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골목약사 백선생-19화 (19/150)

19화

느리게, 아주 느리게 호랑이의 앞발이 서준의 얼굴을 향해 다가왔다.

‘뭐지? 왜 다 느려 보이는 거지?’

서준이 속으로 생각하는 사이에도 호랑이의 발은 얼마 움직이지 못했다. 그나마 주위의 다른 모든 것들이 거의 멈춘 듯할 때 이만큼이나 움직인 걸 칭찬해 줘야 할까 싶었다.

이 정도면 포악해서 그렇지 거의 영수에 준한다고 봐도 될듯했다. 다룰 수만 있다면 정말 억만금에 거래될 수도 있었다.

물론 그 사실을 서준이 알 리는 없었고 서준에게 중요한 것은 우선 이 상황을 모면하는 것이었다.

‘일단은… 피해야겠지?’

서준은 호랑이를 마주한 뒤 굳어 움직이지 않던 몸을 강제로 움직였다.

딱딱히 굳어버린 허리를 조금씩, 조금씩 비틀어 호랑이 앞발의 궤도에서 벗어났을 때서야 호랑이의 앞발이 내리쳐졌다.

깔끔한 회피였다.

그리고 그 순간 모든 시간이 원래대로 돌아왔다. 마치 아무 일도 없었던 것처럼.

“뒤로 물러나세요!”

카페 사장이 소리를 치며 내 쪽으로 다가왔다. 그의 손에는 기다란 막대기가 들려있었고, 호랑이를 향해 내질렀다.

-크르릉! 크르릉!

호랑이는 기분 나쁜 소리를 내면서도 카페 사장이 계속해서 밀어내자 어쩔 수 없이 뒤로 물러나 다시 통로 속으로 들어갔다.

강한 힘을 가진 것과는 별개로 카페 사장이 화를 내며 다그치자 의외로 순순히 물러났다.

아무래도 포악한 성질 뒤에는 어느 정도 카페 사장을 주인으로 인식하는 듯했다. 어릴 때부터 길러왔다니 당연한 일이었다.

-어흥! 어흥!

-캬앙! 캬앙!

-크릉! 크릉!

서준의 호랑이들도 서준이 걱정됐는지 달려와서 서준의 주위를 팔짝팔짝 뛰고 있었다.

호랑이들은 낮게 그르렁대며 주위를 경계하고 서준의 곁을 지켰다. 작지만 참으로 믿음직한 아이들이었다.

“괜찮으세요?”

호랑이가 완전히 물러났음을 확인한 카페 주인은 서준의 몸을 이리저리 만져보며 어디 상한 곳이 없나 살폈다.

“괜찮습니다. 안 맞았어요. 슉! 하고 피해버렸네요?”

서준은 일부러 걱정하지 말라는 듯 장난스럽게 답했다. 카페 사장은 그러한 서준의 답을 듣고서야 안심이라는 듯이 안도의 한숨을 크게 내쉬었다.

"얘들아, 형 괜찮아. 걱정 안 해도 돼.”

-어흥! 어흥!

-캬앙! 캬앙!

-크릉! 크릉!

서준은 호랑이들을 안심시키는 것도 잊지 않았다. 호랑이들은 아직도 마음이 진정이 되지 않았는지 계속해서 서준의 머리 위치까지 폴짝폴짝 뛰며 서준 주위를 돌았다.

“정말, 정말, 죄송합니다. 제가 좀 더 관리를 철저히 했어야 했는데.”

“아니에요. 아무 일도 없었는걸요?”

카페 사장은 거듭해서 사과를 계속했다.

하지만 정말 아무 일도 없었기에 서준은 모두를 안심시켰다.

-띠리리리리리링, 띠리리리리리링

서준이 모두를 안심시키고 있을 그때 서준의 휴대폰에서 벨 소리가 울렸다.

창천 길드 길드장 윤희주였다.

“잠시 전화 좀…….”

“네.”

서준은 카페 사장에게 양해를 구한 후 카페 문을 열고 나와 전화를 받았다.

“네, 호랑이 약국 백선생입니다.”

<백 선생님 윤희주에요.>

“네, 말씀하세요.”

<범인 실마리를 잡은 것 같아요. 지금 어디세요?>

“부산이에요. 지금 바로 올라갈게요.”

서준은 전화를 끊은 후 호랑이들을 챙겨 나와 서울로 향했다.

마침 열차 시간이 딱 들어맞아서 기다리지 않고 금방 도착할 수 있었다.

“금방 올라오셨네요?”

“오래 기다리셨나요? 죄송합니다.”

“아니에요. 저도 방금 왔어요.”

서준은 호랑이 약국 앞에서 기다리고 있던 윤희주를 보며 인사말을 건넸고, 그녀를 약국 안으로 안내했다.

“들어오세요.”

“네. 호랑이들도 안녕?”

