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35화. 유의미한 힌트
『<처단자 2> 베니스를 휩쓸다!』
『아라비안 축제 분위기!! 두 번째 오스카도 가능할까?』
『연이은 호재에 아라비안 주가 폭등!』
『국내 개봉은 언제? <처단자 2>에 대한 관심 폭발』
수상 직후 한국에도 그 소식이 널리 퍼져 한바탕 난리가 났다고 한다.
귀국 날이 되어서야 우리를 맞이하는 공항 인파에 화제성을 실감할 수 있었고.
약 2주 후 <처단자 2>는 국내와 해외에 동시 개봉했다.
[오늘 <처단자 2> 보고 왔습니다! 임윤서 딸이!! 읍읍!! 다들 제발 보세요 ㅜㅜ 스포라 이야기할 수도 없고 정말!]
[윤서 언니는 세상에서 가죽이 제일 잘 어울리는 여자야...]
[근데 남의 나라 가서 저렇게 다 부수고 와도 되는 건가?;; 뭐라 그러는 게 아니라 진심 궁금해서;;]
[진짜 대역 1도 안 썼다는데, 임윤서 이번에는 꼭 상 주라구!!]
[폐공장 탈출 장면 한 번에 오케이였다고 함. 윤서 누나 진짜 대단쓰.]
[이제부터 믿보 영화사 아라비안에 믿보 배우 임윤서 추가다 후후]
당연히 흥행은 기본 옵션이었다.
한 달 후.
가을비가 추적추적 오는 날.
나는 집 근처 카페에 앉아 책을 읽으며 여유를 느끼고 있었다.
온전히 나만의 시간을 가지는 건 정말로 오랜만이라 소중한 시간을 허투루 쓰지 않겠다고 다짐하며 나온 것이다.
토닥거리는 빗소리.
은은한 커피 향.
포근한 소파가 그 시간을 더욱더 값지게 만들고 있었다.
문득 읽고 있던 책을 테이블에 내려놓고.
가방에서 <신바드의 모험> 시나리오 북을 꺼냈다.
회귀 초반에는 도움이 될 만한 힌트들을 많이 주다가 점점 그 효력(?)이 떨어졌다.
아주 가끔 올라오는 힌트들은 아주 사소했다.
예를 들어 [물웅덩이, 조심]이라는 단어가 올라오면 그날은 정말로 물웅덩이에 빠져 신발이 젖을 뻔한 일이 벌어진다던가.
[비, 우산]이라고 올라오면 해가 쨍쨍하다가도 소나기가 쏟아졌다.
오늘의 운세와 일기예보를 겸하는 그런 존재가 되어버린 것이다.
마치 이제는 나 스스로 앞으로의 일들을 헤쳐나가라는 그런 의미 같았다.
그나마 아직은 내게 생긴 크고 작은 이벤트들이 신(scene)으로 정리되고 있어 효력을 아주 잃은 건 아니구나.
안심하기도 했다.
여하튼 한동안 바쁘기도 했었던 터라 <신바드의 모험>을 확인하지 못했다.
오늘은 혹시나 해서 카페로 출발하기 전 챙겨왔고.
나는 그것을 들어 조심히 페이지를 넘겼다.
베니스 영화제에서 황금사자상 수상 장면을 지나치자 내가 카페에 앉아있는 현재의 장면에서 딱 끊겨있었다.
그리고 정말로 오랜만의 찾아온 휴식처럼.
힌트들이 있었다.
단어들은 적어도 내 눈에는 유의미해 보였다.
[아버지, 친구, 죽음]
오늘의 힌트는 근래 올라왔던 단어들과 달리 그 뜻을 금방 유추하기가 쉽지 않았다.
내게 아버지란 아주 어렸을 적 기억이 멈춘 존재여서 아버지든 아버지의 친구든 친구의 죽음이든 전혀 알 수 없는 노릇이었다.
그날 나는 비가 멈추고.
날이 어두워지고.
카페 문 닫는 시간을 알바생에게 통보받을 때까지.
