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33화. 어부들을 홀린 인어의 노래
대궐 같은 거실 소파에 앉아 큰 팝콘 통을 품에 안은 채 전전긍긍 중인 한 외국인.
그는 무언가를 기다리는 에이든 브라운이었다.
그의 손은 바쁘게 움직여 통 안에 든 팝콘을 입으로 옮기고 있었다.
거실에 놓인 대형 TV는 얼마나 큰지 흡사 영화관 같았다.
그는 그 화면을 보며 한껏 긴장한 모습이다.
“으! 왜 이렇게 시간이 안 가는 거야!”
그가 이토록 기다리고 있는 건 <왕국 : 시간의 비밀>.
10시 오픈이라고 해서 1시간 전부터 테이블 위에 팝콘이며 맥주며 세팅해 놓은 지 오랜데 아직 3분이나 남았다.
이렇듯 호들갑을 떠는 이유는 전 시리즈의 결말 때문이다.
마지막 장면에서 주인공의 숨이 꼴딱 넘어가기 직전에 끝났으니 말이다.
누가 봐도 죽지 않는 것이 이상할 정도의 상태였기에 그 충격은 쉬이 가시지 않았다.
그러니 새로운 시리즈를 기다리는 지금 모든 이들의 심정은 자신과 마찬가지일 것이다.
‘빨리 보고 싶은데!!’
에이든 브라운이 온갖 야단을 떨며 3분을 보내자.
드디어 새로 나온 콘텐츠 탭에 <왕국 : 시간의 비밀>이 떴다.
빠르게 클릭하니 컴플릭스를 상징하는 오프닝 배경과 효과음이 들려왔다.
두둥-!
‘한다!’
리모컨을 들어 이것저것 누르자 집안엔 어느새 어둠이 깔렸다.
첫 장면은 처음 보는 캐릭터 3명이 안갯속에서 수군거리는 장면이었다.
‘응? 저 여자는 그린 애플의 아람 아닌가? 또 한 명은 좀비 축제 포스터에서 본 것 같기도 한데······.’
셋 중 두 명이 아는 얼굴이었다.
그때.
좀비 축제 모델이었던 여자의 급박한 목소리가 들려왔다.
-총은 절대 안 돼. 소리 때문에 몰려들 거야. 그리고 앞이 잘 안 보이니까 부딪치지 않게 조심하고. 언제, 어디서 튀어나올지 몰라.
나머지 둘이 고개를 끄덕이자 여자가 다시 말했다.
-그래. 그럼 가자.
‘뭐지? 저 셋이 왜 나오는 걸까? 주인공은?! 뭐가 어떻게 된 거지??’
아무것도 알 수 없었지만, 에이든 브라운은 TV 속으로 점점 빠져들었다.
약 5시간 15분 후.
‘아······. 벌써 끝났네.’
에이든 브라운은 1화당 50분 내외였던 <왕국 : 시간의 비밀>을 6화까지 모두 시청한 뒤 소파에 널브러졌다.
중간에 화장실 2번 다녀온 걸 빼면 쭉 시청했다고 봐도 무방했다.
이번 시리즈는 현대는 물론 미래까지 타임 루프 하게 되면서 세계관이 커져 한시도 눈을 뗄 수 없었다.
더불어 무기까지 가지고 넘나들 수 있어 좀비들을 독특하게 처리하는 장면들이 인상적이었다.
그리고······.
‘마지막에 지유 캐릭터가 날아다니네.’
아람이 <블랙 히어로즈>에 출연했다는 것과 그 안에서도 연기를 곧잘 한다는 건 알고 있었지만, 기대 이상이었다.
또 에이든 브라운은 그녀의 연기보다 더 놀라운 것을 발견했다.
그건 지금도 스피커를 통해 흘러나오고 있는 OST.
TV 속 검은 화면에선 엔딩 크레딧이 올라옴과 동시에 음악이 하나 들려오고 있었다.
-내게 사랑은~♬ 마주할 수 없는 현실이 아닌 것인가~♪
한국어를 몰라 무슨 뜻인지는 알 수 없었다.
그러나 매화 마지막을 장식했던 노래여서인지 지금은 자신도 모르게 흥얼거리고 있었다.
이 노래는 보통이라면 바로 스킵 했을 엔딩 크레딧을 절대로 스킵 할 수 없게 만드는 힘을 가진 그런 노래였다.
노래가 너무 좋아 1화가 끝난 뒤 바로 핸드폰으로 검색했는데.
이게 아람이 직접 부른 OST란다.
‘노래를 이렇게 잘 불렀다고?’
에이든 브라운은 최근 떠오르는 그녀들의 실력을 인정하긴 했으나 개개인의 매력까진 느끼지 못했다.
그런데 아람의 이 솔로곡은 사람을 홀리는 마력의 음색으로 <왕국 : 시간의 비밀>의 몽환적인 분위기에도 찰떡같이 어울렸다.
