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감독보다 영화사 대표님-113화 (113/140)

#113화. 거대한 적을 이기려면

“네에?!”

김정난은 밀린 병원비를 내려고 1층 원무과를 찾았다가 직원에게 놀라운 말을 들었다.

“청구됐던 병원비 완납되셨다구요.”

병원비가 계속 밀렸던 터라 자신도 한 번에 낼 수 없는 큰 금액이었다.

“혹시 전산오류 난 거 아니에요?”

8년간 원무과 직원은 수없이 바뀌었고.

이번에 새로 들어온 직원은 말수가 없는 편이었다.

직원은 귀찮은 눈초리로 다시금 모니터를 확인했다.

“오류 아니구요. 완납되셨어요.”

항상 서로 딱 필요한 말만 했었는데 오늘은 그럴 수 없었다.

“그, 그 돈을 누가요?”

“휴우. 그거야 저도 모르죠? 친척분이라도 왔다 가신 거 아니에요?”

모른다는 직원을 계속 붙잡고 있을 수도 없는 노릇이다.

“아, 알겠습니다. 감사합니다.”

김정난은 원무과를 나와 로비 의자에 털썩 앉았다.

원무과 직원이 친척 이야기를 했으나 그녀는 엄마와 동생을 잃은 뒤 친척들과 왕래를 끊었다.

보험금만 노리던 사람들이다.

그들 중 어느 누가 와서 병원비를 냈다는 건가.

말도 안 된다.

‘그럼 누구지.’

아무리 생각해도 모르겠다.

“하아······.”

그녀는 한숨을 한번 푸욱 내쉬었을 뿐인데 근 10년간 느껴보지 못한 기분을 느꼈다.

매 순간 체한 거 같았던 명치에 걸려 있던 무언가가 쑤욱 내려간 듯 개운하고, 후련했다.

어쩐지 뭉쳐 있던 어깨마저 가벼웠다.

다음 달부터 병원비는 또 명치에 걸리겠지만······.

이렇게 사는 것이 얼마만 인지.

김정난은 두 손을 기도하듯 꼭 모았다.

‘하느님. 부처님. 천지신명님. 어느 신이 내려주신 지 모르겠지만, 천사를 내려주셔서 정말로, 정말로 감사합니다.’

기도를 마친 김정난은 사뿐한 발걸음으로 아버지께 이 소식을 전하러 병실로 올라갔다.

*

“대표님. 소식은 들었습니다.”

대표실 소파 맞은편에 앉아 있던 신서영은 내게 조심스럽게 물었다.

“그게······. 사실은 엄청난 부자시라면서요?!”

“제 돈이 아니라 다 회삿돈이죠. 뭐, 회사 자본이 빵빵해야 좋은 영화 많이 만들지 않겠습니까. 하하.”

멋쩍은 듯 말하자 그녀가 고개를 끄덕였다.

“그렇죠! 근데 대표님 진짜 멋있는 분인 것 같아요! 저 미국도 보내주시고!”

음, 멋있는 분까진 좋은데 이유가 그거였구나.

“감독님이 잘하시니까 가신 거죠. 그나저나 이번 시나리오도 정말 좋던데. 고생 많으셨습니다.”

<왕국 : 시간의 비밀> 완고가 나왔다.

신서영이 틈틈이 준비한 덕분에 타이밍이 잘 맞은 것이다.

나는 신서영에게서 완고를 받자마자 컴플릭스로 넘겼고.

소피아의 연락은 전광석화보다 빨랐다.

많이 기다리고 있던 모양이다.

-대표님! 신 감독님 혹시 천재 아니세요? 어떻게 이런 스토리를?! 미쳤어요!!

만족도도 굉장히 높은 것 같아 다행이고.

하지만 그녀는 자신 외에도 다넬, 또 그 위 보고체계가 있기에 계약까지는 약간의 시간이 걸릴 것 같다고 했다.

나도 계약조건에 대해선 할 이야기가 따로 있었기에 내부적으로 확정되면 그때 다시 연락하기로 하고 전화를 끊었다.

“계약은 수월하게 될 것 같으니까 우선 콘티랑 이것저것 준비하고 계시면 될 것 같아요.”

“넵! 알겠습니다. 대표님.”

씩씩한 신서영이 방을 나간 뒤 나는 잠시 생각에 빠졌다.

며칠 전 화분 엔터의 주주총회에서는 약간의 소란이 있었다.

아라비안필름이 화분 엔터의 지분을 가지고 있다는 사실이 알려지자 우리 직원들도.

화분 엔터 소속 연예인들도 모두 놀랐다.

-대표님! 왜 말씀 안 하셨어요! 그럼 이제 저희 회사 경영도 같이하시는 거예요?

임윤서의 말똥말똥한 눈과.

