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감독보다 영화사 대표님-117화 (117/140)

#117화. 선착순이요?!

“안녕하세요!”

한보배, 한다훈 남매가 사무실로 들어오자 그곳은 약 1.5배 훤해지는 효과가 있었다.

“오셨어요.”

둘을 기다리던 내가 반갑게 맞이하자 한보배가 무언가를 내밀었다.

무슨 상자였는데 언뜻 봤을 땐 화장품 같았다.

“응? 이게 뭐예요?”

내가 그걸 들고, 멀뚱히 서 있자 이번에는 한보배의 매니저 남상훈이 양손 가득 쇼핑백을 든 채 안으로 들어왔다.

“대표님. 오랜만이네요. 잘 지내셨죠?”

그는 내게 짧게 인사한 뒤 내 뒤로 가 사무실 직원들에게 손에 들고 있던 것들을 일일이 나눠주었다.

가뜩이나 사무실엔 한보배와 한다훈을 처음 본 직원들이 있어 어수선했는데 남상훈의 쇼핑백을 받고는 더욱 소란스러워졌다.

“제가 이번에 화장품 광고를 찍었거든요. 이사하셨는데 찾아오지도 못했잖아요. 또 이번에 작품도 새로 시작하니까 일종의 뇌물? 이라고 할 수 있겠네요!”

말을 마친 한보배의 입꼬리가 한껏 올라갔다.

뒤에선 상자를 열어보고, 기쁨을 주체하지 못하는 직원들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와! 대박! 이거 못해도 10만 원은 넘을 것 같은데요?”

“그러게! 마침 스킨 다 떨어졌는데, 잘 됐다!”

나는 둘을 대표실로 안내하며 말했다.

“담부터는 괜찮으니까 빈손으로 와요. 알았죠?”

따라오던 둘은 병아리가 삐약 거리는 것마냥 동시에 대답했다.

“네에!”

“넵!”

차 PD가 내민 계약서에 직접 사인하는 한보배와 한다훈.

보통은 계약을 위해 배우들이 직접 제작사까지 찾는 일은 없다.

모든 업무는 회사를 통해서 하니까.

가뜩이나 화분 엔터와 우리는 합병까지 추진 중이었으니 더더욱 그랬다.

하지만 둘은 꾸역꾸역 와서 직접 도장을 찍고 싶다길래 그러라고 했다.

오늘 보니 역시 속셈이 있었다.

어쨌든 이 둘은 <왕국 : 시간의 비밀>의 시은과 정우 역에 각각 캐스팅됐다.

사실 신서영의 시나리오를 처음 봤을 때부터 이 둘을 생각하긴 했으나 내가 너무 작품에 많은 관여를 하는 건 아닐까 싶어 입을 꾹 다물고 있었다.

그런데 지유 역에 아람을 섭외하겠다고 호기롭게 외쳤던 그 날.

신서영이 캐스팅에 난항을 겪는 거 같아 슬쩍 꺼내 봤는데 그녀의 반응은 너무나도 의외였다.

-에에?! 왜 그 생각을 못 했지?! 대표님 혹시 캐스팅 매치하는 학원이라도 다니시는 거 아니죠?

그런 학원이 어딨냐.

황당했던 그 날이 지나고, 우리의 캐스팅은 순조롭게 이루어졌다.

한보배와 한다훈은 물론 아람까지 지구가 멸망하는 일이 있어도 출연하겠다는 의지를 보여왔으니 말이다.

나는 계약을 다 마치고 돌아가는 한보배와 한다훈을 마중했다.

“그럼 조심히 돌아가시고, 나중에 또 뵙죠.”

한보배는 갑자기 갈매기 눈썹을 만들더니 내게 말했다.

“대표님은 가끔 저희를 너무 비즈니스적으로만 대하시는 것 같아요. 그래도 저희가 알게 된 지 횟수로만 벌써 6년짼데······.”

시간이 벌써 그렇게 됐나.

“계약하러 오신 거니까요.”

나는 같이 일하는 사람과는 어느 정도 거리를 두어야 한다고 생각한다.

“흠······.”

한보배는 잠시 뭔가를 생각하더니 한다훈과 남상훈에게 이야기했다.

“먼저 내려가 있을래? 금방 갈게. 대표님이랑 상의할 게 좀 있어서.”

둘은 고개를 끄덕이며 사무실을 나섰다.

상의할 게 있다길래 그녀를 다시 대표실로 안내해야 하나 싶었는데 다행히 이야기는 곧바로 시작되었다.

주변 눈을 의식해서인지 아주 작은 목소리긴 했지만.

“대표님. 저 그거 봤어요.”

말을 할 때 주어를 빼먹으면 의미전달에 상당한 애를 먹는다.

“예? 뭘요?”