망부석처럼 자리에 앉아 그 의미를 생각해봤지만.
알아낼 수 없었다.
그렇게 시간은 또 빠르게 지나가기 시작했다.
*
한 달 뒤 나는 아라비안과 YJ E&M의 합병 절차를 모두 완료했다는 보고를 받았다.
소식을 접하자마자 급하게 비공개 이사회를 열었고.
이사회의 안건은 이것이었다.
앞으로 아라비안의 운영을 어떤 식으로 할 것인가.
화분 엔터와 합병하면서 아라비안은 업종별로 사업자가 나뉘었는데 경영에 약간의 어려움이 있었다.
많은 업종을 아울러야 했기 때문이다.
그리고 이 문제점은 YJ E&M을 흡수하면서 더 극대화될 예정이었다.
영화 제작, 배급, 투자, 엔터, 영화관, YJ E&M에서 운영하던 pvN이라는 방송국까지.
대책이 필요했다.
그래서 우리는 이런 결론을 내렸다.
지주회사 체제로 가자.
지주회사는 안정적이면서도 단순화된 구조 유지와 경영의 효율성과 투명성이 높았다.
또 사업의 분할, 매각 등 구조조정이 쉬웠고, 무엇보다 적대적 인수합병으로부터 경영권 방어가 유리했다.
이사회에 참석한 모든 이는 이런 장점들 덕분에 안건에 찬성했고, 아라비안은 새로 태어났다.
아라비안 지주회사를 필두로 나머지 회사들은 자회사로 구분해 공식 출범했고.
이로써 우리의 자회사는 씨네 아라비안, 아라비안필름, 아라비안 엔터 등등으로 나뉘었다.
나는 당연히 아라비안 지주회사의 회장으로 취임했다.
며칠 후.
“예? 배급 수수료를 8%로 말씀이십니까?!”
최세준은 내 말에 너무 놀라 기겁했다.
그는 최근 자회사 아라비안필름의 투자배급 1팀 팀장으로 자리를 옮겼다.
“예. 업계 관례라곤 해도 10%는 너무 많습니다. 다 같이 잘 먹고, 잘 살아야 영화판이 커지죠.”
그가 조금 난처한 표정이길래 단호하게 말했다.
“대신 어떤 영화라도 8% 그 이상, 이하로 임의책정 안 됩니다. 극장에 들어오는 영화 관계자들한테 아예 못 박으세요.”
최세준은 그제야 내 말도 일리가 있다는 듯 고개를 끄덕였다.
“네. 알겠습니다. 회장님.”
조금 강압적일 수도 있지만, 어쩔 수 없다.
자리를 잡기까진 이렇게 나갈 수밖에······.
“그리고 본부장님.”
최세준 옆에는 씨네 아라비안 본부장도 함께 있었다.
“예. 회장님.”
본부장은 얼마나 놀라려나.
“영화관 수수료 50% 말입니다. 오픈하게 되면 시범적으로 48%로 내리죠.”
사실 마음 같아서는 내 최종 목표인 40%로 확 내리고 싶었으나 뭐든지 과하면 좋지 않다.
점차 시간을 가지고 내려가야 한다.
물론 영화관 수수료를 인하하는 건 내가 선의적인 기업인이라서가 아니었다.
일반인들은 모르는 영화관 사업에 대해 재밌는 이야기가 하나 있는데.
바로 영화관의 가장 큰 수익원이 입장료가 아닌 팝콘에서 나온다는 사실이었다.
팝콘과 음료의 원가가 책정되는 금액보다 현저히 낮기에 가능했다.
회귀 전.
영화관들은 너도나도 영화관 티켓값을 인상하곤 했었다.
그런데 그건 너무 바보 같은 짓이다.
경제학자들이 발표한 연구 결과도 있었는데.
영화관으로 높은 이익을 얻으려면 티켓값을 내리고, 팝콘 가격을 올려야 한다는 결과였다.
그렇다면 회귀 전 영화관 사업을 하는 기업들이 이 사실을 몰랐을까?
