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21화. 전세기라니?
두바이국제영화제.
2004년 시작으로 역사로 따지자면 짧은 편이었으나 전 세계 영화인들은 이 영화제를 매년 주목했다.
중동 최대 규모를 자랑하는 영화제기에 쉽게 접할 수 없는 중동, 아랍, 인도 영화를 접할 수 있다는 장점이 있었고.
더 중요한 건 이 영화제의 주최자가 함자의 아버지이자 두바이의 국왕이었기 때문이다.
이미 할리우드에는 막대한 자금이 이쪽에서 흘러 들어간 경우가 많았다.
그러니 배우와 제작자들을 포함해 얼마나 많은 영화인이 기회를 얻기 위해 이 두바이 땅을 밟겠는가.
나도 그중 하나였으니 몇 개월 전부터 이 영화제에 참석할 생각이었다.
물론 영화를 출품한 뒤 초청되어 간다면 더 자연스러웠겠지만.
이 영화제의 참석 목적은 수상이 아니었다.
함자를 직접 만나 중요한 무언가를 제안할 심상이었다.
또 이 제안의 가장 좋은 타이밍이 영화제라고 생각했다.
그런데 함자에게서 먼저 제안이 왔다.
[친구! 네가 와서 영화제를 빛내준다면 정말로 나는 행복할 것 같아!]
이렇게 끝나는 메일로 말이다.
이 문장으로만 본다면 그는 나만을 초대한 것이다.
하지만······.
나는 잠시 생각하다 곧바로 아람에게 전화를 걸었다.
-여보세요. 대표님?
“예. 아람 씨. 통화 가능하세요?”
-네. 괜찮습니다. 말씀하세요.
괜찮다고 하니 본론부터 꺼냈다.
“저번에 말씀드린 영화제 말입니다. 실은 두바이에서 열리는 영화제예요.”
-두바이요?
아람은 잠시 ‘두바이, 두바이.’ 곱씹다가 뭔가를 떠올렸다.
-아! 두바이라면! 그때 저희 도와주셨던 함자 님이 계신 곳 맞죠?
은인이어서 그런지 극존칭이 자연스럽게 붙었다.
“맞습니다. 일정은 2주 후고 일주일간 열리는데 잠깐 얼굴만 비추셔도 상관없습니다. 아람 씨가 영화제에 참석해주시면 많이 기뻐할 것 같아서요.”
그녀는 내 제안을 흔쾌히 승낙했다.
-그럼요. 당연히 가야죠. 안 그래도 그때 너무 큰 도움을 받았는데, 사인이랑 사진으로 대신한 것 같아 마음이 좋지 않았거든요. 아, 맞다! 혹시 그럼요. 대표님.
아람은 적극적인 자세로 뭔가를 제안했다.
-실례가 되지 않는다면, 애들이랑 다 같이 가서 무대라도 하고 오면 어떨까 싶은데요. 마침 저희가 스케줄 없이 쉬고 있거든요.
그녀의 제안을 듣는 순간 함자가 행복해하며 지을 함박웃음이 떠올랐다.
이렇게까지 해준다면 완전 베스트지.
하지만 영화제까진 시간도 얼마 남지 않았고, 무엇보다.
“아마도 함자는 좋아할 겁니다. 하지만 멤버들 휴식 시간을 그렇게 보내도 괜찮습니까?”
나 때문에 일이 너무 커지는 건 아닌가 싶었다.
그러나 아람은 잠깐 웃더니 답했다.
-괜찮아요. 지금도 숙소에만 있는 게 답답해서 좀이 쑤신다고 난리니까요. 또 제 말은 다들 잘 듣거든요.
이런 좋은 기회를 더 마다할 내가 아니었다.
“그렇다면 저도 영화제 주최 측에 먼저 연락을 취해보고 말씀드리겠습니다.”
전화를 끊은 나는 이 기쁜 소식을 전할 수단을 생각했다.
역시 무대 준비 등을 하려면 빠듯할 테니 메일보단 전화다.
국제전화의 신호음이 울리기 시작했다.
*
아흐마드는 두바이에서 주최하는 국제 영화제 덕분에 요새 아주 바쁜 나날을 보내고 있었다.
두바이국제영화제는 자신과 자신이 모시고 있는 함자에게 아주 중요한 행사였다.
두바이 국왕.
무하르람 나미르 빈 살라마 알 막툼에게는 총 22명의 자녀가 있었다.
그중 함자는 두 번째 왕비의 아들로 서열로 따지자면 그다지 앞에 선 왕세자가 아니었다.
하지만 무하르람 국왕은 함자를 유독 아꼈다.
그래서 할리우드 영화에 막대한 금액을 투자하던 회사 두바이 미디어 시티도 그에게 맡긴 것이다.
또 이번 영화제 주최를 직접 해보라는 지시가 내려왔고.
함자는 그 어느 때보다 열심히 이 행사를 준비 중이었다.
사실 함자는 왕위를 이어받는 것엔 관심이 없었다.
