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0화
“호랑이차를 정기적으로 공급받고 싶습니다.”
“그 말씀은 그쪽 몫을 따로 떼 달라?”
“네. 초록 활력초처럼 인기 많아지기 전에 부탁하는 거 염치없는 거는 아는데 부탁드립니다. 저 뿐만 아니라 길드원들도 고통 속에 살고 있습니다.
많은 헌터들이 자존심 때문에 PTSD를 숨기고 있어요. 우리 길드 역시 마찬가지예요. 차 맛도 괜찮고 해서 아무 말 없이 탕비실에 넣어놓으면 길드원들이 자주 마셔줄 것 같아요. 그것만으로도 충분히 큰 효과가 있을 것 같습니다. 부탁드립니다.”
서준은 잠시 생각에 잠긴 듯 눈을 감고 고개를 숙였다. 그리고 잠시 뒤 답했다.
“조금 더 고민해보고 답해드려도 될까요? 형평성의 문제가 좀 있네요. 괜히 밖에 알려지면 저희 약국 이미지 손상도 있을 거 같아서요.”
“네, 알겠습니다. 결정하시면 연락 부탁드립니다.”
“네.”
말을 마친 여자는 자리에서 일어나 고개를 한 번 숙이고 약국을 떠났다.
“어흥아 일단 한번 튕겨봤는데 괜찮겠지?”
-어흥!
사실 서준은 저 여자에게 호랑이차를 모두 팔아도 별 상관없었다. 어차피 다 팔릴 거 같지도 않았고 가지고 있는 양도 엄청났다. 거기다 수급도 쉬웠다.
그래도 바로 승낙하는 건 뭔가 없어 보였다. 한 번 튕기면 가격이 더 오를 수도 있으니 나쁠 건 없었다.
어차피 급한 건 서준이 아니라 저 여자였다.
“그럼 이제 슬슬 준비해 볼까?”
오늘도 역시 초록 활력초를 수확하는 날이었다. 서준이 게이트를 넘어가기 위해 준비하는 모습을 보이자 호랑이들도 몸단장을 하기 시작했다.
-어흥! 캬앙! 크릉!
그 모습을 본 서준은 저도 모르게 얼굴에 미소가 폈다. 서로 핥아주며 털을 골라주는 것이 너무 보기 좋았다.
“좋아, 애들아 가자!”
-어흥! 캬앙! 크릉!
준비를 마친 서준은 게이트를 열고 아이들과 함께 재배지로 넘어갔다.
그리고 또다시 반복된 일상, 서준은 잎을 따고 호랑이들은 사냥을 했다.
어느덧 이 일을 한 지 석 달이나 지났다. 이제는 슬슬 익숙해졌는지 서준의 행동도 이전과는 비교할 수 없을 만큼 빨라졌다.
“으아아! 드디어 다 땄네, 애들아 이거 말리기면 하면 되니까 갈 준비해!”
-어흥! 캬앙! 크릉!
초록 활력초의 잎을 다 딴 서준이 기지개를 켜며 말하자 호랑이들이 힘차게 답했다.
“룰룰루~ 랄랄라~”
서준은 콧노래를 부르며 즐겁게 초록 활력초의 잎을 말리기 위해 펼쳐놓고 있었다. 이게 다 돈이라고 생각하니 즐거울 수밖에 없었다.
“짜식들 이제 사냥도 실패 안 하고 잘하네. 덕분에 내 밥값이 많이 굳었다. 이쁜이들아!”
몸이 고되어 힘이 들 때쯤 호랑이들을 한번 바라보면 피로가 싹 가셨다.
그런데 그때, 커다란 그림자가 서준의 몸을 가리기 시작했다. 그림자가 점점 다가오더니 어느덧 서준의 머리 위까지 가려버렸다.
“응?”
갑작스러운 그늘짐에 놀란 서준은 고개를 들었고, 그곳에는.
-캬아아앙!
커다란 곰이 한 마리 있었다. 온몸이 강철로 이루어진 그 곰은 신장이 5m는 되어 보였다.
‘갑자기 이게 뭐지?’
곰은 서준에게 어슬렁어슬렁 다가오기 시작했다.
서준은 서둘러 게이트를 열고 달아나려 했지만 그럴 수 없었다.
곰의 위치가 서준과 호랑이들의 한가운데였다. 이대로 서준이 게이트를 열고 도망가면 호랑이들은 홀로 이곳에 남겨지게 될 것이다.
-크와아앙!
그때 갑작스레 포효하던 곰이 서준 쪽으로 크게 한 걸음 다가왔다.
녀석은 어떤 긴장의 표정도 없는 것이 서준을 간단한 한 끼 식사 정도로 인식하는 듯했다.
녀석이 한 걸음 다가오고 서준은 한 걸음 물러서는 대치상태가 시작되었다.