아니다. 알면서도 실천하지 못한 것이다.
추측하건대 아마도 욕심 때문이지 않았을까.
어느 것 하나 포기할 수 없었을 테지.
이런 내 생각을 본부장은 아는지 모르는지 흠칫 놀라는 몸짓을 보이기만 하고, 그 이상의 반응은 없었다.
“예. 알겠습니다. 회장님.”
어쨌든 내 뜻을 따라준다는 게 고마워 웃음이 났다.
“그럼 전국 JYV 순차적으로 리모델링 시작해 봅시다.”
씨네 아라비안의 출범이 얼마 남지 않은 시기였다.
*
바람이 꽤나 차가워진 11월 초 어느 날.
코엑스 광장에는 많은 인파가 몰려있었다.
“꺄악!! 보배 언니!!”
“건우야!! 사랑해에!!!”
“이안 오빠! 손 좀 잡아주세요!!”
“사진 한 번만요! 한 번만!!”
평소와 다르게 그곳엔 긴 레드카펫이 깔려있었고.
<각성 신>의 배우 11인이 각자 화려한 드레스와 턱시도를 입은 채 입장 중이었다.
그들은 걸어오는 길에 팬들이 내민 종이에 사인도 하고, 사진도 찍으며 여유로운 모습이었다.
“반응이 너무 좋은데요?”
현장에 나가 있던 나와 직원들은 그 모습을 흐뭇하게 보고 있었다.
“그러게요. 행사 준비하면 이럴 때 제일 보람 있다니까요?”
오늘은 <각성 신>의 개봉 이틀 전.
일명 레드카펫 행사가 있는 날이었다.
일반적인 레드카펫은 영화제나 시상식 등 대규모 행사에서나 볼 수 있다.
그런데 우리는 이 레드카펫을 온전히 <각성 신> 팬들을 위해 이곳에 깔았다.
11인 배우 전원이 참석해 팬들과 소통하며 질문도 받고, 작은 팬미팅 같은 시간을 가지기로 한 것이다.
홍보 효과를 노린 것도 있었지만.
우리로선 기다려준 팬들을 위함이 더 컸다.
결과적으로 행사는 눈앞에 보이는 것처럼 성공적이었다.
우리 행사를 협조하기로 한 코엑스에서 추정한 인원보다 훨씬 웃도는 팬들과 기자들이 현장을 방문했고.
그들이 일으킬 홍보 효과는 말할 것도 없이 어마어마했다.
다행히 많은 인파에 비해 순조로운 행사가 진행됐고.
어느덧 영화에 관한 질문을 받는 순서가 되었다.
이상한 질문이 나오면 어쩌나 싶었던 우려는 첫 질문을 받자마자 깨졌다.
첫 질문의 주인공은 교복을 입은 소녀팬으로 호기롭게 손을 든 것과는 다르게 굉장히 수줍어하는 모습이었다.
“저······. 이안 배우님한테 질문이 있습니다.”
그 말에 이안이 빙긋 웃으며 앞에 놓인 마이크를 들었다.
“네. 질문 들을 준비 완료했습니다.”
소녀 팬은 심쿵 했는지 잠시 말을 잇지 못하다가 어렵사리 입을 뗐다.
“<각성 신>에서 염력을 사용하는 캐릭터로 나오신다고 들었습니다······. 그럼 혹시 실제로도 무거운 걸 잘 드시는지······. 궁금합니다······.”
소녀 팬은 정말로 궁금했던 모양이다.
그런데 그럴 때가 있다.
괜찮은 생각인 줄 알았는데 입 밖으로 내고 보니 영 이상한.
소녀 팬의 표정이 지금 그랬다.
하지만 이안은 당황스러워하지 않고, 답했다.
“운동을 열심히 해서인지 요즘은 제법 잘 드는 것 같습니다! 혹시 괜찮으시다면 팔에 한 번 매달려 보실래요?”
마시고 있던 커피를 뿜을 뻔했다.
소녀 팬은 한술 더 떠 ‘정말 그래도 돼여?!’라고 소리 지른 뒤 뛰쳐나갔다.