그쪽으로는 자신보다 형들의 능력이 더 뛰어나다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대신 지금 운영하는 두바이 미디어 시티 일은 정말로 재밌어했다.
물론 함자의 태도가 처음부터 그랬던 것은 아니고, 그린 애플의 아람을 좋아하면서부터였던 것 같긴 하다.
그녀가 출연한 영화들을 보고, 더욱 영화에 대한 관심이 높아졌으니까.
이런 이유 덕분에 함자는 이번 영화제의 성공적인 주최를 위해 노력했다.
그 마음과 열정은 지금까지 준비된 영화제 모습으로 고스란히 엿보이는 중이고.
그런데 이런 함자와 아흐마드에게도 고민이 하나 있었다.
영화제 개막이 2주밖에 남지 않은 이 시점에 행사의 꽃이라고 할 수 있는 개막식 축하 무대에 설 가수가 마땅치 않았던 것이다.
정확히 말하면 있긴 있었다.
그러나 함자가 그린 애플을 포함해서 여러 가수의 무대를 웬만큼 봤어야지.
그저 그런 가수들은 눈에도 차지 않는 상황이었다.
또 아무리 기름국이라고 할지라도 아랍 에미리트의 영화산업을 키우기 위한 투자와도 비슷한 영화제에 돈을 펑펑 쓰진 못한다.
정해진 예산에 맞추려면 자국 내 유명 가수를 섭외하는 것이 다였다.
그러나 함자는 이렇게 외쳤다.
-안돼! 아흐마드! 개막식에서 축하 무대가 얼마나 중요한데!
그의 외침은 맞는 말이었으나 시간은 그들을 더 기다려주지 않았다.
아흐마드는 이제 어쩔 수 없었다.
함자에게 후보 가수 중 하나인 중동에서 손에 꼽히는 인기 가수 파하드를 부른다고 선언할 수밖에······.
그에겐 이것이 최선이었다.
‘퇴근이나 하자.’
그런데 그때.
아흐마드의 등골에서 서늘한 기운이 느껴지더니 양팔에는 닭살까지 돋았다.
‘응? 이거 어째 느껴본 기분인데······.’
아니나 다를까.
자신의 핸드폰이 진동했다.
지잉-.
지잉-.
[함자 왕세자님]
이상했다.
지금은 함자의 저녁 식사가 끝나고도 한참 지난 시간이다.
즉, 그가 아람의 무대 영상을 찾아보는 하루 중 유일한 낙과 같은 시간이었기에 자신의 연락도 받지 않는 시점이라는 거다.
그래서 방금 결심을 내린 축하 무대 건도 내일 보고하려던 참이었는데······.
더욱 오싹하기 그지없었다.
그렇다고 자신이 모시는 왕세자 전화를 씹을 순 없는 노릇.
“예. 왕세자님.”
-아흐마드! 개막식 축하 무대 말이야!
함자는 무슨 일인지 모르겠으나 잔뜩 흥분한 목소리였다.
하지만 아흐마드도 이번만큼은 물러서 줄 생각이 없었다.
“예. 왕세자님. 안 그래도 보고드리려고 했는데, 이제 더는 시간이 없습니다. 그때 말씀드린 것처럼 파하드가 서는 걸로-”
그러나 함자는 아흐마드의 말이 들리지 않는 듯했다.
-그린 애플! 그린 애플이 와서 무대를 해준대! 그러니까 어서 한국이랑 연락해서 전세기도 보내주고, 호텔도 가장 좋은 곳으로 가장 좋은 방! 그리고 뭐, 드레스는-
“아니! 잠깐만요! 왕세자님! 흥분을 가라앉히시고!”
-응? 왜 그러는데?
아흐마드는 괜히 자신이 숨이 차오르길래 숨을 골랐다.
“그러니까 빌보드 1위 찍은 그 그린 애플이 저희 개막식에서 축하 무대를 해주겠다고 했다고요?”
그러자 함자의 밝은 목소리가 들려왔다.
-그렇다니까! 그럼 그린 애플이 어디 또 있어?!
함자는 ‘대박이다! 그럼 어서 준비를!’이라는 생각과 함께 상반되는 한 생각이 들었다.
‘아, 어쩐지 오늘이 또 무난하게 지나가나 했다.’
*
이번 영화제는 지금까지 참가했던 영화제 중 가장 준비할 게 없었다.
비행기, 호텔, 드레스와 턱시도 등 모두 함자 쪽에서 최고급으로 준비해줬기에 우리는 그냥 몸만 가면 될 정도였다.
심지어 전세기라니?
그는 편하게 오라고 통 크게 비행기 한 대를 빌려줬다.
일등석 이후로 공항 가는 길이 이리도 설레는 순간이 또 있을까 싶었는데.
그날이 바로 오늘이다.
전세기에 타는 사람들은 하나둘 공항으로 모여들었다.
그린 애플 멤버 4명과 매니저, 스타일리스트까지 포함해 그들은 약 10명의 사람이었다.
