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감독보다 영화사 대표님-138화 (138/140)

#138화. 패기의 제작자

처음으로 누군가와 함께 연말을 같이 보냈고, 새해를 맞이했다.

행복한 시간을 보내던 나는 차를 타고 어디론가 향하는 중이다.

운전석엔 기사가.

조수석엔 머리를 깔끔하게 묶은 여자가.

뒷자리엔 내가 앉아있었다.

“회장님. 기공식 참석 내빈부터 말씀드리겠습니다.”

여자는 하남시 시장 박창선, 한주건설 회장 황영수를 시작으로 조금 뒤 내가 마주하게 될 사람들을 읊었다.

또 기공식이 어떻게 진행될지 이후의 스케줄에는 무엇이 있는지 일목요연하게 정리해서 알려줬다.

나는 그녀의 간단 브리핑이 끝나자 답했다.

“고마워요. 정난 씨.”

김정난이 고개를 돌려 살포시 웃었다.

그녀는 YJ E&M과의 사건을 모두 마무리하고, 얼마 전부터 출근을 시작했다.

지금까진 비서를 두는 것이 영 어색해서 어떻게든 혼자 일을 처리해보려고 했는데.

회장이라는 직책이 사무실에서의 업무만 있는 것이 아니라 고위층과 약속을 잡고, 만나는 등 내가 혼자서 하기엔 벅찬 부분들이 많았다.

마침 김정난을 우리 회사로 데리고 왔어야 했으니 그녀에게 제안했고.

김정난은 흔쾌히 받아들였다.

“아닙니다. 제 일인 걸요.”

어쩐지 그녀의 말투조차 전과 많이 달라진 느낌으로 친근했던 모습보단 프로페셔널한 모습이었다.

역시 사람을 곁에 오래 뒀을 땐 이유가 다 있다.

자동차는 울퉁불퉁한 땅을 지나 어딘가에 도착했다.

“회장님. 도착했습니다.”

차 문을 열고 내리자 위에서 펄럭이는 현수막 하나가 보였다.

[경 아라비안랜드 기공식 축]

김정난은 어느새 내 옆에 자리를 잡고 있었고.

현수막의 밑으로는 수십 개의 화환이 쭉 늘어서 있었다

5년 뒤쯤엔 이곳이 아라비안랜드의 입구가 될 것이다.

“회장님. 이쪽으로 가시죠.”

안내에 따라 안으로 들어가니 사람들이 가득했다.

아마도 내가 제일 마지막으로 도착한 모양이다.

나도 그들 속에 섞여 김정난이 귓속말로 알려주는 내빈들과 악수하며 안면을 텄다.

잠시 후 사회자의 기공식 안내 멘트가 들려왔고.

-내빈 입장을 시작하겠습니다. 모두 착석해 주시기 바랍니다.

아라비안랜드의 기공식이 시작되었다.

내빈들의 축사와 테이프 커팅, 시삽식.

또 돼지머리를 올려둔 고사상까지.

보통 영화 촬영 전 고사를 지내던 것이 전부였기에 이런 허허벌판에서 하는 절이 조금 낯설었다.

그래도 마음을 다해 아무 사고 없이 준공되길 기원했다.

마지막으로 참석자들은 차려놓은 출장 뷔페로 식사하는 시간을 가졌고.

나는 VIP들을 위한 자리로 향했다.

“축하드립니다. 회장님.”

박창선 하남 시장이었다.

아까는 자리가 자리다 보니 사적인 대화를 나누지 못했다.

“이제 시작이죠. 준공식 때도 이렇게 웃으면서 이야기할 수 있도록 잘 진행해보겠습니다.”

그러자 옆에 있던 황영수 한주건설 회장이 말을 이었다.

“저희가 잘하겠습니다. 두 분 다 걱정하실 일은 없을 겁니다.”

자신만만한 얼굴이었다.

“이게 뭐 누구 혼자 잘한다고 되는 일입니까? 다 같이 잘해야지요! 허허!”

