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12화. 해볼 테면 한번 해봐라
[화분 엔터테인먼트 제1회 주주총회]
건물에 들어서기도 전에 입구에 걸린 커다란 플래카드와 입 간판들이 눈에 확 들어왔다.
“우와 장난 아니다. 그렇죠? 대표님.”
나는 예정우, 나경과 함께 이곳을 찾았다.
그냥 혼자 조용히 다녀오려 했으나 그래도 명색이 대표가 그렇게 다니면 폼이 안 난다면서 꾸역꾸역 따라온 것이다.
“그런데 양 회장님은 왜 대표님을 주주총회에 부르셨대요?”
화분 엔터는 상장하면서 조직을 대대적으로 개편했는데 사장과 부사장직을 휘하에 두면서 양상철이 회장직으로 올라섰다.
나경의 물음에 예정우가 답했다.
“뭐, 우리도 언젠가 상장할지 모르니깐 한번 와서 보라는 거 아닐까?”
둘에겐 오기 전 이야기를 하려고 했는데 타이밍을 못 잡았다.
“오! 그럴듯하네요! 이사님?!”
“으흠! 내가 좀 그럴듯하지!”
오랜만에 회사 원년 멤버끼리 나온 외근이라 둘은 꽤 신이 난 것 같았다.
“들어가죠.”
조금은 긴장되는 마음으로 로비로 들어가니 주주총회 참석을 위해 출석한 개인투자자들과 그들을 안내하는 직원들이 보였다.
그리고 나를 발견한 한 여자가 달려왔다.
“아라비안필름 신바드 대표님 맞으시죠? 안으로 들어가시죠. 안내하겠습니다.”
여자가 너무 헐레벌떡 뛰어온 터라 옆에 있던 둘의 눈이 동그랬다.
따라가면서도 들리지 않는 소리로 ‘와, 대박. 역시 우리 대표님 양 회장님이랑 절친!’, ‘그러게, 장난 아니다!’라며 둘은 속삭였다.
여자가 어느 문 앞에 우뚝 서자 그 속삭임도 멈췄다.
“이쪽입니다. 들어가시죠.”
그러자 나경이 물었다.
“저희도 들어가도 되나요?”
“회장님께 미리 안내받았습니다. 두 분은 이 목걸이를 착용하고, 들어가시죠.”
여자가 건넨 것은 본인도 착용하고 있는 화분 엔터 관계자라는 표시의 명찰.
예정우는 좋다고, 명찰을 목에 걸었지만.
나경은 마치 ‘왜 우리 대표님은 명찰을 주지 않지.’ 하는 눈빛이었다.
그러나 곧 ‘뭐, 대표라서 그런가 보다.’ 하고 넘어가는 눈치였다.
그렇게 우리 셋은 여자가 열어주는 문으로 들어갔고, 그곳은 높은 천장을 자랑하는 연회장이었다.
한쪽엔 초대한 주주들을 위한 핑거푸드가 깔려있었으며 주르륵 세팅된 의자에는 사람들이 앉아 있었다.
주주총회는 10시 시작이었다.
지금 시간이 9시 30분인데 의자가 꽤 차 있었으니 주주들의 관심이 얼마나 대단한지 알 수 있었다.
여자는 내게 단상과 가장 가까운 앞 라인을 안내했고.
둘에게는 그 바로 뒤 라인을 안내했다.
“죄송합니다. 앞줄은 지정석이라서요.”
“괜찮습니다!”
나경의 우렁찬 목소리에 여자가 웃어 보였다.
“신 대표님. 여기서 잠시만 기다려 주시겠습니까? 회장님께 보고드리고 오겠습니다.”
의자에 앉아 고개를 끄덕이자 여자는 이내 사라졌다.
나경의 말이 뒤에서 들려왔다.
“대표님. 저기 차려놓은 거 가서 먹어도 되겠죠? 아침을 못 먹고 나와서리······.”
머리를 긁적이던 나경과 예정우는 다과가 펼쳐진 곳을 뚫어지게 쳐다보고 있었다.
“먹으라고 차려놓은 거 아닐까요?”
