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24화. 왠지 낚인 거 같은데
오스카.
미국 최고의 영화 시상식이자 전 세계에서 주목하는 시상식.
흔히들 알고 있는 이 시상식의 또 다른 이름은 미국 아카데미 시상식이다.
미국의 영화 예술 및 과학 아카데미에서 시상하기에 ‘아카데미’라고도 불렸으며 여러 가지 설이 있었지만, 트로피인 황금상의 별명이 오스카라서 ‘오스카’라고도 불린다.
내놓으라 하는 영화들과 경쟁해야 했기에 노미(후보 등록) 되는 것조차 철저한 계산 하에 행해지는 경우가 많았다.
수상을 위해 관련 행사 및 파티 참여, 투표권자에게 자료 및 선물 보내기, 영화계 잡지 홍보, 대중 여론 형성을 위한 뉴스, 토크쇼에 출연하는 등.
영화사, 배급사, 배우들은 오래는 1년까지도 공을 들인다.
이런 행위들을 오스카 레이스, 오스카 프로모(홍보)라고 칭했다.
정말로 이상한 건 방금 말한 요건 중 우리가 실행한 것은 아무것도 없다는 사실이다.
그런데 작품상 후보에 올랐단다.
이렇게는 생각할 수 있었다.
오스카는 매년 2월 마지막 주에 개최되며 그 전해에 개봉한 영화 중 후보들을 선정한다.
그렇다 보니 당연히 3대 영화제에서 수상하는 작품들은 오스카 수상의 기대를 걸어볼 만했다.
<처단자>는 칸에서 두 부문이나 수상해서 후보에 올려준 건가······.
이 현상은 이렇게밖에 추측할 수 없었다.
오스카 시상식은 기밀 유지를 위해 수상 당일에도 트로피에 수상자 이름을 새기지 않는 걸로 유명했다.
그런 단체의 속을 내가 어떻게 알겠는가.
다만, 저절로 굴러온 기회를 놓칠 순 없었다.
우리가 할 일은 지금이라도 홍보를 시작하는 것이었다.
그렇게 <처단자>의 제작사, 배급사, 감독, 배우들을 데리고, 급하게 미국으로 날아갔을 땐.
시상식까지 고작 한 달 반의 시간이 남은 시점이었다.
다행히도 다양한 매체에서 우리에게 관심을 보였고.
각종 행사와 파티, 잡지 화보, 인터뷰, 방송 출연 등의 스케줄을 잡아 쉴 틈 없이 소화했다.
모두의 생각은 이러했다.
이미 <처단자>로 우리나라 영화계 역사를 바꿔놓은 우리였으나 어쩌면 한 번 더 획을 그을지도 모른다고.
그런 생각으로 바쁜 나날들을 견뎌냈다.
드디어 시상식 하루 전날.
우리는 수상의 걱정과 기대는 잠시 내려놓고, 모두 모여 조촐한 식사를 하기로 했다.
그래도 좋은 걸 먹여야겠다 싶어 묵고 있던 호텔 스카이라운지에서 각자 먹고 싶은 것들을 다 주문하라고 했다.
임윤서는 와인부터 한 모금 홀짝이더니 내게 말했다.
“대표님 고생 많으셨어요.”
“윤서 씨도 고생 많았어요.”
“저는 그냥 따라다니기만 했는데요. 스탭분들이 고생 많으셨죠.”
직원들이 고생을 많이 하긴 했다.
초반 스케줄은 여기저기 발품 팔며 잡아야 했고, 시간이 촉박했으니 준비할 것들은 상상을 초월하는 수준이었다.
옆에서 임윤서의 말을 듣고 있던 예정우가 끼어들었다.
“보너스라도 주시겠죠. 하하!”
“보너스뿐만입니까. 수상하면 휴가까지 가야죠.”
재빠른 내 대답에 그는 옆에 있던 고진주의 어깨를 톡톡 쳤다.
“감독님. 들으셨죠?! 단체로 휴가 한번 갑시다! 맨날 드라마 팀 동남아로 휴가 간다고 해대서 배 아팠는데.”
