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22화. 희미한 미소
행복했던 9시간 30분의 시간은 쏜살같이 흘렀고.
전세기는 두바이 국제 공항에 착륙했다.
그리고 그곳엔 예상하지 못한 환영 인파가 몰려있었다.
그들은 바로 그린 애플을 보러 온 팬과 기자들.
“으악! 밀지 마세요!”
“죄송합니다! 죄송합니다!”
“대표님! 어떻게 할까요?!”
출국장 입구부터 ‘그린 애플’을 외쳐대는 사람들로 빽빽했기에 어떻게 해야 하나 싶던 찰나.
검은 선글라스에 정장을 입은 장정들이 갑자기 나타나 우리를 둘러쌌다.
한국에서는 흔히 볼 수 없는 피지컬의 이들은 또 뭔가 싶던 중.
그린 애플의 매니저는 뭔가를 착각했는지 내게 물었다.
“오, 이런 가드들은 어디서 고용하셨어요? 다 알아서 해주신다길래 그냥 편하게 오면서도 걱정했거든요. 근데 괜한 걱정이었네요? 이 정도 가드 업체 구하기 정말 힘드셨을 텐데!”
하지만 이들은 내가 고용한 사람들이 아니었다.
그때 장정들 사이로 익숙한 얼굴이 낑낑대며 비집고 들어왔다.
“신바드 대표님!”
반가운 그 얼굴은 아흐마드.
“오랜만입니다! 오시느라 힘들진 않으셨어요?”
“힘들긴요. 덕분에 너무 편하게 왔습니다.”
부담스러울 정도로 편했지.
아흐마드가 활짝 웃었다.
“정말로 다행입니다!”
옆에 있던 삼총사도 아흐마드를 발견하고 반가운 기색이다.
“아흐마드! 오랜만이에요!”
“그러네요! 다들 잘 지내셨어요?!”
“네! 너무 잘 지냈어요!”
그러나 인사도 잠시.
“우선 공항부터 나가시죠. 호텔까지 모시겠습니다.”
우리는 아흐마드와 장정들의 보호를 받으며 공항 밖으로 신속히 이동했다.
입구에는 우리의 입을 한 번 더 떠억 벌어지게 할 무언가가 있었는데.
“와, 대박.”
그것은 특유의 웅장한 자태를 내뿜으며 우리를 기다리고 있던 검은색 유광 롤스로이스 리무진이었다.
*
너무나 안락하고 폭신한 시트에 앉아 호텔까지 도착한 우리는 모두 목이 곧 꺾일 듯 위를 쳐다보고 있었다.
“여기가 그 버즈 칼리파?!”
끝이 안 보이는 그 건물은 약 2년 전 완공되어 두바이의 랜드마크가 된 버즈 칼리파.
한국의 한 대기업에서 혁신적인 기술을 동원해 시공했다고 한창 떠들썩했던 것이 기억난다.
또 이 건물은 내가 회귀하기 직전까지도 세계에서 가장 높은 인공 구조물로 명성을 떨쳤다.
그런 곳에 자리한 호텔이라니.
아흐마드는 미리 받아놓은 카드 키를 모두에게 건넸다.
“왕세자님은 개막식이 내일이라 함께 하지 못하셨습니다. 대신 미안한 마음을 꼭 전하라고 하셨습니다.”
이해한다.
국제영화제인데 막바지까지 체크할 게 얼마나 많겠는가.
“괜찮습니다. 마주할 시간이 있겠죠.”
아흐마드는 이해해줘 고맙다는 인사를 하며 덧붙였다.
“오늘은 다들 피곤하실 테니 푹 쉬시고, 저는 내일 다시 오겠습니다. 아, 룸서비스는 마음껏 주문하셔도 괜찮습니다.”
물론 함자의 돈이겠지만, 저런 말을 이렇게도 쉽게 하다니.
그는 근사한 말을 툭 던져놓고는 쿨하게 돌아섰다.
