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감독보다 영화사 대표님-130화 (130/140)

#130화. 허허벌판의 땅

함자가 두바이로 돌아가고, 여름의 열기가 식을 무렵 회사에는 많은 일이 있었다.

먼저 <왕국 : 시간의 비밀> 후반이 끝나 완성 편집본이 미국으로 날아갔고.

소피아의 연락은 이번에도 빠르게 돌아왔다.

-대표님. 저······. 잘 몰랐는데 좀비 사랑하나 봐요!! 너무 재밌어!!!

짧지만, 강한 답이었다.

그녀는 오픈 날짜를 빠르게 정해 다시 연락하겠다는 말을 전했다.

두 번째 일은 오래 기다리던 좋은 소식이 날아왔다는 것이다.

아라비안이 <기적>의 저작권 소송에서 승소했다는 아주 기쁜 소식으로 약 1년 6개월간의 긴 싸움이었다.

YJ E&M에서 <안전지대>를 막판에 많이 바꾸는 바람에 어쩌면 승소하기 어려울 수 있겠다고 생각한 적도 있었다.

우리가 표절을 주장한 부분은 <기적>과 유사한 중심 사건과 구성이었는데.

보통 이 두 가지로는 저작권 침해가 인정된 적이 거의 없었기 때문이다.

그러나 최근까지도 우리 소송의 결과를 궁금해하는 글이 근근이 인터넷에 올라오는 등 대중의 관심이 식지 않았고.

우리가 먼저 저작권 신청을 한 것이 유리하게 작용해 승소할 수 있었다고 한다.

억대의 손해배상금보다도 앞으로 영화계에 생길 표절 시비에 좋은 선례로 남은 것이다.

나는 그 소식을 듣자마자 마음고생이 가장 심했을 금현석에서 전화해 고생했다는 말을 전했다.

그러자 그는.

-저는 그냥 믿고 기다린 것밖에 없는걸요. 회사에서 다 알아서 해주셨잖아요. 정말로 감사합니다.

오히려 우리에게 고마운 마음을 전했다.

마지막으로 있었던 큰 이벤트는 <각성 신>이 프리를 마치고, 촬영에 들어갔다는 것이다.

11인의 히어로에는 대한민국에서 내놓으라 하는 배우들이 캐스팅됐고.

그중에는 한보배, 도건우, 이안도 속했다.

최근 우리 배우들이 업계에서 탑을 찍으며 강세를 이루고 있었기에 당연하다면 당연한 결과였다.

아쉽게도 아람과 임윤서는 함께 하지 못했다.

각자 <블랙 히어로즈 2>와 <처단자 2> 촬영이 있었기 때문이다.

어쨌든 대중들의 관심은 뜨거웠다.

아직 촬영도 들어가지 않은 영화인데 각종 매체에서 <각성 신>에 대한 기대감을 다뤄 모르는 사람이 없을 정도였으니까.

이제 잘 만들어서 개봉만 하면 되는 일이었다.

그리고······.

“어디 보자.”

오늘 나는 한 대형서점에서 어떤 책을 찾고 있었는데.

그 책은 얼마 지나지 않아 이달의 베스트셀러 구역에서 쉽게 찾을 수 있었다.

[기적]

표지에는 폐허가 되어 안개 낀 도시를 묵묵히 걸어 나가는 남자의 뒷모습이 그려져 있었고.

책의 아랫부분에는 ‘저자 금현석’이라고 적힌 선명한 글씨가 보였다.

집어 든 책을 주르륵 넘겨 훑어보니 언뜻 봐도 영화와는 또 다른 재미가 있어 보인다.

금현석은 소송 기간 내내 ‘기적’의 출간을 준비해왔으며 출판사는 그가 승소했다는 소식을 듣자마자 출간했다.

한 달이 지난 지금.

<기적>은 당당히 이 베스트셀러 구역을 차지한 것이다.

책을 덮고, 둘러싸인 띠지를 살펴보는데 그곳에는 이렇게 적혀있었다.

[화제의 천만 영화 <기적>의 원작! 카이스트 출신 작가가 그리는 과학과 문학의 완벽한 하모니!]

맞다.

금현석이 카이스트 졸업했지.

그럼 이쪽에서도 도움을 좀 받을 수 있겠다.

내가 요즘 가장 관심 있는 분야는 바로 로봇이었다.

두바이 로봇 전문가는 일 잘하는 아흐마드 덕분에 이미 소개받은 지 오래다.

내가 이렇게도 로봇에 집착하는 이유는 바로 테마파크 때문이었다.

테마파크와 로봇이 무슨 상관이냐.

할 수도 있겠지만.

둘은 아주 밀접한 관계에 있었다.

지금의 테마파크는 떨어지고, 흔들리고, 돌리는 아날로그 운동 에너지를 사용한 놀이기구가 대부분이다.

