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36화. 재밌는 건 나누자
『배우 도건우 화끈한 출연료 공개!』
『아라비안의 독특한 출연료 계산법. 신바드 회장이 직접 지시했다』
『젊은 CEO 신바드, 훈훈한 얼굴로 여심까지 잡아』
『아라비안, 앞으로 영화관 티켓값 점차 내려가겠다. 공표』
『표준 계약서, 연예계에도 통용될 것인가』
[도건우도 이력서 쓰고 면접(오디션) 봐서 배역 따내는데 나도 열심히 해야겠다.]
[처음엔 회차당 300만 원이라고 해서 되게 많이 받는다고 생각했는데, <각성 신> 촬영 기간이 7개월이었다고 함. 업계 탑이 7개월에 2억? 결코 많은 게 아님!]
[나는 오히려 너무 적다고 생각했는데, 평소 받는 게 그 두 배는 될 듯.]
[근데 도건우 생각할수록 웃김 ㅋㅋㅋㅋ 아니 저 자리에서 출연료 묻는다고 까는 연예인이 어딨음? ㅋㅋㅋ]
[역시 신바드 회장님은 시대를 앞서가는 사람입니다!! 모두가 배우들 눈치 볼 때 자신의 길을 가는 사람!!]
[신바드를 국회로!! 이 정도면 현직 국회의원보다 나라 운영도 잘하겠다!!]
레드카펫 행사 당일 저녁.
뒤풀이에서 도건우는 내게 이렇게 말했다.
-회장님. 저는 저희한테 표준 계약서 도입한다고 하셨을 때 정말로 놀랐습니다.
부정적으로 놀란 건 아닌가 싶어 살짝 걱정했는데 그가 해맑게 웃었다.
-저는 정말로 대찬성이에요!!
도건우 같은 탑 배우들은 ‘배우 표준 계약서’를 거부해야 정상이다.
자신들의 출연료가 깎이니까.
그런데도 그는 오히려 대찬성이란다.
궁금증이 몰려올 때쯤 도건우가 그 이유를 덧붙였다.
-저도 무명이었던 시절이 있었는데, 혹시 아세요?
전혀 몰랐다.
내가 그런 눈치를 보이자 그가 자답했다.
-아마도 모르셨을 거예요. 너무 힘들었던 시절이라 어디서도 이야기 안 했거든요. 그때 제가 처음 받았던 출연료가 1만 5천 원이었습니다. 하루 종일 대기하고, 온몸에 흙을 묻히면서 바닥에 뒹굴었는데 말이죠.
내가 ‘배우 표준 계약서’를 만들고자 했던 이유가 바로 이것이었다.
상위 1%만 잘 먹고 잘 사는 극심한 양극화.
그걸 줄여보고 싶었다.
-아라비안의 ‘배우 표준 계약서’가 널리 퍼진다면 적어도 이제 시작하는 후배들은 저보다 상황이 나아지지 않겠어요?
도건우는 이런 이유로 노골적인 남자의 질문을 받아친 것이다.
어쨌든 결과적으로는 모두에게 좋았다.
포커스가 약간 어긋나긴 했지만.
도건우는 숨김없고, 솔직한 이미지를.
아라비안 그룹은 소신 있는 기업의 이미지를.
마지막으로 <각성 신> 홍보까지 알차게 됐으니 싸했던 남자의 질문은 일석삼조의 효과였다.
“대표님!”
핸드폰으로 <각성 신>의 한 줄 평은 어떤지 살피고 있던 나는 익숙한 목소리가 들려와 고개를 들었다.
“아니다! 이제 회장님이시지! 참!”
한보배였다.
“어휴. 회사에서나 듣는 거지. 보배 씨는 그냥 편하게 불러요.”
가뜩이나 회장님 소리가 적응 안 되던 터였다.
“안 되죠! 안돼! 그럴 순 없죠! 그리고 여기는 사람들도 많은걸요?”
많긴 하네.
우리 주변에는 남녀노소 사람들이 빼곡했다.
그곳은 서울의 한 호텔 예식장.
오늘은 류봉수와 지성미의 결혼식 날이었다.
아무래도 둘이 예술계 쪽으로 몸담고 있다 보니 유명한 연예인들도 종종 보였다.
그래서인지 다들 한보배의 출연을 그렇게 신경 쓰지 않는 듯했다.
“안녕하세요! 회장님!”
그녀의 옆으로는 매니저 남상훈과 한다훈.
또 굉장히 오랜만인 한우주와 천상현도 있었다.
“우주도 왔구나?”
“네. 잘 지내셨어요?”
한우주는 마지막으로 봤던 3년 전보다 키가 부쩍 자란 모습으로 이제 어엿한 20대 초반의 성인이었다.
“그래. 미국으로 학교 갔다는 이야기는 들었어.”
한우주는 2년 전.
버클리 음대에 입학했다.
내 동생도 아닌데 그렇게 자랑스러울 수가 없었다.
그는 대학 이야기가 나오자 쑥스러운 듯 뒷머리를 긁적였다.
“네에. 방학이라 잠깐 들어왔어요.”
