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감독보다 영화사 대표님-119화 (119/140)

#119화. 200% 달성

‘응? 뭐가 저렇게 우월하냐. 둘 다.’

김준을 비롯한 4구역 좀비들의 시선은 모두 그 남녀에게로 쏟아졌다.

남자는 떡 벌어진 어깨에 캐주얼 정장 차림이었고, 꽤 훈훈한 얼굴을 자랑하고 있었다.

그런데 어디선가 본 듯한 익숙한 얼굴이었다.

그 옆에서 남자를 바짝 따라오고 있는 여자는······.

적당한 키에 늘씬늘씬한 팔다리와 하얗고, 매끈한 목선까지.

연예인이라고 해도 믿을만한 아우라가 있었다.

다만, 착용한 모자와 마스크 때문에 얼굴이 잘 안 보였는데 오히려 그 부분이 신비로움과 궁금증을 자아내는 중이었다.

김준은 잠깐 여자에게 홀린 듯 나가 있던 정신을 고개까지 도리도리 돌려가며 되찾았다.

‘흠, 이럴 때가 아니지. 나는 좀비다. 좀비다.’

다시금 좀비로 빙의한 김준은 화려한 다리 끌기 기술을 선보이며.

지이익-.

지이익-.

먹잇감인 커플의 근처로 다가갔다.

4구역 규정상 러너들이 서치라이트를 잘 피해 가면 좀비들은 생명 띠를 뗄 수 없다.

그래서 김준은 가만히 기다렸다가······.

“으갸아악!!”

커플 중 여자를 향해 몸을 돌려 깜짝 놀래켰다.

그런데.

여자는 자신을 신기한 눈으로 쳐다볼 뿐 움찔 조차하지 않았다.

‘가, 강심장인가 보네. 그렇다면.’

여자 앞에 있던 남자는 방금 자신의 소리에 살짝 놀라며 여자를 바로 보호하는 모습을 보였다.

‘남자 쪽이 더 겁이 많을 수도 있어. 이쪽을 노린다!’

다시 다리를 지이익 끌며 남자의 근처를 어슬렁거렸다.

그리고 돌아오던 서치라이트에 남자의 몸이 닿을락 말락 하던 그 순간.

김준은 기괴하게 몸을 틀었다.

그런데.

“안돼!”

뒤에서 들려오는 큰 소리에 김준도 주변 좀비도 심지어는 놀래키려던 남자도 놀랐다.

아까는 자신이 신기한 듯 마냥 똘망똘망하던 여자가 근엄한 눈으로 살벌하게 흘겨보고 있었다.

마치 겁을 줘서 못 하게 하려는 것 같았는데, 겁은커녕 살짝 보이는 그 눈은 사람을 빨아들이는 것 같았다.

원래라면 소리를 낸 여자의 생명 띠를 떼는 것이 가능했으나 그를 포함한 좀비들은 왜인지 그럴 수 없었다.

그만큼 여자는 쉽게 다가갈 수 없는 포스가 있었다.

김준은 잠시 그 눈을 멍하니 바라보다 누군가를 떠올렸다.

어쩐지 익숙하다 했더니 여자의 눈은 배우 한보배와 아주 흡사했다.

그것도 그냥 닮았다고 넘기기엔 스크린 속 모습과 똑같았다.

자신이 갸웃거리자 여자는 오른손 검지를 올려 입에 가져가 대고는 싱긋 웃었다.

마스크 안에 있을 그녀의 입이 ‘쉿!’이라고 외치는 것 같았다.

그 모습은 영락없는 한보배다.

“에에?”

너무 깜짝 놀라 좀비어가 아닌 사람 소리를 내어버린 김준은 자신의 입을 틀어막았고.

한보배와 익숙한 얼굴의 남자가 광장을 모두 지나갈 때까지 움직일 수 없었다.

그녀의 싱그러운 웃음이 뇌리에 박혀 잊히지 않았기 때문이다.

3시간 뒤.

집에 도착한 김준은 크로스백을 내려놓고 안에 있던 러너들의 생명 띠를 꺼냈다.

총 37개.

아까 한보배를 본 뒤로는 하나도 떼어내지 못했다.

단 하나도.

연예인을 처음 본 것도 아니었는데 한보배 얼굴을 본 순간 얼었다고 해야 하나.

아무튼 처음 느껴보는 감정으로 그 감정은 마치······.

좀비를 처음 접했을 때와 같달까.

김준은 자신이 생각해도 뭔 소린가 싶어 고개를 저었다.

‘근데 한보배가 거길 왜 온 거지?’

아무리 생각해도 이상했다.

‘그러고 보니······.’

김준은 얼른 컴퓨터를 부팅시켜 인터넷 검색창에 이렇게 적었다.

[아라비안필름 대표]

엔터를 누르자 주르륵 쏟아지는 게시글들.

검색 결과를 이미지 탭으로 옮기자 아까 한보배 옆에 있던 남자의 얼굴이 보였다.

‘그 남자 맞네!’

남자는 ‘좀비 탈출’을 주최한 아라비안필름 대표 신바드였던 것이다.

