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1화
“읏차! 얘들아! 좀 더 열심히 파봐! 더 깊게 파야 해!”
-어흥! 어흥!
-캬앙! 캬앙!
-크릉! 크릉!
서준은 호랑이들과 함께 열심히 땅을 파고 있었다.
지금까지 총 아홉 개의 구덩이를 팠고, 앞으로 마지막 한 개의 구덩이가 남았다.
서준은 삽 하나를 들고 미친 듯이 땅을 파 내려갔으며 호랑이들은 거대한 앞발을 이용해 신들린 듯이 땅을 파 내려갔다.
호랑이들은 일하는 줄도 모르고 서준과 놀고 있는 것 마냥 신이 나는 얼굴로 땅을 파 내려갔다.
이럴 때는 정말 그냥 아이 같았다.
“후우, 됐다. 얘들아 던져!”
-어흥! 어흥!
-캬앙! 캬앙!
-크릉! 크릉!
곧이어 10개의 땅을 다 파낸 서준이 호랑이들에게 말하자 호랑이들은 트롤의 머리통을 각 구덩이당 하나씩 던져서 집어넣었다.
몸집은 작지만 힘이 장사 같은 호랑이들은 커다랗고 무거운 트롤의 머리통을 어렵지 않게 들 수 있었다.
호랑이들이 집어던진 트롤 대가리 속에는 불끈초의 종자들이 심겨 있었다.
서준은 드디어 불끈초를 제대로 재배하는 데 성공한 것이었다. 그리고 그렇게 만들어낸 종자를 이제 본격적으로 심기 시작했다.
“잘 되었으면 좋겠는데…….”
맨 처음 심어두었던 불끈초는 지구 시간으로 한 달 조금 더, 재배지의 시간으로 거의 십 년의 시간이 흐른 뒤에야 다 자라났다.
서준은 거기에서 종자를 얻어내어 10개로 나눠 심은 것이다.
이것이 성공만 한다면 서준은 불끈초의 양산을 성공한 것이라 봐도 될 것이다.
“얘들아 우리 부자 될 날 얼마 안 남았어! 부자만 되면 형이 넓은 마당 만들어줄게!”
-어흥! 어흥!
-캬앙! 캬앙!
-크릉! 크릉!
불끈초 양산에만 성공한다면 트롤 대가리를 사느라 본 손해를 다 메꾸고도 남았다.
아니, 서준은 그동안 결사회때문에 장사를 못 해 본 손해조차 다 메꾸고도 남는 수익을 얻을 수 있을 거라 판단했다.
그만큼 서준은 불끈초가 그럴만한 가치가 있는 약초라고 생각했다.
초인몰에 올리기만 한다면 정말 불티나듯이 팔려나갈 것이다. 그것도 비싼 가격에.
아마도 이 물건을 사기 위해 모두가 눈에 불을 켜고 필사적으로 경쟁할 테지.
“하아, 얘들아 근데 저건 어떻게 처리하냐?”
서준이 한숨을 쉬면서 바라본 방향에는 목이 없는 거대한 시신 10체가 나란히 누워있었다.
바로 트롤이었다.
초인몰에 트롤 대가리를 구한다는 글을 올렸던 서준이었지만, 10개나 되는 트롤 대가리를 한 번에 파는 사람은 적었다.
애초에 트롤의 시체는 쓰임새가 어느 부위고 많아서 몸통 전체를 파는 것이 대부분이었다.
그렇다고 언제까지 웃돈을 주고 구매하기에는 그 가격이 너무 비쌌다. 아무리 최근에 돈을 좀 만지고 있는 서준이라도 부담스러운 가격이었다.
하는 수없이 서준은 트롤 전신 사체를 10개를 구입했다. 덕분에 예상했던 것보다 많은 손해를 보긴 했지만 다른 방법이 없었다.
머리통만 사는 것보다야 더 많은 돈이 들긴 했지만 되팔던가 아니면 어떻게든 다른 활용법을 찾아보는 게 이득이라고 판단했다.
“얘들아, 이거는 왜 안 먹는 거야?”
-어흥… 크릉… 캬앙…
그동안 재배지에서 만난 동물들은 아낌없이 잘 먹었던 호랑이들도 트롤은 먹지 않았다.
아무래도 괴수는 먹지 않는 듯했다. 아니 괴수라서 안 먹는 것인지 트롤을 안 먹는 건지는 좀더 연구해봐야 알겠지.
뭐, 서준이 보기에도 트롤은 비위가 상하게 생기긴 했다.
호랑이들은 서준의 간절한 눈빛을 보았으면서도 딴청을 부리며 눈을 피했다.
트롤의 시체가 너무 거대해서 어떻게든 처리하긴 해야 했는데 좋은 방법이 떠오르지 않았다.
“저 돼지 새끼라면…… 가능성이 있는데? 얘들아 하나씩 입에 물어!”