내 대답에 둘은 잠시 눈빛을 주고받더니 스르르 일어났다.
“그럼 저희는 다녀오겠습니다!”
슬쩍 보니 호텔에서 부른 케이터링인지 다과라고 하기엔 부담스러울 정도로 고급스러웠다.
둘은 주주총회의 엄숙한 분위기에 맞춰 최대한 조심스럽게 걷느라 노력했으나 신이 난 발재간은 숨기기 힘들어 보였다.
그들이 다과를 먹으러 사라지자 익숙한 목소리가 들려왔다.
“어? 대표님!”
고개를 돌리니 옆 옆 의자에 나란히 앉아 있는 임윤서와 도건우가 보였다.
화분 엔터는 상장 전.
소속 연예인들에게도 지분을 분배한 것으로 알고 있다.
“아, 윤서 씨. 건우 씨도 오랜만입니다.”
둘은 냉큼 내 옆자리로 옮겨 와 앉았다.
“대표님. 글쎄 건우 이놈이 <기적> 얼마나 힘들었는지 아냐고 저한테 허세 부리는 거 있죠? 대표님이 <처단자> 이야기 좀 해주세요!”
음, 애초에 이런 걸로 왜 언쟁을 하는지 모르겠다.
“누님은 대표님 곤란하시게 보자마자 그런 이야기를 하세요?”
그나저나 둘이 꽤 친해진 모양이다.
호칭이 바뀌었다.
“곤란하세요? 아니죠? 대표니임?”
대답하려 했으나 도건우가 먼저 말하는 바람에 하지 못했다.
“대표님 이마에 쓰인 ‘곤란’도 안 보이세요? 친한 사이일수록 예의를 지켜야죠. 이럴 땐 인사부터 하는 겁니다.”
그 말에 임윤서는 못마땅한 표정이 되었다.
“그저께 편집실에서 봐서 인사 안 드려도 되거든? 우리가 워낙 자주 보는 사이라서?”
“허이구 참. <기적> 때는 거의 현장에서 사셨거든요?”
으음, 완전히 친해진 건 아닌가 보다.
그러다 문득 엊저녁에 봤던 기사가 떠올랐다.
『임윤서, 도건우. 연인으로 발전』
『연예계 연상연하 커플 탄생』
맞다.
둘이 만난다는 소식에 굉장히 의아했었지.
“그런데 두 분 어제 열애설-.”
“악! 대표님!”
“제발!!”
둘은 내 말이 아직 끝나지도 않았는데 경기를 일으켰다.
“너무 끔찍하고, 듣고 싶지 않은 말이라서 저도 모르게 흥분했네요. 휴우.”
“누님. 그건 저도 마찬가지거든요?”
임윤서는 도건우의 말에 아무 반응도 하지 않았다.
“근데 그거 절대! 네버! 아니에요. 회사에서 정정 기사도 바로 냈고요.”
도건우도 별 신경 쓰지 않고, 그녀의 말을 이었다.
“당연하죠. 천하에 도건우가 왜? 하여튼 요새 저희 회사 소속 루머가 많이 올라오더라고요. 며칠 전에는 어떤 기자가 회사로 전화를 했는데.”
뭔가 비밀스러운 이야기인지 그는 가까이 오라는 제스처를 보였다.
우리 셋은 똘똘 뭉쳐 다시 이야기를 시작했다.
“아람이가 미국에서 마약 했다는 제보를 받았다더라고요? 회사가 발칵 뒤집혀서는 저희한테까지 확인 전화 오고 난리 났었습니다.”
마약이라니.
이건 조금 심각하네.
임윤서가 다시 말을 받았다.
“회사 쪽에서 단단히 입막음은 했는데, 아니다. 진짜로 한 게 아닌데 입막음은 무슨. 하여튼 그거 나갔으면 아람이 이미지 어쩔 뻔했어요?”
“아무래도 이거 누가 작정하고 제보하는 거 같아. 그렇죠? 누님?”
“내 말이!!”
다시 정정한다.
둘이서 죽이 잘 맞네.
