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15화. 정말로 영화에 진심인 기업
오늘은 월요일 오전.
팀장 회의가 있는 날이었다.
회의실 문을 열고 들어가자 직원들은 나를 반갑게 맞았고.
“오셨습니까!!”
“예. 다들 주말 잘 쉬셨어요?”
“넵!”
우리는 다소 격양된 분위기에서 회의를 시작했다.
빔까지 동원한 오늘 회의의 중요 안건은 일주일 전 예정우에게 지시했던 행사였다.
스크린에 레이저를 쏘아대며 열성적으로 설명하는 이는 예정우 휘하에 있는 사업부 과장이다.
스크린 맨 위에는 이렇게 적혀있었다.
[좀비 탈출]
“아무래도 공포 테마이니 가장 날이 더운 7월 말에서 8월 초까지 약 5회에 걸쳐서 야간에 진행하는 것이 좋을 것 같습니다. 참가자들은 선착순으로 신청받아 참가비를 받을 예정이고, 즉석에서 좀비 분장 등을 할 수 있는 부스와 탈출에 성공한 참가자들은 준비된 기념품을 가지고 갈 수 있게 준비할 예정입니다.”
나는 그날 해가 지고 있던 미사리의 <왕국 : 역병의 시작> 세트장을 보면서 문득 이런 생각이 떠올랐다.
세트장이 문을 닫은 으슥한 이곳에서 사람들이 직접 그 공포를 체험해보는 건 어떨까.
<왕국 : 역병의 시작> 팬들은 물론 좀비를 사랑하는 사람들에겐 구한말 시대로 들어가 좀비와 마주하는 행복한 경험이 될 것 같았다.
오픈 세트장 관람이 끝난 이후 레이스를 시작할 예정이니 장소에 대한 부담은 전혀 없었고.
참가자들의 적정 참가비로 우리가 손해 볼 일 또한 없었다.
물론 이 행사는 돈을 벌자고, 주최하는 것이 아니었다.
“구체적인 예산과 참가비는 현재 정리 중입니다. 이번 주 내로 보고드리겠습니다.”
“예. 알겠습니다.”
기업은 이미지가 아주 중요하다.
이 이미지라는 건 소비자가 원하는 것이 무엇이며 어떻게 소통할 것인가를 끊임없이 고민하며 만들어나가야 하기에 절대로 한순간에 구축해낼 수 없었다.
그렇다면 소비자가 우리 회사에 원하는 것은 무엇일까.
영화업이 기본인 아라비안필름은 당연히 관객들이 보고 싶고, 공감할 수 있으며 재밌는 영화를 제작하는 것이 가장 첫 번째였다.
나는 여기서 더 나아가 이 콘텐츠들을 오감으로 느끼며 체험할 수 있는 것.
그것이 소비자가 진정으로 원하는 것이며 소통하는 방법이 아닐까 생각했다.
지금 대중이 생각하는 아라비안필름의 이미지는 대략 이러했다.
‘영화에 진심인 기업.’
나는 이 ‘좀비 탈출’ 행사가 우리 기업의 좋은 이미지를 단단하게 쐐기 박아줄 거라고 믿는다.
‘정말로 영화에 진심인 기업’
으로 말이다.
‘좀비 탈출’의 준비는 그렇게 시작되었다.
*
『‘왕국 : 역병의 시작’ 컴플릭스 시즌 2 확정』
『신서영 감독. 시즌 2는 조금 더 넓은 세계관이 될 것』
『‘왕폐인’이라고 아시나요? 새로운 신조어까지 탄생시킨 왕국 시리즈』
『신서영을 비롯한 왕국 사단! 팬들의 성원에 보답해 이번에도 열심히 만들어 보겠다』
『왕국 시즌 2 제목은 ‘왕국 : 시간의 비밀’, 그들은 또 어떤 충격을 안겨줄 것인가』
소피아에게서 걸려온 전화는 전체적으로 다급했다.
아마도 컴플릭스는 <왕국 : 시간의 비밀>의 계약을 최대한 빨리 진행하려고 한 모양이다.
-대표님! 승인 났습니다! 빨리 계약하시죠!!
그런데 그 목소리가 얼마나 다급했는지, 순간 국제전화라 그런 건가 싶을 정도였다.
-그럼요. 계약 진행해야죠. 계약조건에 드릴 말씀이 좀 있습니다.
소피아는 ‘계약조건’이라는 마성의 단어를 꺼냈음에도 전혀 당황하지 않았다.
-그럼요! 원하시는 조건이 뭔가요?!
오히려 내가 무슨 말을 꺼낼지 다 알고 있는 듯했다.
-제작 마진을 30%로-.
-오! 그럼요! 당연하죠!
소피아가 받아들이는 속도는 너무나도 쿨해 당황스러울 정도였다.
