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감독보다 영화사 대표님-134화 (134/140)

#134화. 아주 다채로운 일

“응? 대표님! 오셨어요!!”

현장에 있던 리암이 나를 발견하곤 반갑게 맞았다.

“잘 지냈어요? 리암? 촬영은 어때요?”

<각성 신>의 촬영이 2주밖에 남지 않아 현장을 찾았다.

“촬영이요? 너무 재밌죠! 영화 시작하면서 동양 신들에 관해 공부하고 있는데, 신기해요! 미국 돌아가서도 공부는 계속하려고요!”

리암은 동양학 학사라도 딸 기세였다.

“그래요? 재밌게 촬영하고 있다니 다행이네요.”

“혹시 이거 속편 제작할 예정이면 아시죠?! 저 또 불러주셔야 해요!!”

집착이 다시 시작될 것 같아 냉큼 고개를 끄덕였다.

“어유! 그럼요! 당연하지! 리암이 아니면 누가 카메라를 잡습니까! 하하!”

한국어로 이야기했다면 내 어색한 말투를 누구라도 금방 눈치챘을 것이다.

하지만 우리는 다행히 영어로 대화 중이었고, 리암은 그저 함박웃음을 지었다.

“하하하! 다시 한국에 올 날만 기다리겠습니다!! 아, 그나저나 <처단자 2>는 촬영 끝났다면서요?”

“예. 이제 곧 후반 들어갈 겁니다.”

“와! 혹시 이번에도 오스카 노리시는 거예요?!”

솔직히 말하자면 노리고는 있었다.

그러나 이건 굉장한 도전이었다.

1년의 텀이 있긴 했으나 같은 제작사의 영화가.

그것도 상을 받았던 영화의 속편으로 수상한 경우는 아직까지 없었기 때문이다.

심사위원들도 이렇게는 일부로라도 주지 않으려고 노력할 것이다.

물론 영화가 정말 너무 잘 나왔다면 언제든 관례는 엎어질 수 있는 거겠지만.

그래서 우리는 노리고 있다는 야망에 대해 조심스러웠다.

입을 놀리면 될 일도 안 될 때가 있으니까.

“우선 베니스 영화제에 출품하려고요. 거기서 수상하면 이번에도 기대해 볼 만하지 않을까요?”

3대 영화제는 오스카 수상의 발판이 될 수 있기에, 시기가 맞는 베니스에서 수상한다면 가능성을 더 올릴 수 있었다.

“그럼요! 할 수 있을 겁니다! 진심으로 응원해요! 무엇보다 제가 너무 기대하고 있습니다! 해외 로케까지 다녀왔다는 말 듣고, 이번에는 얼마나 스케일을 키우려나 싶었다니까요?!”

맞다.

<처단자 2>팀은 크랭크 업 3주 전.

필리핀으로 떠났다.

나는 가지 않았는데, 필리핀 현지에서 차도 터뜨리고, 총도 쏘고, 건물을 날리는 등.

아주 다채로운 일이 있었다고 한다.

물론 필리핀 현지 담당자와 장소 협조, 철저한 주변 통제, 안전 확보 이후 촬영한 것이라 법적으로 아무 문제가 없었다.

그렇게 무사히 돌아온 줄로만 알고 있었는데.

임윤서와 조감독은 곧장 내게로 와서 푸념을 늘어놓았다.

-대표님! 말도 마세요! 저희 며칠 더 있었다가는 마을 하나를 통째로 날려버릴 뻔했다니까요?!

-예예! 맞습니다! 귀국 이틀 전에 저한테 오셔서는 빈 마을 섭외가 가능하냐고 물어보시는 겁니다! 기가 막힌 장면이 생각났다고 하시면서요!

그러나 둘은 설득에 설득을 거듭해 고진주를 제정신으로 돌려놓았고, 귀국할 수 있었다고 한다.

고진주가 말똥말똥한 눈으로 그들의 이야기를 같이 듣고 있었으니 농담은 아닌 듯했다.

어쨌든 그런 노력 때문이었을까.

미리 확인한 필리핀 분량은 임팩트 있게 잘 나왔다.

“리암! 잠깐만 와줄래요?!”

“네!! 감독님!”

노흥기에 부름에 대답한 리암은 내 손을 붙들었다.

“아, 그리고 대표님. 오늘 촬영 끝나면 저녁이라도 같이 먹어요!! 동양 신에 대해 할 말이 무진장 많은데, 노 감독님은 요새 내 이야기를 안 들어준다니까요?”

수다쟁이 리암한테 잡히면 귀가는 무조건 늦어진다.

그래도 먼 타지까지 날아와서 고생하는데 같이 밥 먹으면서 이야기 정도는 들어줄 수 있지.

“알겠어요. 얼른 감독님한테 가보세요!”

리암은 밝은 얼굴로 고개를 끄덕이곤 뒤돌아 달려갔다.

2주 후.