그나저나 이들의 말을 들으니 딱 떠오르는 사람이 있는 건 왜일까.
현시점에서 이런 짓을 할 사람은 왠지 그들밖에 없다.
옆에서 계속 떠들어대는 임윤서와 도건우는 두고, 잠시 생각에 잠기려는데.
“신 대표님. 주주총회 시작 전에 회장님께서 이야기를 좀 나누고 싶다고 하시는데요.”
아까 우리를 안내해줬던 여자였다.
“아, 그럼요. 윤서 씨, 건우 씨. 저는 잠깐 다녀오겠습니다.”
둘이 동시에 고개를 끄덕이자.
한껏 만족스러운 표정의 나경과 예정우가 나타났다.
“어? 대표님 어디 가세요?”
“예. 회장님 좀 뵙고 올게요. 앉아 있어요.”
그렇게 나는 여자를 따라갔다.
그녀가 나를 데리고 간 곳은 연회장 단상과 이어지는 VIP실.
그곳에는 긴장한 표정의 양상철이 있었다.
“신 대표! 왔습니까?!”
“예. 회장님. 괜찮으십니까?”
“아, 그게 아무래도 불안한 일이 있어서. 허허.”
그의 웃음소리는 평소와 달랐다.
“무슨 일이십니까?”
“그게······. 최근 누군가가 화분 엔터를 악의적으로 공격하려는 것 같아요.”
아까 임윤서와 도건우가 한 이야기다.
“그런데 일주일 전 조금 이상한 보고를 받았어요.”
“무슨 보고를요?”
“NX엔터가 저희 주식을 사들이고 있다고 합니다.”
어허.
그렇다면 NX엔터가 YJ E&M이랑 손을 잡은 거라고 볼 수 있는데······.
“지분이 몇 프로나 됩니까?”
“15%입니다. 아마 대표가 오늘 주주총회에 올 것 같아요.”
화분 엔터 주식은 양상철이 20.4%, 내가 17.7%, 소속 연예인들이 가진 주식이 다 합쳐서 약 3% 정도 될 것이다.
15%라고 하면 아직 회사에 뭘 할 수 있는 입지는 아니지만, 그 사실조차 불편했다.
이렇게 되면 악의적인 루머 배포는 그들이 확실하기도 하고.
잠시 생각하던 나는 그에게 말했다.
“제게 생각이 있으니 너무 걱정하지 마시고, 오늘 첫 주주총회 아닙니까. 무사히 마치는 것만 생각하시죠.”
“알겠습니다. 신 대표랑 이야기하니 한결 마음이 놓이네요.”
똑똑-.
나를 데려다주고, 밖에 나갔던 여자가 다시 들어왔다.
“회장님. 시간 다 됐습니다.”
시계를 확인해보니 9시 55분이다.
“알겠네. 지금 나가지.”
우리는 푹신한 의자에서 일어섰다.
“그럼 이따가 주총 끝나고 마저 이야기합시다.”
“예. 회장님.”
VIP실을 나가 양상철은 단상으로 올라갔고, 나는 아까의 자리로 돌아갔다.
근처에 도달하니 눈에 익은 남자가 보인다.
손두철.
NX엔터 대표다.
그는 깔끔한 하얀색 슈트에 머리를 깨끗하게 넘긴 모습이었다.
실내에서 선글라스는 왜 끼고 있는 건지.
도건우 옆 옆자리에 앉아서는 뭐가 그리도 신이 나는지 금이빨까지 보여가며 웃고 있었다.
나는 그런 그를 보며 콧방귀를 뀌었다.
뭘 하려고 화분 엔터의 주식을 사들였으며 주주총회까지 왔는지 눈에 너무나도 훤했기 때문이다.
“대표님. 시작하겠어요. 얼른 앉으세요!”
임윤서는 아까와 같은 자리를 굳이 비워뒀다.
어쩔 수 없이 그녀와 도건우 사이에 착석했는데 구시렁거림이 들려왔다.
“근데 저놈은 또 여기 왜 온 거래? 꼴도 보기 싫은데.”
