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감독보다 영화사 대표님-140화 (완결) (140/140)

#140화. 신바드의 모험(完)

“그래서 제가 마지막으로 여러분께 드리고 싶은 이야기는 이겁니다.”

최대 500명까지 수용 가능하다는 그 계단식 강의실은 학생들로 빼곡했다.

“영화는 준비기간이 가장 중요한 것처럼 우리 인생도 마찬가지라고 생각합니다. 지금 여러분은 본격적인 촬영에 들어가기 앞선 프리기간의 삶을 살고 있는 거죠. 그러니 부디 그 준비기간을 잘 활용한 뒤 영화판에서 다시 만나길 바랍니다.”

그들은 내 말이 모두 끝나자 반짝이는 눈으로 손을 바쁘게 움직여 마주쳤다.

맨 앞줄에 있던 운서대학교 영화과 교수는 학생들과 비슷한 표정으로 단상에 올라와 마이크를 잡았다.

“오늘 특별 초청 강연 시간을 유익하게 채워주신 신바드 회장님께 다시 한번 박수 부탁드립니다.”

박수는 한동안 계속 이어졌다.

“그럼 이제 질문 시간을 가질게요. 시간이 그렇게 넉넉하지 않으니 무작위로 10개만 받겠습니다.”

그러자 여기저기서 손이 번쩍번쩍 올라왔다.

교수는 학생들을 쭉 훑더니 가운데쯤 앉은 남학생을 지목했다.

그는 자신이 지목되자 밝게 웃으며 마이크를 건네받았다.

“영화과 2학년 우태선입니다. 먼저 오늘 강의 정말 감명 깊게 들었습니다. 앞으로 제가 나아가야 할 방향을 잡을 수 있는 시간이었어요.”

그렇다면 정말로 다행이다.

한 달 전.

허훈은 자신의 모교인 운서대학교로부터 나의 특별 강연을 추진하고 싶다는 연락을 받았다고 전해왔다.

처음엔 거절했다.

허훈도 성공한 감독이었으니 나보다는 직접 강연하는 게 낫지 않겠냐면서 말이다.

그러나 그는 영화과 학생들 사이에서 자신보다 나를 초청해달라는 문의가 잇따랐다는 말을 추가로 전했다.

-그리고 저는 저보다 회장님의 강연이 후배들에게 더 이득일 거라고 생각합니다. 확실히 영화는 연출이 다가 아니니까요.

그래서 수락했다.

앞으로 영화판에 뛰어들 학생들에게 내 이야기가 조금이라도 도움 된다면 괜찮겠다고 생각했으니까.

남학생의 말이 이어졌다.

“그럼 질문드리겠습니다. 회장님의 대표 업적 중 하나인 스태프부터 배우까지 도입한 표준근로계약서에 대해 여쭤보고 싶습니다. 현재 업계에선 통상적으로 사용 중이라고 알고 있는데요. 처음 도입을 생각하게 된 계기는 무엇입니까?”

대표 업적이라고 하니 확 부담스럽네.

그러나 성심성의껏 답했다.

“처음엔 양극화를 줄여보고자 한 것입니다. 어떻게 해야 할지 고민을 하다가-.”

학생들은 다소 길 수도 있는 내 답을 경청했다.

“충분한 답이 되었을까요?”

질문한 학생은 고개를 격하게 끄덕이며 말했다.

“예! 감사합니다.”

그 뒤로도 질문은 쏟아졌다.

개장 1년 만에 전 세계 테마파크 1위로 올라선 아라비안랜드의 성공은 어디까지 예상했었나.

아라비안 그룹이 기업 선호도 1위를 찍을 수 있었던 이유는 무엇이라고 생각하는가.

씨네 아라비안의 고유 색이 보라색인 이유는 무엇인가.

지금까지 10번이나 개최된 ‘K – 좀비 축제’의 성공 비결은?

배급 수수료를 40%까지 인하한 이유까지.

학생들의 질문은 다양했다.