김준은 여러 가지 생각이 들었다.

‘뭐지? 설마! 둘이 사귀나?!’

그렇다고 해도 이상했다.

‘데이트를 그렇게 사람 많은 곳에서? 대놓고??’

둘은 얼굴이 알려진 연예계 쪽 사람들이지 않나.

한 명은 배우고, 한 명은 제작사 대표이긴 하지만.

그러다 김준은 고개를 저었다.

‘뭔 상관이야. 내가 기자도 아니고, 그걸 왜 파헤치고 앉았냐. 오늘 재밌었으면 됐지.’

그는 신바드의 얼굴이 담긴 검색창을 지운 뒤.

자신의 SNS 계정으로 들어갔다.

대문짝만하게 ‘HANDS POP’이라고 적힌 이 SNS는 속칭 ‘핸즈’라고 불렸다.

‘핸즈’는 사진과 글 등의 게시글을 개인 계정에 자유롭게 올려 전 세계 사람들과 소통하는 것이 특징이었다.

김준은 3년 전부터 이곳에 체험 후기 위주로 게시글을 올렸었다.

그저 재밌어서 계속했을 뿐인데 어느새 자신은 핸즈팝 스타가 되어 있었다.

셀카를 찍어서 올린 적은 없었기에 얼굴이 알려지지 않아 귀찮음도 덜했다.

그는 목을 좌우로 스트레칭하며 새로운 게시글을 작성하기 시작했다.

[좀비 탈출 다녀온 후기]

*

[안녕하세요. 냉혈한입니다.

오늘의 체험 후기는 최근 화제 됐던 ‘좀비 탈출’인데요. 직접 다녀온 후기를 지금부터 시작하겠습니다.

우선 가장 좋았던 건 이번이 첫 주최라는 것이 믿기지 않을 정도로 체계적이었다는 점입니다.

몇백 명의 사람들을 인솔하는 게 쉽지 않았을 텐데, 현장에선 그 흔한 잡음 하나 나오지 않았습니다.

진행요원들을 많이 배치해 문제 해결을 바로바로 했기 때문이라고 생각합니다.

그만큼 참가자들을 배려하는 섬세함이 돋보였어요. 주최 측에서 많이 고민했다는 증거겠죠. (후략)]

“와, 이거 ‘좋아요’ 수 장난 아니게 올라가고 있는데요?”

홍보팀장의 밝은 얼굴이 보기 좋았다.

“그러게요? 그런데 이 ‘냉혈한’이라는 사람은 말투가 원래 이래요?”

“네! 컨셉이에요. 장난기 싹 빼고, 냉철하게 분석해서 신뢰도가 높아진 거래요. 그래서 이름도 ‘냉혈한’이잖아요.”

전생에선 SNS를 이 과장이 관리했기에 어떤 스타가 있는 줄 잘 몰랐다.

지금 생각해보면 트렌드를 꿰차고 있어야 하는 영화 제작사 대표가 몰랐다는 게 말이 안 된다.

이제라도 잘 알아둬야지.

“그렇구나. 근데 이 정도면 홍보 제대로 됐겠는데요?”

“영화 홍보뿐만이 아니고, 사이트마다 저희 회사명 검색도 많이 됐어요. 다음에는 언제 개최하냐는 말이 가장 많아요.”

홍보팀장의 말대로 ‘냉혈한’이라는 사람의 게시글엔 댓글도 폭발적이었다.

[와! 냉혈한님도 가신 거예요? 정말 가고 싶었는데ㅜㅜ]

[여러분 혈한이 말이 맞습니다. 진짜 꿀잼이었음.]

[저는 쓰레기 정리하는 팀 따로 있는 거 보고 반했어요!]

[넘어져서 다쳤는데 진행요원분 다급히 달려와서 약 발라주시고... 뜬금 폴인럽...]

반응도 전체적으로 긍정적이었다.

또 이번 ‘좀비 탈출’에서는 핸즈팝 스타 ‘냉혈한’의 후기보다 더 화제된 것이 있었는데 그건······.

아, 마침 여기 댓글에도 있다.

[근데 이번 좀비 탈출의 백미는 당연히 그거 아니겠어요? ㅎㅎㅎ 사비 털어서 좀비 체험하러 간 여배우요! ㅎㅎ]

며칠 전 탈출에 성공한 뒤 한보배는 이런 말을 남겼다.

-이 정도면 저희 아무도 못 알아봤겠죠?!

하지만 그녀의 일탈은 채 하루도 못 가 만천하에 알려졌다.

어쩔 수 없었다.

그녀의 미모가 모자와 마스크로는 가려지지 않는 걸 어떻게 하겠는가.

나는 처음부터 이렇게 될 줄 알고 있었다.

참가자들이 그녀를 알아보지 못하는 건 있을 수 없는 일이라고.

그래서 한보배의 제안을 듣고, 이런 생각을 했다.

차라리 이걸 역이용하자.

어차피 참가자들은 놀래키고, 놀라고, 쫓고, 쫓기느라 한보배에게 말 걸 타이밍조차 없을 것이다.