-어흥! 캬앙! 크릉!

서준은 호랑이차를 한잔 우려내 윤희주에게 건네주고는 윤희주에 맞은편에 앉으며 물었다.

“그래서, 누가 그런 거죠? 왜 그랬답니까?”

“아직 확실한 건 아니에요. 하지만 거의 확신하고 있어요. 이 사람 혹시 보신 적 있나요?”

윤희주는 웬 산적 같은 남자의 사진을 꺼내며 서준에게 보여주었다.

그리고 기막히게도 그 남자는 서준이 알고 있는 자였다.

“털보 아저씨?”

“이미 알고 계시는 겁니까?”

서준이 초록 활력초를 뜯기 위해 지리산에 올랐던 그 날, 지리산 입구에서 봤던 약초꾼이었다.

서준에게 이런저런 조언을 해줬던 기억이 있었다. 별 도움이 되지는 않았지만.

“그냥 얼굴만 한 번 본 적 있는 사람이에요. 근데 이 사람이 어 쨌단 거죠?”

서준의 기억으로는 털보는 평범한 약초꾼이었다. 절대로 서준의 물건을 훔칠 만한 능력을 가지고 있지 않았다.

그는 초인이 아니었으니깐, 서준은 그것만큼은 확신하고 있었다.

“아무래도 이 사람이 배후인 것 같습니다. 저희는 그렇게 추정하고 있어요.”

하지만 놀랍게도 윤희주의 말은 서준의 생각과 전혀 달랐다.

정말로 평범한, 지리산에 머물며 초록 활력초를 캐며 먹고 사는 약초꾼 털보가 배후로 지목되었다.

“그럴 능력이 있는 사람이 아닐 텐데요?”

서준이 파악한 털보는 지극히 평범한 약초꾼이었다. 이런 짓을 벌일만한 위인이 아니었다.

뭐, 비록 잠깐 스친 사이기에 모든 걸 파악하진 못했겠지만 직감이라는 것이 있다.

서준의 직감은 털보를 위험인물로 분류하지 않았다.

“전국 약초꾼 연합이라는 단체가 있어요.”

“아, 그건 저도 알고 있어요. 처음일 시작할 때 가입할까 말까 고민했었거든요.”

전국 약초꾼 연합, 서준도 익히 알고 있는 단체였다.

서준은 평소 성격대로 약초 재배를 시작하기 전 충분히 조사했다.

그리고 대부분의 비초인 약초꾼들이 소속되어있는 전국 약초꾼 연합에 대해서도 당연히 조사했다.

비초인 약초꾼들의 권익을 위해 설립된 단체였고 그 활동내용도 깨끗했다.

비록 서준이 초인이었기에 결국에는 가입하지 않았지만 문제를 일으키는 단체는 아니라고 판단했다.

“그런데 거기가 왜요? 별문제 없는 곳 아닌가? 애초에 비초인 위주의 단체잖아요.”

“예, 그렇긴 한데…. 저도 별 관심 없던 곳이었거든요. 큰 문제 일으킨 적도 없고 평범한 권익단체라고 생각해서…….

근데 오늘 오전 수상한 움직임이 포착됐어요.”

“수상한 움직임이요?”

“네.”

윤희주는 찻잔을 들어 호랑이 차를 한입 머금었다. 찻잔을 들고 있는 그녀의 손은 미세하게 떨리고 있었다.

처음 보았을 때와는 완전히 다른 태도였다.

“전국 약초꾼 연합장 최석현이 누군가를 만나는 걸 발견했어요.”

“누구를요? 그리고 애초에 그 사람 뒤는 왜 캔 거죠?”

윤희주가 말했다시피 평범한 사람이었다. 윤희주가 그의 뒤를 캘 이유는 없었다.

“아뇨. 그 사람 뒤를 캔 게 아니에요. 얻어걸렸을 뿐이에요. 하아…….”

윤희주는 아직 진정되지 않았는지 다시 한번 호랑이차를 들이켰다.

호랑이차로도 진정되지 않을 정도니 심경에 상당한 문제가 있는듯 했다.

“왜 그러시죠? 어디 안 좋으세요? 안색이 많이 어둡습니다.”

“후우…….”

윤희주는 한숨을 길게 내뱉은 후 결심한 듯 입을 열었다.

“결사회라는 조직이 있습니다.”

“뭐죠? 그 중2병스러운 이름은?”

서준은 웃으며 물었지만 윤희주의 표정은 그렇지 못했다.

“돈만 받으면 뭐든지 하는 조직입니다.”

“심부름센터 그런 건가요?”

“아뇨, 그렇다기엔 그 위력이 엄청납니다.”

윤희주는 뭐가 또 불안한지 호랑이차를 한잔 더 타달라 요청했다.