서준은 호랑이들과 함께 트롤 시체를 하나씩 들고 옮기기 시작했다.
트롤의 크기가 워낙 크고 무거워서 한 번에 옮길 수가 없었다.
‘시간 낭비하면 안 되는데…… 괜히 한 건 아니겠지?’
서준은 시간 괴리의 공포감 때문에 걱정스러운 마음이 들었지만 별다른 방법이 없었고, 왠지 모르게 성공할 것만 같은 느낌이 들어 무작정 들이박기 시작했다.
“어휴, 이 새끼는 진짜 돼진가?”
서준은 주위에 꽂아두었던 영양제를 모두 빨아먹은 나뭇가지를 보며 한숨을 쉬었다.
그리고 왠지 모르게 저 녀석이라면 트롤 시체도 좋은 양분으로 다 먹어치울 거라는 기분이 들어 기분이 좋았다.
워낙에 식탐이 강한 녀석이었다. 분명 트롤이라도 못 먹을 게 없었다. 나무에 눈이 달리기를 했는가? 코가 달리기를 했는가? 냄새나고 비위 상하게 생긴 트롤이라도 먹어치울 것이 분명했다.
게다가 나뭇가지가 이걸 먹고 나면 한 단계 성장할 거라는 예감이 들었다. 호랑이들도 꿀닭과 뿔토끼를 먹으며 힘을 길렀다. 트롤을 먹은 나무 역시 한 단계 성장할 것이라는 것은 그리 어렵지 않게 예측할 수 있었다.
“얘들아 빨리 파! 최대한 깊고 넓게! 시간이 없어!”
이미 많은 시간을 소비한 서준은 삽을 들고 힘차게 땅을 파기 시작했다.
-어흥! 어흥!
-캬앙! 캬앙!
-크릉! 크릉!
호랑이들도 서준의 기합에 맞춰서 땅을 파기 시작했다. 이미 호랑이들은 땅 파기의 달인이 되어있었다.
이 녀석들에게 땅굴을 파라고 시킨다면 하루도 지나지 않아 북한과의 길을 뚫어놓을 것만 같았다.
언젠가 이 아이들을 이용해 토목공사를 한번 해봐? 하며 생각하는 서준이었다.
그렇게 서준이 호랑이들의 땅파기 실력을 보며 감탄을 하고 있다 보니 어느덧 충분히 깊고 넓게 파진 구멍이 보였다.
“좋았어! 이 정도면 충분해!”
-어흥! 캬앙! 크릉!
호랑이들은 서준의 칭찬에 기분이 좋은지 크게 포효하며 한껏 멋진 표정을 지었다.
재밌는 땅굴파기 놀이도 하고 서준의 칭찬도 듣고 일석이조였다. 호랑이들은 그 어느 때보다 행복해 보였다.
“귀여운 녀석들… 얘들아 저놈들 다 집어던져!”
-어흥! 캬앙! 크릉!
호랑이들은 서준의 말이 끝나기 무섭게 트롤들을 하나씩 집어던져 넣었다.
깊게 파놓은 땅굴은 어느덧 트롤의 시체로 가득 찼다. 충분히 깊게 팠다고 생각했었는데 트롤의 시체가 워낙 거대한 탓에 땅굴을 거의 메워버렸다.
조금만 덜 팠으면 다시 땅을 파야 할 뻔했다. 다행이었다.
“다시 덮어!”
서준이 말하자 호랑이들은 다시금 앞발을 놀리며 땅굴을 덮기 시작했다.
잔상이 남을 정도로 빠른 속도로 앞발을 휘두르며 뒷다리 사이로 모래를 날려 땅굴을 덮는 녀석들의 모습이 너무 귀여워 서준은 넋을 놓고 바라봤다.
이런 행복은 호랑이를 길러보지 않으면 절대로 느낄 수 없다고 자부했다. 서준은 호랑이들을 처음 만난 날을 생각하면서 흐뭇한 미소를 지었다.
“좋아, 좋아, 이 정도면 충분해.”
땅굴이 충분히 메워졌다고 생각한 서준은 모래를 발로 꾹꾹 눌러주며 땅을 다졌다.
-어흥! 어흥!
-캬앙! 캬앙!
-크릉! 크릉!
호랑이들도 서준의 뒤를 일렬로 따라오면서 꾹꾹이를 하며 서준과 함께 땅을 다졌다.
서준의 뒤를 어흥이가 따랐고, 그 뒤를 크릉이가 따랐다. 그리고 그 뒤를 캬앙이가 따르며 땅을 다져나갔다.
꼭 서준이 피리 부는 소년이 된 것처럼 호랑이들은 서준의 뒤를 쫄래쫄래 따라다니며 땅을 꾹꾹 눌렀다.
“그래, 이 정도면 됐다! 이것도 먹어라 돼지야.”
