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26화. 완전히 얻어걸렸다
새벽녘 골목 한 귀퉁이.
그곳은 가득 찬 희뿌연 안개로 한 치 앞도 보이지 않았다.
시은(한보배), 정우(한다훈), 지유(아람)는 한껏 긴장한 채 큰 거리로 나갈 타이밍을 보고 있었다.
“총은 절대 안 돼. 소리 때문에 몰려들 거야. 그리고 앞이 잘 안 보이니까 부딪치지 않게 조심하고. 언제, 어디서 튀어나올지 몰라.”
시은(한보배)의 말에 둘은 비장한 눈빛으로 고개를 끄덕인다.
“그래. 그럼 가자.”
그들이 안개 속으로 완전히 사라지자.
뒤에서 촬영하고 있던 드론이 상공 위로 서서히 올라갔다.
Dolly out.
낮은 고도에서 높은 고도로 올라가며 피사체와 점점 멀어지는 촬영 기법.
드론은 리허설 때 입을 맞춘 곳까지 올라간 뒤 멈추었고.
그 몸체 바로 아래에는 골목이 미로처럼 어지럽게 빽빽했다.
안개 때문에 얼핏얼핏 보이는 그곳 어딘가에선 사람이 아닌 무언가의 괴기한 포효 소리가 울렸다.
키야아악!
1초.
2초.
3초.
“컷! 오케이!”
“오케이입니다!”
오케이라는 말에 스태프들은 일제히 참았던 기침을 토해냈다.
“콜록! 콜록! 쪼다통 그만! 커피콩 그만 넣어! 끝났대!!”
“헤이저도 그만이요! 꺼주세요!”
“케켁! 안 되겠다! 조명팀! 반사판 들고, 다 와봐! 연기 좀 걷자!”
그렇게 각자 들고 있던 넓적한 판들을 흔들어대자 세트장을 빼곡히 메우던 안개는 서서히 걷혔다.
초저녁부터 시작된 촬영이라 숨어있던 스태프들은 모두가 힘든 기색이 역력한 모습이었다.
그러나 오늘은 크랭크 업.
무사히 끝났다는 안도감으로 곧 모두의 얼굴엔 미소가 걸렸다.
“아유, 그래도 끝났네! 다들 고생했어요!”
“고생하셨습니다!”
<왕국 : 시간의 비밀> 촬영이 끝났다.
나는 세트장 사이를 일일이 돌아다니며 스태프들에게 인사했다.
“조명 감독님. 고생하셨습니다.”
“고생하셨어요. 그립 실장님.”
“은아 씨. 고생 많았어요.”
그러고는 마지막으로 신서영에게 다가갔다.
“감독님 고생 많으셨어요.”
“아! 대표님! 아니에요! 저보다는 배우들이랑 스탭들이 고생했죠. 그리고 어제는 정말 죄송했습니다.”
“아닙니다. 영화에 꼭 필요한 거면 당연히 해야죠.”
이게 무슨 말인가 하면······.
사건의 발단은 어제 내가 사무실 회의실을 지나가면서 시작되었다.
회의실 안에선 어딘가 급박한 목소리들이 오고 갔고, 나는 무슨 일인가 싶어 귀를 기울였다.
목소리로 추정하기에 그들은 신서영과 차 PD였다.
-예? 안개 미로 장면을 추가로요? 그것도 드론이 필요하시다고요?
-네. 갑작스럽게 말씀드려서 너무 죄송합니다. 안개 미로 장면을 높은 곳에서 직 부감으로 담고 싶은데 그게 드론으론 촬영할 수 있을 것 같아서요.
회귀 직전에야 어느 분야든 드론이 상용화되고 있었지만, 이 시기엔 그렇지 않았다.
촬영 현장에서조차 생소했는데, 그 문제는 잘 알려지지 않았다기보단 비용 문제가 컸다.
-그렇다고 해도 촬영이 당장 내일이라 와줄 업체가 있을지 모르겠습니다. 또 그 분량이면 아람 씨도 불러야 하는데······.
-아람 씨는 제가 연락드릴게요. 회차가 더 남았으면 모르는데, 저희 내일이 마지막이잖아요. 이렇게 말씀이라도 드려보지 않으면 후회할 것 같아서요.
신서영의 말은 얼핏 막무가내처럼 들릴 수도 있었으나 일리가 있었다.
안개 미로 장면과 내일 분량은 촬영 장소가 같다.
그러니 드론과 아람만 부르면 크랭크 업 후에 추가 촬영으로 회차가 늘어나는 것보다 예산이 훨씬 적게 든다.
물론 작품을 위해 꼭 필요한 장면이라는 전제하에 말하는 거다.
회의실 안은 잠시 정적이 흘렀고.
이내 그 판단을 마쳤는지 차 PD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어떻게든 내일 올 수 있는 업체로 찾아보겠습니다. 그런데 시간이 너무 촉박해서······. 불가능할 수도 있다는 건 감안해 주셔야 할 것 같아요.