-쿠와앙!
그러다 녀석이 두 팔을 하늘 높이 뻗어 서준을 위협했고 서준에게 달려들기 시작했다. 서준이 도저히 피할 수 없는 속도였다.
-크앙!
그때 크앙이가 녀석에게 달려들어 놈의 오른쪽 발목을 물었다.
하지만 온몸이 강철로 이루어진 놈은 발목 역시 강철로 이루어져 있었고 크앙이의 공격은 통하지 않았다.
“크앙아 안돼! 도망쳐!”
하지만 고통은 있었던 것일까? 고작 아기 호랑이의 송곳니였지만 크앙이를 비롯한 서준의 호랑이들은 보통 호랑이들과는 달랐다.
표정을 찌푸리던 놈이 서준에게서 시선을 돌려 크앙이에게 달려들었다.
-크앙!
다행히도 크앙이는 잽싸게 놈의 앞발을 피하며 도망쳤지만, 곧 따라잡힐 듯 보였다.
“젠장!”
그 순간 서준은 기지를 발휘했다. 옆에 세워두었던 산악 바이트에 올라탄 서준은 그대로 시동을 걸어 엑셀을 강하게 밟았다.
-부아아아앙!
산악 바이크가 강철곰을 향해 돌진하기 시작했다. 이대로 부닥치면 서준 역시 큰 상처를 입을 게 분명했다. 하지만 호랑이들을 상처 입게 할 수는 없었다.
그리고,
-콰앙!
산악 바이크가 강철곰의 엉덩이를 후려쳤고 그 충격에 강철곰이 휘청였다.
서준은 그 짧은 틈을 놓치지 않았다.
“이 개새끼야!”
충돌의 충격으로 온몸에 멍이든 듯 아팠지만 참아냈다. 갈비뼈가 부러진 것 같았지만 그 고통도 참아냈다. 지금 여기서 서준이 움직이지 않으면 호랑이들이 위험했다.
서준은 양손을 모았다가 펼치며 그사이에 게이트를 만들었다.
“꺼져 이새끼야!”
그리고 그 상태로 강철곰에게 날아올라 양손 사이에 있는 게이트를 강철곰의 머리에서부터 덮어 내려갔다.
“허억, 허억, 허억, 살았다…….”
강철곰은 게이트 너머로 사라졌다. 비록 게이트 너머에 있는 약국이 쑥대밭이 되긴 하겠지만 그건 돈으로 해결되는 문제였다. 그리고 서준은 돈이 많았다.
“얘들아 괜찮아?”
-어흥! 캬앙! 크릉!
호랑이들은 오히려 서준이 걱정되는지 서준의 몸을 핥아주고 있었다. 충돌의 충격 때문인지 서준의 몸 군데군데엔 멍이 들어있었다.
골절도 몇 군데 있는 듯했다.
“얘들아, 형은 괜찮아. 좀만 쉬다가 2분만 이따가 넘어가자. 그때쯤이면 다 해결됐을 거야.”
재배지에서의 2분이면 지구에서의 200분 즉 3시간이 넘어갔다. 강철곰은 그 사이에 헌터들이 알아서 처리해놓았을 것이다.
그리 판단한 서준은 아픈 몸을 이끌고 기어서 초록 활력초를 말리기 위해 널어놓은 곳으로 갔다.
“인생은 약빨이야 새꺄.”
서준은 잘 마른 초록 활력초의 잎들을 손으로 부숴가며 온몸에 덕지덕지 발랐다.
“으윽!”
작은 찰과상을 비롯한 외상은 모두 치료가 되었지만 골절은 어쩔 수 없었다. 분말이 닿을 수 있는 피부의 상처는 모두 치료될 수 있지만, 뼈는 별수 없었다.
“됐다. 얘들아 지금쯤이면 다 처리됐을 거야. 이제 그만 집으로 돌아가자.”
서준은 호랑이들이 혹시나 다치지 않았나 싶어 호랑이들의 목덜미를 잡은 채 초록 활력초 위에서 한 바퀴씩 굴렸다.
-어흥! 크앙! 캬앙!
활력초 분말의 냄새가 싫은지 반항하는 녀석들이었지만 아직 서준에게 개기기에는 크기가 많이 작았다.
호랑이들의 상태도 별문제가 없어 보이자 서준은 게이트를 열고 약국으로 넘어갔다.
“와…. 다 부서졌네?”
약국은 그야말로 쑥대밭이 되어 있었다. 비싼 돈을 주고 구매했던 가구들도 모두 파괴되어 있었고 유리문은 완전히 박살 나 있었다.
“어! 거기 괜찮으세요? 위험해요! 어서 나오세요!”
그때 치안 업무를 담당하던 한 헌터가 서준을 발견했다.
“아…. 네, 뭐 저는 괜찮은데 약국이…….”
