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18화. 으거으윽!
좀비를 좋아하냐고 뜬금없이 묻던 그녀는 지금 미사리 오픈 세트장 주차장에 남상훈이 와 있으니 잠깐만 와줄 수 있느냐고 부탁했다.
도대체 무슨 일인가 싶어 주차장으로 향했는데 남상훈이 정말로 처음 보는 차 앞에 서 있었다.
“상훈 씨!”
그는 난감한 표정을 짓고 있었고.
내 기분은 싸했다.
남상훈이 내게 꾸벅 인사하며 말했다.
“대표님. 이것 참······. 죄송합니다.”
다짜고짜 사과하던 그는 조용히 차 문을 열었다.
그 차는 승용차라 처음엔 매니저인 그의 차인가 싶었다.
하지만 내 예상은 빗나갔다.
그 안에는 한보배가 있었다.
“대표니임······.”
“응? 보배 씨. 여기는 어쩐 일로······?”
누군가 한보배를 알아볼지도 모르니 남상훈과 나는 차 안으로 얼른 들어갔고.
그 안에서 자초지종을 들을 수 있었다.
“그게 사실은 제가 좀비를 정말 너무 좋아하거든요. 아니! 사랑해요!”
그녀의 팬들이 방금의 말을 들으면 어떻게 생각할까.
자신이 좋아하는 배우가 좀비에게 사랑을 고백하다니······.
“물론 제가 이제 유명한 연예인이고 공인이기도 하지만요······.”
한보배도 은근히 능청스러워졌다.
본인 입으로 못 하는 말이 없어졌으니 말이다.
“어쨌든! 결론은 좀비 탈출이 너무 해보고 싶은 걸 어떻게 해요?!”
“그래서 인터넷으로 신청한 거예요?”
“네에······.”
사실 그녀가 두 달 전 내게 이런 속마음을 속 시원히 털어놨다면 나도 방법을 생각해볼 수 있었다.
한보배를 ‘좀비 탈출’의 모델로 발탁해 ‘여배우와 함께하는 좀비 탈출’ 뭐 이런 식으로 홍보 효과를 좀 더 높이는 방법도 있었을 테니까.
그럼 아라비안필름도 좋고, 한보배도 체험해보고.
이런 일석이조가 되었을 것이다.
뭐, 지나간 일이야 어쩔 수 없는 노릇이고.
“근데 막상 오니까 들어가기 좀 그러세요?”
나는 그녀가 이곳에 도착해서야 연예인이란 자각을 했을 거라고 생각했다.
이렇게도 많은 사람이 몰린 걸 두 눈으로 직접 확인했으니 자신이 저 사이에 끼어 행사를 즐길 수 있을까.
하고 말이다.
원래 사람은 가끔 뭔가 간절히 원할 때 이성을 지배당하기도 한다.
그러나 그녀가 내뱉은 말은 또 내 예상을 빗나갔다.
“아니요! 저는 너무 가고 싶은데! 상훈 오빠가 여기까지 같이 와놓고, 못 가겠다잖아요······.”
그녀는 마치 첫 해외여행을 앞두고, 기상악화로 비행기표가 취소된 거 같은 울상이었다.
그러자 남상훈도 자신을 변호했다.
“사실 제가 귀신의 집 이런 걸 질색합니다. 그래도 보배가 너무 가고 싶다니까 그래, 한번 가보자 하고 온 거예요.”
그러면서 그는 창밖을 가리켰다.
한 무리의 좀비 집단이 지나가는 사람들을 붙잡고 ‘으거으윽!’ 소리 내는 모습이 보인다.
“근데 저 모습을 보니 도저히 못 가겠습니다! 분장부터 해서 너무 실감 나잖아요! 저는 그래도 대표님과의 의리 때문에 <왕국 : 역병의 시작>도 끝까지 다 봤단 말이에요! 저기 들어가면 드라마 생각이 얼마나 나겠어요?”
방금 남상훈의 말이 딱 이 행사의 주최 목적이었다.
“근데 오빠 실눈 뜨고 봤잖아요.”
입이 부루퉁해진 한보배가 남상훈을 공격하자 그도 가만있지는 않았다.
“그래도 본 건 본거지! 또 하필이면 신청한 게 도망 다니는 러너라면서? 나는 진짜 못해!”
둘은 비슷한 울상이었지만, 그 속마음은 정반대였다.
여하튼 둘의 입장은 백번 이해 간다만, 안 되겠다.
이대로 내버려 뒀다가는 정말로 싸우겠다.
“잠깐만요.”
내 중재에 둘은 입을 꾹 다물었다.
“근데 보배 씨. 혹시 저한테 전화한 게 상훈 씨 못 간다고 하니까 같이 들어가 달라고 하려던 건 아니죠?”
“맞아요······.”
그녀와 행사에 참여하는 건 별로 문제가 되지 않는다.
그저 조금 귀찮을 뿐.