10개의 질문에 대한 내 대답이 모두 끝나자 영화과 교수는 슬슬 마무리할 기색을 보였다.

차고 있던 손목시계를 확인하니 예정했던 시간보다 30분이나 지체됐다.

그만큼 학생들의 열정에 나까지 감화됐던 시간이었다.

“이제 정말 회장님을 보내드려야 할 시간이네요. 그럼 다시 한번 큰 박수 부탁드립니다.”

박수 소리가 대강의실을 가득 메웠고.

나는 그들을 향해 꾸벅 인사했다.

*

강의실 밖에는 김정난이 나를 기다리고 있었다.

“내가 조금 늦었죠? 많이 기다렸어요?”

강연이 끝나고 나가려는데 사인해달라는 학생들이 있어서 나오기까지 시간이 더 걸렸다.

김정난이 웃으며 답했다.

“아닙니다. 인터뷰에는 다행히 늦지 않으실 것 같습니다.”

“예. 서둘러 출발하죠.”

주차장으로 가서 대기하고 있던 차에 올라탔다.

약속 장소로 가는 길에 마침 지나가던 다리 아래엔 뉘엿뉘엿 지고 있는 햇빛에 한강이 반짝이고 있었다.

딱 이맘때쯤이었나.

15년이라는 시간이 흘러 정확한 날짜는 기억나지 않지만.

아마도 이쯤이었던 것 같다.

내가 회귀한 눈이 오던 하얀 겨울날.

시간이 참 빠르기도 하다.

벌써 회귀 전 순간까지 오다니 말이다.

또 한 번의 인생이 주어진 날로부터 오늘까지······.

참 많은 일이 있었다.

나는 소중한 딸을 품에 안았고.

아내는 내 궁극의 목표였던 아라비안랜드의 모델이 되었다.

또 첫째 처남은 할리우드 진출에 대성공했으며 둘째 처남은 망막 이식 수술에 성공해 세상을 볼 수 있게 되었고, 안내견인 ‘너머’와 제2의 인생을 행복하게 살고 있다.

오래전 아버지의 친구였던 양상철은 내게 든든한 삼촌이 되어 또 다른 형태의 가족으로 연을 맺었다.

죄를 뉘우치기 위해 산으로 들어갔던 그의 동생 양상민은 최근 사회로 나와 봉사에 여념이 없었다.

오랜만에 본 그는 이제부터 남을 위해 살겠다며 내게 웃어 보였다.

노흥기의 페르소나이자 화분 엔터를 자신의 집이라고 칭했던 도건우는 후배 양성에 힘을 쏟고 있는 임윤서와 아직도 잘 사귀고 있다.

결혼 이야기가 폴폴 들려오고 있으니 아마도 임박한 것 같다.

그린 애플은 여전히 한국 최고의 걸그룹으로 ‘애국 그룹’이라 불리며 전 세계에 한국을 알렸다.

이렇듯 정상에 선 그녀들이었지만, 아직도 연습을 게을리하지 않는다는 보고를 받고 있었고.

아람의 아버지는 매해 명절마다 우리 집으로 꿀을 보내왔다.

함자는 두바이 국왕에 즉위했다.

왕위를 계승하는 것에 관심이 없던 그였지만, 아버지의 간곡한 부탁에 마음을 돌렸다.

그가 국왕에 즉위하기 전.

언제 한번 놀러 오라던 함자 아버지의 초대에 응했었는데, 그 후로 한국과 두바이의 교류가 더욱 활발해졌다.

전해성은 스타 통역사가 되었고.

금현석은 작가와 영화감독을 넘나들며 작품들을 쏟아내고 있었다.

당연히 그 작품들은 모두 화제를 몰고 다닌다.

이서아는 전생과 마찬가지로 훌륭한 성인 배우로 성장해 지금은 아라비안엔터에 소속되었다.

전생과 달라진 삶을 사는 사람도 있었다.

마지막으로 봤을 때 머리가 훤하게 벗어졌던 이 과장의 머리는 이번 생엔 온전했다.

