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감독보다 영화사 대표님-125화 (125/140)

#125화. 대표님의 꿈

오스카의 기쁨을 한껏 만끽하고, 한국으로 돌아온 우리에겐 수많은 연락이 쏟아졌다.

각종 신문사 인터뷰와 방송국 섭외 요청, 기업들의 광고 제의까지.

하지만 우리는 그 연락을 잠시 내려놓았다.

고생에는 보상과 보람이 따라야 한다.

그래야 또 힘을 낼 수 있는 원동력이 생기니까.

그래서 나는 (주)아라비안의 모든 직원과 <처단자>에 참여했던 스태프들에게 150% 상여금 지급을 지시했고.

참여 스태프들과는 3박 4일간의 발리 여행을 빠르게 추진했다.

많은 지출이 있었지만.

오스카 작품상 수상을 그냥 지나칠 순 없었다.

또 회사의 경사였으니 영화를 참여한 사람들 외에 아라비안 전 직원들과 그 기쁨을 나누고 싶었다.

발리 여행은 정말로 눈 깜짝할 새에 끝났다.

출발할 때부터 일 이야기는 서로 하지 말자고 다짐하며 우리는 진짜 놀기만 했다.

서핑도 하고, 음식도 먹고, 수영도 하고.

얼굴이 좀 많이 탔다 싶었을 땐 한국이었다.

그렇다고 발리에서 수확이 아예 없었던 건 아니다.

호텔 수영장 썬배드에 누워서 지는 석양을 보고 있던 나에게 고진주가 말을 걸어왔다.

-대표님. 저, 한국 가면 집필 시작하려구요.

-응? 조금 안 쉬시고, 바로요?

-네.

그렇다면 나는 궁금했다.

과연 칸과 아카데미가 선택한 감독의 차기작은 무엇일까.

-어떤 건지 여쭤봐도 돼요?

그러자 고진주의 눈빛은 이상해졌다.

-네? 당연히 차기작은 <처단자 2>를 원하시는 거 아니셨어요??

-응? 당연히는 아니죠. 그걸 뭐 강요할 수 있나요.

그러면서 그녀는 ‘자신이 졌다’라는 식의 한숨을 푸욱 내쉬었다.

-대표님은 정말 못 당하겠네요. <처단자>가 이렇게도 잘 됐으니 틀림없이 은근한 압박을 주실 줄 알았는데······.

뭐, 그녀가 차기작으로 알아서 속편을 만들어준다면 우리야 좋다.

애초에 <처단자> 마지막에 속편을 암시하는 장치가 있었고.

분명 돈이 될 테니까.

하지만 본편만 한 속편은 없다고.

이건 양날의 검이 될 수 있었다.

너무도 많은 관심과 찬사를 받은 지금은 <처단자> 속편의 기대가 대단히 컸다.

그러니 시간을 천천히 가지고 만들어가더라도 영화의 완성도가 무엇보다 중요했다.

그 완성도는 시나리오부터 시작되는 것이었기에 나는 그녀에게 부담을 주고 싶지 않았다.

힘이 가득 들어간 시나리오만큼 빨리 망하는 지름길은 없으니까.

무엇보다 이건 지금껏 잘 쌓아온 그녀의 영화 인생도 달린 문제였기에 신중해야 했다.

-저는 감독님이 하고 싶은 다른 이야기 있으면 그거 먼저 제작해도 괜찮습니다.

내가 담담하게 말하자 고진주가 중얼거렸다.

-내가 하고 싶은 이야기라······.

그리곤 선배드에서 벌떡 일어나더니 외쳤다.

-당연히 <처단자> 이야기를 마무리해야죠!

그녀는 주먹을 불끈 쥐고 서 있었는데, 그 바로 뒤로 보이는 주황빛의 동그란 해가 그녀 손에 닿을락 말락 하고 있었다.

-이미 초고도 거의 다 썼어요! 대표님의 꿈, 제가 다시 한번 이뤄드리겠습니다!

응? 내 꿈?

-<처단자 2>로 다시 한번 아카데미에 갑시다아!!

그 모습은 또 잔다르크 같았는데, 주변 썬배드를 차지하고, 누워있던 스태프들이 병사처럼 일어났다.

-가즈아아!!!

*

고진주는 다시 사무실 전용 골방에 박혀 <처단자 2>를 집필했고.

나경이 기획했던 <각성 신>의 프리는 시작되었다.

프리를 시작하기 전 약간의 문제가 있긴 했는데.

감독이 독립영화조차 찍어 본 적 없는 생초짜였다는 것이다.

그러나 우리에겐 이런 경우가 처음이 아니다.

물론 각본으로만 그의 이름을 올릴 수도 있었으나 나는 그런 경우를 별로 좋아하지 않았다.

글을 쓴 사람이 직접 연출해야 영화의 원래 본질을 잘 표현할 수 있다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그래서 <각성 신> 감독에게 먼저 공동연출 참여 의사를 물었고.

