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화
재배지에 들어온 서준은 나뭇가지부터 찾아갔다. 서준이 재배지를 사용한 이래로 가장 손이 많이 가는 녀석이었다.
도대체 뱃속에, 아니 배가 아니고 줄기 속에 뭐가 들었는지는 모르겠지만 정말 탐욕스럽게 먹을 것을 탐했다.
원래 윤희주의 전화만 아니었으면 서준은 부산에 일주일 정도 있을 생각이었다.
그렇기에 나뭇가지 주위에 일주일 치 영양제를 꽂아두고 내려갔다.
하여간 유지비가 장난이 아니었다.
하지만 일이 틀어져 하루 만에 올라왔다. 일단은 과하게 꽂아둔 영양제를 회수해야 했다.
“근데…. 이 돼지 같은 놈이 그새 그걸 다 처먹었네?”
일주일 동안 먹으라고 꽂아두었던 영양제를 놈이 다 처먹었다. 점점 먹는 양이 늘어난다 했지만 이 정도일 줄은 몰랐다.
아무래도 대책을 세워야 했다. 이대로는 파산이다.
“어휴… 돼지 새끼, 적당히 처먹어라.”
서준은 한숨을 쉬면서도 가방 속에 있는 영양제를 다시 꽂아줬다.
이놈의 정체가 뭔지는 알 수 없지만 이 정도까지 했으면 그 정체를 알기 전까지 포기할 수 없었다.
이건 자존심의 문제였다. 서준은 오기가 생기기 시작했다.
“별거 없기만 해봐라, 바로 전기톱 들고 온다.”
나뭇가지는 서준의 말을 알아듣기라도 한 듯이 얄상한 몸을 흔들며 몸부림쳤다. 도대체 나무가 어떻게 사람 말을 알아듣는지 모르겠다.
그리고 그러면서도 영양제를 쪽쪽 빨아먹는 건 잊지 않았다. 이 와중에도 참 식욕이 엄청나다.
-어흥! 어흥!
-캬앙! 캬앙!
-크릉! 크릉!
서준과 나뭇가지가 씨름하는 사이 호랑이들은 신이 나서 뛰놀기 시작했다.
재배지는 호랑이들을 위한 천국이었다. 넓은 들, 높은 산 그리고 빽빽한 나무들과 사냥감들까지 호랑이들을 위한 모든 것이 준비되어있었다.
서로 내가 더 빠르니 아니 내가 더 빠르니 하며 달리기 시합도 했고, 누구의 주먹이 더 센지 내기하듯이 싸움질도 했다.
한창 성장기인 호랑이들은 정말 힘든 줄 모르고 뛰고 싸우고 놀았다.
그러다가 꿀닭이나 뿔토끼가 나타날 때면 협력해서 사냥도 하며 그동안 쌓인 스트레스를 풀었다.
‘그래, 놀아라. 젊을 때 놀아야지. 재배지만 오면 정말… 감당이 안 되네.’
역시 호랑이들이 제일 좋아하는 곳은 재배지구나 생각하는 서준은 호랑이들에게 미안한 마음이 들었다. 아마 시간 괴리만 아니었다면 서준은 호랑이들을 재배지에 넣고 키웠을 것이다.
그러나 그렇지 못하는 것에 미안한 감정이 싹텄다. 그러고는 어떻게든 호랑이들을 위한 공간을 마련해 줘야겠다는 의지가 솟구쳤다.
서준은 호랑이들이 놀고 있는 것을 지켜보다가 산악 바이크를 타고 트롤 대가리를 심어둔 곳으로 이동했다.
재배지 안에서는 시간 낭비를 해서는 안 됐다. 호랑이들은 놀고 있을지 모르지만 서준마저 놀아서는 안됐다.
호랑이 집안의 가장으로서 해야 할 일이 있었다.
“오! 이게 되네?”
트롤 대가리에 불끈초를 심으면서도 별 기대가 없던 서준이었다.
그 재배법이라는 것이 아직 확실히 밝혀지지도 않았고, 그조차도 불분명했다.
죽은 지 십 년이 지난 트롤 대가리에 심어야 한다느니, 트롤 대가리에 십 년간 심어놓아야 한다느니 말만 많았지 그 실체는 없었다.
애초에 대침공이 일어난 후 십 년이 채 지나지 않았다. 그러니 제대로 밝혀질 리 없었다.
그런 내용을 연구 일지에 적어놓은 연구원들이 문제였다.
그러나 서준의 재배지에서는 새로운 발견을 할 수 있었다. 갓 죽은 트롤 대가리에 심어둔 종자가 새싹을 피워낸 것이다.
‘그러면… 십 년 된 트롤 대가리에 심어야 한다는 이론은 폐기되는 거지?’