“갑작스레 괴수 한 마리가 출몰해서 이 일대가 완전 쑥대밭이 됐습니다. 다행히 사상자는 없긴 한데 게이트가 아직 발견이 안 됐습니다. 일단 위험하니 다른 곳으로 몸을 피하시는 게 좋을 거 같네요.”
헌터의 말을 들은 서준은 대충 고개를 끄덕이고 호랑이들을 케이지에 챙겨서 밖으로 나왔다.
“아! 그리고 미리 경보가 울리지 않은 것에 대한 피해보상은 곧 받으실 수 있을 거예요.”
"네! 감사합니다."
서준은 서둘러서 자리를 피했다. 아무래도 게이트 이야기는 하지 않는 편이 좋겠다.
-캬앙! 크릉! 어흥!
초인 전용 호텔 방을 잡은 서준과 호랑이들은 넓고 고급스러운 방에 감탄하며 방 구경을 하고 있었다.
그동안 약초를 팔면서 상당한 수익을 올린 서준은 이왕 다른 곳에 묵는 김에 호사를 부려보기로 했다.
<도심 한복판에 나타난 신종 괴수>
[도심 한복판에 신종 괴수 한 마리가 나타났습니다. 그 어떤 전조도 없이 나타난 괴수는 곰의 형태를 띠고 있었으며 온몸이 강철로 이루어져 있었습니다.
괴수는 십여 분가량 도심을 헤집으며 많은 구조물을 파괴했지만 다행히 주변에서 회식 중이던 헌터 길드가 괴수를 발견한 후 즉각 처리해 사상자는 없었습니다.
하지만 아직도 게이트가 발견되지 않아 주변 봉쇄......]
“음…. 다행이네 피해자는 없었다니.”
스마트폰으로 신문기사를 확인하던 서준은 안도의 한숨을 쉬고 있었다.
게이트를 넘어 강철 곰을 넘겨 보내면서도 내심 불안했던 서준이었다.
“어쩔 수 없었지 뭐, 그 방법밖에 없었잖아? 그렇지 어흥아?”
-어흥!
서준이 말해 주지 않는 이상 게이트를 발견하지 못한 수색조들이 고생을 좀 하겠지만, 그건 어쩔 수 없는 부분이었다. 서준은 그 부분에 대해 더 이상 깊게 생각하지 않기로 했다.
서준은 호랑이들에게 먹을 것들을 좀 챙겨 둔 후 침대에 가만히 앉아서 생각에 잠겼다.
‘이대로는 안 되겠어.’
사실 오늘 서준은 엄청난 무력감을 느꼈다. 호랑이들이 위험에 처했는데도 할 수 있는 것은 아무것도 없었다.
오히려 어린 크앙이덕에 목숨을 구할 수 있었다.
지구에서 괴수가 나타났을 때는 재배지로 넘어가면 그만이지 생각했지만 생각지도 못한 재배지에서 괴수가 나타나는 사태에 서준은 무기력했다.
‘재배지에서 또다시 괴수가 나타나지 않는다는 보장도 없다.’
사실 괴수라는 표현은 좀 틀렸다.
현재 괴수라는 표현은 지구를 침공해온 녀석들을 지칭하는 말이었지만, 재배지에서 만난 강철곰은 뿔토끼처럼 원래부터 거기에 살던 녀석이었다.
오히려 놈에게는 서준이 침입자였다.
"아무래도 안 되겠어. 앞으로 안전한 재배를 위해선 무기를 사든 내가 강해지든 힘들 길러야겠어."
생각을 정리한 서준은 스마트폰에 저장되어있던 한 번호에 전화를 걸었다.
-띠리리링, 띠리리링.
<네, 창천 길드장 윤희주입니다.>
“안녕하세요? 호랑이약국 백선생입니다.”
바로 오늘 오전 호랑이차를 마시고 갔던 그녀였다.
<아! 백 선생님, 혹시 결정하셨나요?>
“네, 대신 조건이 있습니다.”
<꼴깍>
윤희주는 침을 한번 꼴깍 삼킨 후 물었다.
<예, 말씀하세요.>
“우선 가격을 두 배로 쳐주셨으면 합니다. 다른 분들께 팔아야 할 거 따로 빼서 파는 거니 이 정도는 해주실 수 있으시죠?”
<네, 저희도 그 정도는 생각하고 있었습니다.>
“그리고 이 거래가 외부로 유출되지 않았으면 합니다. 다른 고객들이 형평성 문제를 제기할 수가 있어서요.”
<별로 어려운 것도 아니네요. 명심하겠습니다.>
이로써 서준은 챙길 수 있는 실리는 모두 챙겼다.
그리고 서준이 진정으로 원했던 마지막 조건만 남았다.
“그리고 마지막으로, 저도 게이트에 넘어가야겠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