박창선이 호탕하게 웃자 자리하고 있던 사람들이 모두 웃었다.

“아! 그보다 말입니다. 아라비안에 경사가 있다고 들었습니다.”

고개를 끄덕여 보였다.

“예. 이번에 좀 잘 된 친구들이 있습니다.”

“조금 잘 된 게 아니던데요?! 빌보드 1위라면서요?!”

“하하. 예. 맞습니다.”

그린 애플이 참여한 에이든 브라운의 앨범이 발매와 동시에 1위로 올라섰다.

내가 멋쩍게 웃자 주변에선 또 축하 인사를 건넨다고 한바탕 난리가 났다.

“아이고, 정말 경사네요! 경사!”

“그러게요! 그린 애플은 이제 한국의 자랑입니다!”

한국의 자랑이라······.

기분이 좋기도 하지만, 더 잘해야겠다는 책임감과 부담감이 동시에 느껴진다.

그때.

김정난이 다가와 내게 속삭였다.

“회장님. 방금 회사에서 연락이 왔습니다.”

말해보라는 듯 눈빛을 보내자 그녀가 한 번 더 속삭였다.

“<처단자 2>가 오스카 초청을 받았다고 합니다.”

그 말을 듣자마자 온몸에 소름이 돋았다.

그러고는 테이블에서 조심히 일어섰다.

“정말로 죄송합니다. 여러분. 일정이 생겨서 저는 먼저 들어가 봐야 할 것 같습니다.”

모두의 눈이 무슨 급한 일이길래 이런 자리에서 먼저 가냐는 눈빛이었다.

그런 그들에게 싱긋 웃어 보였다.

“제가 한 말을 지킬 수 있도록 준비를 좀 해야 할 것 같아서요.”

*

또 한 번의 오스카.

미국 로스앤젤레스 돌비 극장.

나는 이곳을 죽기 전 다시 찾겠다는 말을 전 세계인 앞에서 한 적이 있었다.

그것도 고작 2년 전에.

그땐 이렇게나 빨리 그 말을 지킬 수 있을지 전혀 몰랐지만.

<처단자 2>는 올해 작품상과 여우주연상 후보에 올랐다.

임윤서가 그렇게도 원하던 상이다.

이상하게도 그녀는 고생한 것에 비해 상복이 없었다.

새하얀 머메이드 드레스를 입고 옆자리에 앉아있던 임윤서가 말했다.

“혹시 못 타더라도 저는 괜찮으니까 너무 걱정하지 마세요!”

아무도 그런 걱정을 한 적이 없었는데 괜히 저런 말을 하니까 더 걱정된다.

“긴장 많이 되죠?”

그녀가 고개를 끄덕였다.

“그렇긴 한데, 진짜 걱정 안 하셔도 돼요!”

괜히 큰소리쳐서 긴장을 떨치려는 모양이다.

“예. 알겠습니다.”

<처단자 2>가 작품상 후보에도 올랐기에 내게는 그녀를 돌볼 여유가 전혀 없었다.

나도 나대로 긴장감이 최고치를 찍은 상태였기 때문이다.

다행히 우리 둘 외에는 다들 긴장하지 않은 모습이었다.

“와! 그래! 음악상은 저 작품 안 주면 이상하지!”

고진주를 비롯한 모두가 기대하고, 안 하고를 떠나서 한번 받은 상이니 못 받아도 아쉬운 것 없고, 주면 고맙게 받겠다.

이런 긍정적인 마인드로 저번에는 즐기지 못한 시상식을 온전히 즐기고 있었다.

부럽다.

나는 혹시나 하는 상황에 대비하고 있어야 했다.

더구나 옆에서 나보다 더 떨고 있는 임윤서를 위해서 티도 낼 수 없었다.

그렇게 시간이 흐르고······.

여우주연상 발표가 코앞으로 다가왔다.

“어우! 어떻게 해! 저 사실 너무 떨려요!! 심장이 밖으로 튀어나올 것 같다구요!!”