서준이 호랑이차를 새로 타서 가져다주자, 뜨겁지도 않은지 그걸 그대로 한입에 다 마신 후 말했다.

“저희 길드의 전 길드장도 그들 손에 죽었습니다.”

“푸하악!”

윤희주의 갑작스러운 말에 놀란 서준은 입에 머금고 있던 호랑이차를 내뿜었다.

“아! 죄송합니다.”

“아니에요. 괜찮아요.”

서준은 휴지를 몇 장 집어주며 사과했으나, 윤희주는 별로 대수롭지 않게 생각하는 듯했다.

“4년 전이었습니다. 그 후로 어렸던 제가 길드장이 되었죠. 그전만 해도 한국에서 손꼽히는 길드였는데…. 삐걱거리기 시작한 것도 그때부터죠.”

윤희주는 길드원들을 휘어잡기 위해 해왔던 일들을 떠올렸는지 안색이 안 좋아졌다.

서준도 그를 알고 있기에 마음이 편치는 않았다.

그녀는 길드원들의 기강을 잡기 위해 더욱 사납게 행동해왔었고, 그것이 PTSD로 이어졌었다.

서준과의 인연이 이만큼 이어진 것도 그 때문이었다.

“저희는 최석현의 뒤를 캐던 게 아닙니다. 백 선생님 사건 배후는 사실감조차도 못 잡고 있었어요…….

단지 그 전부터 저희 전 길드장을 죽였던 결사회를 쫓고 있었는데, 최석현과 만났던 정황이 파악되었습니다. 놈들은 점조직이라 파악이 쉽지 않았어요. 저희도 4년 만에 처음으로 꼬리를 잡은 건데 거기서 최석현이 나타난 거죠.

그리고 그가 약초꾼 연합장이란걸 알았고, 백 선생님 사건과 연관이 있었다는 걸 알 수 있었어요.”

윤희주는 사건을 파악하게 된 모든 경황을 말했다.

“그게 그렇게 된 거군요?”

서준도 앞뒤 맥락을 파악하다가 그 이유를 알겠다는 듯이 천천히 고개를 끄덕였다. 애초에 서준의 머리도 그리 나쁜편은 아니었다.

“네, 역시 한 번에 이해하셨네요. 아시다시피 백 선생님이 초록 활력초를 팔기 시작한 후, 같은 약초를 팔던 일반인 약초꾼들이 모두 망해버렸어요. 아무래도 거기에 앙심을 품었던 것이겠죠.”

“그런 놈들에게 의뢰하려면 상당한 돈이 들었을 텐데…….”

결사회, 그 정도 되는 조직에게 의뢰하려면 큰 비용이 들 것이 분명했다. 일반인으로 이루어진 단체에서 부담하기에는 큰 무리가 있었을 것이다.

“연합비를 탈탈 털었겠죠, 고작 그걸로 다 충당이 될지는 모르겠지만……. 그래도 정말 다행입니다.”

“그렇네요, 이 정도로 끝난 게 정말 다행이네요…….”

윤희주의 말대로였다. 만약 그가 약탈의뢰가 아닌 암살의뢰를 했다면 서준은 꼼짝없이 죽었을 것이었다.

돈이 모자랐는지, 아니면 사람을 죽일 정도의 용기는 없었는지 모르겠지만 어쨌든 서준에게는 행운이었다.

“어쩌면 또 다른 조력자가 있을 수도 있겠네요?”

“그건 조사해보면 나오겠죠.”

서준을 안 좋게 본 또 다른 조력자가 최석현을 지원해주며 부추겼을 가능성도 배제할 수 없었다.

일반인 단체인 전국 약초꾼 연합이 비용을 마련한 건 둘째 치고 최석현이 결사대와 접촉한 것 자체가 사실 말이 되지 않는 이야기였으니깐.

창천 길드조차 4년째 꼬리도 잡지 못한 단체였다.

“어찌 되었건 지금까지 판단한 건 여기까지예요. 더 자세한 건 조사해봐야 알 수 있을 것 같아요.”

“감사합니다. 뒷일도 부탁드릴게요.”

“네, 맡겨만 주세요.”

서준은 윤희주에게 뒷조사를 부탁한 후 그녀를 보냈다. 그녀도 밝은 표정은 아니었으나 결사회의 꼬리를 잡았다는 생각에 각오가 선 느낌이었다.

“일이 복잡해졌네 얘들아…….”

-어흥! 카양! 크릉!

어느새 옆에서 이야기를 엿듣던 호랑이들도 머리가 복잡한 듯 목소리에서 티가 났다.

“그럼 우리는 우리 일을 해볼까? 가자, 얘들아.”

-어흥! 캬앙! 크릉!

윤희주에게는 윤희주의 할 일이 있듯이 서준에게는 서준이 할 일이 있었다.

서준은 호랑이들을 이끌고 재배지로 넘어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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