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감독보다 영화사 대표님-137화 (137/140)

#137화. 시작부터 해야 한다

“누나아아!! 약속 시간 거의 다 된 거 아니야?!”

한보배는 거실에서 들려오는 동생의 목소리에 핸드폰을 들어 시간을 확인했다.

“히익!”

어떤 옷을 입어야 하나 싶어 옷방 거울 앞에서 이것저것 대보다가 벌써 시간이 훌쩍 지나버린 것이다.

약속 시간까진 30분밖에 남지 않았다.

“다훈아!! 잠깐만 와 볼래?!”

동생인 한다훈이 우당탕탕 달려와 잽싸게 문을 열었다.

“왜?! 뭐 도와줄까?!”

왠지 기다린 것 같은 얼굴이다.

“이거랑 이거 둘 중에 뭐가 더 나아?”

한보배 손의 들린 옷은 두 벌.

하나는 트위드 원피스였고.

하나는 청바지와 적당한 두께감의 니트였다.

“치마는 너무 춥지 않을까? 춥게 입고 가서 괜히 바드 형 옷 뺏어 입지 말구 따뜻하게 입고 가 누나.”

“역시 그게 낫겠지?”

처음부터 신바드와 잡은 약속을 동생들에게 알릴 생각은 없었다.

어제 결혼식이 끝나고, 집으로 돌아오는 길에 한다훈이 얼마나 캐묻던지.

말할 수밖에 없었던 것이다.

그리곤 지금까지 동생은 자신보다 더 설레는 모습이다.

“그래! 목도리도 하고 가! 목도리도!”

동생은 배시시 웃으며 한쪽에 예쁘게 개어져 있는 빨간색 목도리를 누나에게 건넸다.

“근데 너는 어제부터 왜 이렇게 좋아해? 그냥 영화 한 편 보러 가는 거라니까?”

한다훈은 그런 사람이 옷을 3시간째 고르고 있었냐고 되묻고 싶었지만, 그만두었다.

“그냥! 어제부터 기분이 좋네? 근데 누나 얼른 갈아입어야 하는 거 아니야?”

“아! 맞다! 빨리 나가!!”

등 떠밀려 옷방을 나왔지만, 한다훈은 정말로 기분이 좋았다.

그는 지금까지 한보배가 항상 자신과 한우주를 위해 살아왔다는 걸 누구보다 잘 알고 있었다.

그러니 이제부터라도 누나가 진정으로 행복했으면 좋겠다는 마음이 간절하다.

누나의 짝사랑은 오래전부터 눈치챘었고, 이제 그 결실이 눈에 보이니 기분이 좋은 건 당연했다.

잠시 후 옷을 갈아입은 한보배는 루즈 핏 코트를 엉성하게 걸치고 후다닥 방을 나왔다.

“밥 잘 챙겨 먹고 있어! 싸우지 말고!”

현관문 앞에서 적당한 굽의 구두를 급하게 신는 누나를 두 동생은 손까지 흔들며 배웅했다.

“우리 이제 애 아니거든! 저녁밥도 잘 챙겨 먹을 거니까 걱정하지 말고, 늦~게 들어와도 돼 누나.”

“뭐, 뭘 늦게 들어와!”

한보배가 당황하자 한우주까지 가세했다.

“누나. 우리도 가끔은 남자들만의 시간이 필요하거든? 그러니까 진짜 늦게 들어와도 돼.”

형보다 한술 더 뜨는 둘째 동생의 말에 그녀는 웃음이 나왔다.

“못하는 소리들이 없네. 정말. 알겠어. 적당한 시간에 들어올게. 그럼 간다!”

그렇게 닫힌 현관문.

엘리베이터 버튼을 누르자 한보배는 괜히 떨려왔다.

‘어쩌다 그런 말을 해 가지고는······.’

사실 어제 결혼식장에서 신바드에게 가위바위보 제안을 한 것은 충동적이었다.

그 전에 권현미 PD와 잠깐 나눈 대화에서 불씨가 붙어버리고 만 것이다.

-보배 씨. 사랑은 말이죠. ‘운’이에요. ‘운’.

그녀는 옆에 앉아 갑작스러운 사랑 이야기를 시작했다.

-응? ‘운’이요?

-네. ‘운을 떼다.’의 ‘운’ 있죠? 말로써 시작부터 해야 한다니까요? 그냥 보고만 있으면 아무것도 이루어지지 않아요.

그런 이야기를 딱 듣고 있는데 신바드와 눈이 마주쳤다.

정 PD의 추궁에 자신을 그저 친구라고 지칭해 섭섭하긴 했지만.

권 PD의 말도 일리가 있었다.

‘내가 좋아하는지는 전혀 모르시겠지······.’

그때.

권 PD가 웃으면서 한 말이 있다.