그 모습을 보며 아마도 전생에 내가 너무 많은 고생을 시켜서 그랬었나. 라는 죄책감도 들었다.

너무나 다행인 일이다.

이 외에도 리암 스미스는 <각성 신> 촬영 이후 한국에서 동양학 석사까지 수료했고.

요즘은 나보다 한국말을 더 잘한다.

아, 그리고 최근 아주 좋은 소식이 있었다.

“정난 씨. 아버님은 좀 어떠세요?”

조수석에서 앞을 보고 있던 김정난이 고개를 돌려 싱긋 웃었다.

“요즘은 말도 슬슬 하세요. 아직 일어서지는 못하시는데 의사 선생님 말씀으로는 계속 노력하면 금방 걸을 수 있으실 거래요.”

김정난의 아버지가 깨어난 것이다.

*

“회장님!”

방 안으로 들어가자 장혜리가 벌떡 일어났다.

“오랜만입니다.”

내가 이 자리에 오르는 동안.

주변 사람들도 같이 성장했다.

그 주변 사람들엔 장혜리도 포함됐는데.

그녀는 현재 꽤 높은 위치까지 올랐다.

현장으로 직접 인터뷰 올 짬이 아닌데도 나를 위해 이렇게 나와준 것이다.

“차는 많이 막히지 않으셨어요?”

“예. 다행히요.”

우리는 반갑게 인사한 뒤 자리에 앉았다.

그곳은 횟집이자 오늘의 인터뷰 장소였다.

언젠가 장혜리에게 저녁 사준다는 말을 지키지 못해 예약한 곳이다.

“식사부터 하고 이야기 나누죠.”

곧이어 밖에 있던 김정난이 주문한 음식들이 테이블 위에 차려졌고.

서로 안부를 물으며 밥부터 먹었다.

배가 조금 찼을 무렵.

장혜리가 녹음기를 꺼냈다.

“이제 슬슬 시작해도 될까요? 회장님?”

“예. 그럽시다.”

항상 어려운 일이 있을 때마다 자신의 일처럼 우리를 믿고 도와줬던 장혜리다.

특집 기사를 실어야 하는데 꼭 내 인터뷰를 싣고 싶다는 그녀의 부탁은 받았던 도움을 갚을 기회였다.

“그럼 질문 시작하겠습니다. 작년 칸 영화제 심사위원으로 위촉되셔서 화제가 됐었는데요. 처음 칸으로부터 연락을 받으셨을 때의 기분은 어떠셨어요?”

“얼떨떨했죠. 제가 심사를 할 자격이 되느냐, 고민도 됐고요.”

인터뷰는 순조로웠다.

특히 그녀가 이런 질문을 했을 때 나는 기분이 굉장히 묘했다.

“3년 전 개봉한 <어드벤처>가 2,000만을 동원하면서 관객 수 1위에 올라 아직까지 깨지지 않는 기록이 됐습니다. 회장님이 생각하시는 <어드벤처>의 성공 비결은 뭔가요?”

<어드벤처>.

회귀 전 주연배우를 잘못 만나 빛도 보지 못한 작품이다.

나는 통한의 이 작품을 다시 만들고자 전생에서 나와 같이 작업했던 감독을 찾아 나섰고.

결국 영화는 세상으로 나왔다.

그리고 장혜리의 말처럼 <어드벤처>는 엄청난 기록을 세웠다.

말이 나와서 하는 말이지만, 서태원은 당연하게도 전역 후 방송계를 기웃거렸고.

나는 그를 철저하게 차단했다.

결국 최근엔 의류 사업을 시작했다는 이야길 들었다.

사업까지 방해할 생각은 없었다.

사업이 녹록하지 않다는 걸 너무나도 잘 알고 있기 때문이다.

“음, 성공 비결이라······. 아마도 한 번 더 살 게 된 것이 가장 큰 비결이지 않을까요?”

내 엉뚱한 대답에 그녀가 고개를 갸웃하며 되물었다.