어떻게 해야 하나 고민하던 중.
잠깐만. 그렇게 하면 되겠는데?
괜찮은 생각이 떠올랐다.
“알겠어요. 저랑 같이 가죠. 상훈 씨는 쉬고 계세요.”
내 말의 둘은 서로 얼싸안을 듯 기뻐했다.
“예?! 감사합니다! 대표님!”
“우와아!! 신난다!!”
그 모습에 괜히 웃음이 나왔다.
싸울 땐 언제고.
역시 오랜 시간 함께 하는 건 다 이유가 있다.
직원들에겐 대충 근처에 볼일이 있으니 먼저 가라고 돌려보냈다.
지금은 행사가 시작되기 30분 전인 9시 30분.
나와 한보배, 남상훈은 차 안에서 만반의 준비 중이었다.
“이것저것 챙겨오긴 했는데요.”
남상훈과 그녀가 펼친 것은 한 가방.
그곳에는 모자부터 각양각색의 가발, 마스크, 선글라스까지 변장을 위한 도구들이 있었다.
그걸 보니 한보배가 ‘좀비 탈출’을 어지간히 하고 싶었구나. 생각부터 들었다.
“음, 이거랑 이거. 이 두 개만 해도 사람들이 못 알아볼 것 같은데요?”
내가 그중에서 고른 건.
검은색 야구모자와 회색 마스크.
“으잉? 선글라스는 못 쓰더라도 가발은 써야 하지 않을까요?”
“그게 더 눈에 띌 거예요.”
“하긴 그럴 수도 있겠네요.”
“대신 머리는 하나로 묶는 게 어때요? 뛰어다녀야 하니까 걸리적거리기도 하고.”
내가 ‘어때요?’를 말하고 있을 때부터 그녀는 손목에 있던 고무줄로 머리를 한껏 틀어 올려 묶고 있었다.
“이렇게요?”
“좋습니다.”
한보배는 목선이 예뻐서 머리를 묶는 것이 훨씬 낫다.
그런데 지금까지의 작품에서는 긴 머리를 풀어 내리는 스타일링밖에 없어서 아쉬웠다.
또 이렇게 해야 얼굴이 더 잘 보이기도 하니깐.
“자, 그럼 나가볼까요?”
“네에!”
우리는 차 문을 열고, 조심히 밖으로 향했다.
9시 55분.
행사가 시작되기 직전이라 그런지 그곳에 모인 사람들은 하나같이 긴장하고 있었다.
그리고 그중에는 숨죽이며 차례를 기다리는 우리도 있었다.
곧이어 10시가 되어 행사가 시작되고, 러너들이 차례대로 입장했다.
그동안 사람들이 한보배를 알아볼 뻔한 위기의 순간도 있었으나 우리는 유연하게 대처했다.
오히려 내 얼굴을 알아보는 사람들이 몇몇 있어서 나도 모자를 써야 했나 싶었지만.
곧 들어갈 순서였기에 그렇게까지 신경 쓰진 않았다.
대기 장소라 불빛이 훤한 거지.
안에 들어가면 껌껌할 것이다.
더구나 도망친다고 정신이 없어 알아볼 겨를도 없을 테고.
길었던 줄은 어느새 줄어 우리가 들어갈 차례가 되었다.
“133번, 134번 참가자 맞으세요?”
허리에 길쭉한 생명 띠 3개가 나란히 달린 밴드를 착용한 상태로 고개를 끄덕였다.
행사를 위해 고용한 알바생은 친절하게 말을 이었다.
“주의사항 꼼꼼히 읽으셨죠? 좀비는 때리시면 감옥 가요. 그러니까 절대로 때리시면 안 됩니다. 아셨죠? 그리고 혹시 도망치다가 다치는 일이 생기시면 중간중간 진행요원 배치되어 있으니까 큰소리로 외쳐주세요. ‘저! 다쳤습니다!’ 이렇게요.”
알바생은 마치 우리를 아이 다루듯 세세하게 알려주다가 설명이 다 끝났는지 빙긋 웃었다.
“자, 그럼 역병을 막고, 꼭 탈출하시길 기원하겠습니다! 좀~비 탈추울! 출바알! 들어가세요!”
아마도 놀이공원에서 일한 경력이 있는지 아주 능숙했다.
예정우한테 말해서 이 사람은 꺽 기억해두라고 해야겠다.
한보배와 나는 눈을 잠깐 마주친 뒤 입구로 들어갔다.
“으거억!”
“으어어어.”
“크악!”
“거어억.”
들어가자마자 보이는 건 실감 나는 연기 중인 좀비들이었다.
“갑시다. 보배 씨.”
한보배가 비장한 눈빛으로 고개를 끄덕였고.
우리는 ‘좀비 탈출’을 시작했다.
‘좀비 탈출’은 세트장 동선에 따라 총 4구역으로 나뉘었다.