그 모습에 나경은 정말로 감격한 모습이다.
“크으! 멋있어!”
“자, 그럼 올라갑시다.”
내 말에 모두는 근처에 있던 엘리베이터에 올라탔다.
“여기 엘리베이터가 그렇게도 빠르다면서요?”
나경이 물었고.
“막 꼭대기까지 1분이면 간다고 하던데, 맞죠? 언니?”
보은이 답했다.
둘은 어느새 절친이 되어 있었다.
친화력이 좋은 둘이었기에 예견된 순서였다.
엘리베이터는 둘의 말대로 정말로 순식간에 올라가더니 38층에서 멈췄다.
“다들 38층 맞죠?”
아니다.
“저는 39층인 것 같은데요?”
“에에? 정말요? 그럼 대표님이랑은 여기서 헤어져야겠네요!”
나경은 숙소 내부가 너무 궁금한지 서두르는 것 같았다.
무한 룸서비스 때문인 것 같기도 하고.
“그럼 각자 방에서 쉬고, 내일 일찍부터 리허설 있다고 하니까 아침에 봅시다.”
사람들의 얼굴은 엘리베이터 문이 닫히며 시야에서 사라졌고.
나는 혼자 39층으로 올라가 복도를 걸었다.
방은 아직 들어가기도 전인데, 복도 마감부터 아주 고급스러웠다.
듣기에 이 호텔은 한 명품 브랜드에서 디자인한 것으로 유명하다고 한다.
그래서 그런가 풍기는 냄새가 그 브랜드 향수 냄새 같기도 하고.
괜히 설레는 마음으로 도착한 방 앞에서 카드 키를 꺼내 찍은 뒤 안으로 들어갔다.
와아.
가장 눈에 들어온 것은 거실이었는데 복층이라 높다란 천장이 탁 트여 있었다.
이곳저곳 둘러보니 그 면적은 또 얼마나 크던지 감히 하룻밤 비용을 가늠하기도 힘든 그런 곳이었다.
나중에야 안 사실이었지만, 이 방은 호텔에서 단 하나밖에 없는 가장 비싼 스위트룸이었고.
함자는 그런 방을 그린 애플도 아닌 내게 배정했다고 한다.
그린 애플의 섭외가 모두 내 덕이라는 인식이 꽤 컸던 모양이다.
*
다음 날 저녁.
수크 마디낫 주메이라.
평소 이곳은 아름다움으로 손꼽히는 쇼핑센터였다.
전통시장을 현대적인 감각으로 설계한 곳이었는데.
베네치아를 연상시키는 구불구불한 마디낫 수로에 둘러싸여 환상적인 경치를 자랑했다.
물론 이 모든 걸 지금은 느낄 수 없었다.
모여든 사람들이 광란으로 물들이고 있었으니까.
“꺄악!!”
“그린 애플!! 그린 애플!! 그린 애플!!”
상당한 규모의 광장에 설치된 무대 앞은 사람이 더는 들어올 수 없을 만큼 빼곡히 차 있었고.
예상을 훨씬 초월한 인파에 두바이 현지 경찰까지 쫙 깔린 상태였다.
그린 애플은 아직 등장하기도 전인데 그녀들을 보러 온 팬들의 고함 때문인지 공간은 더 꽉 찬 느낌이었다.
“드디어 시작이네요.”
옆에 앉은 이 과장의 말에 고개를 끄덕였다.
우리는 오늘 아침 일찍부터 모여 조식을 먹고, 리허설장으로 향했다.
그린 애플은 잠깐 대기하며 목과 몸을 풀다 바로 무대로 올라가 각자 마이크와 인이어 상태, 무대에 맞는 동선 등을 확인했고.
우리는 그 모습을 지켜봤다.
그녀들의 무대는 최근 휴식 중이었다는 말이 어울리지 않을 정도로 능숙하고, 안정적이었다.
처음엔 투어 경험이 많아서 그런 건가 싶었다.