서준은 수첩을 꺼내 들어 적어놓았던 내용에 두 줄을 찍찍 그었다.
이 수첩은 서준의 약초 재배법을 기록해놓은 것이었다. 이곳에는 그동안 서준이 실험을 해왔던 수많은 기록들이 담겨 있었다.
이런 식으로 매번 새로운 방법을 찾아내고, 더 좋은 방법을 찾아냈기에 같은 초록 활력초라도 첫날 심은 것과 지금 수확해내는 것은 큰 차이를 띠고 있었다.
그 잎의 색은 더욱 짙어졌고 약의 효능은 더욱 강력해졌다. 사람들이 호랑이 약국의 초록 활력초 분말을 찾는 이유였다.
‘약국으로 돌아가면 트롤 대가리 10통 정도 더 사야겠네.’
가지고 있는 현금의 대부분을 지출해야겠지만 불끈초의 양산에 성공한다면 더 큰돈을 벌 수 있을 것이라 생각한 서준은 계획을 세우기 시작했다.
비록 결사회에 견제에 지금은 장사를 접었지만 그 문제만 해결되면 다시 큰돈을 만질 수 있다.
불끈초의 확인을 마친 서준은 초록 활력초의 잎을 하나씩 수확하기 시작했다.
그 특성상 멀리멀리 심어놓은 터라 이번에도 산악 바이크가 큰 역할을 했다.
물론 언젠가는 이 문제도 해결해야 할 테지만… 아직은 방법이 요원했다.
‘변종 재배만 성공하면…… 이렇게 고생 안 해도 될 텐데.’
초록 활력초의 변종 재배만 성공한다면 이렇게 많이 심어놓을 이유가 없었다.
높은 가격에 소수에게만 팔아도 지금보다 큰 이득을 얻을 수 있을 것이었다. 거기다 시간 절약 효과도 확실하다.
“어휴… 잘 안되네.”
수첩을 이리저리 뒤적이던 서준은 한숨을 깊게 내쉬었다.
가끔씩 나오는 변종으로 이런저런 실험을 하며 그 과정과 결과를 적어놓았지만 뭐하나 똑 부러지게 나오는 해답은 없었다.
게이트 들어갈 때 사용했던 열매 달린 초록 활력초의 경우도 수십 번의 실험을 해보았지만 좋은 결과는 없었다.
다시 심어낸 후 다시 자라날 때는 보통의 초록 활력초로 돌아와 있었다.
재배지에서 일을 마친 서준은 호랑이들을 챙겨 약국으로 돌아왔다.
-어흐으응…
-캬아아앙…
-크르르릉…
호랑이들은 피곤한지 하품을 길게 한 후 데스크 위에 올라가 서로 몸을 포갠 채 잠이 들었다.
이유는 알 수 없지만 데스크 위는 녀석들이 어릴 적부터 가장 좋아하는 장소였다. 피곤할 때면 항상 그 위로 올라가 서로 몸을 포개 눕고는 했다.
서준은 녀석들이 깨지 않도록 말린 초록 활력초의 잎을 조심스럽게 창고에 가져다 놓았다.
‘판매는 일단 보류하자… 오랫동안 보관해도 별문제 없으니까 창고에 일단 넣어두자.’
창고에 초록 활력초를 쌓아둔 서준은 창고 한가운데에 앉아서 깊은 생각에 잠겼다.
‘지금 다시 판매재개를 해봤자 결사회가 견제할 게 분명하지?’
오프라인 판매도 크게 다르지 않을 것이었다. 결사회 정도 능력이라면 서준이 오프라인 판매를 시작한 순간 약국을 무너트릴 수도 있다고 생각했다.
지금까지는 온라인 판매만 했기에 택배 차량만 건드렸을 뿐이다. 만약 오프라인 판매를 한다면 그를 막기 위해 약국에 테러를 할 것이 분명했다.
뭐 그 정도 능력을 가지고 있는 녀석들이 왜 직접 노리지 않는 것인지는 의아했지만…… 큰 사고를 치고 싶지 않은 것일 수도 있다 생각하며 다음 계획을 머릿속으로 구상했다.
‘여기서 이러고 있으니 그날이 생각나네…….’
창고 한가운데에 앉아서 생각을 모으던 서준은 문득 옛 기억이 떠올랐다. 그리 오래되지 않은 떠올리기 괴로운 기억이었다.
그 날 이후로 서준의 삶은 백팔십도 변했다.
‘웬 괴수 놈이 문 부수고 들어왔을 때는 정말 죽는 줄 알았는데…….’
대침공 첫날 지하벙커로 숨은 서준은 그곳에서 꼬박 하루를 버텼다. 결국 벙커문을 부수고 들어온 괴수에 쫓기긴 했지만 그 덕분에 능력을 각성할 수 있었다.
