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감독보다 영화사 대표님-116화 (116/140)

#116화. 대표님의 큰 그림

아라비안필름의 칸 입성은 벌써 2번째였다.

허훈의 <처절한 인생>에 이어서 <처단자>까지.

그래서인지 인터뷰 등의 행사와 프리미어 상영회는 저번보다 적응하기 쉬웠고, 능숙하기까지 했다.

“윤서 씨. 너무 조금 먹는 거 아니에요?”

칸에 온 지도 벌써 3일째.

오늘은 시상식 날이라 아침부터 할 일이 많아 일찍부터 호텔 조식을 먹으러 내려왔는데 임윤서가 접시에 풀때기들을 가지런히 세고 있었다.

“드레스가 조금 타이트해요. 안 먹으려다가 배가 너무 고파서······.”

그녀를 잘 몰랐을 땐 늘씬한 그 몸매가 체질인 줄 알았다.

하지만 그녀는 운동과 식단을 유지하며 아주 철저하게 관리하는 배우였다.

<처단자> 촬영장에 나올 땐 약간의 붓기조차 허용할 수 없다며 물도 조절해서 먹었던 그녀다.

나는 전생에서 배우들이 받아 가는 과한 출연료를 항상 못마땅해했었는데, 그녀의 노력을 알고 난 뒤로는 함부로 판단할 수 없었다.

“어휴. 굶으면 시상식에서 쓰러진다니까요. 저기 보세요.”

내가 고갯짓을 해 보이자 임윤서의 고개가 뒤로 돌아갔다.

그곳에는 고진주, 고덕현 부녀가 조식 뷔페를 쓸고 있는 현장이 보였다.

“저 정도는 먹어야 단상에 올라간다니까요?”

임윤서가 짧게 웃었다.

“저는 후보 아니라서 단상 올라갈 일은 없는데요?”

“레드카펫도 밥심으로 걷는 거 모르세요? 하여튼 오늘은 시상식 끝나고라도 많이 드세요.”

“네에. 알겠습니다. 대표님.”

그렇게 우리의 짧은 대화가 끝난 줄 알고, ‘조식은 역시 달걀 요리지.’라며 쌓여있던 스크램블을 푹 펐다.

그런데.

“그, 저기. 대표님.”

“예?”

스크램블을 푸다 말고, 그녀를 돌아보자 임윤서가 수줍은 듯 입을 달싹거리고 있었다.

“무슨 할 말 있으세요?”

“감사합니다.”

나는 그 말이 뜬금없어 물었다.

“응? 뭐 가요?”

“이런 작품 만날 수 있게 해주신 거요.”

난 또 뭐라고.

“제가 뭐한 게 있습니까. 윤서 씨가 액션 연습이랑 연기 잘하니까 고 감독님이 캐스팅한 거죠.”

“거짓말하지 마세요. 고 감독님께 여쭤보니까 저 계속 추천하신 분이 대표님이라고 하시던데요?”

그것 맞다.

무조건 내가 임윤서를 주장했지.

“에이, 고 감독님 한 고집하는 거 아시잖아요. 제 말이라고 들으실 분이 아닙니다. 저랑 생각이 같으셨던 거지.”

“그래도요. 그때 저한테 영어 공부랑 대근육 운동 열심히 하라고 하셨을 때는 솔직히 속으로 욕했거든요?”

여배우에게 술 취해서 한 훈장질이었으니 욕먹을 만도 하다.

“그런데 이제 와서 생각해 보니까 그게 다 대표님의 큰 그림이었던 거 같다니까요? 맞죠?”

미래를 알고 있었으니 큰 그림도 맞긴 하지.

하지만.

“제가 그렇게 멀리 볼 수 있는 사람이 아닙니다. 그냥 윤서 씨가 해두면 좋을 거 같다는 생각이 들었어요. 이상하게.”

곧이곧대로 이야기할 순 없다.

임윤서가 ‘풋’하고 웃었다.

“그런데 웃긴 게 뭔지 아세요? 글쎄 그다음 날 저 바로 영어랑 PT 수업 시작했어요. 뭔가 대표님 말은 꼭 이루어질 것 같았나 봐요.”