노흥기와 리암, 배우 11인의 <각성 신> 촬영이 모두 끝나 후반 작업에 들어갔다.

이 소식은 영화인들과 영화를 좋아하는 사람들 사이에서 알음알음 전해지며, 대중에게까지 퍼졌다.

“<각성 신> 개봉 일정은 언제로 잡혀있습니까?”

투자배급팀 최세준 팀장이 답했다.

“예정대로라면 9월 초로 예상하고 있습니다.”

9월이면 추석이 있는 달이니 괜찮을 것 같다.

한데 최세준이 난감한 듯 말을 이었다.

“그런데 이때 개봉하면 문제가 좀 있습니다.”

“어떤 문제 말입니까?”

“<처단자 2>와 개봉 시기가 맞물릴 것 같습니다.”

하기야 다른 회사 경쟁작품들도 시기가 비슷하면 쫄리는(?) 쪽이 개봉 일정을 당기거나 미룬다.

관객의 성향은 다양하다.

매일 극장에 가는 사람도 있을 것이고, 1년에 한 번 가는 사람도 있을 것이다.

어쨌든 영화를 보는 관객의 수는 정해져 있다는 건데.

굳이 영화를 같은 시기에 개봉해 그 수를 나눌 필요는 없다.

특히나 <처단자 2>와 <각성 신>은 올해 대중들이 가장 기대 중인 영화로 나란히 공동 1위를 차지한 적도 있었다.

일정을 조율할 수 있다면 당연히 조정하는 게 맞다.

“해외도 동시 개봉하는 거죠?”

“네. 맞습니다. 두 작품 모두 국내외 동시 개봉할 예정입니다.”

“그럼 <각성 신> 개봉을 11월 초로 미루죠.”

<처단자 2>는 수상을 하든 안 하든 베니스 영화제가 끝나자마자 바로 개봉하는 게 그나마 홍보 효과가 있다.

그러니 <각성 신>은 그 두 달쯤 뒤에 개봉하는 것이 맞을 것이다.

“네. 대표님. 알겠습니다.”

“올해 ‘K – 좀비 축제’ 준비는 어떻게 돼가고 있습니까?”

시간이 참 빠르게도 흘렀다.

벌써 축제 기간이 돌아오고 있었으니 말이다.

“네. 먼저 올해는 작년 건의 사항들을 토대로 대폭 정돈할 예정입니다. 입구 사물함을 추가 설치하고.”

축제를 주관하는 사업 2팀의 설명이 이어졌고, 그 내용은 주로 참가자들이 불편을 호소했던 부분을 개선한다는 것이었다.

“좋습니다. 그럼 이번 좀비 탈출도 작년과 같은 코스로 가는 겁니까?”

“작년과는 다르게 구역마다 김준 사원의 아이디어였던 ‘백신 확보’로 포인트를 줄 예정입니다.”

좀비 탈출은 매년 참가해도 색다른 즐거움을 느낄 수 있어야 하니 변화해야 했다.

‘백신 확보’는 구역에 숨겨진 백신을 찾아오는 참가자들에게 더 큰 보상을 주는 일종의 이벤트였다.

티는 내지 않았지만, 김준이 나름 자신의 몫을 잘 해내고 있는 것 같아 뿌듯한 마음이 들었다.

“예. 알겠습니다. 올해도 안전을 우선으로 신경 써주시고, 그럼 이제 다음으로는······.”

마지막으로 주요 안건이 남아있었다.

“씨네 아라비안 디자인 시안 나왔습니까?”

씨네 아라비안은 신설될 영화관 명칭이다.

YJ E&M과의 합병은 시간문제였다.

합병되자마자 전국 70개의 영화관 리모델링을 원활하게 추진하려면 미리 준비해 놓아야 했다.

특히 리모델링을 어떤 식으로 할 것인지가 관건이었다.

디자인만 정해지면 실존하는 영화관 구조에 맞춰 새롭게 만들어내는 건 식은 죽 먹기였기 때문이다.

그래서 나는 우리 고유의 영화관 이미지 구축을 YJ E&M과의 합병 절차를 밟자마자 지시했다.

“네. 대표님.”

디자인팀 팀장이 회의실 앞으로 나와 스크린에 준비해온 PPT를 띄웠다.

PPT에는 영화관 심벌과 대표 캐릭터, 매표소, 매점 등의 인테리어 시안이 정리되어 있었고.

그곳에서 가장 많이 사용된 색은 보라색이었다.

“대표님께서 말씀하신 보라색을 적절하게 사용한 시안입니다. 먼저 심벌부터 설명해 드리겠습니다.”

컬러마케팅.

세상 모든 기업은 자신들만의 색이 있다.

파란색, 초록색, 노란색, 빨간색.

그 색은 무수히 많았지만.

나는 유독 보라색이 좋을 것 같다고, 강조했다.