다행히 임윤서가 한국어로 이야기해 주변 배우들과 감독들은 그녀의 말을 알아듣지 못했다.

“언니! 진정하세요! 괜찮아! 심호흡! 심호흡!”

고진주가 라마즈 호흡법을 시범 보이자 임윤서가 따라 했다.

나도 슬쩍 따라 한 건 비밀이다.

드디어 무대 위로 올라온 시상자는 중년의 여배우였다.

어렸을 적 외화에서 많이 봐왔던 그녀를 보자 내가 지금 TV를 보고 있는 건가 착각이 들었다.

그녀는 우리와는 확연히 다른 여유로움으로 시상을 시작했다.

“제86회 오스카 여우주연상의 영예는······.”

그 순간은 심장이 튀어나올 것 같다는 임윤서의 말뜻을 알 것만 같았다.

“<처단자 2>의 임윤서. 축하드립니다.”

우레와 같은 박수 소리와 함성이 들려왔다.

임윤서가 여우주연상을 받은 것이다.

고진주는 상의 주인공을 끌어안아 토닥였고.

방금까지 벌벌 떨던 당사자는 오히려 멍한 얼굴이었다.

“정말로? 정말로 내가?”

“그래! 언니! 내가 이번에 상 받게 해준다고 했잖아!!”

환하게 웃는 고진주를 보자 그제야 정신이 드는지 임윤서도 활짝 웃었다.

“얼른 올라가서 하고 싶은 말 다 하고 오세요. 윤서 씨.”

내 말에 그녀는 반짝이는 눈으로 고개를 끄덕였다.

“네!”

무대에 올라간 그녀는 조명들이 쏟아지자 더욱 반짝였다.

“부족한 저에게 이런 큰 상을 주셔서 너무 감사합니다. 또 고진주 감독님과 오토바이를 조기 교육해주셨던 아버지, 같이 고생한 스태프분들께도 감사드립니다. 그럼 하고 싶던 이야기를 조금 더 하고 내려가겠습니다.

저는 몇 년 전만 해도 나이만 든 철부지에 불과했습니다. 작품으로만 경험해서인지 세상을 잘 몰랐어요. 어쩌면 이기적인 면도 많았죠.

그쯤 이런 무지함으로 저는 함정에 빠졌습니다.”

NX엔터와의 불공정계약으로 힘들었던 시기를 이야기할 모양이다.

“삶을 어떻게 헤쳐나가야 할지 앞이 캄캄할 때 귀인을 만났습니다. 그분은 바로 저희 영화의 제작자인 신바드 회장님이십니다. 아니, 이렇게 설명하는 것보단 이곳에 다시 오겠다 선언했던 패기의 제작자. 라고 하면 설명이 더 쉽겠네요.”

흠, 저건 나네.

좌중에선 웃음소리가 들려왔다.

“어쨌든 그 함정에서 저를 구해 이곳까지 올 수 있게 도와주신 회장님께 가장 감사드립니다.”

임윤서가 소감을 끝낸 것처럼 마무리해 박수가 다시 터져 나왔다.

그런데.

“아, 잠시만요. 마지막으로 한마디만 더 하겠습니다. 부디 제 후배들은 저를 선례 삼아 함정에 빠지는 일이 없기를 바랍니다. 물론 그런 영화계를 만들도록 저부터가 노력하겠습니다.”

역시 배우라서 그런가.

그녀는 많이 긴장한 것치고 소감을 훌륭하게 마무리했다.

임윤서는 환하게 웃으며 트로피를 꼭 쥔 채 내려왔고, 이제 우리 팀은 작품상을 받든 안 받든 여한이 없었다.

그녀가 여우주연상을 받은 것만으로 충분히 선전한 것이기 때문이다.

하지만 잠시 후······.

“작품상! <처단자 2>!”

우리는 기어코 또 역사를 쓰고 말았다.

*

삼청동의 한 한옥 앞.