그러니 그녀를 알아보긴 하더라도 후기 정도 남기는 것이 다겠지.

이렇게 하면 처음부터 한보배를 홍보모델로 내세우는 것보다 화제성은 더 올라갈 것이고, 장점도 하나 더 있었다.

그녀가 아무것도 모른 채 러너를 100% 즐길 수 있다는 것.

그래도 양상철에겐 알려야 할 거 같아 행사 참여 직전 전화로 이 사실을 알렸다.

-허허! 그거 정말 재밌겠네요! 보배가 좋아하겠어요!

양상철은 흔쾌히 작당 모의에 합류했다.

그렇게 그녀는 ‘좀비 탈출’을 온전히 즐길 수 있었고.

인터넷엔 그녀의 목격담이 조금씩 올라오기 시작했다.

급기야 다음날에는 추측성 기사까지 올라왔다.

『좀비 탈출에 목격된 여배우. 정말일까?』

『참가자들의 목격담이 대부분 일치. 주최 측 관계자도 동행』

한보배뿐만 아니라 나까지 거론되면서 분위기가 슬슬 이상해지기 시작할 무렵.

우리는 공식 입장을 발표했다.

『좀비 탈출 아라비안필름 측 한보배는 깜짝 손님』

『화분 엔터 측. 단순히 추억을 만들고자 참여한 것』

『좀비 탈출, 한보배 사비로 참여. 광고나 협찬 절대 아니야』

『한보배, 좀비를 원래 좋아합니다』

그녀가 음주운전이나 마약을 한 것도 아니고, 단지 좀비가 좋아서 사비로 ‘좀비 탈출’에 참여했다는 사실은.

대중들에게 친근하게 다가갔다.

[이 언니는 나무늘보 성대 모사할 때부터 알아봤다.]

[우리 보배찡 하고 싶은 거 다 하게 놔두라구!!]

[근데 여기 참가하신 분들은 한보배 실물 봤다는 거 아님?! 아오! 나도 갈 걸!!]

[제가 그 성덕입니다! 누나 머리 묶은 거 너무 예뻐요. 그런 누나를 보면서 좀비인 척 연기해야 했던 내가 레전드······.]

마지막 댓글을 보니 누군가가 생각나는 건 왜일까.

그 남자 굉장히 열심히 하던데.

하여튼 ‘좀비 탈출’은 우리의 목적을 200% 달성한 뒤 성황리에 막을 내렸다.

그런 줄 알았는데······.

며칠 후.

따르르릉-!

사무실 전화기가 요란하게 울렸다.

“여보세요?”

누군가 전화를 받자.

또 따르르릉-!

다른 전화기가 울렸다.

“여보세요?”

그 전화도 직원이 받자 첫 번째 전화를 받았던 직원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아, 네. 한국 샘물이요. 네네. 그런데 어쩐 일로 저희한테 전화를······?”

두 번째 전화를 받았던 직원의 목소리도 들려왔다.

“예? 협찬이요?”

따르르릉-!

따르르릉-!

그러고는 사무실 전화기에 불이 나기 시작했고, 홍보팀장이 대표실 문을 활짝 열어젖혔다.

“대표님! 잠깐 나와보셔야 할 것 같은데요!”

나는 영문을 모른 채 밖으로 나가 상황을 살폈다.

직원들은 수화기를 붙잡고, 여기저기서 걸려온 전화들을 받고 있었다.

‘협찬’이라는 단어가 많이 들리는 걸 보니 기업에서 우리에게 뭔가를 해준다는 것 같긴 한데······.

이런 적이 뭐 한두 번이었어야지.

태연하게 홍보팀장에게 물었다.

“무슨 일입니까?”

“각종 업체에서 ‘좀비 탈출’ 2회 주최 시 자사 제품을 협찬하고 싶다는 전화가 끊이질 않고 있습니다.”

오호. 그렇단 말이지.

“그래요?”

“그리고 이것도 보셔야 할 것 같아요.”

홍보팀장은 들고 있던 태블릿을 내밀었다.

그곳엔 영어로 적힌 한 페이지가 있었다.

“에이든 브라운이 <왕국 : 역병의 시작> SNS에 올리신 건 알고 계시죠?”

그건 소피아가 호들갑을 떨며 알려온 덕에 잘 알고 있었다.

“예. 이거 그 사람 SNS 아닙니까?”

“맞습니다.”

태블릿을 받아들어 유심히 살폈다.

그곳엔 ‘좀비 탈출’의 포스터와 에이든 브라운이 적어둔 글귀가 적혀있었다.

[한국! 정말 이럴 거야?! 이렇게 재밌는 건 좀 같이 하자고!! 아니면 내가 한국으로 간다!]

‘좀비 탈출’ 때문에 내한을 한다고?

허허. 행동력 있는 청년일세.

“대표님. 그뿐이 아니고, 각국에서 자신의 나라에도 주최해달라는 SNS가 쇄도하고 있습니다.”

이것 참. 뜻하지 않은 일복은 언제나 환영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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