양상철도 함자와의 안면을 트는 것이 좋을 것 같았지만, 합병 직후라 회사 내외로 처리할 업무가 많아 함께 하지 못했다.
대신 아라비안필름 쪽에선 나경과 이 과장, 전해성이 함께했다.
이 삼총사는 필름마켓에서 아흐마드와 거래하며 안면을 튼 적이 있었기에 같이 가는 게 좋을 것 같다는 판단이었다.
“안녕하세요!! 대표님! 오랜만이죠?!”
“이햐! 이렇게 콧바람을 쐬니 좋구나!”
그린 애플 멤버들은 한껏 신이 난 모습이었다.
일하러 간다는 느낌보단 휴가를 떠나는 느낌이다.
“예. 다들 잘 지내셨어요?”
아람을 제외한 그린 애플 멤버들은 가끔 공식 선상에서 본 게 전부라 그다지 친하지 않았다.
하지만.
“그럼요! 저 피부 매끈해진 거 보이시죠? 역시 일을 해야 쉬어도 쉬는 것 같다니까요?!”
활달한 성격의 멤버 보은은 친화력이 만렙이다.
“너 그거 부은 거야. 어제 라면 먹고 자서.”
보은과 동갑인 고양이상의 가빈은 그런 보은을 놀리는 맛에 살고.
“죄송합니다. 저희 애들이 아직 철이 없어서요······.”
내게 꾸벅 인사하는 리더 다별은 이런 상황이 익숙한 것 같다.
“하하, 괜찮습니다. 그럼 비행기 시간 다 된 것 같으니 들어가시죠.”
아람이 자신의 멤버들을 보는 눈이 심상치 않길래 얼른 출발을 종용하며 전세기 전용 게이트로 향했다.
평소 같았으면 못해도 1시간은 걸렸을 출국 심사는 5분도 채 안 돼서 끝났고.
18인승 전세기에 몸을 실기까지의 시간은 또 금방이었다.
이래서 전세기, 전용기 하는구나.
나경은 뒤에서 연신 ‘우와! 우와!’를 연발하고 있었는데.
그 ‘우와!’는 전세기에 올라타서 더 심해졌다.
“우와! 의자가 무지 커요! 소파도 따로 있고! 모여서 볼 수 있는 TV도 있어요! 이 음식들은 또 뭐야?!”
비행기의 규모는 작았지만, 일반적이라면 145석은 만들어질 자리가 단 18명이 앉을 수 있도록 만든 비행기다.
당연히 격한 나경의 반응과 속으론 엄청나게 놀랐으나 티 내지 않고 있는 이 과장과 전해성까지도 이해됐다.
나 또한 겉으로만 아무렇지 않은 척하고 있지.
속으로는 무지 놀라는 중이다.
그러나 그린 애플은 무려 빌보드 1위를 찍었던 스타다.
바쁜 투어 시절에는 밥 먹듯 탔을 전세기일 것이다.
“나경 언니! 여기 더 신기한 거 있는데, 와서 볼래요?!”
나경의 반응이 재밌었는지 보은은 그녀를 데리고, 이곳저곳을 구경하기 시작했다.
“으에?! 정말요? 뭐가 또 있어요?!”
어쩐지 보은을 따라다니는 게 나경뿐만이 아닌 것처럼 느껴지는 건 기분 탓이려나.
그들이 시야에서 사라진 지 몇 분도 채 지나지 않아 ‘비행기에 요, 욕조가 있다니!’라는 이 과장의 말소리가 들려왔으니 기분 탓은 아닌 모양이다.
물론 비행기엔 그들 외에 얌전한 그룹도 있었다.
나, 아람, 다별, 또 그린 애플 관계자들.
매니저를 포함한 관계자들은 이번 두바이행을 철저히 일이라고 단정 짓는 듯 보였다.
그럴 수 있지. 암.
나는 이 틈을 타 아람에게 궁금했던 한 가지를 물었다.
“<블랙 히어로즈 2>는 언제 촬영 들어가요?”
“음, 아마도 내년 상반기 중에는 들어가지 않을까 싶어요.”
내년 상반기라······.
잠시 생각하다 밝게 웃었다.
“그렇구나. 그럼 얼마 안 남았네요?”
“네. 그래서 이제 곧 다시 미국으로 가야 할 것 같아요.”
“힘내요. 한국에서 응원 열심히 하고 있을게요. 아, 그리고 꿀은 잘 먹겠다고 아버님께 꼭 전해주세요.”
그 말에 아람도 밝게 웃었다.
“네. 알겠습니다. 대표님.”
그때 기장의 기내 방송이 흘러나왔다.
-손님 여러분, 안녕하십니까? 저희 비행기는 두바이까지 가는······.
안정적인 목소리의 안내 방송이 시작되자 흥분했던 무리가 자리로 와서 앉았다.
그다음으론 승무원들이 다가와 좌석 벨트를 일일이 확인했으며.
-······출발하도록 하겠습니다. 감사합니다.
방송이 끝나자 두바이행 비행기는 활주로를 질주했고, 곧 하늘로 치솟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