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28화. 더 특별한 공간에서
우리는 에이든 브라운의 소속사와 깊이 있는 이야기를 나누었다.
그들은 에이든의 의사를 그대로 전달하는 것뿐이라고 했으며 그 파격적인 내용은 대충 이랬다.
나(에이든)는 아라비안에서 주최하는 ‘K – 좀비 축제’를 직접 참여해 즐기고 싶다.
하지만 안전상의 이유로 그럴 수 없다는 걸 잘 알고 있다.
그러니 무대에 서서 한국 팬들과 축제의 분위기라도 맘껏 즐기고 싶다.
돈을 위해 가는 것이 아니니 페이는 최대한 맞추겠다.
우리는 조금만 시간을 달라고 말한 뒤.
내부 회의에 들어갔다.
홍보팀장은 난감함을 드러냈다.
“처음 SNS에 올렸을 때만 해도 이렇게 진심인 줄 몰랐어요. 죄송합니다. 이럴 줄 알았으면 본격적으로 접촉해보고, 순차적으로 준비했어야 했는데.”
그의 심정도 이해가 갔고.
이미 벌어진 일의 잘잘못을 따질 생각은 없었다.
에이든 브라운 같은 초대형 가수를 섭외하려면 예산부터 책정해야 하지만, 가늠조차 되지 않는 금액일 것이다.
기업들의 협찬을 많이 받았음에도 말이다.
애초에 꿈같은 이야기였다.
그런데 지금은 그 꿈이 현실이 됐다.
세계적인 팝가수가 이렇게까지 오고 싶다는데 우리로서 마다할 이유가 없었다.
당연히 결론은 오케이였다.
“대신 야외무대 시설을 좀 정비해야겠네요.”
나는 엄청난 가수를 적당한(?) 선에서 섭외했으니 무대 예산에 돈을 더 쓸 생각이었다.
그린 애플 무대에만 장비를 맞춰놨기 때문이다.
그런데.
“대표님. 소속사 측에서 그 부분은 신경 쓰지 않아도 된다고 전달해 왔습니다. 소유하고 있는 장비들을 전용기에 실어서 오신다네요.”
하하.
역시 월드 클라쓰는 다르네.
“다행입니다. 그럼 에이든 브라운은 폐막식에 초대하는 게 좋겠네요. 홍보는 시작부터 터뜨릴 생각입니까?”
홍보팀장은 업계에서 일 잘한다고 소문나 특별히 스카웃 해 온 사람이다.
그래서 그런지 이번 상황을 매우 흥미로워했다.
“홍보 시작부터 밝히는 것보다는 적절한 타이밍에 발표하는 게 나을 것 같습니다. 에이든 브라운이라고 한다면 어차피 화제 되겠지만, 집중되면 더 좋을 것 같아서요.”
그의 안광이 번뜩였다.
어째 사람이 많아져도 우리 회사는 변하질 않는구나.
한 번 괴짜 집단은 영원한 괴짜 집단인지.
스카웃을 해와도 마찬가지다.
*
한 달 후.
“이번 시나리오도 액션이 장난 아니던데요. 감독님?”
“풉!”
앞에 앉아있던 고진주는 마시던 차를 뿜었다.
“어머, 괜찮아요?”
고진주 옆에 있던 임윤서는 티슈를 뽑아 건넸다.
“네. 괜찮습니다.”
주섬주섬 자신의 입과 테이블을 닦던 그녀는 쭈그러든 어깨로 우리에게 말했다.
“대표님, 윤서 언니. 이번에도 두 분께는 정말로 죄송합니다.”
고진주는 어느새 임윤서에게 언니라고 부르고 있었다.
둘이 술 먹다가 사적인 자리에선 언니, 동생 하기로 호칭을 정리했다고 한다.
아, 존댓말은 유지하고, 호칭만 정리한 거다.
어쨌든 그게 문제가 아니고.
우리 둘은 그런 고진주를 바라보며 씩 웃었다.
정확히 말하자면 눈만 웃고 있었다.
왜냐.
“에이, 나는 아무렇지도 않아요. 그냥 명 무감님한테 또 혹독한 훈련 6개월 정도만 받으면 되죠.”
“저도 괜찮습니다. 전작에서 비행기에 요트까지 터뜨렸는데, 폭발이 뭐 하루 이틀 일입니까. 아, 맞다. 이번에는 해외 로케가 있긴 하더라고요? 대충 때려보니 한 350억 정도밖에 안 나올 것 같던데요? 하하하.”
<처단자 2>의 완고가 나왔기 때문이다.
정 PD는 초고가 나왔을 때부터 재빠르게 예산 수립에 들어갔고.
처음 300억이었던 그 금액은 시나리오가 수정됨에 따라 1억, 5억, 10억이 추가로 붙더니 결국 350억까지 치고 올라갔다.
“죄송합니다······.”
고진주의 목소리가 쑥 들어가자 우리는 참았던 웃음을 터뜨렸다.
“농담입니다! 감독님!”
그러자 고진주의 오그라들던 어깨가 쭉 펴졌다.