“네?”

그 모습을 보자 웃음이 나왔다.

“아닙니다. 하하. 농담입니다. 농담.”

그제야 장혜리도 웃었다.

“회장님도 참. 그럼 마지막 질문드릴게요.”

그녀가 준비한 마지막 질문은 무엇일까.

“이 질문은 저번에도 여쭤봤던 질문이긴 한데, 이번에는 그 답이 조금 달라지지 않으셨을까 해서요. 회장님의 최종 목표는 무엇입니까?”

그때 내가 했던 답이 또렷하게 기억나서 입꼬리가 올라갔다.

“제 답은 한결같아요. 저에게 최종 목표는 영화 같은 인생을 사는 것. 그것입니다.”

*

인터뷰를 마치고, 집으로 가는 길.

장혜리의 마지막 질문이 계속 머릿속을 맴돌았다.

영화 같은 인생······.

내가 한 대답을 곱씹다 문득 뭔가가 생각나 팔을 올리고 있던 콘솔박스를 열었다.

그 안에는 <신바드의 모험>이 가지런히 놓여 있었다.

가정을 이룬 뒤엔 집에 두긴 뭐해 그곳에 넣어둔 것이다.

회귀한 시점으로 돌아왔기에 과연 <신바드의 모험>의 효력은 언제까지일지 궁금했다.

서둘러 이야기의 마지막 페이지를 펼쳤는데.

그 페이지는 시나리오 북의 마지막 장이었다.

그리고 그 마지막 장면은 현재가 아닌 8개월 후를 그리고 있었다.

15년간 처음 겪는 일이다.

내가 얼떨떨한 얼굴로 마지막 장을 뚫어지게 보고 있자 그곳에는 무언가가 실시간으로 새겨지기 시작했다.

그것은 한 획, 한 획 새겨져 단 한 글자를 만들어냈다.

[完]

<신바드의 모험>이 끝난 것이다.

*

8개월 후.

“촬영 준비 시작하겠습니다!!”

그 말을 시작으로 현장에 활기가 돌기 시작했다.

모든 스태프는 맡은 일에 빠트린 것이 없는지 점검했고.

뛰어다니며 문제를 해결하는 제작팀도 보였다.

“회장님.”

옆에 있던 허훈이 나를 불렀다.

“예?”

그는 쥐고 있던 무전기를 내게 건네며 제안했다.

“크랭크인 첫 장면 촬영인데, 스탠바이 신호 직접 줘 보시는 건 어떠세요?”

그러자 옆에 있던 사람들이 부추겼다.

“오! 그거 괜찮네요! 소소한 이벤트로?”

“맞아요! 시나리오도 회장님이 직접 스탠바이 주시는 장면에서 끝나잖아요!”

이게 정말로 이루어지다니.

“한 번도 안 해봤는데, 하하.”

허훈이 이번엔 내 손에 무전기를 직접 쥐었다.

“그러니까 이참에 해보는 거죠. 자요. 기억에 남을 거예요.”

그렇게 떠밀린 나는 무전기를 들었다.

“그럼 한번 해볼까요?”

잠시 후.

모두의 시선이 내게로 향했다.

감독의 중압감을 처음 느껴보는 순간이었다.

그때.

조감독의 무전 소리가 들려왔다.

-63의 2의 1. 매직아워 풍경을 보며 생각에 잠긴 신바드. 촬영 준비 다 됐습니다.

허훈을 슬쩍 봤는데 그가 고개를 끄덕였다.

지금이라는 신호다.

에라, 모르겠다 싶어 무전기 버튼을 꾹 누른 뒤 외쳤다.

“레디! 액션!!”

내 신호에 따라 신바드 역의 남자배우가 지긋하게 하늘을 바라보는 연기를 시작했다.

<신바드의 모험>의 촬영이 시작된 것이다.

2021년 9월 9일.

오늘은 즐거운 괴짜들과 함께했던 내 인생이 정말로 영화가 된 날이기도 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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