그는 다행히도 제안을 흔쾌히 수락했다.

다음으론 공동연출을 맡아 줄 베테랑 감독을 찾았는데 내가 생각한 그 적임자는 바로 노흥기.

신서영이 이 자리까지 올라올 수 있게 가장 큰 공을 세웠던 그다.

또 촬영은 리암(-지속적인 구애가 있었다.)이 맡아주기로 했으니 노흥기가 안성맞춤이었다.

상황을 조심스레 알리자 그는 잠시 고민에 빠졌다가 답했다.

-잘하는 신인들이 계속 나와줘야 우리도 공생할 수 있습니다. 그래야 이 판이 고이지 않아요. 그리고 신 대표. 내가 누누이 말하지 않았습니까. 나는 재미만 있으면 된다고요.

이렇게 노흥기와 리암의 재회는 한동안 영화판을 다시 들썩이게 만들었다.

그 덕분에 우리는 지금까지 영화를 제작하면서 배우 섭외에 가장 공들일 필요가 없었다.

그렇게도 콧대 높던 대한민국의 대표 배우들이 앞다투어 우리 작품에 출연하기 위해 온갖 방법을 사용했고.

그 러브콜은 한동안 끊이지 않았기 때문이다.

*

“어서 오세요. 대표님.”

“예. 팀장님. 잘 지내셨어요?”

안용덕 팀장을 한주건설에서 만나는 건 오랜만이었다.

그는 한 회의실로 우리를 안내했다.

“시상식은 생방으로 봤습니다. 정말 축하드려요.”

“다 주변 분들 덕분이죠.”

“대표님이 덕을 잘 쌓으셔서 돌려받으신 겁니다. 소감도 정말 화제 됐었잖아요?”

오스카상을 또 받으러 오겠다는 내 패기 넘기는 소감 영상은 아직도 짤로 돌고 있었다.

“혹시 입 밖으로 내뱉으면 정말로 이루어지지 않을까 싶어서 질러버렸습니다. 하하.”

멋쩍음의 웃음을 짓자 그가 활짝 웃었다.

“상남자라는 긍정적인 반응이 대부분이던데요?”

“지키려면 또 열심히 해야죠.”

그렇게 우리는 회의실에 도착했고.

안용덕이 문을 열었다.

그곳엔 한주건설 직원들이 주르륵 앉아 있었고.

나를 포함한 우리 쪽 직원들이 들어서자 모두가 일어나 허리까지 숙이며 인사했다.

이건 좀 부담스러운데.

내 반응을 눈치챈 안용덕이 나를 얼른 자리로 안내했다.

“이쪽으로 앉으시죠. 대표님.”

자리에 앉자 그들의 브리핑이 시작되었다.

성공적인 테마파크 완공을 위한 첫 미팅 자리에서.

우리가 테마파크 시공사를 선택할 때 가장 중요하게 생각한 건,

얼마나 유연한 사고를 하는 기업인가.

이거였다.

테마파크라고 한다면 당연히 지금껏 지어지지 않은 건물들을 짓는 것이고, 새로운 기법을 동원해야 할 일도 많았다.

그러니 디자이너와의 의견 충돌 없이 그 디자인을 현실적으로 가장 가깝게 구현하려고 끊임없이 고뇌하는.

그런 사람들이 모인 시공사와 손을 잡는 것이 유리했다.

그리고 내가 알고 있는 한주건설은 그 조건에 딱 부합한 기업이다.

지금까지 같이 일하면서 항상 우리의 요구를 어떻게든 들어주려 고민하고, 노력했던 사람들이니까.

그래서 초창기보다 현재 많이 성장한 모습에 그들과 계약했다.

“현재 메인 설계팀은 각국의 테마파크 담당자들과 미팅 중으로 그들이 실제 운영 후 생각하는 장단점들을 정리해 저희 쪽에 접목할 예정입니다.”

언뜻 생각해보자면 경쟁 테마파크에서 왜 우리에게 그런 도움을 주는지 이해하기 힘들 수도 있다.

그러나 이 모든 배후엔 함자가 있었다.

그의 파워는 생각보다 뻗치지 않은 곳이 없을 정도로 거대했다.

“또 그때 말씀하신 호텔과 직원 사무실, 기숙사 등은-”

테마파크는 딱 그것 하나만 짓는다고 해서 끝나는 게 아니었다.

세계적인 테마파크로 발돋움한다면 당연히 외국인 관광객들이 많기에 그들이 근접한 곳에 묵을 수 있는 숙소가 필요했고.

채용될 직원들의 사무실, 휴게실, 기숙사 등이 필요했다.

아직 디자이너 섭외를 못 한 상황이었기에 우리는 그 부가적인 건물들의 설계부터 시작하기로 했다.