하지만 미래의 테마파크는 상어가 물에서 튀어나오고, 거미 인간이 놀이공원을 날아다니는 등 지금과는 확연히 달랐다.

당연히 테마파크에 실제 상어를 가져다 놓고, 인간이 복면을 쓰고 날아다닐 수는 없다.

로봇으로 스토리텔링을 접목한 것이다.

또 자동차 공장이나 산업 현장에서나 볼 수 있는 로봇 암(Robotic arm) 기술은 혁신적인 놀이기구를 탄생시킨다.

로봇 암 끝에 집게발 대신 사람이 앉을 수 있는 의자가 달리고, 사람들은 그 의자에 앉아 로봇 암이 휘적이는 대로 움직일 수 있는 것이다.

영상과 접목하면 그야말로 현실과 구분하기 힘들 정도의 놀이기구였다.

그 외에도 테마파크에서 로봇의 활용도는 상상을 초월했으니 전문가들은 꼭 필요했다.

아흐마드에게 소개받은 두바이 전문가는 이미 자말과 연결이 된 상태지만, 우리 쪽에 전문가가 또 있다면 더할 나위 없이 좋았다.

들고 있던 책은 다시 올려놓고, 비닐이 싸인 새 책을 들어 계산대로 향했다.

그리고 책을 계산한 뒤 밖으로 나가 금현석에게 전화했다.

“아, 현석 씨. 혹시 잠깐 통화 좀 가능해요?”

*

테마파크 초기 시안이 도착했다.

그들이 보내온 아라비안 랜드에는 지금까지 우리가 제작한 모든 영화가 집약되어 있었다.

<투명한 사랑>의 투명 인간을 직접 만져 볼 수 있는 체험관.

<혐오스런 라라의 일생>의 뮤지컬쇼.

<망자와 함께>를 모티브로 한 롤러코스터.

트램을 타고 <기적>에서의 지진을 직접 체험하는 스튜디오 투어 놀이기구.

<어울림>의 나오는 동물들과 동물원을 탈출하는 스토리의 VR 롤러코스터.

<처절한 인생>으로 만든 스턴트 공연.

아직 영화가 나오진 않았지만, <각성 신>의 초능력을 체험할 수 있는 다크 라이드.

퍼레이드의 끝을 장식할 화려한 불꽃놀이가 진행될 광장까지.

그 외에도 좀비의 집, 드롭 타워, 잠수함 놀이기구, 모노레일, 대관람차 등등 초기 시안은 아주 만족스러울 정도로 좋았다.

하지만 우리는 여기서 머물 생각이 없었다.

“롤러코스터는 세계에서 가장 높고, 가장 길고, 가장 빠르게 만들면 홍보에 효과가 좋을 것 같은데, 어떠세요?”

내 말에 예정우가 답했다.

“좋습니다. 세계에서 가장 무서운 놀이기구. 이런 랭킹도 있으니까요. 전달해 놓겠습니다.”

“예. 카이스트 협조 요청은 어떻게 됐습니까?”

“긍정적인 답변입니다. 아마도 체결될 것 같습니다.”

그렇게 사업팀과의 회의는 퇴근 시간까지 계속됐다.

“오늘은 여기까지 합시다.”

“넵!!”

다들 지친 얼굴이긴 했지만, 테마파크에 대한 열정은 대단했다.

“오늘 회의 내용은 정리해서 자말 팀에 빠르게 보내겠습니다.”

“예. 그럼 퇴근합시다.”

며칠 뒤.

자말 팀은 우리가 보낸 의견들을 통합해 테마파크의 구체적인 디자인 작업을 시작했다.

그리고 그 디자인은 나중에야 볼 수 있었지만, 두바이와 한국의 로봇 기술을 접목한 획기적인 디자인들이었다.

*

테마파크 사업은 초기에 이 3가지가 필수적이다.

부지 확보.

자금 조달.

지자체 협조.

보통은 부지 확보와 지자체 협조를 먼저 받는 게 상식적이지만.

나는 자금 조달을 먼저 끝마쳤다.

왜 이렇게 했느냐.

부지 확보와 지자체 협조를 같이 해결하기 위해서였다.

“처음 뵙겠습니다. 신바드입니다.”

하남시 시장은 40대 후반의 남자로 젊은 시장이었다.

그리고 꽤 호쾌한 성격의 소유자였다.

“아이고, 안녕하십니까. 박창선이라고 합니다.”

우리는 통성명한 뒤 시장실에 마주 앉아 본격적으로 이야기를 시작했다.

“이번 축제가 성공적으로 끝나서 시민들의 반응이 아주 좋습니다.”

‘K – 좀비 축제’ 유치를 위해 협조를 받긴 했으나 이렇게 직접 만난 건 처음이었다.

“다 하남시에서 도와주신 덕분이죠.”