고진주는 의외로 차분하고 평온했다.
“그럼 너무 좋죠.”
미국에 온 뒤로 줄곧 이런 미지근한 반응이길래 처음엔 이상하다고 생각했다.
그러다 어느 순간 깨달았다.
지금 고진주는 <처단자>가 수상하리라는 생각 자체가 아예 없다는 것을.
후보에 올라온 것만으로도 만족하는 거다.
이해는 했다.
그녀에게 <처단자>는 무려 입봉작이었으니 말이다.
“그런데 대표님. 수상소감은 준비하셨어요?”
다시 임윤서의 물음이었다.
오스카 시상식의 작품상이 우리에게 더 의미 있는 이유는 그녀의 물음에 담겨있었다.
시상하는 상 중 최고의 상으로 꼽히기도 했으나.
작품상은 감독이나 배우에게 수여되는 것이 아니라 영화의 제작자에게 주어진다.
말 그대로 영화를 제작한 스태프들에게 돌아가는 상이었다.
모두에게 줄 순 없으니 상은 그들의 수장이라 할 수 있는 제작자가 받는 것이고, 당연히 그 제작자가 소감까지 말해야 했다.
즉, 내일 만약 수상하게 된다면 내가 마이크를 잡아야 한다는 말이다.
“짧게 준비했습니다. 감독님 소감도 들어야죠.”
그러자 가만히 있던 고진주가 화들짝 놀랐다.
“네에?! 제가요?! 저는 한 글자도 준비 안 했는데요?!”
방금 의자에서 점프한 것 같은데.
너무 놀라는 거 아니냐.
“왜요? 감독님은 한마디 하셔야죠. 칸에 이어서 오스카의 주인공이신데.”
그녀의 목소리는 단호하게 변했다.
“에이! 그건 아니죠! 오스카 작품상은 우리 모두에게 주어지는 상이고, 저희를 이끈 대표님이 주인공이 되는 거예요!”
아니라고 하기에는 그녀 손에 들린 포크가 위협적이어서 고개를 끄덕였다.
“알겠어요. 감독님도 참. 하하.”
포크를 내려놓는 고진주를 보자 안도의 웃음이 나왔다.
“그러니까 내일 정말 만에 하나라도 수상하면 대표님 혼자 시간 다 쓰세요. 아셨죠?! 평소에 고마웠던 사람들이나 하고 싶던 말 있으실 거 아니에요.”
그러자 임윤서까지 고진주의 말을 거들었다.
“이건 감독님 말이 맞죠. 오스카 작품상 수상은 일생에 정말 단 한 번의 순간일 수도 있는데.”
그렇긴 하다.
나는 고개를 끄덕이며 수긍하다 흠칫했다.
왠지 낚인 거 같은데.
그러나 이미 늦은 뒤였다.
*
미국 로스앤젤레스 돌비 극장.
3,400석 규모의 이 공연장 내부는 화려하게 꾸며진 시상식장보다 더 눈부신 영화인들로 가득 찼다.
천장 높이가 26m에 다다르는 그곳은 레드와 골드로 적절하게 꾸며져 시상식 분위기와 정말 잘 맞는 공간이었다.
우리는 안내에 따라 <처단자>가 배정받은 좌석으로 향했고.
그곳으로 향하는 도중 반가운 얼굴을 마주할 수 있었다.
“신 대표님!”
너무 쫙 빼입은 모습이라 못 알아볼 뻔했다.
그는 인사동 도자기와 한우를 그렇게도 좋아하던 리암 스미스였다.
“리암?! 잘 지냈어요??”
나를 보고 반가워하던 얼굴도 잠시.
“아니요. 미국에 오니 한국 생각이 너무 나서 잘 지낼 수가 없어요!”
그의 표정은 마치 타향살이라도 하는 듯했다.
“맞다! 지금 그게 문제가 아니잖아요?! 작품상 후보라니! 너무 축하드립니다!!”
오스카 시상식 후보에 오른 순간부터 축하 인사는 곳곳에서 정말 많이도 받았다.