-제가 뭐 하나 알려드릴까요? 회장님 가위바위보 진짜 완전 못 하세요. 제가 25판을 내리 이긴 적도 있다니까요?

아무리 그래도 그렇지.

25판 연속 패배는 일부로라도 어렵지 않나 싶던 순간 뭔가가 떠올랐다.

그래서 용기를 내었다.

-저랑 가위바위보 안 하실래요?

호기롭게 밀어붙였건만.

결국······. 지고 말았다.

그 모습을 옆에서 힐끗 보고 있던 권 PD는 경악하더니 모른 척 고개를 휙 돌렸고.

한보배는 부끄러움에 얼굴이 달아오르기 시작했다.

그때 신바드가 이렇게 말했다.

-내일 11시까지 집으로 데리러 갈게요. 점심 먹고, 영화 봅시다.

무슨 소린가 싶어 되물었다.

-네? 제가 졌는데요······?

-제가 이겼을 때 절대 보면 안 된다고는 안 했잖아요.

분명 자신이 민망할까 봐 배려해 준 것이다.

그 뒤로 신부인 지성미에게는 미안하지만, 결혼식이 전혀 눈에 들어오지 않았다.

시선은 괜히 신바드의 얼굴로 자꾸만 향했다.

그때 생각을 하니 얼굴이 다시 달아오르는 것 같다.

‘어휴. 왜 이래. 정말. 그냥 친구로서의 약속이잖아.’

한보배는 머리와는 확연히 다른 설레는 마음으로 지하 주차장으로 향하는 엘리베이터에 몸을 실었다.

*

우리는 예약해둔 양식집에서 점심을 먹고, 영화관에서 영화를 관람했다.

한보배가 연예인이기에 불편할까 싶어 식당도 영화관도 프라이빗 한 곳으로 예약했고, 편하게 대화를 나눌 수 있었다.

-입에 맞아요? 여기 파스타가 유명하다고 해서 예약했는데.

-네! 진짜 맛있는데요?! 혹시 무슨 음식 좋아하세요??

사소한 음식 취향부터.

-그때 기억나세요? 저 첫 예능 출연?!

-그걸 어떻게 잊겠습니까. 저는 보배 씨 개인기가 그렇게 많은 줄 몰랐다니까요?

추억을 되짚는 시간까지.

즐거운 시간이었다.

영화관에서는 한보배가 굳이 팝콘을 사겠다고 해서 그러라고 했고.

큰 통 하나로 나눠 먹다가 손이 닿아 서로 놀라는 일도 있었다.

또 우리가 본 로맨스 영화의 마지막 장면에선 훌쩍이는 소리가 들려오길래 챙겨온 손수건도 건넸다.

한보배는 코를 시원하게 풀었다.

엔딩 크레딧이 모두 올라올 때까지 앉아있다가 일어서자 그녀가 손수건을 자신의 가방에 넣으며 말했다.

“죄송해요. 손수건은 제가 빨아서 다시 가져다드릴게요.”

“괜찮아요. 가지셔도 돼요.”

그러나 극구 세탁 후 돌려주겠다고 하길래 알겠다고 했다.

“그럼 나갈까요? 집으로 가실 거죠?”

한보배를 아까 만났던 곳으로 데려다주려고 물은 것인데.

그녀는 어딘가 불편한 듯 우물쭈물거렸다.

“저, 저기······.”

“혹시 약속 있으세요? 그럼 데려다 드릴게요.”

그러나 그녀의 답은 의외였다.

“저녁도 먹고 가면 안 될까요?”

순간, 배가 고픈 건가 싶어 멈칫했는데 한보배가 변명하듯이 덧붙였다.

“애들한테 저녁까지 먹고 간다고 해서요. 남자들만의 시간이 필요하다나, 뭐라나. 하하.”

그렇게 히죽 웃는데 그 모습이 왠지 귀여워 보였다.

“그럴까요? 그런데 제가 괜찮은 술집은 잘 모르는데.”

한보배가 씩씩하게 제안했다.

“제가 아는 곳이 있어요!”

1시간 후.

우리는 강남의 한 퓨전 음식점 2층에 마주하고 있었다.

“여기가 연예인 커플 되게 많이 오는 곳이거든요? 사장님이 2층에는 지인들만 올려보내 주셔서요.”

메뉴판을 들고 있던 그녀는 해맑게 웃고 있었다.

“헤헤, 이야기를 많이 들어서 언제 한번 꼭 와보고 싶었는데!”

그러다 나를 의식하곤 말을 정정했다.

“아! 그런데 꼭 커플들만 오는 건 아니에요! 그냥 연예인들이 많이 온다. 이런 뜻이었어요!”

커플이라고 지칭한 것이 마음에 걸렸던 모양이다.

이럴 땐 그냥 넘어가 줘야지.

“그래요. 뭐 먹을까요? 보배 씨 먹고 싶은 걸로 주문해요.”

