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감독보다 영화사 대표님-120화 (120/140)

#120화. 오랜만에 만날 친구 생각

차를 타고, 대극장이 들어설 부지로 가는 길에 오픈 세트장이 보였다.

‘좀비 탈출’을 성공리에 마친 미사리 오픈 세트장은 본연의 자리로 돌아갔고.

한낮의 세트장은 좀비들이 들끓던 때와는 확연히 달랐다.

“그 ‘좀비 탈출’이란 게 여기서 하신 거죠?”

조수석에 앉아 있던 지성미가 물어왔다.

“예. 맞습니다.”

“화제가 많이 된 걸로 알고 있는데, 바쁘시겠어요. 주변에서 이쪽으로 이직한 걸 아는 사람들이 다음 주최는 언젠지 아는 게 있느냐고 꽤 물어오더라고요.”

‘좀비 탈출’은 끝난 지 벌써 한 달이란 시간이 지났지만, 지성미의 지인들처럼 아직도 다음 주최 계획을 물어오는 이들이 많았고.

그러는 사이 우리는 그들이 원하는 다음을 계획하기 시작했다.

이번엔 기업 이미지보단 큰 수익의 가능성을 보았기 때문이다.

에이든 브라운 측에선 정말로 다음 행사에 참여하고 싶다는 의사를 직접적으로 전해왔고.

우리 행사를 자국에서 주최하고 싶다는 각국 기업들의 문의가 잇따랐다.

그래서 우리는 앞으로 이 행사를 어떤 식으로 운용하면 좋을지 고민했다.

그에 따른 결론은 이랬다.

하나의 축제로 변형해 사람들을 끌어모은다.

이른바 ‘K-좀비 축제’.

이렇게 몇 회 더 진행해 본 다음 외국 주최를 고민해 본다.

이렇게 결정한 이유는 본격적으로 일을 키울 거라면 아예 ‘우리 고유의 축제로 만들자’라는 생각이 컸기 때문이다.

성공적인 축제는 기업과 지역 발전에 큰 도움이 된다.

또 외국에서도 많은 관심을 보이고 있으니 외국인 관광객 유치까지 성공할 수 있었다.

이 모든 것을 일반인들에게 공개할 시기는 아직 아니지만, 이제 지성미는 그냥 일반인이 아닌 우리 회사의 일원이었다.

“매년 축제식으로 발전해 볼까 합니다. 그때 대극장 팀에서도 도움을 주셔야 할 것 같고요.”

지성미에게 웃으며 말하자 그녀는 신이 난 얼굴이었다.

“어머 정말요? 재밌겠다! 그럼 대극장이 빨리 오픈해야겠네요.”

뒷자리에서 우리 이야기를 묵묵히 듣고 있던 안용덕 팀장이 답했다.

“저희가 속도 좀 내 보겠습니다.”

그 말에 지성미가 화들짝 놀라며 미안한 표정을 지어 보였다.

“아니에요! 팀장님! 그런 식으로 이야기한 건 아니었는데······.”

“알죠. 이번 대극장 오픈은 저희 쪽에서도 좋은 커리어가 될 거 같아서 회사에서 신경을 많이 쓰고 있습니다.”

“아, 그런가요? 그럼 또 잘 부탁드리겠습니다.”

그렇게 지성미, 안용덕과 두런두런 이야기를 나누다 보니 어느덧 대극장이 들어설 부지에 도착했다.

“도착했습니다. 내리시죠.”

그곳은 기본적으로 풀 정리 정도만 된 아직은 허허벌판인 곳이었다.

대극장은 설계와 허가가 완료되었고, 이제 본격적인 시공만이 남아있었다.

건물의 규모는 지하 2층, 지상 4층으로 좌석은 1, 2층으로 나눠 총 1,300여 개의 규모였고.

오랜 경력의 지성미가 설계 파트부터 참여하면서 다른 극장에서는 볼 수 없었던 특별함이 있었다.

바로 국내 극장 중 무대에서 객석까지의 간격이 가장 가깝다는 것.

즉, 어느 위치에 앉더라도 무대의 생생함을 그대로 느낄 수 있다는 말이었다.

“다음 주부터 토공사 들어갈 예정입니다.”

안용덕은 그 말을 시작으로 마지막 미팅에서 우리 쪽 요구사항을 일목요연하게 정리했다.

“저번에 말씀하신 마감 재료는 저희 쪽에서도 고급화 전략에 맞지 않는 것으로 판단했습니다. 이번 주 내로 다시 선정해서 보내드리겠습니다. 또 설치될 음향 장비들도 이사님께서 보내주신-”

한주건설은 최선을 다해 우리와 협력하려는 의지를 보였고, 우리는 그런 그들을 온전히 믿고, 공사를 맡길 수 있었다.