-왜 저희한테는 말씀 안 하셨어요오?!

서운하다는 표정의 나경.

-그럼 우리 회사 자본이 도대체 얼만 거야?!

손익부터 따지고 보는 예정우까지.

다행히 도건우는 축하한다는 말만 전했다.

그 후 며칠은 다들 어떻게들 알았는지 주변에서 축하 전화까지 받았다.

살다 살다 대주주 됐다고 축하한다는 말 듣기는 또 처음이다.

아, 그리고······.

그 소식을 듣고, 가장 놀란 사람은 바로 손두철이었다.

그의 여유롭던 태도는 순식간에 사라졌다.

-뭐? 네가 그 신바드라고?

그 신바드는 또 무슨 말인지.

그는 화들짝 놀라더니 핸드폰을 손에 쥐고, 서둘러 밖으로 나갔다.

아마도 배인규에게 상황을 보고하려는 걸 테지.

배인규와 손두철은 나와 화분 엔터 모두에 악감정이 있다.

배인규는 아마도 화분 엔터와 우리 회사의 공생관계를 눈치채자마자 손두철과 손을 잡았을 것이다.

즉, 이들이 화분 엔터 주식을 사들인다는 건.

언젠가는 경영권을 위협하겠다는 뜻이 된다.

느닷없이 아라비안필름의 지분율을 보고받은 배인규는 둘 중 하나를 선택하겠지.

더 공격적으로 주식을 사들이던가.

아니면 여기서 그만 객기를 멈추던가.

멈추는 건 절대 그의 성정이 아니니 분명 전자의 방법으로 우리를 위협할 것이다.

그렇다면 우리는 어떻게 대비해야 할까.

생각해온 방법이 있긴 하지만, 결국 그렇게까지 해야 하는 걸까.

고민하고, 또 고심했다.

그러다 결론을 내렸다.

그래. 역시 이 방법밖에 없다.

아라비안필름과 화분 엔터 둘 다 손해 보지 않으면서 우리를 위협하는 존재들을 막을 방법은······.

원래 거대한 적을 이기려면 몸집부터 불려 놓아야 한다.

*

배인규는 회장실에 앉아 야경을 보며 이틀 전 일을 곱씹고 있었다.

‘그럼 그렇지. 그놈이 아무 목적도 없이 그런 행동을 할 리가 없지.’

화분 엔터의 주주총회 날.

그는 손두철의 다급한 전화를 받았다.

-회장님! 글쎄! 여기 그 신바드 놈! 그놈이 나타났습니다!

거기까진 ‘그래. 뭐 그럴 수도 있지. 이놈은 뭐 이렇게도 호들갑인가.’ 싶었다.

그런데 손두철은 경악스러운 말을 덧붙였다.

-그놈 회사인 아라비안필름에서 화분 엔터 지분을 소유하고 있답니다!

거기서 확신할 수 있었다.

그렇게 고고하고, 깨끗한 척하던 신바드는 사실 돈을 노리고 있던 게 맞다고.

자신의 예상이 맞았다고.

-우선 이번 주총은 그냥 넘어가야 할 것 같습니다. 괜히 여기서 깽판 쳤다가는 다음을 노릴 수 없을 것 같아요.

손두철 말이 맞았다.

양상철 지분만 생각하고 화분 엔터를 노리고 있던 터라 조금만 더 매수하면 계획은 성공이었다.

그래서 그들은 이번 주주총회를 엉망으로 만들 생각이었다.

화분 엔터를 인수하기 전 주주들에게 눈도장을 찍고, 그들에게 혼란을 주어 현 경영진의 이미지를 실추하는 것.

이게 그들의 의도였다.

그런데 뜻밖의 변수가 생겼다.

거의 들어온 줄 알았던 화분이 손아귀에서 빠져나가면서 시간이 더 필요해진 것이다.

‘17.7%라······.’

그렇다고 여기서 포기할 생각은 추호도 없었다.

자신이 누구인가.

국내 굴지 대기업인 YJ E&M의 회장이다.

투자 면목으로 화분 엔터 주식을 쭉쭉 사들이는 건 큰 문제도 되지 않았다.

하지만 스케일이 너무 커져 더는 손두철에게 돈을 넘기면서 주식을 사들일 순 없었다.

‘그놈이 언제 뒤통수를 칠지도 모르는 노릇이고, 어쩔 수 없네.’

이제는 자신이 전면으로 나설 때였다.

그는 김정난을 호출하며 생각했다.

‘결판이 나는 건 시간문제야. 마지막에 웃는 사람은 내가 될 거다. 신바드.’

*

그날은 비가 오는 날이었다.

그래서인지 대폿집엔 막걸리를 걸치러 온 사람들로 시끌벅적했다.