-그럼요. 해보고도 안되는 걸 어거지로 떼쓸 생각은 없습니다.
거기까지 들은 나는 문을 똑똑 두드린 다음 안으로 들어갔다.
-저기······. 죄송합니다. 지나가다가 두 분 하시는 이야기를 들었는데요.
-대표님?
이제 내가 이런 것까지 신경 쓸 짬은 아니지만, 그래도 들은 걸 어떻게 하겠는가.
그것도 내가 금방이면 해결해 줄 수 있는 일을.
-제가 아는 드론 업체가 있습니다. 거기 연락해보세요. 차 PD님.
전생에서 계속 일해왔던 드론 업체(-그들은 나를 모를 테지만)가 다행히도 촬영에 흔쾌히 응해줬고.
아람도 한마디 불만 없이 와주었다.
그 덕분에 오늘의 마지막 장면을 이렇게 촬영할 수 있었던 것이다.
“어휴. 속이 다 시원해요. 진짜 안 찍었으면 평생 두고두고 응어리 맺혔을 것 같아요.”
신서영의 다소 격한 반응을 끝으로 <왕국 : 시간의 비밀>은 후반에 들어갔고.
얼떨결에 크랭크 업을 함께 한 아람은 일주일 후 바로 미국으로 날아갔다.
<블랙 히어로즈 2> 촬영이 시작됐기 때문이다.
*
어느새 길거리에 꽃들이 피어나고, 사람들의 옷이 얇아지기 시작한 어느 날.
나는 사무실에서 누군가와 통화 중이었다.
“여보세요? 소피아. 잘 지내고 있습니까?”
-그럼요! 대표님!
“촬영은 무사히 잘 끝났습니다.”
그러자 소피아가 살풋 웃었다.
-그거야 너무 잘 알고 있죠. 차 PD님이 얼마나 꼬박꼬박 연락해 주시는데요. 아, 그리고 이번에도 저희 기대 많이 하고 있어도 되는 거죠?!
지난해 컴플릭스 쪽에서 낸 대외비 수익 통계를 얼핏 들었는데.
<왕국 : 역병의 시작>으로 전 세계 가입자 수를 꽤 많이 유치했다고 한다.
그러니 당연히 그 시즌 2에 대한 기대가 클 수밖에 없을 테지.
-아, 그런데 제가 이런 말 했다는 건 신서영 감독님께 절대 전하지 마세요! 원래도 잘하시는 분이니 괜한 부담감은 드리고 싶지 않으니까요!
그래서인지 컴플릭스는 부쩍 우리를 배려하고, 신경 썼다.
“그건 걱정하지 마세요. 기대는 하셔도 되고요.”
-우와. 역시 대표님! 과연 오스카 작품상 받은 제작자는 다르다니까요!!
아차.
오스카 이야기가 나오면 소피아의 수다는 1시간이 기본이다.
얼른 다른 소재를 꺼내야겠다.
싶던 찰나.
마침 묻고 싶던 게 떠올랐다.
“소피아 혹시 지인 중에 테마파크 디자이너 있어요?”
-응? 테마파크요?
그녀에겐 뜬금없는 질문이었을 거다.
“예. 저희가 한국에서 테마파크 사업을 하려고 하는데 아직 디자이너를 찾지 못해서요.”
그런데 나는 더 뜻밖의 답변을 받았다.
-오?! 그럼 진작 말씀하시지! 보스의 동생이 유명한 테마파크 디자이너예요! 듣기로는 그 분야 최고 실력자라고 하던데요? 물론 보스의 일방적인 말이긴 하지만요. 한번 물어볼까요??
완전히 얻어걸렸다.
“그럼 너무 고맙죠! 최대한 빨리 가능할까요?”
*
며칠 기다려야 할 줄 알았던 소피아의 연락은 하루 만에 다시 왔다.
또 하루가 지났을 때 나는 예정우와 미국으로 가는 비행기에 앉아 있었다.
“하하. 일사천리네요.”
소피아의 보스 다넬은 이야기를 듣자마자 자신의 동생에게 연락했다고 한다.
그리고 그 답변을 듣기 전.
소피아에게서 전해 들은 다넬 동생의 이름을 사업팀에 물었는데.
-예? 자말 해리스요?
사업팀장이 깜짝 놀라길래 무슨 일인가 싶었다.
-팀으로 활동하시는 분인데 연만 닿는다면 무조건 데려와야 하는 분입니다. 세계 테마파크 중 자말 해리스의 손이 닿지 않은 곳이 없을 거예요.
다넬의 동생은 생각보다 더 거물이었다.
-저희도 계속 접촉했는데 거절 답변만 받았어요. 주변에 물어보니까 그 팀이 몸값도 몸값이지만, 얼마나 인기가 많은지 향후 3년은 일정이 꽉 차 있다고 하더라고요.