“그래요?”

“네에! 정말이라니까요?”

격렬하게 자신의 말을 믿어달라길래 웃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알겠어요. 그러면 오늘도 밥 먹고 힘냅시다.”

그렇게 우리는 각양각색으로 담아온 조식을 먹으며 시상식 준비를 시작했다.

*

시상식장에서 내 옆자리였던 고덕현은 굳어있었다.

“괜찮으세요?”

내 물음에 그가 눈을 깜박였는데 그 모습은 마치 로봇을 연상시켰다.

“아하하. 이것 참. 청심환까지 먹었는데 너무 떨리네요.”

모르는 사람이 보면 마치 촬영상 발표를 앞둔 것처럼 보일지 모르겠으나 그의 손에는 트로피가 이미 들려있었다.

그렇다.

고덕현은 한국인 최초로 촬영상을 받았다.

자신의 이름이 불리고 난 뒤에도 그는 전해성과 단상에 올라가 예상외에 담담함을 보였다.

-감사합니다. 이 상의 영광은 제 딸인 고진주 감독과 같이 고생한 스태프들. 영화를 제작한 아라비안필름의 신바드 대표님과 그 휘하 직원분들 덕분입니다.

걱정했던 것보다 훨씬 긴장을 덜 하는 모습이었다.

역시 연륜은 무시하지 못한다.

그런데 그랬던 그가 왜 이리도 떨고 있느냐면.

“이제 곧 황금종려상 시상이죠?”

자신의 딸인 고진주 감독이 단상 위에 올라가느냐. 올라가지 못하느냐의 순간이 다가오고 있었기 때문이다.

“예. 이제 곧일 것 같습니다.”

우리의 짧은 잡담이 끝나고 몇 분 뒤.

세계 모든 영화인이 집중하는 황금종려상의 시상이 시작되었다.

보타이를 맨 노신사가 나와 마이크를 잡았는데 그는 왕년에 할리우드를 주름잡았던 배우다.

비디오 시절 참 좋아하던 배우를 눈앞에서 보고 있자니 감회가 새로웠다.

“황금종려상 시상을 하게 되어 영광입니다.”

그 뒤로 그는 시상하게 된 소감을 몇 마디 덧붙였다.

그리고······.

“잡담이 너무 길었네요. 자, 이제 너무나도 긴장하고 있을 후보들을 위해 이만 시상하도록 하겠습니다.”

황금종려상의 주인을 부를 생각 때문인지 그의 얼굴은 활짝 피어있었다.

“제64회 칸 영화제 황금종려상의 주인은 <처단자>의 고진주. 축하합니다!”

사실 그 뒤부터는 기억이 잘 나지 않는다.

턱시도와 드레스를 입은 이들이 일제히 일어서서 박수를 보냈고.

그 소리가 모여 우렁차게 귀를 찔렀다.

고덕현은 일어서지도 못한 채 울고 있었으며 딸은 그런 아버지를 끌어안았다.

너무 큰 기쁨의 순간을 맞이하면 이렇게 되는구나.

순간 희미해지려는 정신을 얼른 붙잡았다.

“감독님. 올라가서 소감 말씀하셔야죠. 아버님은 제가 신경 쓸게요. 해성 씨 감독님이랑 어서 올라가세요.”

고개를 끄덕인 전해성이 고진주를 데리고, 단상으로 올라갔다.

그사이 나는 고덕현을 진정시켰고.

다행히 우리는 수상소감을 제정신으로 들을 수 있었다.

고진주는 올라가면서 울었는지 눈이 벌게진 상태였다.

근처에서도 훌쩍거리는 소리가 들려왔는데 옆 옆 좌석에 앉아 있던 임윤서였다.

아마도 고생했던 것들이 주마등처럼 지나간 모양이다.

“이렇게도 빨리 이 상을 받으리라고는 정말 꿈에도 몰랐습니다. 더구나 아버지와 함께하는 영예는 더더욱 알 수 없었습니다.”

전해성이 그녀의 말을 옮기자 고진주는 다시 마이크 앞에 섰다.