어부들을 홀린 인어의 노래가 마치 이러했을까.
그는 노래를 멍하니 듣고 있다가 어느새 화면에 아무것도 나오지 않는다는 걸 깨달았다.
그러더니 갑자기 핸드폰을 들어 뭔가를 찾으며 분주해졌다.
‘이럴 게 아니지.’
어딘가로 전화를 거는 에이든 브라운.
“여보세요? 대표님? 다른 게 아니라 내가 이번에 같이 작업해보고 싶은 가수가 생겼는데요.”
*
<왕국 : 시간의 비밀>은 공개되자마자 컴플릭스 전 세계 1위를 찍었으며 그 순위는 한 달이 지난 지금도 그대로였다.
이 전무후무한 기록은 매일 경신되는 중이다.
이와 별개로 또 하나의 경사가 그린 애플을 찾아왔는데.
에이든 브라운의 다음 앨범에 참여해 줄 수 있냐는 부탁을 받은 것이다.
그는 몇 년째 탑을 유지하고 있는 가수였기에 그린 애플 입장에선 하지 않을 이유가 없었다.
하지만 그린 애플의 위상도 만만치 않게 올라간 상태라 그들의 콜라보 소식은 전 세계 팬들을 열광시키기에 충분했다.
서로에게 시너지 효과를 줄 좋은 기회였다.
이외에 회사에 있던 큰일은 하남시 국유지 매입 절차가 모두 끝났다는 것이다.
“하남시로부터 구매한 부지들은 설계가 완료되면 바로 시공에 들어갈 수 있도록 토공사부터 해놓을 예정입니다.”
눈 앞에 펼쳐진 광활한 부지는 개발을 진행하지 않아 아직 풀이 무성한 땅이었다.
정당한 방법으로 산 것이니 이제 이곳에 테마파크 건설만 진행하면 된다.
이곳에 대관람차.
저곳엔 롤러코스터.
디자인 시안을 대입해봤지만, 아직은 머나먼 꿈만 같았다.
“원활한 교통편을 위해 인근 도로 확장 공사도 진행될 예정입니다. 대표님. 이쪽입니다.”
직접 보면서 보고받고 싶다는 내 말에 사업1팀과 나는 현장으로 나왔고.
그들은 나를 데리고 다니면서 이곳저곳 자세히도 설명했다.
“이번에 디자인 완성된 곳이 어느 구역이랬죠?”
구체적인 디자인이 완성되면서 테마파크는 크게 8구역으로 나뉘었다.
“예. <망자와 함께> 구역입니다.”
특히나 <망자와 함께>, <기적>, <각성 신>의 경우에는 체험형 놀이기구를 만들어내기 좋은 영화들이라 각각 하나씩의 구역을 차지했다.
아예 그 구역 전체가 영화의 컨셉을 가지게 되는 것이다.
“설계는 언제부터 들어갑니까?”
사업 1팀 팀장이 힘차게 대답했다.
“오늘부터 실시 설계 들어갔습니다. 설계 완료되는 대로 시공 들어갈 예정이고요.”
이제야 한 발을 앞으로 내민 것 같은 느낌이었다.
*
“촬영 시작한 지 얼마 안 됐는데 너무 빡센 장면 아니에요?”
슬쩍 고진주 옆에 서서 묻자 대답이 돌아왔다.
“그렇긴 한데, 이 장면부터 찍어 놓고, 시작하고 싶어서요.”
내가 지금 서 있는 곳은 인천의 한 폐공장.
<처단자 2>는 이곳에서 6일 전 크랭크인 했다.
그리고 오늘은 폐공장에서의 마지막 촬영 날이자.
불타는 폐공장을 임윤서가 오토바이로 탈출하는 장면을 촬영하는 날이었다.
이 장면은 <처단자 2> 기획 단계서부터 안전을 걱정할 정도의 액션 신이었다.
<처단자>가 1편에 이어 2편도 대부분이 액션이라 어쩔 수 없긴 하지만.
그래도 보통은 촬영 초반에 이렇듯 강도 높은 액션 신을 촬영하진 않는다.
스태프들의 손이 맞을 시간도 필요하고, 구상과 준비를 철저히 한 뒤 촬영에 임하기 위해서였다.
이 장면은 곳곳에 실제로 불을 내야 했고.
전편과는 다르게 오토바이 기능이 업그레이드됐다는 설정이라 마치 곡예를 하는 듯한 액션을 선보여야 했기 때문이다.
그나마 다행인 건 현장 스태프들 대부분이 전편부터 같이 해온 사람들이라는 점이었다.
“제작팀! 여기도 소화기 좀 가져다 놓자!!”
“특효 실장님! 여기는 불 안 내요?!”
“거기도 낼 거야! 지금 준비 중! 좀만 기다려줘!!”
“조명 감독님! 여기 세팅 좀 더 해주세요! 배우 얼굴에 불 아른거리게!”