“하하하, 저희가 뭐한 게 있나요. 아라비안에서 열심히 준비하셨으니 이런 성공을 이룩한 거죠. 그, 누구더라. 에이든 브라운? 요즘 엄청 유명한 가수라면서요. 그런 가수를 섭외하는 게 어디 쉬운 일입니까.”

넝쿨째 스스로 굴러들어온 에이든 브라운이었지만.

티는 내지 않았다.

“조금 힘들긴 했습니다. 하하.”

“그럼요! 당연한 거죠. 저희는 내년에도 물심양면으로 돕겠습니다. 필요하신 게 있다면 말만 하세요.”

그렇게 우리는 한동안 화기애애한 분위기를 유지했다.

하지만 나는 오늘 축제 이야기를 하기 위해 온 것이 아니다.

“사실 저희가 지금 테마파크 사업을 준비 중입니다.”

“예. 간략하게 보고는 받았습니다. 하남시 발전에는 다신 없을 기회가 되겠더군요. 아니, 대한민국이 달라지겠죠.”

역시 긍정적인 반응이다.

지금은 다른 지역에서도 연락이 오는 판이었으니 청탁이라도 하면 어쩌나 싶었는데 그는 적당한 선을 잘 지켰다.

“테마파크도 저희 쪽에서 적극적으로 협조하겠습니다.”

그래.

오늘은 이 말을 들으려고 이곳에 왔다.

“그럼 부탁드릴 게 있는데, 좀 드려도 되겠습니까?”

박창선은 흔쾌히 고개를 끄덕였다.

“물론이죠! 그래, 저희가 뭘 해드리면 되겠습니까?”

사실 몇십만 평의 부지를 확보한다는 것은 참으로 어려운 일이다.

테마파크가 돈이 되는 사업인 건 확실했지만.

가뜩이나 작은 땅덩어리에 어마어마한 돈이 투자되는 테마파크를 짓겠다고 선뜻 나서는 지역도 기업도 없는 것이다.

그게 지금까지 우리나라에 전 세계적으로 내세울 만한 테마파크가 없는 이유기도 하다.

더구나 이렇게도 큰 사업을 듣도 보도 못한 작은 회사가 하겠다는 말을 어느 지역에서 믿고, 반갑게 맞이하겠는가.

처음 미사리 땅 10만 평을 구입한 시점에 우리의 위치가 저랬다.

그래서 나는 생각을 바꿨다.

다 살 순 없더라도 우선 서울에서 그나마 가까운 허허벌판의 땅을 찾자.

그리고 그중에서 우리가 살 수 있는 만큼만 사자.

그런데 양상철이 가지고 온 미사리 땅은 내 조건에 완벽히 부합하는 땅이었다.

서울에서도 가까웠고, 바로 앞에 강이 흐르고 있어 경관도 아름다웠으며 가장 중요한 요소였던 넓은 면적까지.

우리가 매입한 10만 평의 땅 옆으로는 30만 평의 땅이 더 있었고.

그 땅은 하남시의 땅이었다.

“하남시에서 가지고 있는 미사리 쪽 부지 말입니다.”

“미사리 부지요?”

박창선은 예상치 못한 이야기였는지 놀라는 기색을 보였다.

“예. 30만 평 정도 되는 걸로 알고 있습니다.”

“그렇지요. 그런데 그건 왜······?”

국가에서 사용 중이거나 꼭 필요한 곳에 이용 중인 국유지는 매입이 불가하다.

하지만 일반재산으로 분류되는 땅은 매수 신청을 하면 살 수 있다.

통상적으로 공매 경쟁 입찰이 원칙이긴 하나 불가피한 경우에는 수의 계약 방식으로 진행하기도 한다.

물론 더 많은 절차가 남아있긴 하지만······.

“허허벌판이던데 거기는 왜 그렇게 두신 겁니까?”

그도 내 생각을 얼추 읽었는지 입꼬리가 올라갔다.

“아, 혹시 그 땅이 필요하십니까?”

먼저 말해주니 이다지도 좋을 수가 없다.

“예. 맞습니다.”

그러나 아직 방심하긴 일렀다.

그 넓고, 좋은 부지를 왜 개발하지 않고 놔뒀는지 이유를 아직 모른다.

그 이유가 명확해서 우리가 살 수 없다면 테마파크 부지를 다시 찾아야 하는 초유의 사태에 직면할 수도 있었기 때문이다.

하지만.

“그럼요! 당연히 드려야죠. 저는 대표님 같은 분이 나타나길 기다렸습니다. 개발을 하려고 해도 제대로 해야지 않겠습니까? 저는 아파트 이런 거 딱 질색입니다.”

조금 엉뚱한 그 대답은 내가 딱 원하는 답이었다.

그러더니 박창선이 활짝 웃으면서 내게 악수를 청했다.

“이제야 그 땅이 주인을 제대로 찾았네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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