옆에 있던 여직원들의 ‘와, 부럽다!’ 소리도 간혹 들려왔다.
혹시나 이안이 성공하지 못하면 어쩌나 싶었는데 운동을 열심히 한다는 게 거짓말은 아니었나 보다.
소녀 팬은 행복한 얼굴로 한동안 이안의 오른팔에 대롱대롱 매달려있었다.
그 뒤로도 몇몇 황당한 질문들이 이어졌지만.
악의적인 질문은 없었다.
그렇게 화기애애한 분위기가 계속되는데.
이번엔 한 남자의 질문 차례가 되었다.
뭔가 싸한 분위기의 남자였다.
“안녕하세요. 저는 도건우 씨에게 질문드리겠습니다.”
도건우는 무표정으로 마이크를 들었다.
“예. 말씀하시죠.”
남자가 질문을 시작했고.
“이번 <각성 신> 출연료로 얼마를 받으셨습니까? 11명 모두의 출연료가 다 궁금한데 도건우 씨가 제일 많이 받으셨을 것 같아서 질문드립니다.”
썩 좋지 않던 예감은 적중했다.
노골적이고, 무례한 질문이다.
이럴 땐 그저 침묵으로 대처하는 것이 가장 좋은 방법이었지만, 도건우는 그럴 놈이 아니었다.
“페이요? 까짓것 대답해드리죠. 근데 그전에 먼저 드릴 말씀이 있습니다. 저는 돈 보고 이 영화에 출연한 게 아닙니다. 이점은 확실하게 하고 싶어서요.”
더 이야기하면 홍보를 넘어서 논란이 될지도 모르는 상황이었기에 나는 그에게 그만하라는 수신호를 계속 보냈다.
그러나 그는 멈추지 않았다.
“정확한 회차 정산이었습니다. 102회차 중 제가 출연한 분량이 71회차였고, 회차당 300만 원 받았습니다. 계산은 알아서 해보시고요.”
좌중이 웅성거렸다.
“아, 좀 더 정확히 말씀드리자면 이 회차 정산은 <각성 신>에 출연한 모든 배우에게 적용된 방법입니다. 출연 확정 전 일종의 이력서 같은 개념의 서류를 보냈고, 그 서류를 제작사에서 확인한 뒤 책정한 금액이죠.”
이건 내가 지시한 게 맞다.
배우의 출연료는 우리나라 영화 제작비에서 비중을 상당히 많이 차지한다.
저예산 영화에선 정말로 심한 경우 제작비의 절반 이상을 가져갈 때도 있다.
출연료에 적당한 기준이 있다면 제작비를 그만큼 아끼거나 그 돈으로 영화의 다른 퀄리티를 충족할 수 있지 않을까.
줄곧 생각해왔다.
나는 그저 <각성 신> 촬영 전.
그 생각을 실현할 시기가 왔다고 생각한 것뿐이다.
그래서 직원들과 머리를 싸매고 몇 달을 고생했다.
연기력, 경력, 전작들의 흥행 요소, 평소 인성 등등을 가지고 최대한 적당한 기준을 만들었고.
그에 맞는 출연료까지 책정했다.
<각성 신> 배우들에게 계약 전 이 사실을 모두 알렸고, 그들은 동의했다.
그런데 뭐지?
처음엔 대놓고 불만을 토로한 건가 싶었는데 뭔가 이상했다.
그때 일부러 내 눈을 피하던 도건우와 눈이 딱 마주치자.
그가 씩 웃었다.
“저희 제작사가 이렇게 호락호락하지가 않습니다.”
다음날 우리 회사는 또 한 번 화제가 되어 포털사이트 실시간 검색어까지 오르게 되었다.
[2위. 아라비안]
[3위. 배우 이력서]
[4위. 배우 표준 계약서]
[5위. 도건우 300만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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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런데 어쩐지 그 화제의 포커스는 조금 이상했다.
[1위. 신바드]
나를 향하고 있었기 때문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