“그렇구나. 그래도 이렇게 잠깐이라도 보니까 좋네.”
그때.
무언가 바닥에 철퍼덕 눕는 소리가 나길래 뭔가 싶어 아래를 내려다봤다.
예식장 대리석 바닥에는 옆으로 누운 레트리버 한 마리가 보였다.
순둥순둥한 그 얼굴은 세상 지루해 보였으나 귀를 쫑긋거리며 주변을 경계하고 있었다.
레트리버 몸에는 형광색 하네스가 채워져 있었고.
하네스에서 이어지는 끈은 한우주가 꼭 잡고 있었다.
“우리 너머가. 심심했구나.”
한우주는 녀석의 이런 행동이 익숙한 듯 자세를 낮춰 레트리버를 쓰다듬었다.
한보배가 그 모습을 보며 말했다.
“우주 혼자 미국으로 보낼 수는 없어서요. 안내견 분양받은 지 꽤 됐어요.”
‘너머’라는 레트리버는 한우주의 손길이 좋은지 꼬리를 움찔거렸다.
어떠한 상황에서도 흥분하지 않고 침착해야 하는 안내견이기에 저렇게 참고 있는 거다.
“그렇구나. 우주한테 좋은 친구가 생겼네요. 근데 왜 이름이 ‘너머’예요?”
“우주 뒤에 붙이면 ‘우주 너머’잖아요. 그래서 그렇게 지었대요.”
참으로 엉뚱한 발상의 이름이라 웃음이 나왔다.
“귀엽네요.”
이번엔 천상현이 내게 물었다.
“아! 맞다! <처단자 2> 1,400만 넘었다면서요? 정말 축하드립니다.”
그러자 한보배도 거들었다.
“맞아요! 1,400만이라니?! 저는 잘 될 줄 알았다니까요?! 정말로 축하드려요!!”
“감사합니다.”
둘의 말대로 <처단자 2>는 최종 스코어 1,400만을 찍고 극장에서 내려왔다.
이 스코어는 역대 관객 수 2위를 넘어서는 기록이다.
한다훈은 누나에게 장난치고 싶었는지 짓궂은 질문을 했다.
“근데 누나 <각성 신>도 치고 올라오는 속도가 장난 아니던데?”
이것도 맞았다.
<각성 신>은 개봉한 지 고작 2주가 지났지만, 현재 500만의 관객이 영화를 봤다.
홍보가 빛을 발했는지 무서울 정도로 초반 스코어가 쭉쭉 올라간 것이다.
이 속도라면 1,000만은 따놓은 당상이었고.
한다훈의 말처럼 <처단자 2>를 넘어서는 일도 발생할 수 있었다.
언론에선 이미 <처단자 2>와 <각성 신>의 대결 구도를 만들어 연일 보도 중인 상태다.
그러나 한보배는 자신이 주연인 영화 이야기에 부끄러웠는지 헛기침을 하기 시작했다.
“큼큽! 우리 여기서 이럴 게 아니고! 신부라도 보러 가시죠!!”
어째 하는 행동이 한우주와 똑같다.
피는 못 속이지. 암.
그렇게 우리는 신부 대기실로 향했는데.
그곳은 사람들의 줄이 늘어서 있었다.
“와, 기다려야 되나 봐요.”
안에서 축하 인사며 사진이며 시간이 아무래도 걸리는 데다 하객이 많아서였다.
우리는 차근히 기다리다 안으로 들어갔다.
“어머! 회장님 오셨어요?!”
순백의 웨딩드레스를 입은 지성미가 우리를 반갑게 맞이했다.
“보배도 그렇고! 다들 와주셨네요?!”
지성미는 누구보다 아름다운 신부였고, 행복해 보였다.
“그럼! 당연히 와야지!”
지성미와 한보배는 ‘좀비 탈출’ 회식 자리에서 만나게 됐고.
그 뒤로 연락하며 지내다 지금은 고민 상담까지 하는 사이가 됐다고 한다.
“와, 근데 언니 너무 예쁘다! 진짜!!”
한보배는 지성미에게 다가가 눈을 떼지 못했다.
“너도 얼른 가야지.”
지성미가 부드럽게 맞받아 치자 한보배의 얼굴은 또다시 붉어졌다.
“무, 무슨 소리야! 나는 아직 한창이지! 사진! 사진 찍자!!”
서두르는 한보배 덕분에 우리는 지성미 근처로 가 섰고.
찰칵-!
사진사의 셔터 소리가 빠르게 들려왔다.
“자! 사람들 많이 기다리니까 이따 봐! 언니!!”
그렇게 또 속전속결로 신부 대기실을 나와 식장으로 향했고.
한다훈은 무슨 일인지 아까부터 쿡쿡 웃고 있었다.
“다훈이 무슨 기분 좋은 일 있어?”
내가 묻자 한다훈은 눈물까지 닦아내며 답했다.
“아, 웃겨. 누나가 너무 웃겨서요.”
재밌는 건 나누자고 하려던 그때.
“어! 회장님! 여기 계셨네요?!”
정 PD와 권 PD, 우리 회사 직원들이 우르르 몰려오고 있었다.