먼저 1구역부터 4구역까지의 좀비들은 각각 속도가 달랐다.
1구역이 느릿하게 걷는 속도라면 4구역 좀비들은 뛰어다닐 수 있었다.
그래서 행사를 기획할 때 4구역에서 가장 많은 탈락자가 나올 거라고 예상했다.
또 전체적으로 소리와 빛에 민감하게 반응한다는 설정이라 큰 소리를 내는 것도 안 됐다.
구역별로 설명하자면.
1구역은 걸어 다니는 좀비들을 피해 러너가 뛰어서 탈출하는 거였다.
아무래도 시작이다 보니 준비 단계라고 할 수 있었다.
2구역은 설치해둔 각종 장애물을 넘으면서 위협해오는 좀비들을 피해야 했다.
뛰어넘어야 할 장애물부터 두 사람이 겨우 지나갈 좁은 통로나 기어서 올라갔다가 내려와야 하는 장애물 등이 있었다.
3구역은 미로.
미로를 탈출하면서 중간중간 나타나는 좀비로부터 생명 띠를 사수해야 했다.
그리고 마지막인 대망의 4구역은······.
“보배 씨. 괜찮아요?”
한 구역이 끝날 때마다 물을 마시면서 쉴 수 있는 공간이 마련되어 있었기에 우리는 3구역이 끝나고, 잠깐 숨을 골랐다.
2구역 끝날 때까지만 해도 러너들이 많이 탈락하지 않은 상태였기에 혹시나 누군가 알아볼까 싶어서 여기까지 쉬지 않고 달린 것이다.
한보배는 열심히 뛴 탓인지 언뜻언뜻 보이는 얼굴엔 땀방울이 송골송골 맺혀있었다.
“네! 너무 재밌어요! 진짜로! 대표님 이거 또 주최해 주시면 안 돼요?!”
그녀는 힘든 기색 하나 없었다.
“생각해볼게요. 그나저나 4단계가 좀 많이 어렵거든요?”
내 말에도 그녀는 지금이 마냥 좋은 얼굴이었다.
“괜찮아요! 할 수 있어요! 제가 이렇게 밖에서 사람들 사이에 있는 게 정말 오랜만이거든요. 그래서 너무 즐거워요! 지금!”
이거 원.
아드레날린이 폭발한 얼굴이다.
이럴 땐 말을 듣지 않을 확률이 높으니 얼른 출발이나 하자.
“알겠어요. 몸 최대한 낮추고 따라와요.”
“네엡!!”
나 참. 탈출하면서 이렇게 행복해하는 사람은 한보배 밖에 없을 것이다.
*
“와! 저 사람 좀 봐!”
4구역에 있던 좀비들은 한 남자를 보며 놀라움을 감추지 못했다.
좀비를 선택한 참가자들은 러너들을 위협하는 재미를 위해 이곳에 온 것이지만.
누구나 ‘음, 다들 열심히 도망치는군. 이 정도면 보내줘야겠어.’ 정도의 최소한에 자비라는 게 있었다.
그러나 4구역의 한 남자에겐 자비라고는 눈곱만큼도 볼 수 없었다.
그는 오늘만을 기다려 온 김준.
4구역은 꽤 넓은 광장으로 설치된 서치라이트들이 쉬지 않고, 뺑뺑 돌고 있었다.
좀비들이 빛에 예민한 설정이니 러너들은 이 서치라이트에 걸리지 않고, 광장을 빠져나가야 한다.
그런데 김준은······.
아무리 재빠른 사람이라 할지라도.
“으거어억!”
끈질기게 쫓아가 생명 띠를 회수해버렸고.
“어어! 아저씨! 잠시만요! 한 번만! 한 번만 봐주세요! 저 이제 하나밖에 안 남았어요!!”
아무리 예쁜 여자가 애원할지라도 냉철하게 자신의 역할에 충실할 뿐이었다.
‘애초에 좀비가 예쁜 여자를 구분할 리 없지.’
그리고 그는 유독 커플 참가자에 예민했다.
“앗! 오빠! 같이가아!!”
남자 참가자를 노리는 척하다가 여성 참가자의 생명 띠를 가차 없이 뜯어 버렸다.
그 때문에 남자 혼자 도망간 꼴이 되어 지금까지 4구역에서 싸운 커플만 6커플이 넘었다.
‘아무리 그래도 커플은 용서 못 한다!’
절대 최근 여자친구와 헤어져서 그러는 건 아니었다.
이제 김준이 메고 온 크로스백 안에는 약 37개의 생명 띠가 들어 있었다.
‘좋아! 100개 채우자!’
김준은 좀비로 분하면서부터 좀비어로만 이야기하고 있었기 때문에 기괴하게 웃어댔다.
“으거거거거걱!!”
슬금슬금.
주변 좀비들조차 그를 피하기 시작하던 그때.
김준의 눈에 아주 훤칠한 커플이 들어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