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감독보다 영화사 대표님-131화 (131/140)

#131화. 당한 만큼 갚아줘야 한다

“맞다. 저번에 병원비 내고 간 남자 말이야. 그 사람 되게 유명한 사람이더라?”

화장실에 앉아있던 김정난은 익숙한 목소리에 자신도 모르게 귀가 쫑긋거렸다.

“응? 누구?”

“아, 그때 말했었잖아. 김인호 씨 병원비 누가 싹 다 내고 갔다고.”

김인호라는 이름에 흠칫 놀라는 김정난.

‘아빠?!’

“아아, 맞다. 멀끔한 남자가 와서 내고 갔다고 했었지.”

‘그때 물어봤을 땐 누가 내고 갔는지 모른다고 했는데······.’

귀찮은 듯 퉁명스럽게 답하던 원무과 직원이 바로 밖에서 들려오는 목소리의 주인공이었다.

“근데 그 남자가 누군데?”

“너 요새 우리나라 천만 영화는 다 한 영화사에서 나오고 있는 거 알아?”

“갑자기 무슨 뜬금없는 소리야?”

그러자 여자는 답답한 듯 나열했다.

“<처절한 인생>, <망자와 함께>, <처단자>, <기적> 다 들어는 봤을 거 아니야.”

“아? 그럼, 다 극장에서 봤지.”

“이 영화 만든 영화사가 아라비안필름이라는 곳인데, 그 영화사 대표가 병원비를 내고 갔더라니까?”

“에?? 진짜? 그 대표가 왜?”

“그건 나도 모르지. 김인호 씨 보호자랑 아는 사이일 수도 있고······. 근데 절대 말하지 말라고 했으니까 사정이 있겠지.”

숨죽이며 대화를 듣던 김정난은 너무 놀라 ‘헙!’하고 자신의 입을 틀어막았다.

“나도 그 대표 얼굴 인터넷에서 본 것 같은데, 아직 젊은데다가 꽤 훈남이지 않아?”

“응. 맞아. 실물은 더 괜찮음!”

“오, 영화사 대표면 돈도 많은 거 아니야?”

“뭐, 그렇겠지.”

“그럼 번화라도 받았어야지!”

“그땐 몰랐지!”

둘은 뭐가 그리도 신이 나는지 한동안 웃으면서 농담을 주고받았고.

잠시 후 그 웃음소리는 점점 멀어져 갔다.

김정난은 그제야 살며시 화장실 문을 열고 나왔다.

‘이게 뭐야. 내가 무슨 죄인도 아니고.’

숨어있던 꼴이 우스웠다.

‘그나저나 천사가 신바드 대표였다니······.’

도통 이유를 알 수 없었다.

혹시······.

-저는 배인규 회장을 무너뜨릴 생각입니다.

신바드 대표는 자신에게 저런 말을 한 적이 있었다.

그것도 이 병원 앞 카페에서.

‘그럼 그때였나.’

-그래서 김정난 씨의 도움이 필요합니다.

당시엔 너무 황당하고도 당황해 그냥 카페를 박차고 나갔었다.

아무리 배인규라는 쓰레기 밑에서 일하고 있다지만, 스파이 노릇을 할 순 없었던 마음이 컸다.

그렇다면 그가 병원비를 내고 간 이유는 분명했다.

자신을 회유하기 위함이다.

정말로 이해가 되지 않는 건.

이 가정이 맞다면 병원비를 낸 직후 무슨 액션이라도 있었어야 했는데 너무나 조용했다는 것이다.

그를 본 적은커녕 문자 한 통이 없었다.

심지어는 원무과 직원에게 자신의 행동을 알리지 말라고까지 했으니······.

이건 이상해도 한참 이상했다.

‘그래. 어디 한번 이유를 들어나 보자.’

김정난은 핸드폰을 열어 한동안 봉인해뒀던 그 이름을 찾았다.

[신바드 대표]

그녀는 통화 버튼을 망설임 없이 눌렀다.

*

-네. 그럼 거기서 뵙죠.

갑작스럽게 걸려온 김정난의 전화.

그녀의 용건은 간단했다.

할 이야기가 있으니 만나자.

그리고 나는 그녀가 하고 싶은 이야기를 알 것 같았다.

김정난을 회유하기 위해 처음 병원 앞 카페에서 만나고 헤어진 날.

혹시나 해서 들어간 병원에선 병원비가 밀려있단 이야기를 듣게 됐고, 밀린 병원비는 모두 내가 냈다.

그녀를 회유하기 위한 방법은 아니었다.

그저 병원비라는 게 사람을 얼마나 옥죄고, 숨 막히게 하는지를 잘 알고 있었기 때문이다.

원무과 직원에게 비밀로 해달라고 한 것은 김정난의 자존심을 지켜주고 싶은 마음에서였다.

돈이라는 게 사람을 비참하게도 만드니까.

하지만 이렇게 알게 된 이상 어쩔 수 없겠지.

어차피 그녀를 곧 만나야 했기에 타이밍도 아주 좋았다.