“그래도 돼요?!”

고개를 끄덕이자 한보배는 사장님을 불러 신이 난 목소리로 주문했다.

“사장님! 트러플 감자튀김이랑 뇨끼 치즈 떡볶이랑 메밀 김밥 주세요!”

야무지게 칵테일까지 전달한 뒤.

음식이 나오자 맛있게 먹기 시작했다.

“음식이 맛있네요.”

“그렇죠? 같이 작품 했던 언니가 얼마나 여기 자랑을 하던지! 저도 처음 먹어보는데 맛있네요.”

그렇게 칵테일을 한 잔, 두 잔 비워내는데.

“회장님.”

호칭이 아무래도 거슬린다.

“진짜 그렇게 안 불러도 된다니까요. 둘이 있으니까 더 괜찮아요.”

그러자 한보배가 고민하는 눈치를 보였다.

“음······. 그럼 뭐라고 불러요?”

그러게.

뭐라고 들어야 하지.

“그냥 편하게 부르세요.”

“그럼······. 대표님이라고 할래요! 처음부터 대표님은 대표님이었으니까!”

그게 그거 아닌가.

그래도 회장님보다는 나은 것 같기도 하다.

“알겠어요. 그렇게 불러요. 그럼.”

그 뒤로 우리는 칵테일을 못 먹어서 죽은 귀신이라도 붙은 듯 잔을 비워냈고.

살짝 취기가 돌기 시작했다.

어느덧 시간은 10시.

이제 슬슬 가야 하지 않나 싶을 때쯤 그녀가 진지하게 말했다.

“대표님. 저 드릴 말씀이 있어요.”

“뭔데요?”

“말해도, 말해도 부족하긴 한데, 정말로 감사드려요······.”

“응? 뭐 가요?”

“다훈이도 그렇고, 우주도 그렇고, 저희 세 식구 이렇게 잘살고 있는 건 다 대표님 덕분이잖아요.”

다들 오해하는 게 있다.

내 도움을 받았다고들 생각하는데, 아니다.

각자 열심히 한 노력의 결과일 뿐이다.

“저는 한 게 없어요. 오히려 도움을 받았죠. 보배 씨랑 다훈이, 우주 없었으면 저도 여기까지 오기 힘들었을 겁니다.”

진심이었다.

영화 제작은 나 혼자서 할 수 있는 것이 아니니까 말이다.

“도움이 됐다니까 다행이네요. 아, 그리고 그때 제 수상소감 기억나세요?”

수상소감이라면······.

“홍콩 영화제요?”

“네. 맞아요. 그때요.”

그녀는 신인상을 받고, 많은 사람들이 다름을 자연스럽게 받아들이는 세상이 왔으면 좋겠다고 했었다.

“이제는 조금 그런 세상이 온 것 같아요.”

그녀가 원하던 바람은 이루어진 것일까.

“그래요?”

“네. 그 뒤로 우주 얼굴이 많이 밝아졌거든요. 친구들도 생기고요.”

“다행이네요. 정말로.”

“세상은 점점 더 나아지지 않을까요?”

나는 웃으면서 고개를 끄덕였다.

“그렇게 될 거예요. 분명.”

도란도란 이야기를 더 나누던 중 시간을 확인해 보니 어느새 11시였다.

“그만 일어날까요? 대리 기사님 불러서 데려다줄게요.”

“응? 시간이 벌써 이렇게나 됐네?”

한보배가 아쉬운 듯 고개를 끄덕였다.

“알겠습니다. 일어나죠······.”

우리는 그길로 먹은 것을 계산하고, 가게를 나와 주차장으로 향했다.

“잠깐만요. 기사님 좀 부를게요.”

그런데 누군가 옷자락을 잡는 듯한 느낌이 들었다.

“저기, 대표님.”

한보배였다.

그녀는 살짝 취했는지 얼굴이 벌겠고.

추운 날씨라 입에선 하얀 입김이 폴폴 나오고 있었다.

“예?”

내가 대답하자.

“······싫어요.”

무슨 말을 했는데, 한보배가 고개를 푹 숙이고 있어 앞부분이 잘 들리지 않았다.

“예? 뭐가 싫다고요?”

그 뒤로 이어지는 대답은 상당히 의외였다.

“집에 가기 싫다고요······.”

응?

물론 오늘 데이트를 조금 기대했던 건 사실이다.

혹시 그녀와 무슨 관계로 발전할지 모를 일이었으니까.

그런데 이렇게나 빠르다고?

한보배는 내 생각보다 더 저돌적인 성격이었다.

“대표님. 저랑 만나보실래요? 저 대표님 진짜 좋아하는데······.”

당시엔 깜짝 놀라 눈만 껌벅였지만.

결론만 말하자면 우리의 본격적인 만남은 그날로부터 시작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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