근래 어디서 무슨 실수라도 했나 싶어 머리를 최대한 굴려 가며 묻자 한보배는 왠지 창피해했다.

뭐지. 왜 본인이 저러는 거지.

“그, ㅈ비······. ㅌ”

“예?”

그녀의 말이 너무 들리지 않아 나도 모르게 큰 소리로 되물었다.

아마 지금쯤 직원들의 모든 귀는 우리를 바짝 향하고 있을 것이다.

“아, 그것참! 잠깐만 나와보세요!”

그렇게 나는 한보배 손에 이끌려 복도로 나가게 되었다.

“잘 안 들려서 그랬습니다.”

“좀비 탈출 있잖아요.”

좀비 탈출?

너무나도 생뚱맞았다.

갑자기 한보배 입에서 좀비 탈출 이야기가 왜 나오는 거지?

“그거 아라비안필름에서 주최하는 거 맞죠?”

‘좀비 탈출’의 홍보는 아직 본격적으로 시작되지 않았지만.

최근 새어 나간 건지 우리가 좀비 탈출 행사를 주최한다는 소식이 연예계 곳곳에 퍼졌다.

“그렇긴 하죠. 저희가 합니다. 왜요?”

“그게······. 혹시 신청 어떻게 해야 해요?”

좀비 탈출은 두 달 뒤부터 온라인으로 신청받는다.

“아직 멀었긴 한데 사이트 들어가셔서 신청하고, 참가비 입금하시면 되는데요?”

나는 그녀가 왜 묻는지 몰랐으나 친절하게 대답해줬다.

“주변에 누가 하고 싶으시대요?”

“그건 아니고······.”

“음, 혹시 누가 참가하고 싶다고 하신 거면 선착순이라 빨리하는 게 좋다고 말씀해주세요.”

그러자 한보배 얼굴이 사색이 되었다.

“선착순이요?!”

이게 사색이 될 정도인가.

“예.”

“그거 막 시간 맞춰서 클릭하고 그래야 하는 거 아니에요?”

“에이, 아무리 그래도 그 정도는 아닐 겁니다.”

그녀는 ‘그래도 혹시 모르는 건데······.’라며 중얼거리더니 또 물었다.

“지인들한테 나눠줄 표 따로 빼놓으시거나 그럴 생각은 없으시죠?”

“예. 그럴 생각은 없는데요?”

그러자 한보배는 뭔가를 결심한 듯 보였다.

“그렇다면 어쩔 수 없지! 수강 신청할 때의 기억을 되살린다! 해보는 거야!”

사실 그때까지만 해도 나는 그녀가 무슨 말을 하는지 몰랐다.

*

2달 후.

서울의 한 PC방.

인터넷 서칭 중 뭔가를 발견한 김준은 쓰고 있던 안경을 추켜세웠다.

‘응? 좀비 탈출?’

김준은 좀비라면 자다가도 벌떡 일어날 완전한 덕후라고 할 수 있었다.

그는 얼른 그 게시글을 더블클릭했다.

클릭하자마자 뜨는 한 이미지는 어떤 행사의 포스터였다.

검은색 바탕에 기괴하게 몸을 꺾은 좀비들이 보였고.

핏자국으로 쓴 것 같은 섬뜩한 글씨체로는 이렇게 적혀있었다.

[역병의 시작을 직접 막아라! 좀비 탈출!]

‘오오!’

김준은 자신도 모르게 아드레날린이 솟구치기 시작했다.

스크롤을 내리자 이미지 밑으로는 포스터를 퍼온 작성자의 사담이 보였다.

[얔ㅋㅋㅋ 아라비안필름 골 때리지 않음? 이거 주최한단다. <왕국 : 역병의 시작> 실제로 촬영한 오픈 세트장이 최근 개장했는데 야간에 거기 싹 다 불 꺼놓고 진행한다고ㅋㅋㅋ 여기 대표 멀쩡하게 생겨놓곤... 아니다. 이런 마인드라 그렇게 성공할 수 있었던 건가?!]

작성자의 사담은 의식의 흐름이라 유익한 정보가 썩 없었다.

김준은 인터넷에 ‘좀비 탈출’을 검색하기 시작했고.

약 10분 후.

그가 얻은 정보는 이랬다.

좀비와 러너를 구분해서 신청받아 참가팀을 나누며 행사 당일 좀비팀은 준비된 부스에서 좀비 분장을 받는다.

탈출이 시작되면 좀비는 행사진행자에 의해 각각의 구역으로 배치되어 러너가 부여받은 세 개의 생명 띠를 뺏는다.

러너는 좀비로부터 생명 띠를 지키면서 구역마다 있는 미션을 해결해 탈출한다.

올해 처음 주최하는 행사라 그런지 이 외에는 구체적인 정보랄 게 없었다.

‘무조건 참가지 이건.’

이 행사는 좀비 덕후인 김준이 항상 꿈꿔오던 행사였다.