초반에는 전화기가 마비될 정도였지만.
축하는 받아도 받아도 기분이 좋다.
“후보도 너무 영광이죠. 축하해줘서 고마워요.”
그는 얼굴을 가까이 들이밀며 조용히 속삭였다.
“이건 제 예상인데, 수상도 기대해 볼 만합니다. 작년 <처단자> 인기가 이쪽에서 얼마나 대단했는데요. 안 주는 게 이상할 정도예요.”
당연히 나도 그랬으면 좋겠지만,
그 기쁨은 수상하고 나서 만끽해도 늦지 않았다.
괜히 멋쩍게 웃어 보이다가 문득 괜찮은 생각이 떠올랐다.
“아, 맞다. 혹시 작품 들어가는 거 뭐 있습니까?”
“작품이요? 요즘도 제작사 대표들이 줄곧 따라다니기는 하는데, 몇 달은 쉬려고요. 할리우드는 한 작품 하고 나면 감정이나 체력소모가 아주 심해서요.”
음, 그렇다면 안 되려나.
떠오른 생각을 꺼낼까, 잠시 망설이는데 리암이 물었다.
“왜요? 혹시 뭐 다른 작품 새로 들어가세요?”
내가 고개를 끄덕이자 리암이 빠르게 흥분했다.
“오! 아라비안필름 영화면 당연히 가죠! 제발 제가 촬영하면 안 돼요?!”
아니, 무슨 영환지는 알아야지 이 사람아.
내 속마음이 닿았는지 리암의 입이 또 열렸다.
“근데 장르가 뭡니까?”
왠지 장르 말하면 더 흥분할 것 같은데······.
“한국형 히어로물을 기획하고 있습니다. 이른바 동양 판타지죠.”
리암은 순간 놀랐는지 눈도 깜빡이지 않고, 쳐다봤다.
“오우! 진짜요?! 미쳤다! 저 할래요! 아니, 나 시켜준다고 할 때까지 따라다닐 거예요!”
그는 제작사 대표들이 따라다니는 게 그렇게 싫다고 할 땐 언제고, 집착하며 나를 쫓기 시작했다.
시상식이 끝나고 다시 자세히 이야기하자며 겨우 그를 돌려보내자 시상식의 막이 올랐다.
매년 약 3시간 동안 진행되었기에 맨 마지막 순서인 작품상 수상까지는 한참이나 시간이 남아있었다.
어차피 계속 긴장하고 있어 봤자 도움 될 게 하나도 없었다.
나는 그저 떨리는 마음을 잠시 내려두고, 시상식 자체를 즐기기로 했다.
박수도 치면서 호응하자 옆에 있던 정 PD가 슬그머니 말을 걸어왔다.
“대표님. 긴장하신 건 아니죠?”
회귀 전 인생까지 통틀어서 이곳에 올 일도 온 적도 후보에 오른 적도 없었으니.
여기서 긴장을 안 하면 사람이 아니다.
“당연히 했죠. 티 많이 나요?”
그러자 정 PD는 내 긴장을 풀어주고 싶었는지 장난스럽게 웃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조금요. 근데 있잖아요. 대표님.”
“예?”
“그 예전에 <처단자> 명호식 감독님 섭외할 때 말입니다.”
참, 명호식도 같이 왔으면 좋았을 텐데.
<처단자>를 찍고 여기저기서 섭외 요청이 폭발해 내년까진 스케줄이 꽉 차 있었다.
지금은 웬만한 탑 배우보다 바쁜 몸이라 그는 함께 하지 못했다.
“그때 저는 명호식 감독님이 진심으로 불안했거든요.”
그런 적이 있긴 했다.
그냥 내가 밀어붙인 거지.
“당연히 그럴 수 있죠.”
정 PD가 고개를 저었다.
“아니요. <처단자> 찍으면서 제가 아직 부족한 점이 많다는 걸 느꼈어요.”
“예? 아닙니다. 정 PD님 없었으면 지금의 <처단자>도 없죠.”