“그런데 제 이름이 불리는 순간 느꼈습니다. 인생은 정말 모를 일이구나. 열심히 하면 이렇게 알아주는구나. 정말로 감사합니다.”

그 뒤로 고진주의 수상소감은 고마움을 전하는 것에 치중되었고.

그 고마움을 모두에게 전달했다는 생각이 들었는지 소감을 갈무리할 분위기를 보였다.

“제가 영화를 시작한 이유는 사실 아버지께 인정받기 위한 것도 있었습니다. 그래서인지 그 시절 저는 열등감 덩어리였던 것 같아요.

그런 저에게 현장은 도망치고 싶은 감옥과도 비슷했습니다. 그러다 한 분이 제게 이런 말씀을 하시더라고요. 지금의 힘듦은 제가 못해서가 아니라 모든 사람이 겪는 성장통일 뿐이라고. 끝나면 무조건 성장해있을 거라고요.

그 말 덕분에 이 자리까지 올 수 있었습니다. 지금 어딘가에서 힘들어하실 분들께 이 말을 꼭 하고 싶었습니다.

저 말 외에도 저를 이곳까지 안전하게 이끌어주신 신바드 대표님께 정말로 감사하다는 마음을 전하고 싶습니다.”

가슴 한구석에서 뜨거운 무언가가 올라오는 것이 느껴졌다.

수상소감을 마치고 꾸벅 인사하는 고진주를 향한 박수는 다시 한번 쏟아졌고.

나도 진심을 담아 그녀를 축하하며 다짐했다.

<신바드의 모험>에서 알려준 ‘독특한 감성’의 고진주의 재능이 만개한 이 날을 마음껏 만끽하겠다고.

*

[고덕현 촬영 감독님. 본인 수상에는 덤덤하시면서 딸 수상에 오열하실 때 같이 울었습니다.]

[<처단자> 부녀 수상할 만하다! 오늘부터 제 인생 영화입니다.]

[임윤서 배우는 왜 상 안 줬나 싶을 만큼 고생했던데, 영화관에서 여배우 멋있다는 생각이 든 건 정말 오랜만이네요.]

[임윤서가 진짜 찐이다. 영화 보기 전엔 이미지가 영 안 맞는 것 같았는데 완전 찰떡!]

[*스포주의* 마지막에 은서 딸 살아있었잖아요? 이거 죽지 않는 능력 물려받은 거 맞죠?! 속편 암시 맞죠?!]

[것보다 여기 무술팀 도대체 어딥니까? 몸을 전혀 사리지 않던데?!]

[획기적인 액션이라길래 기대하고 봤는데 그 기대를 뛰어넘네요! 끝날 때쯤엔 폭발 정도는 밥 먹듯 편해졌음. 이런 영화에서 사고 한번 나지 않았다는 게 너무 신기하네.]

[아예 청불로 나온 건 정말 잘한 것 같다. 괜히 15세로 나왔다가는 죽도 밥도 안 됐을 듯.]

[초반 성당 총격 장면 롱테이크는 정말 예술이다. 아직 안 보신 분들은 극장에 여분의 바지를 챙겨가시오.]

[진짜 아라비안필름 없었으면 한국 영화계 어쩔 뻔했어!]

칸을 다녀온 뒤로는 시간이 정신없이 흘렀고.

<처단자>가 화려하게 개봉했다.

사실 청불 영화라 국내 관객 수에 대한 걱정이 조금 있었다.

그러나 첫 주 스코어 300만이라는 기록으로 쾌조의 스타트를 보여 걱정은 씻은 듯이 사라졌다.

최근 언론은 <처단자>가 청불임에도 어떤 기록까지 깰 것인가를 주목하며 연일 기사화해 이 또한 홍보로 이어졌다.

물론 ‘황금종려상 받은 작품’이라는 수식어 하나만으로도 다른 홍보는 필요 없었지만 말이다.

“감독님. 원하시는 배우는 있어요?”

회의실에 모인 신서영과 차 PD 그리고 나.

우리는 <왕국 : 시간의 비밀> 준비에 박차를 가하고 있었기에 하루가 모자란 지경이었는데.