“정말요?!”
“그럼요. <처단자>가 어디 그냥 보통 한국 영화입니까? 부담되셨을 텐데 이 정도 퀄리티 뽑아내신 거 정말 잘하셨습니다. 이제 연출만 한 번 더 힘내보죠.”
빈말이 아니었다.
고진주가 가지고 온 <처단자 2>는 그야말로 본편을 뛰어넘는 속편이었다.
“나 진짜 한 번 더 우리 감독님한테 반했다니까요? 어디서 그렇게 요상한 액션들을 개발해 오는 거예요? 혹시 진짜 킬러 집단에 있었던 건 아니죠?”
임윤서 말에 고진주가 당황하더니 허둥지둥거렸다.
“네? 아, 아니! 아닌데요?! 진짠데!”
임윤서는 그런 고진주가 너무 귀엽다는 듯 보고 있었다.
“칭찬이에요, 칭찬! 현장에서는 그렇게도 똑 부러지면서 밖에서는 어쩜 이렇게 다른지 몰라. 호호.”
방실거리는 우리의 표정과는 반대로 고진주 얼굴이 급격히 우울해지길래 웃음을 뚝 멈췄다.
“응? 감독님 화나셨어요?”
“어머? 정말? 기분 상했으면 미안해요······.”
그런데 그녀의 입에서 나온 말은 뜻밖이었다.
“그게 아니고······. 감사해서요. 두 분이 믿어주셔서 여기까지 올 수 있었어요.”
고진주는 잠시 감정을 추스르고.
다시 평소 모습으로 돌아왔다.
“그럼! 또 잘 만들어보겠습니다!! 윤서 언니! 이번엔 여우주연상도 추가입니다!!”
임윤서가 벌떡 일어났다.
“그래요! 나도 상 한번 받자아!!”
그래. 이래야 내 주변 사람들이지.
“예. 저도 잘 부탁드립니다.”
*
또 한 달이 지나고.
“대표님! 여깁니다!”
저 멀리서 류봉수가 손을 흔들고 있었다.
“아? 류 소장님이 여긴 어쩐 일이십니까??”
오늘은 대극장 시공이 끝나는 날이라 막바지 점검 차 미사리를 찾았다.
그런데 만나기로 약속했던 지성미와 안용덕 외에 뜬금없는 류봉수가 해맑은 얼굴로 손을 흔들고 있는 것 아니겠는가.
“성미가 어찌나 오라고 성화던지! 구경하러 왔습니다!”
옆에서 지성미가 반발했다.
“무슨 소리야? 네가 오겠다고 했잖아! 대표님한테는 직접 전해드려야 한다고-”
류봉수는 지성미의 입을 턱 막아버렸다.
“하하, 그만 떠들고, 얼른 점검부터 하자. 점검. 하하하.”
뭐지. 굉장히 수상한데.
그러나 당장 알 길은 없어 우리는 대극장을 돌아보기 시작했다.
먼저 외관부터.
전체적으로 이 대극장의 컨셉은 ‘골드’였다.
아직 우리나라에서 뮤지컬이나 연극은 특별한 날에 보는 경우가 많다.
그러니 특별한 날에 보는 공연을 더 특별한 공간에서.
라는 취지였다.
그래서 저 멀리서부터 봐도 화려하다는 생각이 들게끔 인테리어 했다.
금빛 마감재와 아치형 창문으로 유럽의 분위기를 물씬 풍기게 했고.
저녁이 되면 곳곳에 설치한 조명들이 금빛을 더 아름답게 물들일 것이다.
입구에는 대극장의 이름이 깔끔하게 적혀있었다.
[ARABIAN ARTS CENTER]
“아라비안아트센터! 대표님! 이름 한번 좋네요! 아주 여러 갈래로 뻗어나가십니다! 하하하.”
류봉수였다.
저리도 오바하는 걸 보니 확실히 이상하다.
나는 안용덕에게 슬쩍 다가가 물었다.
“혹시 무슨 일인 줄 아십니까?”
그도 고개를 절레절레 저었다.
“모르겠습니다. 아까 대표님 오시기 전부터 저렇게 하이 텐션이시더라고요?”
우리는 몇 마디를 더 나눴지만, 결국 알아내지 못한 채 아트센터 안으로 향했다.
곧바로 보이는 공간은 널찍한 티켓 부스가 돋보이는 로비.
그곳도 외관과 마찬가지로 기본적인 금색의 마감재와 커다란 샹들리에로 화려함을 추구했으나.
그 사이 무채색의 대리석을 적절히 배치해 깔끔하면서도 모던한 고급스러움을 자아냈다.
안용덕은 우리를 더 깊숙한 곳으로 안내했다.
“라운지는 이쪽입니다.”
로비와 분리된 라운지는 극 시작 전까지 조용히 쉴 수 있는 공간이다.
그렇기에 화려함보다는 릴렉스할 수 있는 공간으로 만들려고 노력했다.
역시 고급 대리석으로 마감된 내부.
테이블, 의자, 커튼, 쿠션, 심지어는 벽에 걸린 액자까지도 섬세하게 신경 쓴 모습이다.