다만, 고민이 있다면.

‘좀비로 신청할 것인가. 러너로 신청할 것인가.’

그것이 문제였다.

물론 김준은 둘 다 경험해보고 싶었다.

하지만 자신이 조금 늦게 이 행사를 발견한 덕분에.

아니다. 사실 늦은 것도 아니었다.

신청은 40분 전부터 매진될 때까지 받고 있었는데.

참가하고자 하는 사람이 얼마나 많은지 지금은 총 5회 중 4회의 신청이 이미 끝난 상태였다.

그는 평소 온라인에선 굉장한 인싸였던 터라 웬만한 소식은 다 꿰고 있었는데 하필이면 이 행사를 이제야 본 자신을 원망했다.

하지만 후회해봤자 뭣하겠는가.

자신이 늦게 본 것을.

‘그래도 둘 중 하나를 고르라면 역시!’

그는 눈을 반짝이며 [좀비]라고 적힌 곳을 클릭했다.

참가비 30,000원을 재빠르게 결제하고, 참가 시 주의사항을 꼼꼼히 읽었다.

대부분이 안전사고를 대비한 것들이었고.

마지막엔 유료 셔틀버스도 운행한다고 적혀있었다.

행사 시작이 밤 10시부터라 끝나면 미사리에서 집까지 어떻게 오나 싶었는데 다행이었다.

그는 어느새 달력을 보며 행사까진 며칠이나 남았나 세고 있었다.

‘러너가 생명 띠를 세 개씩 가진다고 그랬지?’

김준은 기대에 찬 얼굴로 다짐했다.

자신이 러너들의 생명 띠를 가장 많이 가져가는 좀비가 되고 말 거라고 말이다.

*

‘좀비 탈출’ 행사는 성공적이었다.

포스터를 제작해 온라인 홍보를 막 시작하던 처음엔 전국 방방곡곡에 숨어있던 좀비 마니아들 사이에서 소소한 인기를 끌더니.

어느새 신청과 문의가 폭발적으로 늘었다.

총 5회 중 4회가 진행된 지금은 친구, 연인, 심지어 동호회나 회사 동료들과 다녀왔다는 후기들이 난무했다.

참가자들이 좀비와 러너로 각자 역할이 있는 행사라 혹시나 몰입도로 인해 안전사고라도 생기지 않을까 노심초사했는데.

다행히 큰 사고는 없었다.

사무실엔 벌써 다음 행사 문의가 끊이질 않는다.

“와! 좀비를 좋아하는 사람들이 이렇게나 많구나!!”

행사는 사업팀과 홍보팀이 주관했기에 마지막 날에는 구경하고 싶다는 사무실 직원들을 데리고, 미사리를 찾았다.

“그러게요. 다 매진됐다 그랬을 때 진짜 놀랐는데!”

오픈 세트장 입구에 차려놓은 임시 부스에는 섭외한 분장팀들의 손이 바빴고.

분장이 완성된 좀비들은 돌아다니며 주변 사람들을 놀라게 하느라고 정신이 없는 모습이었다.

부스 옆에는 출출할 참가자들을 위한 푸드트럭이 몇 대 와 있어 축제 분위기를 풍성하게 꾸며주고 있었다.

그 축제가 좀 기괴하긴 했지만.

나경은 푸드트럭을 가리키며 사람들에게 물었다.

“우리도 사 먹을까요? 근데 대표님 저희는 참여 못 하는 거- 으아아아악!”

별안간 비명에 모두가 놀라 나경의 안위를 살피려다가.

“아아아악!!”

예정우의 비명만 추가되었다.

분장을 마친 한 남자 참가자가 우리에게 조용히 다가와 얼굴을 들이밀고 있었기 때문이다.

남자는 우리가 너무 놀라자 태도를 바꿔 꾸벅 고개를 숙였다.

“어! 죄송합니다. 다들 이렇게 하는 분위기길래······.”

나경은 놀란 심장을 쓸어내리고 있었고.

예정우는 심하게 놀란 것이 민망했는지 큰 소리로 말했다.

“하하! 그렇죠! 저희도 그런 분위기에 맞춰서 놀라드린 것뿐입니다! 아하하!”

그가 거짓말 중이라는 건 거기 있던 모두가 알고 있었지만, 그냥 넘어가 줬다.

좀비 분장 남자는 다시 한번 거듭 사과하며 다른 곳으로 향했고.

진정한 나경의 말대로 푸드트럭에서 뭐라도 사 먹으려던 그때.

주머니에서 핸드폰이 울리길래 꺼내 들었다.

지잉-.

지잉-.

[한보배 배우]

응? 무슨 일이지?

의아하며 전화를 받았는데, 그녀의 엉뚱한 목소리가 들려왔다.

-대표님! 혹시 좀비 좋아하세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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