이트는 그 어떤 징조도 없었다.
“소현 씨 그것보다 더 이상한 게 있어요.”
“뭐죠?”
하지만 서준은 그보다 더 이상한 점을 찾을 수 있었다.
“괴수가 한 마리도 보이지 않아요. 이쯤이면 게이트를 넘어가려는 괴수들로 득실댔어야 하는데…. 주위에 괴수가 한 마리도 없어요.”
본래 게이트 경보라는 것은 100% 완벽하지는 못했다. 미리 징조를 파악하고 예측하는 것이기 때문에 완벽할 수는 없었다.
해서 때때로 경고 없이 열리는 게이트들이 있었고, 그로 인한 피해도 꽤 컸다.
하지만 게이트가 열린 지 십여 분이 지난 이 시점에서 괴수가 단 한 마리도 보이지 않는 것은 지금껏 없었던 일이다.
“그러게요? 이게 어찌 된 일인지…. 저도 게이트는 꽤 많이 다녀봤는데 이런 적은 처음이네요.”
본래 게이트란 것이 괴수들이 지구를 침공하기 위해 만들어진 것이었다.
그리고 괴수라는 녀석들은 게이트가 열리면 뭐에 홀린 것처럼 눈에 불을 켜고 지구로 넘어와 파괴행위를 했다.
때문에 경보 없이 미확인 게이트가 열리면 순식간에 튀어나온 괴수들을 잡아내지 못해 매우 큰 피해를 입었다.
지금도 역시 평범한 게이트였다면 서준과 김소현 둘이서 막아내는 건 요원했을 것이다. 지금 둘이 살아있는 것은 매우 이례적인 일이었다.
“백 선생님 어떻게 할까요? 일단 나갈까요?”
계속해서 주위를 경계하던 김소현이 물었다. 겉으로는 이렇게 묻고 있었지만 사실 김소현은 답을 내린 상태였다.
둘이서 게이트를 탐험하는 것은 자살 행위였고, 김소현은 무조건 나가야 한다고 판단을 내린 상태였다.
“계속 가보죠?”
하지만 서준의 대답은 김소현의 예상과는 전혀 달랐다.
“네? 하지만 너무 위험해요! 백 선생님은 전투 요원도 아니시잖아요!”
김소현의 대답은 당연한 것이었다. 김소현이 아니라 그 누가 왔더라도 같은 대답을 했을 것이다.
“지금까지 괴수가 나오지 않은 것을 보면 이 게이트 안에는 괴수가 없을 가능성이 커요.”
“꼭 그렇지만은 않아요! 지난번 함께 들어갔던 경우를 봐도 보스가 남아있었어요.”
실제로 창천 길드와 서준이 함께 들어갔던 게이트에는 보스가 남아있었고 그를 대비하지 못한 창천 길드는 큰 피해를 입은 적이 있었다.
“맞아요. 위험부담은 분명히 큽니다. 하지만 그만큼 돌아오는 게 더 클 거라고 생각해요. 괴수가 하나도 보이지 않는 게이트에요. 거의 24시간을 모두 쓸 수 있는 이례적은 상황이에요. 이 기회를 놓치면 분명 큰 후회를 할 거예요."
하지만 서준의 답은 달라지지 않았다.
“그리고 전 둘이서도 해낼 수 있다고 생각해요.”
그리고 서준은 자신이 있었다.
서준 옆에는 성장한 호랑이들이 있었다. 그동안 재배지에서 충분한 사냥 훈련을 해왔고, 어느 정도 괴수들도 잡을 수 있다고 확신했다.
게다가 서준에게는 게이트가 있었다. 정 위험하면 그 속으로 도망치면 그만이었다.
만일 그렇게 된다면 능력을 공개해야겠지만 김소현이 서준의 능력을 어디 발설할 인물로 보이지는 않았다.
“좋아요. 대신 위험해지면 무조건 도망치는 거예요.”
“갑시다.”
한참을 생각하던 김소현도 이 기회를 놓칠 수는 없었는지 서준의 뜻을 따라주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