그런데 매니저가 말하기로 쉬었다곤 하나 쉰 게 아니었다고 한다.
-한번 감을 잃으면 찾기 쉽지 않다고, 4명 다 연습실은 매일 갔어요.
쉬는 동안에도 노력을 게을리하지 않았던 것이다.
역시 한 분야의 탑을 찍는 사람들은 다 이유가 있다.
함자는 리허설장에서 마주치긴 했는데 너무 정신없어 보여 제대로 된 인사를 하지 못했다.
-친구! 정말 미안! 그래도 개막식만 끝나면 숨 쉴 틈이 있을 것 같으니까 그때 이야기하자!!
그랬던 그는 지금 무대와 가장 가까운 좌석에서 아버지, 형제들과 함께 주르륵 앉아 있었다.
현재 그의 얼굴은 넓어지려는 코 평수를 자제하며 체통을 지키려고 무척 노력하고 있는 듯 보였다.
모르긴 몰라도 주변 그린 애플 팬들이 흔드는 응원 봉을 당장이라도 흔들고 싶을 것이다.
잠시 후.
광장의 조명이 서서히 어두워지면서 오직 4개의 스포트라이트만이 무대를 비췄다.
아까 리허설 때 확인한 무대는 정말 굉장했다.
아흐마드는 2주간 자신이 할 수 있는 모든 노력을 다 쏟아부었던 것이다.
그 노력의 증거는 그린 애플의 대표곡인 so far girl 전주가 나오면서부터 눈으로 확인할 수 있었다.
그녀들은 무대 아래 리프트에서 대기하고 있다가 리허설 때와 같은 타이밍에 비추고 있던 스포트라이트로 튀어나왔다.
“와아아아!!”
“꺄아악!!”
광장 내 들끓던 함성은 so far girl이 다 끝나고도.
다음 곡이 이어진 뒤에도.
마지막 곡이 끝나며 무대 뒤로 화려한 폭죽이 연신 터질 때까지 끊이질 않았다.
그리고 나는 봤다.
함자 옆에 있던 국왕의 희미한 미소를.
*
“신바드! 나의 친구!”
“함자. 고생했어.”
우리는 일주일 만에 반가운 인사를 하며 소파에 마주 앉았다.
결과적으로 말하자면 두바이국제영화제는 총 일주일간의 일정을 성공적으로 마무리했다.
개막식이 끝나고 바로 볼 수 있을 줄 알았던 함자는 웬일인지 더 바빠져서 영화제 내내 얼굴조차 보기 힘들었다.
그 덕분에(?) 우리 일행은 아주 흡족한 관광을 할 수 있었다.
태어나서 처음 사막도 구경하고, 산해진미란 산해진미는 다 맛본 것 같다.
아주 다들 새까매져서는 행복한 얼굴을 하고 있었다.
특히 그린 애플 관계자들의 만족도가 굉장했다.
해외 출장을 이렇게 호화롭게 보내본 적은 처음이라면서 말이다.
어쨌든 나는 바쁜 함자를 귀국 날이 하루 남은 날 겨우 마주할 수 있었다.
“간단하게 한잔하면서 이야기할까?”
“그러자.”
내 대답에 함자가 어딘가 전화를 걸어 아랍어로 뭔가 간단히 지시했다.
잠시 후.
아흐마드와 호텔 직원이 가지고 온 룸서비스는 최고급 양주와 안주들이었다.
“함자, 네 덕분에 일주일 동안 정말 잘 지내고 가. 다들 고맙다고 전해달라더라.”
그러자 함자가 흥분하며 고개를 저었다.
“무슨 소리야! 당연히 해야지! 무려 그린 애플 무대를 코앞에서 볼 수 있는 영광을 줬는데! 그것도 내가 주최하는 영화제에서!”
직관이 좋았던 거구나. 우리 함자는.
피식 웃으며 잔을 들어 올렸다.