“그렇게 말씀해주셔서 정말 감사합니다. 어쨌든 뭐 갑자기 분위기가 이상해지긴 했는데, 제가 하고 싶은 말은 대표님은 정말로 존경받을 만한 분이라는 거예요. 밑에서 일하는 게 자랑스럽습니다.”
긴장을 풀어주려는 게 아니었나.
왜인지 부담이 더 된다.
“그리고 제가 꿈이 정말 잘 맞거든요?”
어쩐지 정 PD도 많이 긴장한 모양이다.
이렇게도 뜬금없는 말을 하다니.
“꿈이요?”
“예. 어젯밤 저희가 작품상 타는 꿈을 꿨어요. 그러니까 수상할 거예요. 긴장 푸세요.”
거기까지 딱 들었는데 다른 쪽 옆에 있던 임윤서가 옆구리를 쿡 찔렀다.
“쉿. 곧이에요! 곧!”
3시간은 언제 다 지나가 버린 건지.
애써 내려놓았던 두근거림은 쿵쾅거림으로 변하고 있었다.
작품상 시상을 위해 무대 위에 선 시상자는 할리우드 간판 여배우였다.
그녀는 세련된 금빛 드레스를 입고, 우아하게 청중들에게 작품상 시상자로 나선 소감을 잠시 이야기했다.
그리고.
“And the oscar goes to······.”
시상자들이 봉투를 열기 전 사용하는 고정 멘트다.
역시 저 말을 한 뒤 그녀는 손에 들고 있던 봉투를 조심히 뜯어 열었다.
한 번 웃어 보이던 그 입에선
“<처단자> 축하드립니다.”
간절히 원하던 그 단어가 나왔다.
들려오는 환호 소리는 어쩌면 칸에서 들었던 것보다 더 크게 느껴지는 것 같았다.
<처단자> 팀은 불리자마자 자리에서 튈 듯 일어났다.
“와! 진짜야! 진짜로 저희가 수상했어요!”
“이거 지금 꿈 아니죠?!”
“무슨 소리야! 대표님! 빨리 올라가시죠!”
그나마 정 PD가 정신을 차리고 있었다.
모두 함께 무대로 올라갔고.
돌비 극장에 있던 모두는 우리를 진심으로 축하해줬다.
그렇게 나는 마이크 앞에 섰고, 오히려 소감을 말할 차례가 되자 마음이 차분하게 가라앉았다.
“우선 제일 먼저 아카데미 멤버들과 저희 팀에 투표해 준 모든 분께 감사드립니다. 또 여기 같이 자리한 <처단자> 식구들과 한국에 계신 가족분들까지 모두에게 감사드립니다.”
전해성은 내 말을 곧바로 통역했다.
“그리고······. 감히 상상도 할 수 없던 일이 일어나고 말았네요.”
이번엔 관중석에서 짧은 웃음이 터져 나왔다.
“저는 지금까지 영화를 제작하면서 단 한 번도 재미없던 적이 없었습니다. 물론 힘들었던 적이 있긴 하지만요.”
다시 한번 웃음이 들려왔다.
“그래도 저는 영화처럼 살다가 죽는 그 순간에도 영화처럼 죽고 싶습니다. 그러다가 문득 나는 왜 이렇게도 영화에 미쳐 사는가. 이런 의문이 들더군요.
그 해답을 오늘 밤 이 오스카에서 찾은 것 같습니다.”
모두의 눈은 물음표로 가득했다.
“영화란 다른 사람의 인생을 훔쳐보고, 간접적으로 살아보는 정말로 이상한 예술입니다.”
그러자 물음표가 사라지기는커녕 더 추가되려기에 얼른 말을 이었다.
“예. 그런 이상한 종합예술을 저는 너무 사랑하네요. 그것이 저희 모두가 이곳에 자리하고 있는 이유인 거 같습니다. 그래서 저는 죽기 전에 한 번은 꼭 다시 이곳을 찾는 것을 목표로 재밌게 살아가겠습니다.”
함성으로 물든 오스카의 밤은 너무도 아름다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