“미술팀! 여기 연결 좀 맞춰줘! 깨진 유리 있었잖아!!”
그렇다고 현장이 여유롭다는 말은 아니다.
모두 빠르게 촬영 준비를 완료하느라 정신이 없었다.
고진주는 내 옆에 서 있던 명호식에게 심각한 얼굴로 물었다.
“무감(무술 감독)님. 윤서 씨가 직접 오토바이 타는 거 정말로 괜찮겠죠?”
명호식도 표정이 마냥 좋진 않았다.
“본인이 하겠다는데 어떻게 말리겠습니까. 그리고 워낙 잘 타니까 걱정하지 마세요. 리허설도 깔끔하게 성공했고.”
헬멧을 쓰고 타는 오토바이 장면이라 충분히 대역이 해도 되는 액션이었지만.
임윤서는 자신이 하겠다고, 고집을 부렸다.
결국 그녀가 직접 타는 것으로 결정됐고.
대역의 얼굴을 가릴 용도로 검게 선팅했던 헬멧 쉴드 부분 유리 선팅은 모두 벗겨냈다.
이렇게까지 하는데 대역을 쓰지 않는다는 티라도 팍팍 내야지.
“명 감독님!!”
현장에 있던 임윤서가 명호식을 힘차게 불렀고.
“네! 갑니다!!”
빠르게 뛰어간 명호식과 임윤서는 촬영 전 마지막으로 동선 체크를 하는 듯 보였다.
잠시 후.
-자, 이제 촬영 들어가 봅시다.
고진주의 무전 소리에 잔뜩 긴장한 현장 스태프들이 자신이 있어야 할 자리를 묵묵히 지켰다.
쫙 달라붙는 위아래 가죽옷을 풀세트로 입은 임윤서는 헬멧을 착용한 뒤 오토바이 위에 올라탔다.
방금 그녀가 명호식과 체크하던 동선의 끝에는 폐공장의 입구가 있었고.
그 입구 바로 앞에는 낡은 철제 경사판이 버려진 듯 놓여 있었다.
사실 폐공장에 있던 건 아니고, 소품팀에서 가져다 놓은 우리 쪽 세팅이었다.
조감독은 현장 곳곳에서 점화할 준비 중이던 특효팀의 완료 신호가 있자마자 외쳤다.
“촬영 준비하겠습니다!!”
전 스태프들의 긴장이 최고조에 이르렀고.
“레디.”
특효팀은 자신이 맡은 구역을 점화한 뒤 카메라 뒤로 빠졌다.
폐공장이 실제로 불타오르는 모습으로 구현되자 다시 조감독의 신호가 들려왔다.
“액션!!”
부아아아앙-!
우렁찬 배기음을 내뿜으며 임윤서의 오토바이가 출발했다.
그녀는 일렁이는 불꽃들을 유려한 코너링으로 휙휙 지나쳤다.
그러더니 입구 앞에서 끼이이익-! 소리를 내며 멈춰 섰다.
지금까지와는 다른 크기의 불꽃이 앞을 막고 있었기 때문이다.
그녀는 거리를 계산하는 뉘앙스를 보이며 한곳을 응시했다.
아마도 편집에선 이 부분에 경사판의 클로즈업 장면을 넣을 것이다.
세팅해 놓은 경사판의 위치를 확인한다는 듯이.
아주 찰나의 시간.
그러고 있던 그녀는 뒤로 살짝 물러서더니 가차 없이 철제 경사판으로 돌진했다.
부와아아아앙!!
임윤서는 경사판을 도움닫기 삼아 한 치의 망설임도 없이 불꽃 사이를 날아올랐다.
그 모습은 내게 순간적으로 느리게 보였다.
타악-!
끼익-!
정확히 폐공장 밖에서 오토바이가 착지하자 시간은 원래대로 돌아왔다.
순간 ‘우와’ 소리가 절로 나올 뻔했는데, 가까스로 삼켰다.
고진주의 컷 사인이 아직 나오지 않았기 때문이다.
“컷! 오케이!! 윤서 언니 괜찮아요?!”
컷에 오케이 사인까지 한 뒤.
고진주는 헤드폰을 벗어던지고, 임윤서에게 뛰어갔다.
자신도 모르게 사적인 자리에서만 부르기로 했던 ‘언니’라는 호칭을 부르짖으며 말이다.
그러자 임윤서가 헬멧을 벗으며 배시시 웃었다.
“괜찮아요! 괜찮아!! 근데 벌써 오케이야?! 나 그렇게 잘했어요?!”
명호식도 달려가며 외쳤다.
“예! 너무요! 너무! 완벽했습니다!!”
소화기로 열심히 불을 끄고 있던 스태프들의 얼굴에는 미소가 걸려 있었다.
힘들지만 보람이 있는 것이다.
“바로 다음 씬 준비하겠습니다!”
또 한 번의 오스카를 위한 모두의 긴 여정은 그렇게 시작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