보라색은 예로부터 가장 고귀하고, 성스러운 색으로 숭배되면서 대부분 사람이 보라색을 보면 고급스럽고, 화려한 이미지를 떠올린다고 한다.

그래서인지 보라색은 심신이 피로할 때 무의식적으로 찾게 되는 치유의 색이기도 했다.

삶에 지친 사람들이 우리 영화관을 찾은 뒤 조금이라도 안정을 찾으면 좋겠다는 상징적인 의미였다.

PPT가 넘어갈수록 마음에 쏙 들었고, 디자인팀의 알찬 설명은 곧 마무리되었다.

“좋네요. 실질적인 리모델링 방향은 한주건설이랑 상의해서 진행하는 걸로 하죠.”

“네. 대표님.”

그날의 회의는 그렇게 끝났다.

그리고 약 2개월 뒤.

내 계획이 한 번 더 잘 맞아떨어지는 사건이 벌어졌다.

<처단자 2>가 베니스 영화제 초청과 더불어 황금사자상 후보에 오른 것이다.

*

이탈리아 베네치아 리도섬의 팔라조 델 시네마.

이곳에선 역사상 가장 오래된 영화제이자 칸과 베를린에 비견되는 베니스 영화제가 열리고 있었다.

수많은 카메라가 찍고 있는 레드카펫엔 나, 명호식, 고진주, 임윤서, 극 중 임윤서의 딸을 연기했던 아역배우가 손을 흔들고 있었다.

일반적으로 무술 감독이 영화제에 참석하진 않지만, 그래도 누구보다 고생한 명호식이었기에 같이 비행기를 탔다.

“이쪽도 좀 봐주세요!!”

우리는 입의 경련이 일어날 것 같았지만, 흔드는 손은 유지한 채 소리를 지른 기자 쪽으로 살짝 몸을 틀었다.

사실 <처단자 2>가 황금사자상 후보에 오르긴 했지만, 수상하는 건 어쩌면 불가능한 일일지도 모른다.

아니, 초청된 것만으로도 굉장히 이례적인 일이었다.

베니스는 3대 영화제 중 가장 비 상업적인 예술 영화를 시상하는 영화제다.

상업 영화와 예술 영화를 구분하는 것은 명확하지 않지만.

보통 상업 영화가 관객의 흥미와 흥행을 끌어내는 것이 목표라고 한다면.

예술 영화는 감독이 가진 가치관이나 예술관을 중점으로 제작되는 영화다.

그래서 감독들은 이 사이에서 갈등을 많이 했다.

돈이냐.

예술이냐.

물론 욕심을 부리다가 망하는 경우도 많았다.

그렇다 보니 영화판에서 이 두 마리 토끼를 다 잡는 건 불가능한 일에 가까웠다.

그런데 철저하게 상업 영화로 제작한 <처단자 2>가 이곳에 초청됐고, 최고 영예의 상인 황금사자상 후보에까지 올랐다.

이 말은 즉.

우리 작품이 두 마리 토끼를 모두 잡았다는 뜻이었다.

눈부신 카메라 세례가 끝나고, 우리는 시상식장 안으로 이동했다.

회귀 후 지금까지 많이도 초청된 국제영화제였지만.

그래도 떨리는 건 매한가지다.

임윤서도 나와 같았는지 덜덜 떨리는 손을 내밀었다.

“저어······. 대표님 혹시 손잡으실래요??”

무슨 소린가 싶어 그녀의 다른 쪽 손을 보니 고진주와 꼭 맞잡고 있었다.

또 고진주는 그 옆에 앉아있던 명호식의 손을 잡고 있었고.

긴장을 저렇게라도 나누고 싶었나 보다.

지금, 이 순간 그들은 피를 나눈 전우와도 같은 심정인 것이다.

비장하게 고개를 끄덕이고, 그녀가 내민 손을 잡자 다행히 긴장된 마음이 한결 나아지는 것 같았다.

그렇게 손에 땀을 쥐는 영화제 순서가 지나가고······.

화려한 영화제는 마지막 순서인 황금사자상 시상만을 남겨두고 있었다.

시상자는 유명한 아프리카계 미국인 남자 배우.

그는 시상 분위기를 유쾌하게 이끌고 가다 봉투를 들어 보이곤 발표를 시작했다.

“제69회 베니스 국제영화제 황금사자상은······!”

임윤서 손의 힘이 잔뜩 들어갔다.

슬슬 내 손에 피가 통하지 않는다고 생각이 들 때쯤.

그의 입이 열렸다.

“<처단자 2>!!”

고진주는 오열했고.

나머지는 얼싸안은 채 방방 뛰었다.

“와!! 대표님!! 우리가 황금사자상이래요!! 미쳤나 봐!!!”

조금 과장해서 임윤서의 목소리가 주변 박수 소리보다 더 컸다.

그날은 우리가 두 번째 오스카에 더욱 가까워진 날이자 3대 영화제를 모두 석권한 영화사가 된 날이기도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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