가장 중요한 캐스팅이 아직 완료되지 않은 탓도 있었다.

“음, 우선 시은, 정우, 지유. 이렇게 세 명이 급하긴 한데······.”

말끝을 흐리는 걸 보니 아직 마음을 정하지 못했나 보다.

<왕국 : 역병의 시작> 6화는 주인공이 위험에 빠져 죽기 일보 직전에 끝이 난다.

엄청난 궁금증을 남긴 채 끝났기에 사람들은 시즌 2에 대한 갈망이 더욱 심했다.

그리고 <왕국 : 시간의 비밀>은 주인공이 다시 현대로 돌아가 위험에서 벗어나면서 시작된다.

그 기점을 계기로 그는 과거와 현대를 왔다 갔다 할 수 있게 되고, 그 능력으로 더욱 좀비 퇴치에 과감해진다.

그러다 실수로 현대의 여자 시은을 과거로 같이 데리고 오게 되는데.

사실 그녀는 일부러 주인공에게 접근한 것이었다.

회수가 지나면서 밝혀지겠지만, 그녀는 정우라는 남동생이 있는데 그는 현실에서 좀비가 되어버렸다.

시은은 의문의 기관으로부터 과거로 가서 주인공을 죽이면 남동생을 인간으로 돌려주는 백신을 맞게 해주겠다는 제안을 받고, 접근한 것.

하지만 막상 과거로 와 보니 주인공을 죽이면 자신은 다시 현실로 돌아갈 수 없는 처지였고.

무지를 깨달으며 과거의 좀비 사태를 바로잡으면 현실의 동생도 좀비가 될 일은 없을 거라고 설득하는 주인공과 손을 잡는다.

이쯤 이야기의 분위기는 환기되는데.

시은과 같이 현실을 오가던 중 정우까지 과거로 오게 되면서부터다.

구한말 시대로 온 정우는 현대에서처럼 좀비가 아닌 인간이었다.

제정신인 동생을 오랜만에 상봉한 기쁨도 잠시.

시은을 유혹했던 의문의 기관과 마주하면서 셋은 고군분투한다.

지유는 그 과정에서 정우와 사랑에 빠지는 과거의 여자였다.

당연한 말이지만, 캐스팅은 이야기에 맞는 이미지의 배우들을 찾는 것이 굉장히 중요하다.

시은은 자존심과 승부욕이 아주 강하면서도 자신이 해내야겠다고 생각한 일에는 몸을 아끼지 않는 캐릭터였다. 동생에 대한 사랑이 큰 것은 말할 것도 없고.

정우는 한마디로 바르고, 잘생긴 청년. ‘좀비 분장을 뚫고 나오는 잘생김’이 포인트라던 신서영의 말이 인상 깊었다.

마지막으로 지유는 이 셋 중 분량이 가장 없었다.

하지만 임팩트는 그 누구보다 컸다.

시즌 2 마지막을 이끌고 간다고 봐도 무방한 캐릭터였기 때문이다.

“지유 역할은 특별출연으로 해서 탑 배우를 데리고 와도 괜찮을 것 같던데요.”

내 말에 신서영이 고개를 격하게 끄덕였다.

“그럼 저야 너무 좋죠! 그런데 분량이 너무 없어서 하려는 분이 계실까요?”

<왕국 : 역병의 시작>이 큰 인기를 얻었기에 하려는 배우는 분명 많을 것이다.

하지만 내가 생각하는 탑 배우의 기준은 조금 달랐다.

“저는 최근에 전 세계적으로 이목을 끌었던 배우가 좋을 것 같아요.”

컴플릭스를 보는 시청자들에게 특별출연으로 다가오려면 이 정도는 돼야 탑이지.

신서영과 차 PD가 놀라 눈을 끔뻑였다.

“예? 그런 분이 저희 작품에요? 어떤 분을 생각하고 계세요?”

“아람 씨요. 섭외는 제가 하겠습니다.”

끔뻑거리던 눈들은 당황해 이리저리 굴러다녔지만, 나는 당당했다.

구두로라도 한 약속은 약속이니 그녀가 우리의 출연 요청에 응할 것은 너무나도 분명했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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