이어서 살펴본 공연장 내부도 흠잡을 곳 없었다.
특히 설계 단계부터 돋보였던 지성미의 꼼꼼함 덕분인지 공연에 특화된 구조와 음향이 훌륭했다.
어느새 우리 무리에 스며든 설비과장이 설명을 덧붙였다.
“무대 주변 메인 스피커들과 공연장을 둘러싸는 서라운드 스피커, 또 이동형 스피커들을 비치해 극의 분위기에 따라 적재적소에 배치할 수 있도록 했습니다. 며칠 전 테스트에서 완벽한 조화를 이뤄 관객을 압도한다는 평이 있었습니다.”
그렇게 우리는 약 한 시간 동안의 아트센터 점검을 마치고, 근처 카페로 향했다.
“두 분 정말 고생 많이 하셨네요. 마음에 쏙 듭니다.”
안용덕이 환하게 웃었다.
“대표님이 이렇게도 좋아하시니 고생한 보람이 있습니다.”
지성미도 그의 말에 고개를 끄덕였다.
“운영까지 잘해보겠습니다.”
아이스 아메리카노를 쪽쪽 빨며 흐뭇하게 우리를 바라보고 있던 류봉수는 슬그머니 대화에 끼어들었다.
“이것 참. 세분이 굉장히 돈독하시네요. 하하.”
그러더니 그는 옆자리에 둔 캐주얼 백팩에서 무언가를 꺼냈다.
“그런 의미에서 두 분 이것 좀 받으시죠.”
그건 하얀색의 봉투였다.
왠지 안에 뭐가 들었는지 알 것 같다.
봉투를 주며 하는 말의 앞뒤가 자연스럽지 않을 걸 보니 확실하다.
“응? 이게 뭡니까?”
나와 달리 안용덕은 봉투를 받자마자 열었는데 화들짝 놀랐다.
“으에에에?! 두 분 그런 사이셨어요?!”
그러자 방금까지 티격태격하던 둘의 표정이 어색하게 바뀌었다.
“하하. 예. 뭐, 그렇게 됐습니다.”
“두 분께는 미리 말씀 못 드려서 죄송해요.”
역시 그건 청첩장이었다.
“죄송할 일인가요. 축하드립니다.”
아무렴 둘 나이가 있는데, 경사였다. 경사.
*
그 뒤로 우리 회사는 홍보에 박차를 가했다.
‘K – 좀비 축제’와 ‘아라비안아트센터’
TV, 모바일, 잡지, 옥외광고, 라디오, 극장 등등 할 수 있는 모든 곳에 광고했고.
홍보팀장은 대중의 관심도를 최고조로 끌어올린 다음 에이든 브라운의 내한 소식을 터뜨렸다.
『차세대 팝의 황제. 에이든 브라운 내한.』
『좀비 축제, 그린 애플에 이어 에이든 브라운까지 섭외해』
『축제의 범위를 넘어섰다. 국제행사로 번져가는 K – 좀비 축제!』
『사람들은 왜 이렇게도 좀비에 열광하는가?』
그리고 그 반응은 가히 폭발적이었다.
[이게 뭔 소립니까?? 에이든 브라운이 내한? 동명이인 아님?]
[행사 뛰러 한국 오는 팝가수 실환가.]
[그냥 행사가 아니죠! 좀비 축제를 전 세계로!!]
[무조건 간다! 7년 광클 경력을 보여주마!!]
[님들 주말이 박 터짐. 그러니까 평일이라도 가셈. 좀비 탈출 이번에 러너만 모집하는 거 보니까 이놈들 진짜 각 잡고 준비한 거임.]
[아라비안 놈들! 도대체 뭔 짓을 한 거야?! 돈쭐 한번 나볼래!!]
그리고······.
지잉-.
지잉-.
[함자]
응? 무슨 일이지?
“여보세요?”
-신바드! 나의 친구! 잘 지내고 있지??
“그럼, 잘 지내고 있지.”
-다른 게 아니고, 나 곧 한국에 갈 거야!
“뭐? 언제?”
-아마도 다음 주쯤?
갑작스러운 소식이었지만, 반가웠다.
“알겠어. 준비해 둘게.”
-아니야! 아무것도 준비할 필요 없어! 이게 굉장히 극비리에 가는 거라서 말이야. 아흐마드가 다 준비할 거야!
음, 뭔가 이상하긴 했지만,
왕세자의 내한이니 그럴 수도 있지.
“그래? 뭐, 알겠어. 그럼 조심히 와.”
내가 전화를 끊으려는 것처럼 느껴졌는지 함자의 다급한 목소리가 들려왔다.
-아! 잠깐! 친구! 아직 할 말이 더 남았어!
“할 말? 뭔데?”
들려오는 그의 목소리가 너무 작아 귀를 기울여야 했다.
-······그 축제 말이야. 혹시 표 좀 줄 수 있을까??
축제? 설마?
“좀비 축제에 오려고??”
또 한 명의 거물이 내게 표 청탁을 해 오며 내한 소식을 전해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