“오셨어요?”
내가 그들을 발견하자 직원들은 허리를 90도로 꺾으며 인사했다.
“안녕하십니까! 회장님!!!”
어휴.
안녕 못 했다가는 큰일 나겠네.
그나마 식장이 시끌벅적해서 다행이다.
“예. 다들 반갑습니다.”
직원들은 곧 그 자리가 불편했는지 흩어졌고, 정 PD와 권 PD만이 남아 우리 옆 좌석을 채웠다.
한보배는 <각성 신>을 촬영하며 권 PD와 꽤 친해진 모양이다.
무슨 비밀 이야기라도 하는지 둘은 속닥이며 웃고 있었다.
지성미와의 관계도 그렇고, 은근 사교적이네.
아직 식이 시작하려면 10분 정도 남아있던 터라 아까 보던 <각성 신> 한 줄 평이나 마저 볼까 하는데 정 PD가 말을 걸어왔다.
“그런데 회장님. 회장님은 여자친구 없으십니까?”
정 PD는 내가 대표든 회장이든 나를 친근하게 대하는 몇 안 되는 사람이었다.
그래도 그렇지.
질문 하나로 심장을 후벼파다니.
“그러게요. 없네요.”
전생에서도 결혼하지 않았던 터라 이번 생도 별생각이 없었······.
기는커녕! 사실은 연애도 하고, 결혼도 하고, 아이도 낳고 싶었다.
왜 하고 싶지 않겠는가.
좋은 사람 만나 아이를 갖는 것.
이건 무릇 인간의 본성이다.
정 PD는 이런 내 마음을 아는지 모르는지 능글맞은 눈으로 나를 봤다.
“에이, 언제까지 말 안 하실 겁니까. 그때 놀이공원 같이 갔던 여자친구 있으셨잖습니까.”
그의 눈빛은 필히 오늘은 꼭 그 여자의 정체를 밝혀내겠다는 눈빛이었다.
그런데 놀이공원?
여자친구?
내가 나도 모르는 여자친구가 있었나, 싶던 그때.
한보배와 눈이 딱 마주쳤다.
아, 한보배랑 캐리월드에서 마주쳤었지. 참.
바이킹도 타고, 퍼레이드도 보고.
그때는 몰랐는데 이렇게 생각하고 보니 데이트 비스무리했던 것 같기도 하다.
그래도 그렇지.
어떻게 한보배와 나를 엮을 수 있겠는가.
상상조차 한 적 없던 인연이었다.
“그분은 여자친구가 아닙니다. 그냥 친구인데, 잠깐 마주친 거예요.”
그러나 정 PD는 믿지 않았다.
“놀이공원을 혼자 갔는데 친구분을 만나셨다고요?!”
그래. 뭐 이렇게 딱 정리해서 이야기해주니 내가 봐도 말이 안 되긴 하네.
고개를 끄덕이려는데.
한보배와 다시 눈을 마주쳤다.
그녀는 어딘가 슬퍼 보이는 눈으로 중얼거렸다.
“회장님은 그냥 친구랑 바이킹도 타고, 퍼레이드도 보고, 좀비 탈출도 하고 그러시는구나······.”
“예? 보배 씨 뭐라고요??”
정 PD가 되물었다.
“아무것도 아니에요······.”
너무 작게 중얼거려 주변 사람들은 정확히 못 들은 모양이다.
그런데 무슨 일인지 내 귀에는 콕콕 박히면서 들렸다.
-하객 여러분께 잠시 안내 말씀드리겠습니다. 잠시 후 신랑 류봉수 군과 신부 지성미 양의 결혼식이 시작될 예정입니다.
마침 결혼식 시작을 알리는 사회자 때문에 상황은 어영부영 넘어갔다.
그렇게 이상한 분위기가 잠시간 계속되고.
사회자의 목소리가 다시 들려왔다.
-안녕하십니까. 저는 오늘 결혼식 사회를 맡게 된.
“회장님.”
줄곧 표정이 이상하던 한보배의 갑작스러운 부름 때문에 나는 사회자 이름을 듣지 못했다.
“예?”
그러더니 그녀는 내게 이상한 제안을 하나 했다.
“저랑 가위바위보 안 하실래요?”
갑자기 가위바위보?
그것도 결혼식이 곧 시작된다는데?
“제가 이기면 내일 우리 영화 봐요.”
“에?”
너무 놀라서 말이 잘 안 나왔다.
“대신 제가 지면 꼭 안 보셔도 돼요.”
내가 아무리 연애를 많이 안 해 봤다지만.
이건 분명 데이트 신청 아닌가?
더구나 나는 가위바위보를 더럽게도 못한다.
“자! 그럼! 가위! 바위! 보!!”
순식간에 시작된 가위바위보에 나는 무의식적으로 주먹을 냈다.
“아······.”
탄식을 자아내는 한보배의 손가락을 보니 정확히 엄지와 검지만이 펼쳐져 있었다.
가위를 낸 것이다.
나는 눈치도 없게 그녀를 이겨버렸다.
이상하게 꼭 이럴 때만 이기더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