-그 정도는 예상하고 있었습니다. 시즌 1은 대표님께서 맞춰주셨으니 이번엔 저희가 원하는 조건에 맞춰드려야죠!
나는 당연히 컴플릭스 측에서 이 조건을 단번에 받아들이지 않을 거라고 생각했다.
직접 협상하기 위해 미국행 비행기표를 박지연에게 부탁하려고 했으니 말이다.
그런데 땅 짚고 헤엄치듯 이리도 손쉬운 협상이라니?
전생과 현생을 다 합쳐도 컴플릭스를 상대로 이런 딜을 할 수 있는 제작사는 없을 것이며.
패기 넘치는 제작사가 있더라도 받아들여지지 않았을 것이다.
그만큼 우리의 노력이 눈으로 보이는 순간이었다.
-보스가 이미 위에 보고해둔 상태더라고요. 위에서도 <왕국 : 시간의 비밀> 놓칠까 봐 서둘러 진행한 거고요.
그러면서 소피아는 내게 꼭 하고 싶은 말이 있었는지 들뜬 목소리를 진중하게 바꾸었다.
-대표님. <왕국 : 역병의 시작>은 아라비안필름에서 <왕국> 시리즈를 생각하는 열정이 얼마나 대단한지 알려주었습니다.
처음 저는 한국인들이 모든 일에 경쟁하며 살아간다고 생각했어요. 그런데 대표님과 아라비안필름 직원들을 보면 꼭 그런 것만은 아닌 것 같더라고요.
<왕국> 스태프들은 누군가를 이기기 위해서라기보단 작품을 생각하는 마음에서 치열했던 거잖아요? 결과물은 그 노력을 절대 배신하지 않습니다.
<왕국>은 저희가 충분히 대우해 드릴만 한 작품이에요.
소피아의 말은 한마디로 극찬이었다.
*
봄의 기운이 완연한 오후.
어째 사무실에 있으면 더 나른해진다.
커피라도 마셔야겠다 싶어 대표실 문을 열고 밖으로 나갔는데.
“드디어! 드디어 끝났다아!!”
사무실 한구석에서 누군가가 벌떡 일어나는 소리에 그곳에서 나른함을 느끼던 모두가 깜짝 놀랐다.
“으잉?! 뭐, 뭐가요?!”
예정우가 특히나 많이 놀라는 걸 보니 식곤증에 시달렸던 모양이다.
소리를 지른 이는 고진주.
그녀의 겉모습은 피폐해 보였으나 속은 전혀 그렇지 않은 듯했다.
“<처단자>! 드디어 끝났습니다!!”
눈빛이 얼마나 또렷한지 똘똘 뭉쳐 빛나고 있었기 때문이다.
마치 이 순간을 기다리고 기다리던 야생의 사자 같았다.
결코 그녀의 머리가 엉망이었기 때문은 아니다.
그만큼 멋있어 보였다는 거지.
“오올! 고 감독님! 이제 고생 끝! 행복 시작이네요!”
예정우의 말을 바로 내가 이었다.
“감독님. 혹시 지금 사무실에서 시사회 가능합니까?”
사실 나는 <처단자>에 대한 기대가 어마어마했다.
영화는 후반 작업을 하면서 관계자들이 중간중간 확인하는 시간을 갖는데.
<처단자>는 지금까지 봐왔던 영화들과는 달라도 너무 달랐다.
탄탄한 스토리부터 임윤서의 연기, 화려한 액션.
모든 면에서 완벽했으니 무슨 일을 내지 않는 것이 이상하다고 생각들 정도였다.
그런 영화의 최종본이 나왔다니 가슴부터 두근거렸다.
“지금요?”
고진주는 잠깐 당황하더니 고개를 끄덕였고.
그 끄덕임을 본 나경이 곧바로 행동했다.
“30분만 주세요! 세팅 금방 할께요!”
아라비안필름은 영화사다 보니 사무실에 모여 영화를 보는 경우가 더러 있었다.
그래서 안용덕에게 사무실 리모델링을 요청할 때부터 넓은 사무실에도 빔 설치를 추가했다.
근처에 있던 모든 직원이 달라붙어 창문을 닫고, 커튼을 친 뒤 스크린을 내려 세팅하자 사무실은 금세 작은 영화관으로 변신했다.
“시작하겠습니다!”
언제나 이런 일에는 앞장서는 나경이 외치자 직원들이 하나둘 모여들었다.
각자의 손에는 주전부리들이 하나씩 들려있었다.
누군가 사무실 불을 끄려는데.
띠링-!
뭔가의 알림음이 울렸다.
“다들 매너모드 부탁드립니다!”
나경의 엄숙한 목소리에 이 과장이 뒷머리를 긁적이며 고개를 꾸벅 숙였다.
“죄송합니다! 혹시나 영화제 메일이 올까 봐서······.”
그렇게 그는 자리에서 일어나 자신의 자리로 향했다.
나경은 이 과장이 다시 자리로 올 때까지 기다려줬다.