나는 외투를 걸쳐 입고, 회사를 나선 뒤.

우리가 저번에 만났던 병원 앞 카페로 향했다.

카페에서 마주한 김정난은 의외로 차분하다 못해 말이 없었다.

다짜고짜 화라도 내면 어쩌나 싶었는데 다행인 건가······.

우리는 한참 동안 서로 주문한 차를 마셨고.

그러다 그녀의 입이 열렸다.

“대표님.”

“예. 말씀하세요.”

마주 앉은 김정난과 눈이 마주쳤다.

“병원비는 왜 내고 가신 거예요?”

지금부턴 뭐든 사실대로 말하는 게 가장 좋다.

나는 오늘 그녀를 내 편으로 만들어야 했으니까.

“20살 때 제 마지막 가족이었던 할머니가 돌아가셨습니다.”

김정난의 눈이 동그래졌다.

“그런데 돌아가시기 전까지 병원비 때문에 많이 힘들었어요. 20살인 제가 뭘 할 수 있었겠습니까. 매일 새벽 공사판에 나가는 게 전부였죠.

그땐 이 병원비를 내지 못하면 할머니가 돌아가시진 않을까 하는 걱정부터 왜 이렇게 살아야 하나 극단적인 생각까지 별의별 생각을 다 했습니다. 지금 생각해보면 그냥 하루하루를 버틴 것 같아요.”

나로서도 오랜만에 꺼낸 기억이었다.

“그러다가······. 할머니는 병원에서 편하게 눈을 감으셨습니다. 고통이 없는 곳으로 떠나셨겠지만, 저는 장례식 비용도 없는 현실이 너무 비참했죠.”

어렸을 적 나에게 돈은 정말로 원수 같은 존재였다.

김정난은 어느새 내 이야기에 몰입했는지 물었다.

“그럼요? 할머니는 어떻게 보내드렸어요?”

“도움을 받았습니다.”

주어가 빠진 내 대답에 그녀가 되물었다.

“네? 누구한테요?”

“병원 벤치에서 엉엉 울다가 들어갔는데 누군가 할머니 장례 비용을 모두 냈다고 하더라고요.”

“그게 누구였는데요?”

“나중에야 알게 됐는데 저희 할머니 담당 의사 선생님이셨어요. 저희 사정을 누구보다 잘 알고 계셨던 분이죠.”

김정난이 안도의 한숨을 쉬었다.

“정말로 다행이네요······.”

“예. 그분이 아니셨다면 저는 그 일이 평생의 한으로 남았을 겁니다.”

문득 그녀는 나와 사담을 나누러 이 자리에 나온 것이 아니라는 걸 의식했는지 말이 없었다.

“제멋대로 병원비를 내고 간 건 죄송합니다. 하지만 그 아픔을 아는데도 모른 척 지나갈 순 없었습니다.”

그러다 김정난이 조심스럽게 물었다.

“그러면 그때 말씀하셨던······. 제 도움이 필요해서 병원비를 내주신 게 아니라는 말씀이시네요?”

“예. 그냥 도와드리고 싶었습니다.”

한 치의 거짓도 없었다.

“하지만 그때 말씀드렸던 거처럼 저 또한 도움이 필요한 건 맞습니다.”

그녀가 아까와는 다른 부류의 한숨을 푸욱 내쉬었다.

“휴우. 대표님은 저희 회장님을 왜 그렇게도 무너뜨리려고 하시는 건데요?”

“저는 당한 만큼 갚아줘야 직성이 풀리는 성격이거든요.”

“당한 만큼 갚아줘야 한다 라······.”

뭔가 골똘히 고민하던 그녀는 정장 안주머니에서 봉투 하나를 꺼내더니 테이블 위에 턱 올려놨다.

그 봉투에는 이렇게 적혀있었다.

[辭職書]

사직서였다.

“에라! 모르겠다! 당한 만큼 갚아주려면 제가 제일일걸요?! 그럼 뭘 어떻게 도와드리면 됩니까?!”

이런 성격이었나.

어쩐지 그녀는 잡고 있던 고삐를 풀어버린 느낌이었다.

“증거가 필요합니다. 그들의 추악한 과거와 현재의 증거요.”

내 말을 들은 김정난은 팔짱을 끼고는 상체를 뒤로 젖혔다.

“허, 참! 그런 거라면 제대로 찾아오셨네요!”

약간의 장난기가 섞인 말투였으나 금세 진지한 표정으로 바뀌었다.

“그런데 저 이거 터뜨리면 이 바닥에서 더는 일 못 해요. 그러니까 대표님이 책임지셔야 합니다. 아시죠?”

다른 일자리야 내가 회사를 가지고 있는데 걱정할 일이 없었다.

“그럼요. 당연합니다. 그런데 뭘 터뜨린다는 말씀이십니까?”

김정난은 그동안 봐왔던 얼굴 중 가장 환하게 웃으면서 말했는데.

“이날을 위해 무려 8년간 모았습니다. 배인규는 물론 그와 한 번이라도 손잡은 사람들은 무사하지 못할 거예요.”