“다음으론 지자체에 요청할 협조 사항입니다. 현재 저희 쪽에서 계속 미팅 중이며-”

한주건설 직원들과의 열정적인 회의는 약 2시간에 걸쳐 진행됐고.

오늘 회의를 통해 얼추 큰 틀이 잡히는 듯했다.

“오늘 더 정확히 알게 됐습니다. 역시 한주건설이네요. 앞으로도 잘 부탁드립니다.”

내 말에 안용덕이 믿음직스러운 얼굴로 입을 열었다.

“열심히 하겠습니다. 대표님.”

그런데 그때.

회의실 문이 벌컥 열렸다.

그곳에는 동그란 안경을 쓴 후덕한 풍채의 중년남성이 서 있었다.

머리 색과 옷만 달랐지.

마치 한 햄버거 프랜차이즈 매장 앞에 서 있는 할아버지 동상과 비슷한 분위기의 남성이었다.

“아이고, 이거 회의가 다 끝났다는 연락을 받고 급하게 내려온 건데, 아직 안 끝난 겁니까?”

안용덕을 포함한 한주건설 직원들이 다급하게 답했다.

“아, 아닙니다! 회장님! 회의는 지금 막 끝났습니다!!”

응? 회장님?

우리 쪽 직원들의 눈이 동그랗게 변하자 그가 말했다.

“다행입니다. 신바드 대표님. 처음 뵙겠습니다. 황영수라고 합니다.”

그는 한주건설 회장 황영수였다.

잠시 후.

나와 황영수는 그의 방에 마주 앉아 차를 마시고 있었다.

“제가 너무 늦게 인사드렸습니다. 죄송합니다.”

그가 대뜸 사과하길래 손을 내저었다.

“아닙니다. 건설회사가 건물만 잘 지어주면 된 거죠.”

내 말에도 그는 미안함을 보였다.

“안 팀장이 잘하고 있는데 괜히 제가 나서면 부담스러워하실 것 같았습니다.”

그렇긴 하다.

지금까지 의뢰한 건물들의 예산이 적은 건 아니었으나 더 큰돈들이 오가는 건설 시장 관점으로 봤을 땐 또 그렇게까지 크다고 볼 순 없었다.

아마 처음부터 황영수가 직접 나서 우리를 케어했다면 그 말대로 내가 부담스러웠을 것이다.

“매번 저희와 프로젝트를 진행해주셔서 정말 감사하게 생각하고 있었습니다. 제가 원래 입바른 소리를 못 하는 편입니다. 사업가로는 영 꽝인 성격이죠.”

그는 웃으면 눈이 없어지는 스타일이었다.

“그러니 제가 지금부터 하는 말이 진심이라는 걸 꼭 알아주셨으면 합니다.”

무슨 이야기를 하려고 이렇게 분위기를 잡는 것일까.

“알겠습니다.”

“사실 처음 아라비안필름에서 의뢰를 받았을 적에 한주건설 사정이 좀 많이 어려웠습니다.”

그런 사정이 있었구나.

어느새 로비, 뒷돈, 리베이트 등을 하지 않으면 살아남지 못하는 세상이 되었다.

“그러니 대표님은 저희의 은인인 셈이죠. 제가 드리고 싶은 말은 이제 저희와의 관계를 그저 비즈니스로만 생각하지 않으셨으면 한다는 겁니다. 혹시나 업무 외적으로도 저희가 도와드릴 수 있는 일은 물심양면으로 돕겠습니다.”

“예? 아니, 뭐 그렇게까지는······.”

그는 줄곧 고민하다 꺼낸 말이겠지만, 나로서는 조금 갑작스러운 느낌이었다.

하지만.

문득 한 생각이 머리에 떠오름과 동시에 황영수의 말이 들려왔다.

“제가 지금까지 살면서 정말로 확실한 것 한 가지는 잘 알고 있습니다.”

“그게 뭡니까?”

“하늘 높이 있더라도 언제 고꾸라질지 모르고, 보잘것없어 보일지라도 언제 상황이 반전될지 모른다는 겁니다.”

그래. 인생은 아무도 모른다.

황영수가 이 말을 꺼낸 이유는 현재 영화판을 흔들다 못해 탈탈 털고 있는 우리에게도 위기는 언제든 찾아올지 모르는 일이고.

그 위기가 혹여나 오게 된다면 함께 하겠다는 뜻이다.

정상이 아닌 나락을 같이 하겠단 말이 진심으로 와닿았다.

“알겠습니다. 친구가 생긴 것 같아 든든하네요. 앞으로도 잘 부탁드립니다.”

황영수의 눈이 다시금 사라졌고, 나는 그가 내민 손을 붙잡았다.

마침 사건을 터뜨려 마무리해야 할 시기가 다가오고 있다.

그리고 지금 내 주변은 전생과 완전히 다른 모습이다.

내게 힘이 되어 줄 사람들로 넘쳐나는 중이었으니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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