“회장님. 좀 더 조용한 곳이 나을 뻔했네요. 저번에 왔던 기억이 좋아서 온 것인데······.”

양상철에게 묻자 그는 고개를 저었다.

“여긴 이런 맛에 오는 겁니다. 허허.”

오늘 술잔을 기울이기로 한 곳은 양상철이 내게 회사 지분을 넘겨주겠다 선언했던 그곳이었다.

“그나저나 여긴 올 때마다 뭔가 옛날 생각이 많이 나네요.”

회귀 전.

딱 이런 곳이 회사 근처에 있었다.

현생과는 다르게 되는 일이 하나도 없던 그때 무슨 일이 있을 때마다 이 과장과 찾았던 곳이다.

이 과장은 항상 내 한탄을 묵묵히 들어줬다.

회귀 후.

그곳을 한번 찾아가 볼까 했지만, 기분이 이상할 것 같아 도저히 갈 수 없었다.

양상철은 내 말이 이상했는지 고개를 갸웃거렸다.

“신 대표한테 옛날이라고 하면 대학교 다닐 때쯤 아닙니까? 이런 곳을 많이 다녔었나 봐요?”

회귀 사실을 모르는 양상철에겐 이상하게 들릴 수도 있었겠다.

“하하. 예. 많이 다녔습니다.”

그 뒤로 우리는 거창한 사업 이야기가 아닌 시시콜콜한 사람 사는 이야기를 나누었다.

그러다 문득 창밖으로 고개를 돌린 양상철이 말했다.

“와, 봄비가 시원하게도 옵니다.”

그 말에 나도 같은 곳을 보니 비가 하염없이 쏟아지는 중이다.

막걸리에 은근하게 좋아진 기분과.

주변에서 들려오는 적당하게 왁자지껄한 사람들의 소리.

대폿집 골목 앞에 홀로 비추고 서 있는 가로등 불빛까지.

“그러게요. 가끔은 이렇게 세상을 씻는 듯이 오는 비를 보는 것만으로도 좋네요.”

그 말을 하며 생각했다.

이제 슬슬 오늘 만나자고 한 목적을 이야기해야겠다고.

“회장님.”

“응? 무슨 할 말 있어요?”

“배인규와 손두철이 손을 잡은 것 같습니다.”

“예??”

놀라는 그에게 지금까지의 정황과 내 추론을 알렸다.

양상철은 처음 놀랐던 거에 비하면 이야길 하는 동안에는 별다른 기색 없이 가만히 듣고만 있었다.

아마 대충은 눈치채고 있던 모양이다.

“이들은 최종 목표를 이룰 때까지 멈추지 않을 겁니다. NX엔터가 화분 엔터를 인수할 때까지 말입니다.”

그리고 마지막 말에는 착잡한 심정을 여실히 내 비추었다.

“하아······.”

그는 잠시 말이 없다가 입을 열었다.

“...나도 대충은 눈치채고 있었습니다. NX에서 우리 주식을 산 이유가 뭐 다른 게 있겠습니까. 그래도 나와 신 대표 지분까지 있으니 설마 그렇게 되겠어. 라며 안일하게 생각하고 있었던 거죠. 어쩌면 상장한 지 얼마 되지도 않아 일어난 일들을 믿고 싶지 않았던 걸지도 모르겠습니다.

하지만 손두철이 배인규와 손을 잡았다면 이제 이건 정말로 두고 볼 수 없는 일이 되었네요.”

양상철은 말을 하면서도 어깨가 점점 추욱 내려갔다.

지금 그의 기분을 100% 헤아릴 순 없으나 저런 모습이 너무나도 이해가 간다.

자신이 일군 회사가 누군가에게 넘어가게 생긴 그 일은 나도 전생에서 수없이 겪어봤으니까.

그 기분은 한마디로 말해서.

아주 더럽다.

“그런데 어떻게 해야 할지 모르겠습니다. 그들을 막을 방법이 있긴 할까요······.”

기분이 더욱더 더럽고, 착잡할 때가 있는데.

그 이유는 방금 양상철이 한 말에 있었다.

방법이 없다는 것.

대기업까지 낀 마당에 화분 엔터가 넘어가는 것은 어쩌면 순식간일지도 모른다.

하지만······.

“방법이 있습니다.”

단호한 내 말에 양상철 어깨가 조금씩 펴지기 시작했다.

“정말로, 있습니까?”

“예. 있습니다.”

더불어 이 방법은 아라비안필름에도 폭발적인 성장을 가지고 올 것이다.

“그게 뭡니까?”

그 물음에 나는 양상철에게 제안했다.

“화분 엔터. 아라비안필름이랑 합치는 게 어떻겠습니까.”

양상철의 눈이 화등잔만 하게 뜨이더니 반짝이기 시작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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