임윤서가 손두철을 보고 한 소리다.
NX엔터에 대한 응어리는 아직 남았을 것이다.
때마침 단상에선 마이크 소리가 울렸다.
“제1회 화분 엔터테인먼트 주주총회를 시작하겠습니다.”
의장으로 선임된 사장이었다.
시작한다는 소리에 손두철의 웃음은 더욱 비열해졌다.
그래. 해볼 테면 한번 해봐라.
나는 전혀 겁나지 않으니까.
그렇게 주주총회는 시작되었다.
주주총회는 여느 곳과 다를 바 없었다.
감사보고와 영업보고.
올해 영업 및 운영계획.
해외시장 진출 계획. 등등.
안건들도 평범했다.
재무제표 승인의 건.
대표이사 보수한도 승인의 건.
이사 보수한도 승인의 건.
등등.
다행이라고 해야 할지 손두철은 주주총회가 진행될 동안 별다른 발언을 하지 않았다.
그건 다른 주주들도 마찬가지다.
그러다 사장이 마지막 안건을 읊자.
손두철이 손을 들었다.
“의장! 발언권 신청합니다.”
사장도 그가 누군지 대충 알고 있는 낌새였다.
해주기 싫은 눈치가 역력하다.
“발언하십시오.”
“최근 화분 엔터 소속 연예인들의 논란이 잦은 걸로 알고 있는데, 해명 좀 부탁드립니다.”
자신 있는 표정이 영 마음에 들지 않았다.
당연히 주주총회를 방해하려는 의도와 여기 모인 주주들에게 자신을 각인시키려는 의지가 뻔히 보이는데 의장이 그걸 받아줄 리 없었다.
“의제와 관계없는 발언입니다.”
사장의 칼 같은 반응에 그 표정이 썩어들어갔다.
“여기는 대주주를 이런 식으로 대접합니까? 내가 투자한 돈이 얼만데?”
그 돈이 자기 돈 일리도 없고.
대주주라고 해서 갑질할 권리도 없다.
더구나 그 논란을 직접 만든 자에게는 더더욱.
하지만 그는 멈추지 않았다.
“안 그래요? 아니, 막말로 여기 오신 분들 다 궁금할 거 아닙니까? 지금도 주가가 주춤하던데 정말로 훅 떨어지기라도 하면 어떻게 합니까?”
그러자 사람들이 슬쩍 동요하는 것이 보였다.
“아티스트 관리다 뭐다 회삿돈 쓰지 않아요? 그러면 잘 관리를 잘해야지. 그 뭐냐. 아람-.”
“그만하시죠.”
나서고 싶지 않았으나 나서야만 했다.
방금 손두철은 아마도 아람의 마약 찌라시를 봤다.
뭐, 이런 부류의 이야기를 하려고 했을 것이다.
화분에서 어렵게 막은 루머다.
손두철은 그걸 여기서 공론화시킬 계획일 테지.
“뭡니까?”
손두철은 나를 모르는 눈치였다.
“여기 앉아 있으니 저도 당연히 주주겠죠?”
“허, 참나. 여기 주총 분위기는 왜 이래? 뭔 어중이떠중이들이 다 앉아 있네.”
그 말에 나는 사장에게 손을 들어 보였다.
“의장. 발언권이요.”
사장은 그런 내 모습에 희미한 미소를 언뜻 보였다.
아마도 그는 양상철에게 내 이야기를 많이 들었을 것이다.
당연히 내가 가지고 있는 화분 엔터 지분에 대해서도.
그래서인지 그의 웃음은 굉장히 호의적으로 느껴졌다.
그는 곧 내 발언권 신청에 답했는데 주변에선 경악 소리가 들려왔다.
“예. 발언하시죠. 17.7%의 지분을 가지고 계신 아라비안필름의 신바드 대표님.”
하하. 헛웃음이 나왔다.
그렇다고 나를 저렇게 소개할 줄은 전혀 몰랐네?
나를 보는 주변의 눈들이 단번에 달라졌고.
“대, 대표님이?”
나경의 똥그란 눈은 당황스러웠다.