“그 정도면 좋겠네요. 공사 시작되면 사업부에서 왔다 갔다 할 예정입니다. 너무 부담스럽게 생각하지는 마시고요.”

내 말에 안용덕이 웃었다.

“오실 때마다 양손 가득 뭘 사 들고 오셔서 부담스럽긴 합니다.”

보통 이런 공사들은 예정우가 담당했으니 어쩌면 당연한 일이었다.

그가 잔정이 많다는 걸 알기에 그런 것은 아끼지 말라고 이야기한 적이 있으니까.

“고생하시는데 당연히 빈손으로 갈 수 있습니까. 자동차 극장도 같이 시작하시는 거죠?”

“예. 자동차 극장은 3개월이면 끝날 것 같습니다. 오픈 일정 잡으시죠. 그 안에 맞춰 드리겠습니다.”

“알겠습니다. 그럼 이번에도 잘 부탁드립니다. 팀장님.”

안용덕이 믿음직스럽게 고개를 끄덕였다.

그렇게 미사리 부지는 서서히 채워지기 시작했다.

*

“<왕국 : 시간의 비밀> 리딩을 시작하겠습니다.”

마이크를 든 제작 실장의 말이 들려오자 각자 자리에 앉아 있던 배우들의 눈빛은 순식간에 돌변했다.

배역에 빠져든 것이다.

이번에도 총 6부작으로 완성될 <왕국 : 시간의 비밀> 전체 리허설은 조감독이 지문을 읽자 시작되었다.

“시은. 누군가를 찾는 듯 거리를 두리번거린다.”

배우들의 열연은 1시간, 2시간 계속되었고.

중간중간 정말 화장실이 급한 사람은 자신의 분량이 없는 타이밍에 맞춰 다녀오는 열정을 보였다.

그래도 6화 분량의 리딩은 생각보다 오래 걸렸고.

누구도 요청하진 않았으나 제작 실장의 판단으로 3부 리딩이 끝난 후 잠시 쉬는 시간을 가졌다.

“대표님. 커피 한잔하세요.”

한보배는 뭐가 그렇게 신이 나는지 웃으면서 내게 테이크아웃 커피잔을 건넸다.

주변을 둘러보니 다들 하나씩 손에 들고 있는 모습이다.

저번에 내가 뭐 사 들고 오지 말란 소리를 해서 그런지 그녀는 대뜸 변명했다.

“만나 뵙고 싶던 선배님들이 많으셔서 이 정도는 해도 된다고 생각했어요······. 하하.”

“잘하셨어요.”

내 대답이 의외였는지 한보배가 씨익 웃으며 옆자리에 앉았다.

“다행이다. 근데 대표님. 제가 다훈이랑 같은 작품에 캐스팅됐다는 게 아직도 믿기지 않는 거 있죠.”

근처에 있던 한다훈은 자신의 이야기를 하는지 모를 정도로 굉장히 얼어있었다.

“다훈이가 많이 떨리나 보네요.”

한보배가 말도 말라는 듯 손을 내저었다.

“그럼요! 어제 잠도 한숨 못 잔 거 같더라고요.”

그는 <망자와 함께> 출연 이후로 일약 스타덤에 오르긴 했으나 아직은 작품 경력이 많지 않았다.

더구나 컴플릭스 드라마 시스템이 처음이었고.

시즌 1과 ‘좀비 탈출’의 화제성으로 시즌 2에 대한 대중의 기대감이 최대치를 찍은 상태였다.

그렇기에 그의 마음을 충분히 이해할 수 있었다.

누구나 차려놓은 밥상을 자신이 엎는다고 생각하면 부담이 되기 마련이니까.

“아, 맞다. 감독님께 말씀드릴 게 있었는데, 깜박했네! 그럼 이따 뒤풀이 때 이야기 더 나눠요. 대표님!”

한보배가 신서영에게 가서 이야기를 시작하자 이번엔 아람이 조심히 다가왔다.

“대표님.”

“아, 예. 아람 씨. 이번에 출연 요청받아주셔서 정말 감사합니다.”

“당연히 약속한 건 지켜야죠. 작품도 흥미로운 데다가 여기 제가 낄 수 있다는 건 오히려 영광입니다.”

그러더니 그녀는 뭔가를 수줍게 물었다.

“혹시 저번에 드린 꿀은 다 드셨어요??”

안 그래도 아람이 꼬박꼬박 문자로 물어왔던 터라 챙겨서 먹었다.

“예. 거의 다 먹었습니다. 역시 자연산이라 맛이 다르더라고요. 잘 먹었어요.”

“그럼 혹시 차 어디에 주차해두셨어요? 매니저 오빠한테 말해둘게요.”

“예? 뭘 말입니까?”

“아버지께서 또 보내주셨거든요.”

“아닙니다. 아람 씨 투어한다고 몸도 많이 쇠하셨을 텐데. 아람 씨 드세요.”