1초.
2초.
3초.
그 후로도 몇 초가 더 지났는데 이 과장이 모니터에서 눈을 떼지 못하고, 돌아오지 않자 나경이 물었다.
“저기, 재민 대리. 아직 멀었어-”
“아악! 대박! 무슨 이런 일이 다 있어요?!”
이 과장의 돌발행동에 모두의 시선이 돌아갔다.
“황금종려상! 황금이래요!!”
이 과장의 문장은 많은 것을 빼먹었지만.
그 뜻을 모르는 이는 없었다.
다들 믿지 못했을 뿐.
“그게 도대체 무슨 소리야?!”
예정우가 이 과장의 모니터로 통통 튀어 뛰어간 뒷모습처럼 말이다.
*
『한국인 최초 황금종려상 나오나. ‘처단자’ 칸 초청에 후보까지』
『감독 고진주, 배우 임윤서 칸 입성! 영화계에 불어오는 여성 파워』
『겹경사에 흥에 겨운 ‘처단자’! 황금종려상과 촬영상 후보!』
『세계 최초, 부녀가 동시에 수상하는 영예 얻을까?』
『칸 영화제 측. ‘처단자’는 획기적인 영화』
<처단자>는 무려 칸의 최고 영예 황금종려상 후보에 올랐고.
고덕현은 촬영상 후보에 올랐다.
딸과 아버지가 같은 영화제 후보에 오른 것이다.
그것도 칸 영화제에.
두 부문 모두 한국인의 수상은 아직 없었고.
부녀가 수상한 적은 세계적으로도 없었다.
그렇기에 이 희대의 사건(?)은 대한민국을 들썩이기 충분했다.
그 뜨거운 열기를 폐부로 직접 느낄 수 있던 곳은 인천공항이었다.
칸 출국을 위해 그곳을 방문한 나를 비롯한 <처단자> 팀은 몰린 인파에 혀를 내둘렀다.
“와, 이거 어떻게 뚫고 가요?”
고진주는 걱정이 앞서는지 얼굴이 새파랗게 질려있었다.
“그러게······. 허, 그거참.”
고덕현까지 말문이 막힌 모습이었다.
우리를 태운 차는 친절하게도 게이트 앞에 서 있는 상태였으나 이미 지옥철로 변한 그곳엔 발을 내밀 엄두가 나지 않았다.
문득 <투명한 사랑>으로 상을 받고, 홍콩에서 귀국했을 때가 생각났으나 지금은 그때와는 비교도 되지 않았다.
“그래서 고용했습니다.”
내가 슬쩍 우리가 타고 온 밴(양상철이 공항까지 편하게 가라고 보내준) 앞을 턱 짓 해 보였다.
차 안에 있던 모두가 바라본 그곳엔 검은색 스타렉스 한 대가 서 있었다.
“응? 저게 왜요? 에엥?!”
고진주는 내게 묻자마자 놀랐다.
스타렉스 문이 열리더니 그 안에서 열댓 명의 장정들이 우르르 나왔기 때문이다.
오늘을 위해 미리 고용한 가드들이다.
“자, 내립시다.”
밴의 문의 열리고.
“어!! 내렸다! 고진주 감독님! 황금종려상 후보에 오른 소감 한 말씀만 부탁드립니다!”
“<처단자>의 액션이 획기적이라고 하던데 주로 영감은 어디서 얻으셨습니까!”
“거참! 밀지 좀 맙시다!”
“촬영 감독님! 따님이 정말 자랑스러우실 것 같은데, 부녀 수상이라는 영광의 결과를 어떻게 생각하십니까?!”
“신 대표님! 이렇듯 연속 흥행의 비결이 도대체 뭡니까!”
기자들의 질문이 쇄도했다.
당연히 그 질문은 우리를 둘러싼 가드들에 의해 차단됐지만.
“윤서 씨는 들어갔대요?! 여기에서 만나기로 했던 것 같은데!!”
주변이 시끄러워 정 PD가 큰소리로 외치자 익숙한 얼굴이 보였다.
“저 여기 있어요!!”
“어! 윤서 씨!”
“악! 누가 발 밟았어요! 조심해주세욧!”
그녀의 차는 우리가 타고 온 밴 뒤에 세워져 있었다.
우리처럼 언제 나가야 하나 눈치를 보고 있던 모양이다.
임윤서가 누군가에게 발까지 밟혀가며 어렵게 합류하자 우리는 조금씩 조금씩 공항 안으로 입성했다.
“윤서 씨! 한 말씀 부탁드립니다!!”
여전히 기자들이 따라오며 질문을 해댔지만, 우리는 그저 묵묵히 비행기를 타기 위해 몸을 옮겼다,
우리의 그 발걸음은 꼭 <처단자>를 제작하기 위해 한발 한발 치열하게 나아간 것과 굉장히 흡사한 모습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