그러면서 사업팀장은 마치 초능력자라도 보는 듯 날 쳐다봤다.
-와, 그런데 대표님은 정말 인맥이 없는 분야가 없으시네요?!
음, 다 운이긴 한데······.
그냥 그렇다고 해뒀다.
하여튼 우리는 장거리 비행을 마치고, 약속한 장소까지 택시로 이동했다.
그곳은 카페처럼 생긴 곳이었는데 자말 일행 외에는 아무도 없었다.
우리가 들어서자 자말로 보이는 흑인 남성이 반갑게 맞았고.
그의 옆에서 뭔가를 보고하던 사람들은 각자 테이블로 흩어져 업무를 보기 시작했다.
카페가 아니라 그렇게 꾸며놓은 사무실인가 보다.
“처음 뵙겠습니다.”
자말은 190이 족히 넘어 보이는 큰 키의 남자로 캐주얼한 코트를 입고 있었다.
다넬과는 또 다른 분위기였는데.
음, 한마디로 그는 피곤해 보였다.
“반갑습니다. 자말입니다. 앉으시죠.”
자리에 앉자 그가 먼저 입을 열었다.
“찾아보니 비행시간이 꽤 길던데, 보시다시피 제가 자리를 비울 수 없는 상황이라서요. 여기까지 와주셔서 감사합니다.”
거물치고는 겸손한 면이 있네.
“아닙니다. 바쁘다고 들었습니다. 이렇게 만나주신 것만으로도 저희가 감사하죠.”
그러자 자말이 힘없이 웃었다.
“그렇게 생각해 주시니 감사합니다.”
인사를 마친 뒤.
우리는 구체적인 의뢰를 설명하기 시작했다.
“먼저 저희 영화사에서 제작한 영화를 보셨을지 모르겠습니다만, 영화와 접목해서 공연, 롤러코스터, 체험관-”
이야기가 진행될수록 자말의 힘없던 눈빛이 살아나고 있었다.
몇 분간의 설명이 끝나고······.
“대략적인 저희 구상은 이렇습니다. 디자인을 맡아주실 수 있으십니까?”
그런데 살펴본 그의 표정은 어딘가 불편해 보였다.
뭐지?
마음에 안 드는 게 있었나 싶던 순간.
“전에 저희한테 의뢰하신 적이 있으시다고요?”
예정우가 그 물음에 답했다.
“예. 사업부에서 연락을 드렸습니다. 그런데 도저히 일정이 빡빡해 받을 수 없으시다고······.”
자말은 손을 들어 이마를 짚었다.
“이런, 하마터면 저희가 기회를 놓칠 뻔했네요. 사실 저는 아라비안필름에서 제작한 영화를 전부 봤습니다. ‘좀비 탈출’ 행사도 알고 있어요. 저 또한 너무 가보고 싶은 곳 중 하나입니다.”
응? 그럼 우리를 알고 있었다는 건데······.
“일정이 빡빡한 건 맞습니다. 그래서 어디에서 의뢰가 오던 거절하라고 했거든요. 그런데 아라비안필름에서 왔을 줄이야.”
그러더니 그는 주변에 대기하고 있던 한 직원에게 귓속말로 뭔가를 지시한 뒤 말을 이었다.
“이거, 다넬한테 고마워해야겠네요. 일전의 무례는 죄송합니다. 의뢰는 받을게요. 그리고 지금까지의 노하우를 총동원해 최고의 디자인으로 보여드리겠습니다.”
화끈한 의뢰 수락이었다.
“정말입니까? 감사합니다.”
우리가 활짝 웃으며 좋아하자 그가 덧붙였다.
“아닙니다. 당신들과 일하게 된 저희가 영광이죠.”
그때 자말이 귓속말했던 직원이 종이 뭉치들을 가지고 나타났다.
“계약서입니다. 오신 김에 검토하고 가시죠.”
의외로 스피드한 구석이 있네.
마음에 든다.
자말은 또 뭔가 좋은 생각이 났는지 우리에게 제안했다.
“아, 그럴 게 아니고, 오늘 저녁이라도 같이하는 건 어떠신가요? 제가 형도 부르죠.”
어차피 오늘은 자고 갈 예정이었으니 그럴까 싶어 고개를 끄덕이려는 찰나.
“아니다! 저희 집으로 가시죠! 부모님이 근처에 사시는데 좋아하실 겁니다!”
응? 그건 조금······.
“그럴까요?!”
예정우의 답변이었다.
뭐, 앞으로 계속 함께할 사람들과 친해져서 안 좋을 건 없겠지.
나까지 고개를 끄덕이자 자말은 자신의 부모님과 형에게 연락을 돌리기 시작했고.
약 2시간 뒤 우리는 행복해하는 해리스 가족 사이에 앉아 밥을 먹고 있었다.
이날은 놀라운 친화력의 예정우가 해리스 가의 세 번째 아들과도 같아진 날이자.
나 또한 그들과 특별해지는 계기가 되는 날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