적당히 땅을 다진 서준은 이 정도면 충분하다고 느꼈는지 가방에서 영양제들을 꺼내서 나뭇가지 주위에 박아 넣었다.
트롤의 시체에다가 영양제들까지 꽂아주자 나뭇가지는 기분이 좋은 듯 몸을 부르르 떨었다.
“이거 진짜 말 알아듣는 거 아냐?”
서준의 말을 마치자마자 나뭇가지는 또 한 번 몸을 떨었다. 정말로 말을 알아듣는 거 마냥.
“나중에 보면 알겠지, 얘들아 이제 그만 가자!”
더 이상의 시간을 지체해서는 너무 많은 시간 괴리가 일어날 것만 같았던 서준은 호랑이들을 데리고 서둘러 재배지에서 빠져나왔다.
평소보다 많은 시간을 재배지에서 보냈던 서준은 돌아와서 날짜를 확인하자마자 눈살을 찌푸렸다.
벌써 지구에서는 2주가 흘러있었다. 아무래도 너무 오랜 시간 재배지에 머무른 듯했다.
-띠리링,
그렇게 약국에 도착한 서준은 재배지에서 고된 일정으로 인해 쌓인 피로를 풀지도 못한 채 손님을 맞아야 했다.
“백 선생님! 안에 계세요? 왜 이렇게 전화를 안 받으세요!”
“아, 죄송합니다. 제가 일이 있어서 잠시 전화를 못 받았네요.”
창천 길드의 전투 조장 김소현이었다.
“결사회가 납치라도 한 줄 알고 길드장님 난리 나셨잖아요!”
아무래도 재배지에서는 통신이 되질 않는 데다가 시간 괴리 때문에 2주나 흘러버렸으니 걱정할 만도 했다.
보통의 평범한 일상이었어도 걱정이 될만한 일인데 더군다나 서준은 결사회의 타깃이 되어있었다.
윤희주는 결사회가 서준을 노린다는 것을 알고 난 후 서준도 모르게 약국 주위에 헌터들을 깔아두었다.
그런데도 서준이 말도 없이 사라져버렸으니 난리가 날 법도 했다.
“미안해요. 말을 해줬어야 했는데... 아무 일도 없으니 걱정 마세요. 오늘은 그 일 때문에 오신 건가요?”
“네 길드장이 걱정된다고 가보라고 해서 왔어요. 별일 없으시니 됐어요.”
김소현은 연락 두절된 서준이 걱정되어 윤희주가 보낸 것이었다.
서준은 앞으로는 재배지에 들어가기 전에 주위에 연락을 해둬야겠다고 생각했다.
“아! 그리고 저도 호랑이 분양받았어요! 그것도 두 마리나!”
“정말요? 제가 얼마 전에 부산에 호랑이 카페 갔었는데 거기 사장님이 분양 잘 받아야 한다고 주의 주던데…….”
서준은 호랑이 카페 사장이 알려준 호랑이 분양 시의 주의사항을 김소현에게 말해주려 했었으나 일이 바빠 그러지 못했다.
그러는 사이에 김소현이 덜컥 호랑이를 분양받아버린 것이다.
“아! 물론 그 정도 조사는 다 했죠, 그리고 제가 이래 봬도 창천 길드 전투 조장이에요. 저한테 사기 치면 다 뒤지는 거예요.”
“하하, 그런가요?”
김소현은 휴대폰을 꺼내들어 분양받은 호랑이들의 사진을 보여주며 방긋 웃었다.
“귀엽죠? 귀엽죠? 아직 완전 아기들이에요. 쪼물딱 쪼물딱 움직이면서 나 따라다니는데 진짜 심장 터져 죽는 줄 알았다니깐요?”
김소현의 휴대폰 속에는 두 마리의 작은 아기 호랑이들이 서로 몸을 포갠 채 잠을 자고 있는 모습이 찍혀있었다.
서준은 저도 모르게 입을 헤 하고 벌리며 사진을 확대해 보았다.
“와… 귀엽네요. 얘네들 이름은 뭐예요?”
“얘는 둘리고요, 얘는 또치예요.”
“엥? 그게 뭐예요. 하하핫!”
어울리지 않는 이름을 들은 서준은 저도 모르게 웃음이 터져 나왔다.
늠름한 호랑이에게 둘리와 또치라니, 황당하기도 했다.
“그럼 저는 이만 가볼게요! 오늘 오후에 게이트 출몰 예정이어서요.”
“네, 걱정해주셔서 감사해요. 조심히 가세요.”
그 뒤로도 한참을 얘기하던 김소현은 오늘도 어김없이 갑작스럽게 기분이 내키는 대로 떠나갔다.
그리고 그렇게 평화로운 시간을 보내던 서준에게 어느덧 전국 약초꾼 워크숍 날이 다가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