“그래. 그런데 무대에 힘을 많이 줬던데? 시간도 2주 밖에 없었는데 그사이에 어떻게 준비한 거야?”
함자가 한쪽 눈썹을 올리며 능글맞은 표정을 지었다.
“우리 아흐마드가 일을 참 잘해. 하하.”
아흐마드에겐 줄곧 미안한 마음을 가지고 있었다.
다크서클이 얼마나 내려왔던지.
우리는 양주가 담긴 얼음 컵을 들이켰고.
함자는 그 컵을 유심히 보았다.
“이렇게 친구랑 술 마시는 것도 정말 오랜만이다.”
생각해보니 그는 유독 내게 친구라는 호칭을 많이 사용했으며 메일에는 가끔 감정을 나눌 친구가 없다는 말을 적어 보내곤 했다.
내가 묵묵히 듣고 있자 그가 말을 이었다.
“어느 순간부터 친구들이 내 돈을 노리고 다가오는 것 같더라고. 그래서 사람들과 거리를 두기 시작했어.”
어쩌면 함자가 연예인인 아람을 덕질하는 건 현실 인간관계에서의 도피는 아니었을까.
잠시 어두웠던 그의 표정이 밝아졌다.
“그래도 지금은 이렇게 친구들이 많이 생겨서 너무 좋아!”
“그래. 한잔 더 하자.”
나도 함자가 정말로 편해졌는지 우리는 어색함이 전혀 없었다.
그렇게 두바이의 야경을 즐기며 두런두런 이야기를 나누다가.
“아, 맞다. 한국에서의 사업이 잘되고 있다는 건 들었어.”
자연스럽게 사업 이야기가 나왔다.
“응. 맞아. 최근에 그린 애플 소속사를 인수해서 합병도 했어.”
나는 알기 쉽게 설명하기 위해 ‘그린 애플’을 꺼낸 것인데 그의 눈이 번쩍하고 빛났다.
“그린 애플 소속사를 너희 쪽에서 인수했다고?? 그럼 그린 애플을 관리하는 회사의 대표가 내 친구인 거네?!”
딱히 틀린 말도 아니었다.
“그렇다고 볼 수 있지?”
“와! 너무 멋있다!!”
함자는 나를 부러운 듯 쳐다보며 말을 이었다.
“혹시 다른 사업을 계획하고 있는 건 없어?”
그는 정말로 적절한 타이밍에 내가 원하는 말을 꺼내주었다.
“계획 중인 사업은 너무 많지.”
“그래?”
술이 조금 들어간 탓인지 함자는 자신의 상황을 설명했다.
“사실 아버지께서 이번 영화제를 성공적으로 주최하면 내년부터 두바이 미디어 시티의 운용예산을 전폭 지원해주시겠다고 했거든.”
국왕의 희미했던 웃음이 떠올랐다.
“그래서 투자할 곳을 찾고 있어.”
그가 내 눈을 똑바로 보며 말을 이었다.
“높은 수익성보다도 완전히 믿을만한 투자처로 말이야.”
나는 설레는 마음을 애써 가라앉히며 침착하게 말을 꺼냈다.
“그래? 사실 우리가 계획하고 있는 큰 사업은 두 가지야.”
“뭔데? 너무 궁금하다. 얼른 말해봐!”
함자가 내 말에 집중했다.
“첫 번째는 우리 고유의 극장 프랜차이즈를 출범해 한국, 아니 전 세계적인 브랜드로 만드는 거고.”
그는 두 번째도 빨리 말해보라는 듯 종용했다.
“너무 멋있는데? 그리고? 두 번째는??”
“두 번째는 아라비안필름에서 만든 영화들이 주제인 테마파크를 건설하는 거야.”
두 가지를 다 들은 그는 잔뜩 신이 난 얼굴로 악수를 청하듯 손을 내밀었다.
“정말?! 그럼 그거 둘 다 우리랑 하자. 나 너무 하고 싶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