만약 그때 능력을 각성하지 않았더라면, 초인들의 세상이 되어버린 이 세상에서의 삶은 그다지 윤택하지 못했을 것이다.
‘오히려 잘 된 건가?’
거기다 8년의 타임워프는 서준과 지인들 간의 관계를 끊어버려 서준을 고립시켰지만 그로 인한 이득도 분명히 존재했다.
대침공 이후 몇 년간 인류는 제대로 된 반격조차 하지 못한 채 죽고, 죽고, 또 죽었다고 들었다.
하지만 서준은 타임워프가 된 덕에 안정된 곳에서 삶을 이어갈 수 있었다. 거기다 호랑이를 키우며 즐거운 나날을 보낼 수 있었다.
“이쯤 정리하고, 일이나 해볼까?”
생각을 하며 창고 정리를 끝마친 서준은 휴대폰으로 초인몰에 접속해 글을 올렸다.
이제는 돈을 벌기 위해 돈을 쓸 차례였다.
<싱싱한 트롤 대가리 삽니다.>
[갓 죽은 트롤 대가리 10통 구매합니다.
개별 구매 안 할 거니까 10통 한 번에 파실 분만 연락 주세요.]
그리고, 글을 올리자마자 폭주하는 댓글창을 보며 서준은 피식 웃었다.
-백 선생님! 왜 장사 안 하십니까!
-피를… 피를… 너무 많이 흘렸어요! 활력초 주세요!
-PTSD가 도지고 있습니다! 살려주세요!
-호랑이차 내놔!
서준이 장사를 접은 지 며칠이나 됐다고 그동안 서준의 물건을 구입했던 자들이 난리가 나서 댓글을 달기 시작했다.
하긴, 싼값에 상위 약초의 효과를 보여주던 서준의 초록 활력초는 없어서 못 팔 정도였고 호랑이차 역시 PTSD를 앓고 있던 헌터들이 알게 모르게 많이 사용하던 물건이었다.
-띠링!
서준이 댓글창을 훑어 내려가며 기분 좋게 웃고 있을 때 서준의 메일함 알람이 울렸다.
“뭐지?”
<전국 약초꾼 워크숍 초대장>
[제3회 전국 약초꾼 워크숍이 다가왔습니다.
전국의 모든 약초꾼 여러분들께서는 하던 일을 잠시 멈추고 워크숍에 참여하여 약초꾼들의 찬란한 미래를 위해 일조하여 주십시오.
-전국 약초꾼 연합장 최석현]
중2병스러운 내용이었지만, 그 안에 담겨진 메시지는 분명했다. 서준을 전국 약초꾼 워크숍에 초대하는 내용이었다.
‘나는 약초꾼 연합이 아닌데?’
하지만 서준은 전국 약초꾼 연합 소속이 아니었다. 그런 서준에게 메일을 보냈다는 것은 무언가 꿍꿍이가 있는 것이 분명했다.
서준은 곧바로 윤희주에게 전화를 걸었다.
<예, 백 선생님 무슨 일이 습니까?>
“전국 약초꾼 워크숍 초대장을 받았어요. 이놈들 무슨 꿍꿍이일까요?”
윤희주는 서준의 설명을 듣더니 잠시 고민하다가 답했다.
<백 선생님 일단 참여하시는 게 어떻겠습니까?>
“위험하지는 않을까요? 결사회가 관련돼있을 확률이 큰데…….”
메일은 서준의 초인몰 계정 메일로 들어왔다. 그리고 초인몰 계정을 사용했다는 것은 초인이란 뜻이었다.
최석현이 보낸 메일이 아니었다. 필시 결사회가 보낸 메일일 것이다.
<어차피 뭔가 수를 쓸 생각이었으면 지금 바로 그렇게 하고도 남을 녀석들이에요. 백 선생님을 해코지할 생각이 있었다면 이미 그렇게 됐을 거예요. 그럴 능력이 충분한 놈들이니깐요.>
“흠… 그런가요?”
<어차피 녀석들은 점조직인 데다가 워낙 은밀해서 뒤를 잡기가 힘듭니다. 우리 쪽에서 움직이지 않으면 더 이상의 단서는 잡기 어려울 것 같아요.
우리가 먼저 움직여서 녀석들을 움직이게 해야 해요.>
윤희주의 말을 들은 서준은 고민을 하기 시작했다. 용기가 필요한 일이었다.
“후우… 좋아요. 그럼 제가 어떻게 하면 되죠?”
긴 고민 끝에 서준은 용기를 냈고 결심을 했다.
서준은 더 이상 피하지 않고 직접 부딪히기로 결심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