부담스러움에 단호하게 거절하자 아람은 눈을 부릅뜨더니 더 단호한 말투로 말했다.

“안 돼요. 대표님한테 꼭 전달해달라고 하셨어요.”

너무 확실한 모습에 나는 어쩔 수 없이 차 위치를 불었다.

“흠, 지하 2층 B 구역 쪽에 있을 겁니다.”

그녀는 그제야 흡족한 미소를 보였다.

“네. 차 키도 주세요. 꿀 넣어놓고, 다시 드릴게요.”

철저하다. 철저해.

“예. 아, 그보다 아람 씨.”

생각해보니 나는 그녀에게 할 말이 있었다.

“12월 초쯤에 저랑 어딜 좀 가주실 수 있을까요?”

아람은 의아한 듯 고개를 갸웃거렸다.

“네? 12월 초요······? 그땐 한창 촬영 중이지 않을까요?”

“그건 걱정 안 하셔도 됩니다. 제가 조감독님께 미리 말해서 아람 씨 분량 앞으로 다 땅겼거든요.”

“그러셨어요? 그럼 상관없죠. 그런데 어디를요?”

“영화제인데, 누구 기 좀 살려주러요.”

여전히 그녀는 아무것도 모르겠단 눈치였지만.

나는 오랜만에 만날 친구 생각에 설레기 시작했다.

*

한 달 후.

어느 빌딩의 입구는 익숙한 듯 새로웠다.

구 ‘화분 엔터테인먼트’.

현 ‘ARABIAN’.

그 입구엔 화분 엔터와 아라비안필름 임직원들이 한곳을 바라보며 활짝 웃고 있었다.

[(주)아라비안! 새로운 도약!]

앞으로 (주)아라비안의 사옥이 될 그곳에서 합병을 축하하는 플래카드와 함께 기념사진을 찍고 있었기 때문이다.

“하나, 둘, 셋! 파이팅!”

다소 진부한 파이팅 자세를 마지막으로 기념사진까지 모두 찍고, 양상철과 나는 연회장으로 향했다.

기념식에 참석한 내빈들에게 인사하기 위해서였다.

잠시 기자들이 따라붙지 않은 틈을 타 양상철이 물었다.

“신 대표. 힘들진 않아요?”

“그럼요. 힘들게 뭐 있습니까. 경사스러운 날인데요.”

말은 그렇게 했지만.

기념식 시작부터 몰려온 기자들이 얼마나 사진을 사방에서 찍어대든지 입에 경련이 올 지경이었다.

“역시 신 대표는 사업이 체질이라니까요. 허허.”

“사업이 체질인 사람도 있을까요? 운이 잘 따라줬던 거죠.”

“허허, 이쪽은 운이 따라주는 게 체질인 겁니다.”

“그렇다면 그 운이 저를 끝까지 잘 따라와 줬으면 좋겠습니다.”

양상철은 내 다짐을 듣더니 온화하게 웃으면서 고개를 끄덕였다.

“당연히 그렇게 될 겁니다. 이제 한배를 탔으니 제 운도 같이 따라주지 않겠습니까?”

그냥 한 말일 수도 있었지만, 뭔가 든든한 빽이 생긴 느낌이었다.

“예. 이대로 쭉 올라가시죠.”

그렇게 걷다 보니 어느새 연회장 문 앞이었고, 옆에 있던 비서가 문을 열었다.

우리를 기다리던 사람들의 박수를 받으며 안으로 들어가자 단상 위에 진행자는 마이크를 잡았다.

“귀빈 여러분. 모두 자리에 앉아주시면 감사하겠습니다.”

진행자는 우리가 단상으로 걸어가 위에 마련된 의자에 앉을 때까지 기다리다 말했다.

“지금부터 (주)아라비안의 합병 기념식을 시작하겠습니다.”

우리의 새로운 출발이 시작되는 날이었다.

*

보자. 2주 정도 남았네.

갑자기 나타나면 놀라려나.

그래도 국제적인 행사인데 그냥 갑자기 나타나는 건 좀 그럴 것 같기도 하다.

어떻게 이야기를 꺼낼까 싶어 한참을 가만히 있다가 ‘메일 쓰기’의 커서 껌뻑임이 신경 쓰일 무렵.

띠링-!

알람 소리가 들리며 받은 메일함 옆에 뜬 ‘1’이라는 숫자가 보였다.

지금 쓰고 있던 메일은 한 글자도 못 썼기에 망설임 없이 뒤로 가기를 눌러 방금 온 메일부터 확인했다.

그런데.

[내 친구. 신바드. 드디어 우리가 만날 날이 온 것 같아. 혹시 시간이 된다면 우리 두바이영화제에-]

이 정도면 정말 마음이 맞는 친구라고 할 수 있는 걸까.

두바이 왕세자, 함자는 방금 내가 하던 고민을 단숨에 날려주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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