그곳은 고급 한우 구이집으로 차에서 내리자 종업원이 나를 안내했다.

안으로 들어가자 가운데 복도를 두고 양쪽으로 쭉 늘어선 룸들이 보였고.

종업원은 그중 가장 끝방까지 가서 멈추곤 문을 열었다.

“어이구! 신 회장! 왔습니까!”

안에 있던 사람은 양상철.

멀뚱히 앉아있던 그는 나를 반갑게 맞았다.

“일찍 온다고 왔는데 죄송합니다.”

“무슨 소립니까. 내가 너무 일찍 온 거지. 이상하게 신 회장 만나러 오는 길은 항상 서둘러 나오게 됩니다. 허허.”

약속 시간보다 항상 먼저 도착하는 양상철이기에 오늘은 나도 30분 일찍 출발했는데 그래도 늦었다.

나는 얼른 안으로 들어가 그의 맞은편에 앉았다.

“그럼 식사부터 주문하시죠.”

우리는 특수부위 위주로 주문한 뒤 이야기꽃을 피우기 시작했다.

“<각성 신>이 1,700만을 넘었다면서요?!”

너무나 감사하게도 <각성 신>은 <처단자 2>의 국내 관객 수를 넘었고, 역대 관객 1위라는 기록을 세웠다.

“예. 올해는 제게 최고의 해가 되려나 봅니다.”

양상철이 잘 구워진 고기 한 점을 내 그릇에 올렸다.

“무슨 소립니까. 아직 앞길이 창창한 사람이. 매해 최고의 해가 되어야지요.”

그렇다면 좋겠지만.

나는 정말로 올해 이룬 것들이 많았다.

아라비안랜드의 본격적인 시작부터.

<처단자 2>로 오스카 두 번째 입성과 수상.

<각성 신>으로 1,700만이라는 유례없던 기록을 세우며 역대 관객 1위까지.

인생의 목표를 다 이뤘다고 해도 괜찮을 정도로 최고의 나날들이 계속되는 중이었다.

하지만.

양상철의 말대로 노력할 것이다.

오늘보다 더 나은 내일을 위해서.

“예. 그렇게 하겠습니다.”

날 지긋이 보고 있던 그는 뭔가 떠오른 듯 이야기했다.

“신 회장. 혹시 내가 예전에 했던 말 기억납니까?”

“어떤 말씀 말입니까?”

“영화판을 바꿔보겠다는 신 회장의 말을 처음 들었을 때 했던 말인 것 같은데······.”

아, 기억난다.

옛 친구 생각이 났었다고 했었다.

“돌아가신 옛 친구분 말씀이십니까?”

양상철은 신이 나서 답했다.

“맞아요! 맞아! 신 회장이 그 친구와 참 많이도 닮은 것 같다. 이렇게 생각했었지요.”

“그러셨습니까.”

“정말입니다! 그런데 이상하게도 그 친구가 어젯밤 제 꿈에 나온 것 아니겠습니까?”

“꿈이요?”

양상철은 내가 이야기에 흥미를 보이자 씩 웃었다.

“진짜 이상한 건 지금까지 제 꿈에 나와 말 한마디 없던 녀석이 어제는 한 마디하고 갔다는 겁니다.”

원래 죽은 자는 말이 없다던데······.

“친구분이 뭐라고 하셨습니까?”

“내 아들을 잘 부탁한다더군요.”

아들?

“아침에 일어나 가만 생각해보니 막 돌 지난 아들놈을 두고 떠나서 세상에 미련이 많이 남은 건가 싶지 뭡니까.”

그의 목소리에는 슬픔이 묻어 있었다.

“잘 부탁한다고 할 거였으면 지 아들놈이 어디서 어떻게 살고 있는지 정도는 알려주고 가지. 녀석······.”

순간 잊고 있던 <신바드의 모험> 힌트가 머리를 스쳤다.

[아버지, 친구, 죽음]

그리고 잠시 후 터무니없지만, 현실일 것 같은 하나의 가정이 떠올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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