그건 판도라의 상자를 가진 자의 여유로운 미소였다.

*

『검찰, YJ E&M 압수수색, “조사에 성실히 임할 것”(종합)』

[검찰이 배인규 YJ E&M 회장의 정계 청탁 및 주가조작 제보를 받고 강제수사에 나섰다.

서울중앙지검은 29일 서울 강남구 YJ E&M 본사와 서울 영등포구 NX엔터에서 압수수색을 진행했다.

배인규 회장은 NX엔터 손두철 대표와 손을 잡고, 일명 ‘성 접대’ 의혹도 제기되고 있어 파문이 예상된다.

이에 관련 검찰은 다음 주 초 배인규 회장과 손두철 대표를 소환해 조사할 방침이다.

한편, YJ E&M 관계자는 “검찰의 압수수색이 들어온 것은 맞지만 구체적인 내용은 확인해 줄 수 없다”라며 “검찰 조사에 성실히 임하겠다”라고 설명했다.]

판도라의 상자는 열렸다.

김정난은 나와 대화를 나눈 그 바로 다음 날 가지고 있던 모든 자료를 가지고 검찰로 향했다.

아, 그전에 사직서는 던지고 왔단다.

그런데 김정난의 자료는 한번 묻힐 뻔하기도 했었다.

너무 충격적인 사건들이 많아 자칫 대한민국의 혼란을 가져올 수도 있다는 개소리를 해대면서 말이다.

당시 한주건설 황영수 회장과 하남시 시장인 박창선의 도움이 컸다.

서로 누가 먼저랄 것도 없이 인맥들을 동원했고.

다행히 대한민국에 고인물들만 있던 건 아닌지 수사가 곧 시작되었다.

김정난의 자료에는 배인규와 모종의 거래를 하고 있던 손두철까지 깊게 연결돼있어 그도 수사망을 벗어나지 못했다.

손두철을 벼르고 있던 임윤서는 <처단자 2> 촬영이 코앞이었지만.

짬짬이 시간을 내어 방송 인터뷰, 증인 출석 등 할 수 있는 모든 걸 다 하며 힘을 실어주었다.

예상했던 것보다 컸던 그들의 청탁 스케일 덕분에 정치계에도 피바람이 불고 있다는 풍문이 들려오는 중이다.

그리고······.

-저기, 혹시 서태원이라고 알고 계시죠?

최근 나는 한 남자를 수소문한 끝에 찾을 수 있었다.

-네? 서태원이요?? 아, 알죠······.

그는 고등학생 시절 서태원의 학교 폭력 피해자였다.

-옛날에 괴롭힘을 당하거나 하지 않았어요?

기억을 떠올리는 게 힘들었는지 그를 설득하는 건 꽤 오래 걸렸다.

하지만 피해자인 이 남자에게도.

전생의 내가 될지 모르는 관계자에게도.

이편이 가장 나았다.

상처는 가린다고 낫지 않으니까.

그렇게 오랜 시간 깊이 있는 대화를 나누던 중.

-네. 맞아요. 그 새끼······. 지금도 생각하면 잠이 안 옵니다.

남자는 내게 마음에 문을 열었다.

-그 서태원이 지금 배우를 하고 있다는 건 알고 있어요?

-네······. 동창들 SNS에서 봤어요.

-이대로 괜찮겠어요?

그는 단호하게 고개를 저었다.

-아니요. 잊고 싶어요. 가끔 인터넷에서 보이는 그 얼굴로도 치가 떨립니다. 어디서도 보고 싶지 않아요.

그는 복수가 하고 싶은 것이 아니었다.

그저 보고 싶지 않다.

이게 피해자의 마음인 것이다.

-저희가 도와드리겠습니다. 다시는 못 보게 해드릴게요.

그렇게 오늘 기사가 올라왔다.

『배우 서태원, ‘학폭 의혹’ 제기, 소속사 “확인 중”』

『서태원 측 학폭? 사실 아냐. “사실무근”』

『서태원, 학폭 추가 폭로. 일파만파』

전생과 똑같은 학폭 논란이 터졌지만.

그에 대한 대중들의 반응은 완전히 달랐다.

[이놈은 뭐임? 뭔 듣보잡? 어렸을 때부터 못 된 것만 배워 가지고, 너는 영구퇴출이다. 퇴출.]

[어! 얘 NX엔터 출신인데? 그 YJ 푸드 전속 모델! 엥? 말하고 보니 죄다 범죄자집단이랑 연결되네?]

[태원아. 멀리 안 나간다. 다신 보지 말자.]

서태원은 그렇게 대중들에게 외면받기 시작했고.

그 후폭풍은 그가 출연하고 있던 한 드라마로 향했다.

시청자들의 하차 요구가 빗발친 것이다.

비중이 작은 조연이었기에 눈치를 보던 방송국에선 그의 하차가 발 빠르게 이루어졌다.

내 계획이 실현되는 순간이었다.

물론 이제 막 시작했을 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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